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록펠러 재단

好學 2010. 9. 25. 22:25

 

[만물상] 록펠러 재단

 

 

 

1913년 미국 콜로라도주 탄광에서 광원 9000여명이 형편없는 작업환경을 견디다 못해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가 고용한 무장 구사대와 광원들이 충돌하면서 파업은 1년 넘게 끌었다. 이듬해 민병대가 광원들이 머물던 천막촌을 기습해 불을 지르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50여명이 죽었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참혹한 ‘러드로의 학살’이다. 이 탄광의 소유주가 존 데이비슨 록펠러였다.

▶1870년대엔 ‘클리블랜드의 대학살’이 있었다.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세워 석유산업을 한 손에 움켜쥐는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거꾸러뜨린 일을 가리킨다. 총격전까지 벌어지진 않았지만 폭력사태로 사망자도 여럿 나왔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악의 화신’으로 꼽혔다. 침대 곁에 권총을 둬야 했을 만큼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그 록펠러가 오늘 ‘위대한 자선가’로 불리는 것은 프레드릭 게이츠라는 목사를 만난 덕분이다. 1891년 시카고대 후원모임에서 만난 이후 30년 넘게 게이츠는 록펠러의 자선사업 책임자이자 가장 충실한 가신(家臣)이었다.

게이츠는 그저 돈을 나눠주는 즉흥적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관을 세우자고 록펠러를 설득했다. “회장님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습니다. 불어나는 것보다 더 빨리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회장님은 물론, 자녀 모두가 그 눈덩이에 깔려 죽을 것입니다.”

▶게이츠의 설득으로 탄생한 것이 록펠러재단과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이다. 처음 미국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의회로부터 재단 설립 인가를 받는 데만 3년을 씨름해야 했다. 곡절 끝에 록펠러의 자선기관들은 교육·의료·과학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록펠러는 악명(惡名)을 거의 지웠을 뿐 아니라 기업인 사회 공헌의 세계적 모델로 남아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일가가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기로 했다. 부정적 여론에 대한 자구책이라는 점에서 록펠러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기금 운영을 정부와 시민단체에 맡기는 방식이어서 돈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쓰일 것인지 벌써부터 의문이 나오고 있다. 록펠러처럼 기업인 스스로 창의적이고 건강한 자선·기여 방식을 짜내 우리 사회에 큰 전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