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70대 고궁 지도위원

好學 2010. 8. 21. 18:35

 

[만물상] 70대 고궁 지도위원

 

 

 

미국 수퍼마켓에 들어서면 매장 입구에 서서 손님에게 일일이 쇼핑 카트를 밀어 건네며 반갑게 맞는 직원부터 마주친다. 편안한 차림과 밝은 표정으로 손님 안부를 묻고는 “쇼핑을 즐기시라”까지 짧지 않은 인사를 쾌활하게 던진다. 인사하는 사람 ‘그리터(Greeter)’다. 계산대를 거치지 않고 나서는 사람들이 혹시 상품을 들고 가지 않는지도 살핀다. 대개 은퇴한 노인들이다.

▶그리터는 1980년 LA의 한 월마트 점포에서 생겨났다. 매니저가 딱딱한 유니폼의 경비원 대신 상냥한 노인을 세워 인사시키는 아이디어를 냈다. 손님들이 반길 뿐 아니라 뜻밖에 좀도둑도 크게 줄었다.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은 이곳에 와 본 뒤 그리터를 전체 점포에 두라고 지시했다. 다른 업체들도 이내 뒤따랐다. 대형 수퍼가 그리터를 10명쯤 채용하니 노인들에겐 쏠쏠한 일자리다.

▶어느 날 경복궁에 온 어린이가 나뭇가지를 잡고 마구 흔드는데 부모는 재미있다는 듯 보고만 있었다. 한 노인이 다가와 아이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자 노인이 말했다. “너처럼 나무도 아프단다.” 작년에 문화재청이 궁·능(宮·陵)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들인 방동규(73)씨다. 백기완 신경림 황석영씨 등과 오랜 친교를 나누며 문단 안팎에서 ‘협객 방배추’로 통하던 이다. 그는 즐겁게 종일 3만보씩 걸으며 관람객을 안내하고 질서를 추스른다.

▶문화재청이 지도위원 5명을 더 뽑기로 하면서 지원 자격으로 ‘70세 이상, 하루 1만보 넘게 걷는 체력’을 내걸었다. 정부 수립 이래 단연 최고령 채용조건이겠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나이 든 분이 젊은 관리사무소 직원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데다 권위도 서고 분위기 ‘진압’도 빠르더라”고 했다. 어제 마감한 접수창구엔 지원자 104명이 몰렸다. 대기업 사장, 교장, 중앙부처 국장급 출신에 외국어 잘하는 지원자도 많았다.

▶원서엔 ‘왜 이 일을 원하고 왜 해야 하나’를 몇 장씩 쓴 예가 적지 않았다 한다. 창구 직원에게 “이런 채용 시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연방 인사하기도 했다. 일을 열망하는 ‘신(新)노인’이 그만큼 많다. 일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때의 행복, 그 이상 가는 보약도 없다. 그리터나 고궁 지도위원처럼 노년을 건강하게 해줄 일거리는 눈 크게 뜨면 얼마든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