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대통령의 TV 연설시간

好學 2010. 8. 21. 18:34

 

[만물상]대통령의 TV 연설시간

 

 

 

1983년 3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국방예산 관련 연설을 준비했다. 그런데 TV 방송사들이 “정책 세일즈를 위해 프라임 타임(밤 9~11시)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참모들은 궁리 끝에 연설문에 새로운 내용을 포함시켰다. 제임스 베이커 대통령 비서실장은 “연설 중에 빅 뉴스가 터질 것”이라고 방송사를 설득했다. 소련이 미국 본토를 향해 발사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한다는 ‘스타 워즈’ 구상은 이렇게 설익은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클린턴 대통령이 1995년 4월 복지정책 연설을 동부시간 밤 9시에 했을 때 3대 메이저 방송 중 CBS만 중계했다. ABC, NBC는 정규 프로그램인 시트콤을 그대로 방영했다. “팀 알렌(시트콤 주연)의 인기가 클린턴을 눌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CBS가 고민 끝에 중계한 이유도 재미있다. “열흘 전 야당인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연설을 생중계했었기 때문에 반론권 차원에서 대통령 연설도 중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국 TV는 제 아무리 대통령 연설이라 할지라도 알맹이가 없으면 중계하지 않는다. 대통령 연설을 방송하더라도 야당 의원들에게 반론할 수 있는 방송시간을 준다. ‘논란이 되는 주제에 대해 한쪽 입장을 방송하면 반대쪽에도 반론기회를 줘야 한다’는 형평의 원칙 때문이다. 통신법상의 이 조항은 1987년 폐지됐지만 지금도 관행으로 지켜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18일 신년 연설을 KBS·MBC·SBS 지상파 3개 방송이 모두 생중계했다. 3개 방송의 밤 10시 평소 시청률 합계는 37%(닐슨 미디어 리서치)였는데, 대통령 연설 시청률은 22.2%로 뚝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지상파 TV를 봤을 시청자 중 3분의 1쯤은 여기저기 대통령 연설만 나오니 드라마나 케이블 쪽으로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껐다는 얘기다. 달리 선택권이 없어 연설을 들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는 TV 방송사들에 “중계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고 강조한다. 방송사들이 중계를 자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의 그 말을 말대로 받아들여 대통령 연설 중계 여부를 시청률에 따라 결정할 ‘간 큰’ 방송사가 어디 있겠는가. 40분 동안 TV 리모컨을 청와대에 저당 잡힌 채 대통령 연설 시청을 강요당한 시청자들은 대통령이 “아시아 국가들의 언론자유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첫 번째”라고 자랑하는 것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