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발굴도 패션"
고고학자가 땅 속에 있는 유물과 유적을 찾는 것은, 따지고 보면 원래 그곳에 있던 것을 찾아낸 것이니 ‘발견’이다.
2000년 가을,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현장인 충남 공주시 장선리에서 이상하게 생긴 유적을 발굴했다. 지하 깊숙이 땅을 파고 내려가 이리저리 방마다 이어진 모습이었다. 마치 개미굴과도 비슷했다.
중국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백제가 들어서기 전에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 살던 마한 사람들은 ‘토실’(土室)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토실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자연히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는 얘기만 있었을 뿐 누구도 토실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기록에만 남았을 뿐 그 때까지 한 번도 ‘실체’를 본 적이 없으니 장선리 유적에 대해 토실이다, 아니다 논란이 많았다. 논란 끝에 토실로 인정됐고, 사적으로 지정됐다.
장선리 토실 유적이 보고된 이후 옛 백제의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의 토실이 발견됐다. 이전에는 비슷한 유적이 발굴됐을 때 ‘용도 불명’이라고 했지만, 일단 찾아낸 이후에는 그 비슷한 유적이 모두 토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이런 점에서 고고학계에서는 “발굴도 패션”이라는 말을 한다. 한 번 발굴되면 그 뒤 잇따라 발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토실을 발굴한 것은 분명 ‘발견’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아무도 모르던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니, ‘발명’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유적 발굴은 ‘유(有)’에서 유를 찾는 작업이다.
때로는 이렇게 ‘무(無)’에서 유를 찾는 일도 있다. 그 맛에 발굴 현장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이훈·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연구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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