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일사일언]아버지는 드라마狂

好學 2010. 8. 21. 18:13

 

[일사일언]아버지는 드라마狂

 

 

 

일찌감치 자식들을 모두 객지로 보내고 둘만 남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부모님은 언젠가부터 드라마광이 되어 있었다. 수다 떨 친구가 많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했다. 아침 7시에 밥을 먹고 나서 8시 아침드라마를 꼭 보시고, 드라마가 끝나야 집을 나선다. 저녁시간에도 뉴스를 본 다음엔 꼭 드라마를 챙겨 보신다.

TV를 잘 보지 않는 내가 모처럼 집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혹 따분할까봐 지난 줄거리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젊었을 땐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가 하루 일과를 드라마로 시작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뻔하고 느슨한 스토리인데도 말이다.

가만히 보니 아버지는 드라마 속 가족에다 감정을 이입하여 실제 자신의 일인 것처럼 시뮬레이션하고 계셨다. 극중에는 아들과 딸, 며느리와 손주들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울고 웃는 작은 일상들이 있었다. ‘내가 저 아버지라면 며느리한테 이렇게 했을 텐데, 사위한테는 이렇게 했을 텐데….’ 가끔씩 아버지는 혼잣말도 하셨다. 실제 당신의 아들, 며느리, 손자는 해외에 있고, 딸과 사위는 1년에 몇 번밖에 못 본다. 인터넷상의 손자 사진이라도 보기 위해 무뎌진 손가락으로 독수리 타법까지 배운 아버지였다.

우리가 이상적이라 믿는 가족의 풍경은 사실 우리 일상이 아니거나 인생에서 어느 한 시기밖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며 관성처럼 부모 역할을 계속 하려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든 드라마가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최재경·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