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현대敎會史

IV.북한 교회의 수난사와 성도의 신앙

好學 2010. 7. 19. 21:25

 

IV.북한 교회의 수난사와 성도의 신앙

 

1.해방이후부터 한국동란까지의 교회수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으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조만식장로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무시하고,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소련의 계획을 강압적으로 강행하였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소련군정이나 김일성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북한 땅의 교회였다. 신의주 제일교회,제이교회의 목사인 윤하영,한경직을 중심으로 1945년에 기독교 사회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결국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해 11월 16일 사회민주당 용암포지부 결성대회 때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일단의 청년들의 습격으로 유명한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이 북한도처에서 교회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북한 땅을 공산화하려는 소련군정의 음모에 투쟁하던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를 하거나 고난을 겪었다. 그당시 북한땅에는 10개 노히에 2천여개의 교회와 대략 30만의 교인이 있었다. 북한 교회는 5개노회를 연합하여 공산화를 목표로하는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인민위원회를 향하여 5개 항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범교회적 움직임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양면정책을 사용하였는데 강경책과 회유책이었다. 특히 교회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1946년 11월 28일 평양신학교 출신인 강양욱을 앞세워 조선기독교 연맹을 만들었다. 그 핵심 요지는,북한 땅을 공산화하는데 있어 적극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북한교회는 여기에 야합하여 공산화에 일조하든지 아니면 신앙양심을 지키어 순교를 택하든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육이오동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북녙땅에 남아 있던 목사들과 장로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북한교회에서는 큰 부흥이 일어났다. 비록 목자없는 교회였지만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찼고, 조국의 장래에 대한 통곡 어린 간구와 회개의 기도, 성령의 위로가 충만하게 나타났다. 핍박이 심해지는 와중에 일부는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교인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어느정도 신앙의 자유가 있었던 만주로 피신하였다.또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로 잠적하여 지금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다.

 

육이오동란 중에 북녘땅의 3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남한땅에 정착하였으며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으로 남한 도처에 교회를 세웠다. 1950년도에 북한의 교인 중 소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마다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2. 육.이오동란 이후의 북한의 지하교회

북한에는 현재 그 당국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봉수교회가 있고 그 이후 김일성이가 자신의 어머니 강반석과 함께 어린시절 교회에 다녔다는 칠골이라는 동네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하지만 이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대외 전시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러나 지상으로 들어나지 않은 일명 지하교회는 비공식 통로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1950년 동란이 일어나던 그해에 김일성종합 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북한교회안에서의 부흥이 미국장로교회의 선교부 파송으로 활약하던 종군의사와 목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전쟁이후 1958년 평북 용천의 이관화목사 사건, 1959년 박천에서의 인민학교 여교사 체포와 그 이후 1966년 잔여 교인들의 색출사건,1968년 평남 온천군 운하리의 박목사 사건, 1974년 10월 함흥에서 적발된 김대용목사와 교인들 소탕사건,더욱이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기독교인들을 평박쑴섬에 수천명을 유배시킨 일과 최근에 신의주 자강도,함북,황해도 등지에서의 지하교회 적발사건들,등은 분명 지하교회가 살아 움직이며 성도들의 신앙이 조직을 이루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소개되는 기사는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는 어느 선교사의 방북시에 그곳의 지하교회 성도를 직접 접한 내용이다.

 

"저는 북한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인하여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 몇몇분의 소개를 거쳐 그들을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우리 자유진영의 성도들은 감히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실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각오로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의 광채를 가진 그들의 얼굴은 이미 이땅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양식이 없어도 산에 올라가거나 들에 나가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기도하고,낮에 12시가 되면 각자 일터에서 그리고 학습장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을 하늘을 바라다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식사후에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2세는 이제 청장년이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찬송가를 3백곡은 족히 알고 있다고 했으며,그것도 삼,사절까지 외우는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를 구할 수가 없기에 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도 물론 귀했습니다. 종이에 베껴서 많은 사람이 돌려 보아야 했으며 그나마 부모님이 순교를 각오하고 숨겨두셨던 옛날의 성경책은 너무 오래전의 것이라서 옛말이 많이 섞여 있어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을 때 다른 식구들은 교대로 밖에서 보초를 서야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남한의 교회들이 구국제단을 쌓고 열심으로 기도한다고 전하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한 가정이 어려움에 처해 숙청을 당하게 되면,오,륙십리 먼길을 걸어 다른 사람에게 기도제목을 나누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남한의 성도들이 자기들을 맞아줄 것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곳의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하성도들은 한사람의 불신앙인이라도 들어서면 지하교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과는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끼리 결혼을 하면서 선을 보는 것도 아니고 어느집 어느 성도의 가정 누구의 손주 손녀 정도로 소개할 뿐 그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가 불구자 일지라도, 맘에 들지 않더라도 결혼합니다. 그러니까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다 친척이고 사돈입니다. 믿는 성도들 가운데는 고급 당원들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또 기술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수도 많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지체인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배급품들을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당원이기에 사회혜택이 많습니다. 고급당원들이 단복이라고 하는 나이론추리닝은 아주 귀히여기는 옷으로서 자신이나 자식들에게 입히기 보다는 믿는 형제들에게 먼저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십일조를 모릅니다. 적게하면 십의 이조,그다음으로 십의 오조를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집 앞에 땅콩 심은것, 감자 등 이런 것들을 없는 사람에게 보내어 줍니다. 순교를 당한 한 성도의 아내는 어린 자식 다섯을 키우기 위하여 13년을 탄광에서 일하는 동안에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십일조를 통해 그 가족을 도왔으며 도움받은 그 아이들은 장성하여 십의 오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성도들간에 이와같이 헌신적으로 서로 섬기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하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초대교회의 삶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기사내용은 1995년 2월 26일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부위원장 리종혁과 "해외 동포원호위원회"부위원장인 전경남이 미국을 방문하여 버지니아 Founders Inn에서 교민들과의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두레신문에서 지면으로 소개한 것이다.

기자질문:현재교포사회의 접촉이 주로 기독교 단체 혹은 종교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만큼 북한에서의 종교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


리종혁단장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활성화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 중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은 육이오때 다 이남으로 갔고, 전쟁중에 다 파괴되었는데 우리가 뭐 교회부터 짓겠습니까? 당장 살집부터 짓고 했지 교회를 세욱 종교생활이 활성화하고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었지요. 최근에 와서는 국제적인 냉전이 종식됨으로서 여건이 달라지면서 지금까지 교인이던 것을 숨기던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몇년전부터 많이 늘은 것은 사실입니다."이 질문 중에서 나온 대답도중 평양의 봉수교회,칠골교회,천주교회 등의 교회 이름이 나오고.....


이어진 질문에 전경남부위원장의 대답이 계속된다. "아,우리는 그것 신봉하니까 우리는 종교는 안믿어도 주체사상을 절대적으로 믿고 우리는 교회를 안 가도 우리 사상을 통해서 거기서 우리는 확보한다. 그런 입장입니다. 옛날부터 교회를 믿었던 분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독실한 교인들은 또 가서 믿는기고 아,그렇지 않습니까? 아,그렇게 믿게 해당하게끔 종교를 세우면 되는기고, 제가 알기로는 교회는 없지마는 필요한 분들은 가정에서 회원들이 하는기고,뭐 이렇게 잘 이해해 주십시오. 공화국에서는 절대다수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체사상신봉자들입니다.

이렇게만 문제를 보면 해결될 것입니다. 다 자기 지식이 있으니까" 이들의 대담 내용 가운데 북한의 고위 당원이며 책임자인 그들의 입에서 지하교회, 혹은 비밀교회의 존재와 최근의 움직임을 그들 스스로가 증명해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지난 5월 평양축전행사 때 참관하고 온 중국교포를 통해 어느 평양시민과의 짧은 전도 대화 가운데서도 그 주민이 가정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바가 있다고 들었었다. 북녘땅에는 분명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서 생명을 유지하며, 때가 되면 다시 그 잎과 열매를 맺듯이 북한의 교회는 분명 살아 숨쉬며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