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현대敎會史

I.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好學 2010. 7. 19. 21:23

 

I.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한 역사의 과정

 

동방의 작은 나라인 한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뜻가운데 진행되었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는 세계의 열강들의 틈바귀에서 쇄국정책을 통해 외국과는 관계를 거부하였으나, 일본,러시아,영국,미국 등이 힘에 의한 강압적인 자세로 조선을 굴복시키고,마침내 은둔의 나라인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게되었다.이러한 역사적인 변화는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복음의 주자들인 선교사들이 속속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우리보다 복음을 먼저 전해준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어 한반도에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고, 조선의 관리들이나 상인등이 중국과 일본을 출입하면서 복음을 전해듣게 되어 이들을 통한 복음의 전래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의 이러한 주변 여건은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즉 선교를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절대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불신,부패 등으로 불안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피폐해져 있어 삶 자체가 희망이 없는 암담한 가운데 있었을 뿐만아니라 이로인한 혹세무민의 미신행위가 모든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마치 예수님의 초림 직전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과도 같았다. 그당시에는 선지자의 활동이 단절된 암흑기였고,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압제자들에 불과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메시아를 대망하였듯이 우리나라의 그 당시 백성들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기대하는 암흑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우리의 역사상 가장 암흑기인 그 시대에 복음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1. 한.미조약의 체결로 인한 복음화의 여명기

조선 조정의 쇄국정책을 종식시키고 굳게 닫힌 문의 빗장을 벗기게 된 계기는 1875년(고종1년)일본의 군함 운양호 사건이었다. 일본과의 조약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조약을 뒤따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미국도 조선과 관계를 맺게된다.

미국과의 통상 조약은 1876년 한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활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되어 청나라가 조선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제의 세력을 견제케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청나라의 원세계가 조선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 해안에 설치된 텐트안에서 우리측 대표 김홍집과 미국측 대표 슈펠트간에 역사적인 한, 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오래동안 피로 맺어진 혈맹의 유대 관계가 시작되게 되었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선교도 이것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올 시점에 한미조약이 체결된 것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미조약은 오래동안 조선이 중국의 부속국가로 중요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의 재가를 얻어야만 하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고,세계 만방에 독립된 국가로서 나서게 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5월에 우리 나라에 와서 비준서를 교환하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서 서울에서 그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조선장부도 이에 대한 답례 사절단을 파송하게 되었는데, 민영익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대리공사에 홍영식을 그리고 수행원에 서광범,유길준 등을 임명하여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3년 7월 미국의 해군함정을 이용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저들은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워싱톤에 도착하여,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12월에 귀국하였다.

2. 한국선교의 정지 작업을 한 가우쳐 박사와 맥클레이

미국에 간 사절된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횡단 기차를 타고 위싱톤을 향해 갈 때 한국 선교 역사상 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설립자이며,감리교회의 목사인 가우쳐박사였다. 3일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그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1833년 11월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편지를 써 보내어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선교자금 2천달러를 같이 송금하였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는 아직 한국에 선교를 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우쳐는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대표 맥클레인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내면서 "한국에 찾아가서 그 나라를 실지 답사한 후 선교사업에 착수하였으면 좋겠다고"하였다.

 

맥크레이는 곧 한국을 1884년 6월에 2주간 예정으로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다행히도 그는 김옥균이 일본에 있을 때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김옥균을 찾아갔다. 그는 김옥균이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게 해달라넌 청원서를 전달하여, 국왕의 허가를 부탁하였다. 며칠후 김옥균은 맥클레이에게 국왕으로부터 회신이 왔는데 "임금께서 지난 밤에 나의 편지를 자세히 읽어 보시고 나의 요청대로 선교회가 한국에서 이러한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이 회답을 받은 맥클레이는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가까운 곳에 선교사역을 시작할 대지를 하나 구매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일본에 돌아온 후 즉시 그는 "우선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다는 것을 감추어 두지 아니하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은 시급한 요구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 북감리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첫발을 딛게 하여,1884년말에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아펜젤러목사가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한국선교의 과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미조약이 맺어졌고 민영익이 가우쳐 박사를 기차간에서 만났으며,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국왕에게 편지를 올려 윤허를 받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3.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 역시 한국의 선교사업에 대한 작업을 조용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1884년 9월 한국에 마침내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하였다. 그 해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점으로 잡는 해가 되었다. 개신교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얻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의사 알렌이다. 그는 1883년 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 의료선교사로 지원서를 보냈고,이것이 허락되어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선교지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그의 친구 의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에 알렌은 곧 뉴욕의 선교본부에 한국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외국공관들과 세관에서는 의사를 몹시 필요로 하므로 본부가 허락한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국으로 떠났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4천년의 한국역사에 처음으로 개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도착하게 되어 마침내 개신교 선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미국 공사 푸트씨를 만났고, 바로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금해져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장 적합한 일자리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길이기도 하였다. 푸트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했을 때도 푸트는 그를 공사관의 의사로 소개하였다.

알렌의 이와같은 입국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한국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후로 일어나는 한국의 정변은 마침내 왕궁의 복음화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4.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을 통한 의료선교의 시작.

당시 조선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누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수구파의 거세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는 피로연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때를 기해 개화파들이 수구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개방정치를 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12월 4일 저녁 피로연이 진행되는데 "불이야"하는 신호와 함께 잠복했던 자객들이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민비의 동생)이 전신에 칼을 맞고 혈관이 끊기는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에 처했을 때 미국공사 푸트와 세관고문 묄렌도프가 민영익을 응급 처치하고 함께 그를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즉시 알렌에게 통지하여 급히 오도록 조치하였다.

 

알렌이 통지를 받고 오는 동안 벌써 어의를 포함한 한의사들 여러 명이 모여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끊겨진 몸을 한방의 의술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도착한 알렌은 환자의 위급함을 알고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이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면 자기에게 돌아올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치료는 극적인 효력을 나타내,민영익은 얼마되지 않아 완치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은 후에 알렌에게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그들은 당신이 아메리카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사건은 알렌으로 하여금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곧 고종의 시의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민영익을 구해준 대가로 국왕으로부터 참판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왕으로부터 막대한 상금을 받게 되어 그는 그돈으로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조정에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제출하였다. 왕이나 관리들은 알렌의 뛰어난 의술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알고 있는 터여서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알렌의 청원을 순수히 받아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1885년 4월 14일에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개원한지 열흘쯤 지나 이름을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언더우드가 입국하게 되어 그 병원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직 외국인들이 선교활동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중원은 아직 선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때를 기다리는 곳이었고, 합법적으로 체재할 수 있는 은신처이며,활동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 제중원은 한국선교를 확산시키는 근거지가 되었고, 한국의 복음화가 의료봉사와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모델이 되었으며, 한국의 복음화 뿐만아니라, 근대화와 문명화를 이루게 하는 산실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