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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생텍쥐페리의 별을 꿈꾸며

好學 2010. 6. 29. 21:07

 

[ESSAY] 생텍쥐페리의 별을 꿈꾸며

 

 

 

김중겸·현대건설 사장

사막의 밤하늘은 별들의 파노라마다
그러나 그것을 이불 삼았던 땅거죽은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외로움의 불바다가 된다

얼마 전 리비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30년 넘게 건설회사에서 목이 굵었고 그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지만, 리비아 땅을 밟긴 처음이었다. '그랑 블뢰'라 불리는 지중해 해안을 머금고 있는 리비아는 이슬람과 사회주의가 절묘하게 섞여 있다. 전 국민이 통트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올리는 정통 무슬림 국가지만, 여성의 사회참여는 자유롭고 활발한 편이다.

리비아는 도로망이 열악하고 땅덩어리가 넓어 현장을 둘러보려면 부득이 경비행기를 전세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8인승 경비행기 안에서 동행한 임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책도 읽어볼 요량하다니, 아뿔싸, 이 어리석음이여!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창밖 풍광은 탑승객을 온통 사로잡아 버렸다.

명암이 뚜렷한 구름들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붉은 빛깔의 사막 평원도 장관이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초저녁 무렵부터 선명히 빛나는 하늘의 별이다. 경비행기 안에서 보는 별은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눈앞에서 반짝인다. 리비아 사막이 배경인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다. 경비행기를 타고 있는 내가 생텍쥐페리가 된 기분이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에게 그간의 별나라 여행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어린왕자, 동화에 나오는 여우와 장미, 술주정뱅이 남자도 저 별 어딘가에 꼭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가 몇백만이나 되는 별 중의 어느 별인가에 피어 있는 단 한 송이의 꽃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는 '내가 좋아하는 꽃이 어딘가에 있다'고 늘 생각하는 거야"라던 동화 속 여우의 말이 생각난다.

사막의 밤하늘은 별들의 파노라마다.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지평선은 그 자체로 밤하늘의 일부 같다.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은 유난히 가깝고 총총하다. 리비아뿐 아니라, 중동지역의 사막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별들의 파노라마를 이불 삼고 있는 땅거죽은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부터 외로움의 불바다가 된다. 사막 한복판 공사현장은 꽉 막힌 감옥이다. 육지 사람들에겐 탁 트인 바다가 섬사람들에겐 꽉 막힌 바다가 되는 것을 어찌 모를 것인가. 가족과 멀리 떨어진 채 외로움과 싸워야 할 때면 저 별들이 위안의 등불이기는커녕 향수병 앓는 가슴을 날카롭게 긁어대는 표창이 된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나도 갓 결혼한 아내와 생이별을 한 채, 사우디 현장에 홀로 떨어져 지독한 향수병을 끌어안고 뒹굴던 때가 있었다. 참 한심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멀고 힘든 나라까지 와서 제대로 대접도 못 받는 고된 일들을 해야 하나.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도 자주 연결할 수 없었다.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 중에 열사(熱砂)의 공사현장이 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면 더욱 가족들 때문에 가슴이 저린다.

적어도 해외현장 근무자들에게 외로움을 시(詩)처럼 낭만처럼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외로움은 무찌를 수 없는 적군이자 병마 같은 존재다. 누가 '사막 골프'를 귀족 취미라고 했는가. 중동의 부자 귀족들은 절대 사막 골프를 하지 않는다. 소일거리도 없이 숙소에 갇힌 외로움쟁이들이 외로움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비장한 마음으로 나서는 것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땡볕 아래 사막 골프다. 조그만 개인 매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스윙을 할 때마다 깔아놓고 공을 때리면서 우리는 우리가 우스웠다. 한여름 불볕 사막에서 움직이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도마뱀과 한국인이라고 우리는 우리를 비웃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외로움 때문에 정말 목을 매달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일한 위안거리인 음주마저 중동의 이슬람국가에선 엄격히 금지돼 있다. 궁여지책으로 어떤 사람들은 손수 불법 양조를 해서 술을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었다. 현장근무자들 사이에 '싸대기'라는 은어로 통했다. 낮에는 무에서 유를 만들고, 밤에는 이튿날까지 스스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외로움을 버텨내야 했다. 지구 위 어느 곳에서든 비상한 일들이 벌어지려면 누군가는 자기 살을 깎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도전이고, 그것이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도전정신과 인간애에 불탔던 생텍쥐페리도 흔들리는 경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중해를 건너다녔을 것이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거대한 땅에 그러한 하루하루가 쌓여 마침내 지하수로가 연결됐다. 거리마다 가로수들이 우거지고, 모랫바람만 몰아치던 황량한 벌판에 대단위 산업단지들이 거대한 은빛 몸뚱이를 드러냈다. 낙타들만 띄엄띄엄 눈에 띄는 사막을 가로질러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송전탑이 들어섰고, 파도만 출렁이던 푸른 바다가 땅덩이로 변했다.

지구 위 어느 곳에서는 오늘도 어떤 인간들이 가족과 떨어져 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은 왜 그럴까. 아내를 위해서? 조국 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을 만들기 위해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 취미생활이라서? 고독에 중독됐기 때문에? 우리는 묻지 않아도 알고, 대답을 듣지 않아도 훤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표가 가슴에 붙어 있는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때론 사막의 밤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희망과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막의 별처럼 환하게 빛날 미래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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