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글]긍정.행복글

[ESSAY]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好學 2010. 8. 21. 18:18

 

[ESSAY]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마놀로 블라닉·구두 디자이너

나는 가죽 냄새를 사랑한다. 질 좋은가죽의 냄새는내게는 향기다.
좋은 가죽은 아름다움을탄생시키는 말구유 같다.
여인의 발에 신겨진 작은 가죽신에는…

나는 가죽 냄새를 사랑한다. 질 좋은 가죽의 냄새는 내게는 향기다. 좋은 가죽은 아름다움을 탄생시키는 말구유 같다. 여인의 발에 신겨진 작은 가죽신에는 삶의 풍요로움과 애잔함, 달콤함과 고달픔이 새겨져 있다.

나는 신발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만든 신발을 보면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워서 한 켤레쯤은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여져."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은 장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말이기도 하다. 신발은 장인의 손끝에서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쳐 제작된다. 그런 신발을 구성하는 건, 좋은 재료뿐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농축된 지혜다. 나는 신발 디자이너지만 대학 때 전공은 건축이었다. 그래서 신발을 만들 때도, 그 농축된 지혜에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더하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내 이름과 동시에 '하이힐'을 떠올린다. 하긴 난 하이힐을 지독히도 사랑한다. 하이힐은 마법이기 때문이다. 단지 신기만 해도 여자들은 변한다. 하이힐을 신는 건, 배우가 변신하기 위해 분장을 하는 것과 같다. 하이힐은 참 신통한 물건이다. 특별하게 걷기를 원하지 않아도 하이힐을 신는 순간, 여성의 몸은 다르게 움직인다. 여성을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소품이 또 있을까.

한참 전, 뉴욕타임스는 여성들이 내 구두를 신기 위해 날씬한 칼발로 성형수술 받는다고 보도했다. 오, 세상에. 나는 모든 발에 잘 맞고 편안한 신발을 만들고 싶었건만. 제발 신발에 맞추려 발을 수술받을 필요는 없다는 걸 좀 믿어줬으면 좋겠다.

여자들이 그렇게 이상한 일을 하면서도 구두에 집착하는 건, 구두가 매우 관능적인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부츠는 일종의 섹스", "마를렌 디트리히의 섹시함을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구두를 갖고 무슨 그런 생각을 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 아닌가. 어떤 사람은 내 구두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누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아름다움의 정의는 달라진다.

내가 봤던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한번 떠올려 볼까? 그건 바로 중국 베이징 이화원에서 올려다봤던 파란 하늘이었다. 누군가는 "베이징에서 파란 하늘을 보는 건 너무 어렵다"고 말했지만, 난 그곳에서 파랑보다 더 파란 하늘을 봤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중국의 하늘은, 아시아의 하늘은 내게 '아름다움과 동경의 푸른색'을 떠올리게 만든다.(만약 한국에 가봤다면, 한국에서 본 하늘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지.)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그 기억 때문일까.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연한 '화양연화'는 21세기에 탄생한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며, 보는 동안 정말 눈을 뗄 수 없었던 영화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시선에 비친 장면 하나하나의 색감은 단번에 눈을 매혹시켰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연기했고, 무수히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그중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바로 레스토랑에서의 장면이다. 냇 킹 콜의 음악이 흐르고 있고, 양조위와 장만옥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 장면. 흐느끼듯 내리는 빗방울은 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영화 속 홍콩 아파트의 좁디좁은 복도는 반짝이는 벽뿐 아니라 장만옥이 입은 드레스의 아름다운 프린트까지 반사시키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건 누추한 공간이 아니라, 취해 버릴 것 같은 아시아적 매력을 틈새 하나하나에서 뿜어내는 공간이 돼 있었다. 장만옥이 입고 있었던 하이 칼라의 중국식 드레스조차 앞으로 펼쳐질 장면에 대한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그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파워풀한 장면이자, 불멸의 러브 스토리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난 신발을 통해 그런 러브 스토리를 구현해 보고 싶다. 그 러브 스토리란, 때론 관능적인 사랑으로 나타나고, 때론 존중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내 인생에서도 '화양연화'와 같이 가장 빛나는 한순간이 있었다. 지난 2007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커맨더 훈장(CBE)을 받았을 때다. 그 훈장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내가 패션에 공헌했다는 증표이며, 나같은 사람이 해온 일에 대해 사회가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천한 구두쟁이일 뿐이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의 수고의 산물을 통해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을 선물한 나를 세상이 또 보상해준다는 것은, 신이 허락한 선물이다.

신발을 만드는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로마 조각상의 발이다. 그들의 맨발은 신이 빚은 아름다움의 절정인 듯하다.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신발을 항상 보게 된다. 직업병이겠지. 공교롭게도 바로 그런 순간,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어쩌면 궁극의 아름다움이란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마놀로 블라닉은?

1942년 스페인 카나리섬 출생으로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두 디자이너다. 1998년부터 방송한 미국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구두로 부각되면서 20~30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리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밝힌 그에게 조선일보 독자를 위해 에세이를 써달라 요청하자 1주일 만에 답변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