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바울의 生涯와 神學

바울로 이해의 첫걸음

好學 2010. 6. 27. 01:43

 

바울로 이해의 첫걸음

 

1. 편지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거나 어떤 용무가 있을 때 쓰는 것인데, 바울로의 편지는 어떻게 성서가 될 수 있나요?

먼저 편지와 서간의 구분을 하는 게 좋겠군요. 편지는 실제로 만나 대화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통신수단이고, 서간은 일정한 수신인이 없고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씌어진 편지형식을 딴 저서들을 말합니다. 바울로의 글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지요. 여기에서는 편의상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바울로의 편지'로 통용하겠습니다.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20권이 편지로 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편지들은 엄밀히 말해서 개인적 용무만을 위한 사신(私信)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당히 큰 공동체들을 위해 기록되었지요. 심지어 필레몬서와 같이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도 그 수신자의 이름이 '당신의 집안에 있는 교회'로 되어 있어 그 공동체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답니다.

바울로의 편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뼈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머리말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름과 서로의 안부를 전합니다. 다음엔 일반적으로 중재기도와 종말론적 희망을 포함하는 감사나 축복의 말씀이 나오지요. 그리고는 종말론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편지의 본 내용이 이어진답니다. 그 다음엔 사목적 권고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편지의 끝맺음은 고별인사와 축복으로 되어 있어요.

이상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우리는 바울로의 편지들이 모두 편지의 형태를 빌려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에게 복음의 내용을 좀 더 깊이 해설해주고 그 공동체를 사목적으로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해서 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초대 교회는 바울로의 편지를 성서로 채택하여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읽게 한 거랍니다.

 

2. 그의 편지를 통해 그는 무얼 강조했습니까?

바울로가 강조한 내용은 다른 신약성서 저자들이 전하는 내용과 같아요.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약속을 실현시키셨고 이 예수를 영광의 주님으로 선포하였다는 겁니다. 아울러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선포하지요.

 

3.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독서 시간의 길이는 책의 분량보다 책에 대한 독서자의 관심과 흥미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신약성서의 독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바울로의 편지를 대할 때 당혹감과 어려움을 느낍니다. 바울로의 성품이나, 편지가 나오게 된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서 그의 편지들을 읽게 되면 각별한 감동과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 것 같군요. 그리되면 편지들의 길이도 자연 짧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실제로 바울로의 편지들 전체의 분량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분량의 절반 가량밖에 안된답니다.

 

4. 신체적으로 바울로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리는 바울로의 외모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한 곳에서 바울로가 자신에 대한 반대자들의 비평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인용문 안에서 그의 외모에 대한 약간의 암시를 엿볼 수는 있지요. "바울로의 편지는 무게도 있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막상 대해보면 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 것이 아니다"(2 고린 10,10)

바울로의 편지와는 별도로 2세기 말경 <바울로 행전>이라는 전설 모음집이 발간되었는데 역사적인 신빙성은 없지만, 꽤나 자세하게 바울로의 외모를 전해주고 있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바울로는 땅딸막한 대머리 총각이고 다리가 양가발이로 뒤틀려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약간의 매부리코에 양미간에 짙은 눈썹이 교차하는 안면과 더불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는 겁니다. 이런 용모라면 그 누구도 바울로를 미남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바울로 행전>은 이런 기형적인 용모에도 불구하고 바울로가 은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얻어진 내면의 아름다움이 그의 육체적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5. 성서공부를 많이 못한 사람도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으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물론 상당한 대목들은 성서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고린토 전서 13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만인의 가슴을 울려주는 대목이지요. 디모테오 전. 후서도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깊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바울로의 편지들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책상에 앉아 쓴 것이 아니었지요. 때로는 공동체의 파벌을 잠재우고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반격하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의 선교 동업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바울로는 이곳저곳 선교 여행길에서 필요를 느낄 때마다 원시 교회 공동체들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편지들이 씌어지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편지를 받아볼 공동체의 성격을 간단하게라도 파악한다면 편지의 내용을 보다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6. 그 편지들은 모두 바울로가 직접 쓴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바울로의 이름으로 씌어진 편지들은 도합 13권입니다. 히브리서는 바울로의 이름으로 씌어지지 않았고 실제의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도 바울로의 편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답니다.

다른 13권의 편지들 중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바울로의 것으로 보이는 책은 로마서, 고린토 전. 후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필레몬서, 데살로니카 전서로 총 7권이지요. 여기에 덧붙여 골로사이서, 데살로니카 후서가 약간의 의심은 있지만 대체로 바울로의 친저로 인정됩니다. 에페소서는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 바울로의 다른 편지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골로사이서를 많이 닮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의 저자가 바울로가 아니라 바울로를 잘 알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목서간으로 알려져 있는 디모테오 전. 후서와 디도서는 바울로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7.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남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볼 그런 일들을 왜, 어떤 사정이 있어 그렇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책을 낸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유명인사의 이름을 도용한 명예훼손죄에 해당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서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가 쓴 책을 평소 존경하거나 숭배하던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하나의 예우였답니다. 특히 유명인사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에 부합하도록 글을 써서 스승의 이름으로 출간시키는 경우가 많았지요.

바울로의 사목서간(디모테오 전. 후서, 디도서)은 단어사용, 문제의 접근방법, 전체적인 분위기 등이 바울로의 다른 서간들과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관심 내용도 다릅니다. 거기에서는 참교리를 보전하고 이제 겨우 꼴을 갖추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직분과 규율을 확립시켜나갈 것인가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들의 저자들은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당면한 문제들을 바울로 같으면 어떻게 풀어나갔을 것인가 상상하면서 그의 정신에 따라 이 편지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개중에는 간혹 바울로의 진짜 편지들의 일부가 포함되었을 거예요. 어떻든 사목서간은 바울로의 사상을 깊이 이해한 사람들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8. 복음서와 바울로의 편지들은 어느 것이 더 먼저 씌어졌습니까?

적지 않은 신자들이 신약성서의 집필 순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요. 책을 구성하는 순서로 보면 마태오 복음이 가장 먼저 나오지만 실제로는 바울로의 편지들이 더 먼저랍니다. 4복음서의 집필 연대가 70년에서 100년 사이로 비교적 1세기 말엽인데 비해서, 바울로의 친저 편지들은 49년에서 바울로의 순교(대략 64년) 직전까지 1세기 중엽에 기록되었습니다.

바울로의 추종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사목서간은 신약성서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된 작품으로서 그 작성 연대를 2세기초로 추정들 합니다.

 

9. 그러면 바울로와 복음사가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나요?

사도행전과 바울로의 편지들을 토대로 바울로가 복음사가들 중 적어도 마르코와 루가와는 서로 친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마르코는 요한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사도 12,12) 어머니 마리아(성모님이 아닌 다른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거주하다가 바울로와 자신의 삼촌 바르나바를 만나 한때는 그들과 전도여행을 같이 하기도 했지요(사도 13,5;골로 4,10). 그러나 마르코는 바울로가 자신의 동행 문제로 바르나바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자 바울로가 필레몬서를 쓰고 있었을 당시에는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필레 24절). 그 외에 마르코가 감옥생활을 하는 바울로를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골로 4,10;2디모4,11).

다음으로 루가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3번의 언급이 있지요. 필레몬서 24절에서 루가는 바울로의 동업자로 소개되고 골로사이서 4장 14절에선 '사랑하는 의사'로 묘사되지요. 그리고 디모테오 후서 4장 11절엔 루가만이 바울로를 끝까지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얼마나 역사적인 신빙성을 갖느냐도 문제이지만, 그 복음사가들이 직접 그 복음을 썼느냐에 대해서 대개는 회의적이고 또 동명이인(同名異人)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로가 위의 두 복음서 저자들과 친분을 맺었노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10. 바울로의 출생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그는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태어났나요?

바울로의 출생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이 전해주고 있는 몇 가지 정보 이외에 다른 자료가 없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는 다르소 시에서 출생했습니다(22,3;21,39 참조). 다르소 시는 바울로의 초기 선교활동의 주무대였던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한 도시로서 희랍문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던 도시로 평가되었지요. 바울로가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이스적 사고방식과 대화술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지식은 이 도시에서 길러진 게 아닐까요?

불행히도 바울로가 언제 탄생했는지, 또 그의 부모의 이름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자료는 전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울로가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출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기원전 6년경 탄생하셨으니 바울로는 서기 5년경에 출생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가문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증언은 바울로의 자신의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로마 11,1;필립 3,5).

 

11. 바울로는 사울이라고 불렸다는데 사울은 개종 전의 이름인가요?

사울이라는 이름은 유다식 이름이고 바울로는 그것의 로마식 이름으로 처음부터 그는 이 두 가지 이름을 다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스스로를 한 번도 사울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바울로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의 이름을 처음에는 사울이라고 했다고 개종 이후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방인의 영역에로 넘어갈 때부터 바울로로 바꾸어 부릅니다(사도 13,9).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에는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이 아브람을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시며 가나안 복지로 가도록 명하실 때에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 부르신 것이라든가 예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당신 제자로 삼으시면서 계파(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다교에만 집착해 있었던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새로운 소명인 이방인 선교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도행전의 저자는 개종전후의 이름을 구분하여 부른 것이라고 봅니다.

 

12. 그는 언제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까?

바울로가 예수를 알게 된 때에는 34년경이라고 보면 무방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회심을 다마스커스와 관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이에 반해 바울로의 편지들은 자신의 회심을 '계시'(갈라 1,16), '새 창조'(2고린 5,17),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1고린 15,8)이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실제로 바울로의 회심은 악인에서 선인으로 돌아서는 윤리적인 '회개'도 아니었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도 아니었습니다. 바울로는 회심 이전이나 이후에나 윤리적인 수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회심 이후에도 유다교를 의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로의 회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심'(로마 8,9)으로써 그리스도께 소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바울로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원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어떤 경로를 밟아 얻게 되었는지는 사도행전에서도 그 자신의 편지들에서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3. 그는 여행을 많이 했다던데 여행수단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차례의 전도여행 모두 출발점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어요.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의 종착역은 예루살렘이었지만, 제1차와 2차 여행은 종착역도 안티오키아였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로는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

지중해 동쪽과 북쪽의 거의 전 지역을 포함하는 이 모든 여정들은 육로와 해상을 통과했는데 당연히 육로여행 때는 도보와 말, 당나귀, 수레 등을 타고 다녔을 것이고 해상 여행은 돛과 노를 가진 목선을 이용했을 것입니다.

 

14. 그렇게 많은 여행을 했다니 바울로 사도는 무척 건강했나 보지요?

앞에서 이야기한 <바울로 행전>의 기록엔 그가 매우 강인한 체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바울로 자신이 편지들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들을 해봅니다. 간질, 말라리아, 만성적 안질 등. 그러나 병의 징후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 없군요.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열한 장황한 육체적 고통들은 그의 병약한 체질에 대한 게 아니라 그가 당한 고생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든 그는 세번씩이나 이 만성 질병에서 구해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와 같은 치유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고 이 육체의 연약함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한 채찍질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성 질병이 바울로의 전도여행을 불가능하게 할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교통기관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못한 그 시대에 그토록 장거리 여행을 끊임없이 할 수 있었다면 강한 정신력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기초 체력은 유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15. 결혼은 했습니까? 결혼한 몸이었다면 여행도 가족과 함께 했나요?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가 당시 예루살렘의 저명한 랍비(유다교의 지도급 선생님) 가믈리엘의 제자로서 바리사이와 랍비가 될 수업을 받아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수업은 통상 꽤 이른 나이 때부터 시작되지요. 5살 때 율법의 주요내용을 익히고, 6살엔 시나고가(유다교 회당)에 딸린 유치원에 입학하여 10살 때까지 성서를 공부하면서 구전 법전과 수많은 규정들을 배워나갑니다. 15살 땐 가므리엘 선생이 가르치는 예루살렘 성전 대학에 입학하여 고된 랍비수련과정을 밟는 한편, 율법의 해석과 유다인들의 고전문학을 익힌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랍비로서의 자격을 모두 얻게 되면 원로 랍비들의 추천을 받아 랍비로 서품 되지요.

바울로가 랍비로 서품 되었는지 아닌지는 문헌상 밝힐 수 없지만 사도행전과 그의 편지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사이로서 분명히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서품된 랍비들에겐 결혼이 의무규정으로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로가 바리사이의 규정대로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동시에 그의 부정적인 결혼관으로 미루어보아 결혼 초기에 아내와 갈라섰던 게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나 당시에 랍비들이라고 해서 다 결혼했던 것은 아니었지요. 한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별수없잖은가? 내 영혼이 이미 율법에 결합되어 있으니, 세상이야 다른 사람들이 계속 유지시키면 되는 게 아닌가?"라고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로가 독신생활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신비적 약혼을 간주했던(1 고린 7,7) 점으로 보아 그가 보다 크고 자유로운 자기 봉헌을 위해 독신으로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16. 그의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갔나요? 혹시 부업이라도 있었나요?

랍비들은 율법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돈을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생업을 가져야 했답니다. 바울로는 원래 비교적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도 복음을 전파하면서 돈받기를 거부했고 천막 짜는 일로 자신의 생활비를 벌었습니다(사도 18,3).

 

17. 바울로를 사도로 부르는데 그렇다면 그도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나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만 사도라고 부른 건 아니지요. 그리스도교에서 사도라고 했을 때는 두 가지 조건을 채운 사람들을 가리켰답니다. 첫째 그들은 교회사 안에서 첫 번째 세대에 속해야 하고, 둘째 무엇보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열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지요.

바울로는 역사적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열 두 제자들 틈에 끼지 못했던 탓으로 처음에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가 간혹 의심과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에 거세게 반발하면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하면서(로마 1,1;1 고린 9,1-2;15,9;2 고린 11,4-5) 자신의 가르침도 다른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첫머리에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바울로는 자신과 열 두 사도들 이외에도 '주님의 형제'(유다인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먼 친척도 형제 자매로 불렀습니다) 야고보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생각하였지요(갈라 1,19;1 고린 9,6;15,7). 교회의 직책 중 사도직을 최상의 은사로 소개하고 이 직책은 놀라운 표정과 기적들을 동반함으로써 거기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2고린 12,12).

 

18. 초대 교황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는 심하게 다툰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결말이 났나요?

두 사도가 심하게 다투었다기보다는 바울로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끝난 이 사건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점차로 불어나고 있었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일어났지요. 베드로와 바르나바를 위시해서 상당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성체성사를 포함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식탁을 같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낸 예루살렘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베드로는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원래 유다교에서는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을 구별하고 식사 전에는 그릇과 손을 깨끗이 닦는 등 음식에 대한 규정이 까다로웠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다인들로 구성되었고 엄격한 율법준수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바울로는 복음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식탁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고 베드로와 바르나바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예루살렘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도착하자 비겁하게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않은 체하며 꽁무니를 뺀 겁니다. 지도급 인사들인 이들의 표양을 보고 다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성찬과 식사 나누는 일을 피하게 되지 않았겠어요?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바울로의 눈에 이것은 분명 복음에 위배되는 일로서 이제 막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협하는 일로 판단되었지요. 왜냐하면 이로써 만인을 위해 제정된 주님의 성찬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할례를 비롯한 유다교의 온갖 율법규정들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강요하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직접 대고 "당신이 이미 그리스도의 법을 받아들여 유다인으로서의 모든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는데 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려는 이방인들을 유다교의 규정에 묶어놓으려는거요?"하고 면박을 주었습니다(갈라 2,14). 베드로가 워낙 잘못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바울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사건이었지요.

 

19. 다른 사도들과 바울로 사도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단이 바울로를 지지하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그의 독보적 권한과 위치를 인정한 것으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바울로는 이방인 선교 벽두에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수구파들로부터 상당한 방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문제를 삼고 있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의 정통성 여부였습니다. 바울로는 분명 열 두 제자의 무리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러 번 자신있게 자신의 가르침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얻어진 것이고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그가 이룩한 이방인 선교의 놀라운 결실을 보고 종내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수구파 유다계그리스도인들도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며 그를 동업자로 받아들였으리라 확신합니다.

 

20. 바울로 사도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첫 전도 여행 때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를 동반자로 삼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집니다. 두 번째 전도 여행 때에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동반자로 맞아들입니다. 세 번째 전도 여행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로의 중요한 협력자로서 그리스인 디도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외에 바울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게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들에 대한 안부를 소상히 묻거나 문안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하지요. 로마서 16장에서 바울로는 27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문안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맺는데 각별히 신경을 쓴 거지요.

 

21. 바울로가 사용한 언어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로가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를 떠나 여러 이방지역에 흩어져 사는 현상)의 유다인 출신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랍비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라메아어와 그리스어 둘 다 능통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요 선교대상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향한 그의 연설이나 편지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2. 바울로의 말솜씨와 글솜씨 중 어느 것이 더 뛰어납니까?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보면 바울로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유다인들을 거리에서 재판정에서 굴복시키고, 궤변에 젖어 있는 그리스인들을 탁월한 논리로 설득시킨 유명한 설교가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로는 숭배하다시피 떠받들었던 루가의 문학적인 기록이라고 봐야 할겁니다. 루가는 여기서 바울로라는 한 영웅을 통하여 복음이 유다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로의 말솜씨는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끊임없는 반대자들의 공격과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의 모함 앞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어 적대자들의 숨은 의도를 밝혀내고 자신의 언행을 변호하는 것이었겠지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으리만큼 바울로는 실제로 체계적이고 냉정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여유도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연 그의 말이나 글이 상식 밖으로 장황하게 길어지거나 논리의 비약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사도행전에서조차도 많은 청중들, 특히 바울로의 반대자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웃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정은 약간 낫기는 하지만 그의 편지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지요. 바울로가 당시의 수사학에서 유행하던 디아트리베(대화체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킴)의 방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 하지만, 한 주체를 너무 지나치게 파고 든다든가 문법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무리하게 강변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그의 글을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답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글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과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복음선포에 대한 불타는 정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봉사는 그의 말과 글에 생명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청중과 독자를 감동시켰으리라고 봅니다.

 

23. 바울로의 성격은 어떤 편인가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적 봉사와 사랑은 바울로를 단단히 무장시켰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든지 적극적이었고 자신이 한번 진리라고 생각한 일에 진지하고 철저하게 몰두해 들어갔지요.

설상가상으로 바울로는 그의 권위와 가르침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반대자들의 공격에 끊임없이 반박성명을 내야 할 형편이었지요. 이 모든 요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바울로로 하여금 자신의 편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복음과 권위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성공적인 그의 선교활동이 자신의 약점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칠 만큼 강조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를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균형을 잃어버린, 그리하여 영원히 자기 나팔만을 부는 사나이로까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자랑한 적이 없고 다만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을 자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자랑도 반대자들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 진리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지 자기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답니다. 오히려 바울로의 편지 곳곳에서 우리는 그의 신생교회들에 대한 어버이다운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고 많은 친구들과 협조자들에게 보내는 자상한 충고와 문안을 발견할 수 있지요. 이는 바울로가 결코 언제나 도발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따뜻한 면모도 갖춘 균형 잡힌 인물임을 증언하는 대목들입니다.

 

24. 바울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가 항구도시 에페소에서 3년 동안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20,31).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페소는 바울로가 한 장소에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될 겁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광신적인 유다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모함을 받았습니다. 바울로를 쫓아내기 위해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는 에페소에서 바울로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사도행전과 그의 편지들로부터 별 특별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필레몬이 살던 골로사이가 에페소 근처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생활을 하면서 필레몬에게 옥중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상당히 근거 있는 추측 같군요.

 

25. 그는 감옥에 많이 갇혔는데 무슨 죄 때문이었습니까?

바울로는 대부분 유다인들의 모함 때문에 감옥에 갇혔지요. 그들은 바울로가 자신들이 처형한 나자렛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선포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걸보고 위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율법과 유다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상대화시키고 직선적으로 비판하는 바울로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바울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갖가지 구실을 찾으며 일반 시민들을 선동하였습니다. 바울로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 이외에도 치안대장이나 총독에게 고발하여 감옥에 갇히도록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였답니다. 유다인들로부터 그가 당한 박해가 고린토 후서 11장 23절에서부터 26절에 나열되어 있지요.

 

26. 그가 로마에 간 것은 전교 때문이었습니까?

바울로의 로마 여행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유일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바울로는 로마에 전교하러 간 게 아니었지요. 예루살렘과 가이사리아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함에 빠져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로는 가이사리아로 이송되어 아그리빠 왕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심문 도중에 바울로는 출생지 다르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황제에게 상소합니다. 이 상소가 윤허되어 바울로는 로마로 압송되지요. 말하자면 바울로가 로마에 간 것은 순전히 재판문제 때문이었던 겁니다.

 

27. 바울로는 몇 살까지 살다가 어디에서 돌아가셨읍니까?

사도행전은 "바울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2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0-31)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로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전도를 계속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언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사도행전도 그의 편지들도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의 클레멘스 바울로가 로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후 서부의 끝인 스페인에까지 전도여행을 했다고 전합니다. <무라토리오 경전>과 위경 <베드로 행전>도 같은 전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스페인 여행을 마친 바울로는 로마에서 다시 붙잡혀 더 엄격한 수인생활을 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67년; 로마의 클레멘스와 떼르뚤리아노는 64년으로 주장) 참수 치명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분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정확한 출생연도를 모르니 알 수 없지만 대략 60세 정도가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보다 깊은 바울로 이해를 위해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라서


다르소

바울로의 출생지로 로마시대 때에는 길리기아(Cilicia)주의 수도로서 철학과 의학 학교로 이름났었다고 함. 회심한 후에도 바울로는 이곳에서 한동안 살았다(사도 9, 30 ; 11 , 25).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아(Antakja)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바울로 사도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루가에 의하면 안티오키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사도 11, 19-26) 초대교회선교의 출발지라고 할만큼(사도 13,1-3;14, 26-28;15, 35-40;18,22)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시대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키프로스 섬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스테파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첫 번째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온 곳이기도 하다. 사울(바울로)과 바르나바는 제1차 전교여행 때 이곳에서 전교했다(사도 11,19 이하).

키프로스(Cyprus)섬에는 현재 약 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중 80퍼센트가 그리이스계 사람으로 그리이스정교신자이고 18.7퍼센트가 터어키계 사람으로 이슬람 신자인데 인종적 종교적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1960년 독립, 공화국으로 출범하였지만 1974년 7월 그리이스군 장교들이 이끌던 일단의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자 5일 후 터키는 군대를 동원하여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결국은 키프로스 섬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강점하였으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이스계 주민들을 추방하고 1983년에는 그 지역을 '터어키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으나 국제적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즉, 남부는 그리이스계 키프로스이고 북부 일부는 터어키계 키프로스이다.

 

갈라디아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이다. 오늘의 터어키의 수도 앙카라 근처를 지칭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사도 바울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갈라디아가 정확히 어느 지역을 두고 말하는지 논란이 되는데 그 이유는 갈라디아는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주')으로서의 갈라디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좁은 의미로 기원전 3세기 초 갈리아 지방에서 오늘의 앙카라 근처 지역으로 이주해왔던 켈트족이 살았던 지역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수신교회의 지역이 바울로가 그의 1차 전교여행 때 방문하였던 비시디아와 이고니온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주')으로서의 갈라디아를 뜻한다면 아마 갈라디아서는 바울로의 편지들에서 가장 먼저 씌어진 편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갈라디아로 보고 있다.

 

필립비

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기원전 358-357 알렉산더 대제의 부왕인 필립 2세 때는 샘들이 매우 많아 토지가 비옥하였고 금광도 발굴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던 간선 상업도로요 군사도로였던 에냐시아 가도(Via Egnatia)가 있던 곳인데 여기에다 필립 2세는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필립비라 하였다 한다. 필립비는 기원전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율리우스 케사르(J.Caesares)의 암살자였던 브루투스와 카씨우스와 싸워 이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우구스투스는 필립비를 재건하고 필립비에 많은 퇴역로마 군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 필립비 시민들에게는 이탈리아 권리(jus italicum)를 부여하였다. '이탈리아 권리'란 로마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시민들이 차지하던 권리로 이 권리의 소지자는 재산의 소유, 판매, 이전과 시민법 소송의 권리를 가졌고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필립비 교회는 바울로가 제2차 전교여행 때 세웠던 교회로 유럽지역에서 첫 번째로 세운 교회였다. 바울로는 기타 다른 지역에서의 전교활동 중에서도 이 필립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별히 사랑하였다. 바울로의 편지들 중 필립비서만큼 정이 넘치는 편지도 없을 것이다. (사도 16,12-40; 1데살 2,2; 2 고린 7,5-7;8,2;11,8-9; 필립 4,15-16).

 

데살로니카

알렉산더 대제의 막료 장군이었던 카산드로스(Cassandros)가, 에냐시아 가도가 지나는 길이며 항구를 끼고 있던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알렉산더 대제의 이복누이이자 자기 부인이었던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시대 때에는 마케도니아주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로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즈음에는 매우 번창하던 도시였다.

7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에집트와 시리아를 빼앗긴 후 데살로니카는 동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다음가는 대도시로 부상했다.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스 제2의 대도시이다.

 

아테네

고전 그리스 시대의 중심지로 최고 전성기는 5세기. 기원전 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에 패함으로써 고전 아테네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고전 시기에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정치가, 시인, 역사가 등등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들을 배출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86년에는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의 정치적 중요성과 경제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수세기 동안 거의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아테네는 터키에 대한 독립전쟁(1821-30)과 그 이후 독립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1834년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항구의 인구를 포함하여 만 명 미만에 불과하였으나 현재는 4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발칸전쟁,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46-49년의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등으로 아테네에는 많은 피난민 또는 이주민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고린토

현재 고린토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토이며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가 전교했던 고린토는 그리이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중심지로 국제도시였다. 고린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켄크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고린토인들은 이쪽 항구에서 건너편 항구로 화물을 옮길 때에는 선박도 바퀴가 달린 운송장치를 통해 건너편 항구로 옮겼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들은 바람과 파도가 많아 위험스럽고 먼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돌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1882년에 착공 1893년에 완공된 길이 6345미터 폭 23미터의 고린토 운하가 있고 운하 위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대가 그리스를 점령할 때 고린토는 최후의 저항의 보루였다. 오랜 포위 끝에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가 후일 케사르의 명령에 의해 로마의 식민도시로 복구되고 나중에는 아카이아 주의 수도이자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퇴역 군인들이 즐겨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주민 중에는 로마인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상업 대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였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문화. 종교가 혼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특히 성윤리가 매우 타락해 있었다고 한다.

 

에페소

이곳 역시 지금은 지도에서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지만 바울로 사도 당시만 해도 아시아 주의 수도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지 항구도시였다.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고린토 항구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바울로 사도가 진정 그렇게 열심히 선교하였고 초세기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소아시아(오늘의 터키 지역) 교회들은 오랜 세기동안 이슬람의 지배 속에 있던 탓인지 지금은 이슬람 사원들만이 곳곳에 보일 뿐 찬란했던 교회들의 자취는 고고학적 발굴에서나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말타 섬

사도행전 28장 1절에 의하면 바울로는 배가 파선한 후 극적으로 어느 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의 이름은 멜리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멜리데 섬이 오늘날의 말타 섬과 동일하다고 본다.

말타 섬은 현재 인구 40만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고대로부터 시실리 섬 바로 남부라는 그리고 지중해의 거의 정중앙이라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지중해를 제패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하던 섬이었다. 페니키아, 로마, 아랍, 노르만 족이 번갈아 차지하다가 마지막으로는 영국이 1814년부터 1964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1974년부터 공화국이 되었는데 비동맹 노선을 취하고 있다.

 

바울로 편지의 중요성

 

* 신약성서 27권의 문헌 중 13권이라는 많은 양이 바울로 사도의 편지라고 되어 있다.

*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복음서들이 오랜 구전(口傳)과정과 복음사가들의 편집과정을 거쳐 전해지고 있음에 비해 사도 바울로의 편지는 이러한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해지고 있다(물론 일부 서간에 대해 학문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음을 전제함).

* 바울로의 편지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들이다.

*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됨에 있어서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은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에까지 전파함으로써 장차 교회를 세계적 교회가 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신심사적으로 볼 때 바울로 사도의 삶과 가르침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

* 교회일치적 측면에서도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인 성서적 전거는 바로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로의 편지를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바울로 사도의 편지를 소일거리로 한가하게 읽어서는 안 된다. '편지'라는 것을 명심하고 바울로 사도 자신의 '육성'을 직접 듣는다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며 '말씀을 듣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로 사도의 생애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필요하다. 바울로의 생애에 대해서는 먼저 바울로 자신의 기록인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4절 ; 고린토 후서 11장 22-33절 ; 12장 1-10절 ; 필립비서 3장 5-11절을 먼저 읽고 난 후, 비록 세부적으로 다른 점이 있지만 루가가 전해주는 사도행전 13-28장을 정독해야 한다. 이때 반드시 바울로의 전교여행에 관한 성서지도를 보면서 지명을 확인해야 한다. 더욱 바람직한 방법은 직접 지도를 그리고 주요지명에 관한 해설서를 읽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의 편지들을 읽을 때에는 각 편지를 쓸 때의 바울로 사도의 상황과 편지를 받는 수신교회의 상황이 어떠했었는지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신학논문'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이 계기가 되어서 씌어진 '편지'였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신약성서 입문서에는 이에 대한 해설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신약성서에 수록된 순서대로 바울로 사도들의 편지들을 읽게 되면 곧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독서순서를 추천한다.

 

1) 데살로니카 전후서 :

가장 먼저 씌어진 데살로니카 전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사건이 있은 지 불과 20여년밖에 안 되던 때, 즉 역사적인 예수사건에 대한 목격증인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그때 바울로의 선포를 통해 막 형성된 참신한 데살로니카 교회와 바울로사도의 상태를 감안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

 

2) 필립비서 :

기쁨과 감사로 가득찬 편지이다. 아주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는 필레몬서도 이때 읽는 것이 좋다.

 

3) 고린토 전후서 :

고린토 교회의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비추며 때로는 신랄하게 꾸짖으며 때로는 아버지같이 타이르고 호소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4)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

시간적 여유를 갖고 차분하게 정독해야 할 책이다. 바울로 사도의 핵심 신학이라 할 수 있는 '의화론'이 이 편지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두 편지가 희어진 시기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편지를 쓰는 바울로 사도의 상황과 수신교회의 상황이 두 편지에서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잘못 해석할 우려가 많은 편지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로마서를 마치 바울로 사도의 신학 학위논문처럼 분석해서는 안 된다.

5)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 :

바울로 사도가 직접 쓴 편지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편지들이지만 최소한 바울로의 철저한 영향을 받은 편지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있어서 꼭 인용되는 편지이다.

6) 사목서간들(디모테오 전후서, 디도서) :

위의 세 편지들을 사목서간 또는 목회서신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이 편지들에서 바울로가 그의 제자들인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사목적 직무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주고있는 데서 유래한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여러 이유에서 사목서간을 사도 바울로가 직접 썼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로가 사망한 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쓰였다고 인정하더라도 바울로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의 제자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이해하였는지를 아는 데 있어서 사목서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바울로 서간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들


 

이홍기, <사도 바울로의 생애와 편지>, 분도출판사, 1986.

광주 가톨릭 대학 교수인 저자가 강의했던 것을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하게 썼다. 그러면서도, 최근의 학문적 연구결과가 고려된 바울로 서간 입문서이다.

 

J. 피츠마이어, <바울로의 신학>, 김수복 역, 분도출판사, 1973.

미국의 저명한 가톨릭 성서학자인 J.A. 피츠마이어 신부가 <제롬 성서주석>(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에 부록으로 썼던 것을 번역한 것으로 비록 부피는 작지만 바울로의 신학사상의 주류를 명료하게 집약해 놓았다.

 

G. 보른캄, <바울-그의 생애와 사상>, 허혁 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8.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보른캄이 쓴 1969년 개정판 <빠울루스>(Paulus)를 번역한 책. 바울로에 관한 학문적 토론들이 반영된 책으로서 바울로에 관해 좀더 깊이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독도서라고 하겠다.

 

K.H. 셀클레, <신약성서입문>, 김영선 외 5인 역, 분도출판사, 1983.

사도 바울로와 그의 서간들에 관해서는 135-228쪽 참조.

튀빙겐 대학 교수였던 셀클레의 1966년 제3판의 번역본으로 학적 무게가 있는 입문서이다.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신약성서 전체에 관한 교과서적 입문서이다.

 

W.G. 큄멜, <신약정경 개론>, 박익수 역,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8.

1913년에 P.화이네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하여 1936년(제8판)부터는 J.벰이, 1963년(제12판 전면 개정판)부터는 W.G.큄멜이 이어받아 계속 보완하여 완성한 책(1978년 제19판)으로 전세계적으로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약성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바울로 서간에 관해서도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C. 붸스터만, <성서입문>, 김이곤.황성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8(11판).

서독의 저명한 구약성서학자인 저자가 사목생활 10년 뒤에 신학대학 교수로 취임하였을 때 신학대학생들의 성서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이 너무나 부족한 데 놀란 나머지 개최하였던 성서입문강좌의 결과로 나왔다는 책이다. 부피는 얼마 안 되지만 최근 성서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신구약 전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반 평신도들이 혼자 보기에는 좀 어려운 편이다. 바울로 서간에 관해서는 351-408쪽(바울로의 행적과 관련된 사도행전에 관하여는 336-34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