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바울의 生涯와 神學

바울 윤리의 기초

好學 2010. 6. 27. 01:37

 

바울 윤리의 기초




1. 들어가는 말


오늘 한국 교회는 잇단 대형 사고와 비리 사건에 기독교인이 연루됨으로써 그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고 위신이 심하게 손상될 뿐 아니라 사회가 교회에 바라는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고 교회의 사회적 위상마저 큰 폭으로 흔들리고 있다. 실로 오늘의 시대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에 있어서 방향 설정 위기의 시대요, 행동 불확실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및 행동 규범 위기와 행동 결정 위기에 직면하여 신약성경윤리를 성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의 기초와 근거가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행동과 삶에 있어서 무엇을 그 결정 기준과 내용으로 삼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과 행동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본 논문은 철저하게 유대 바리새적 윤리의 한 대표자인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 바울 윤리의 기초를 밝힘으로써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삶의 규범 위기와 행동의 결정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기독교인의 행동과 삶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바울 윤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전제들을 살펴 보고, 구원의 은혜와 윤리적 요구의 관계를 논할 때 일반화된 용어인 "직설법"과 "명령법"의 상호 관계를 간략하게 규명한 다음, 바울서신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는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 기초, 성례론적 기초, 성령론적·은사론적 기초, 그리고 종말론적 기초를 차례로 해명하고 나서, 이러한 다양한 기초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조사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에 있어서 그 규범 제시와 행동 결정을 위한 이론적 토대 마련이라는 본 논문의 실천적 목적에 부합되게 바울 윤리가 비록 분석 철학이나 일반 윤리에서처럼 체계화될 수 없는 윤리일지라도 그 기독론적인 성격 때문에 한 신학적인 맥락 안에 있는 윤리임을 밝히고자 한다.



2. 바울 윤리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전제들


바울의 윤리적 진술들은 그 체계를 밝혀낼 수 있을 정도로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바울서신 전체 본문 안에 산재(散在)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에 대해 조사하려 한다면 바울서신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바울서신에 흩어져 있는 윤리적인 진술들을 전체 바울서신과의 맥락 안에서 조사하고 그 관련 의미를 먼저 밝혀야만 할 것이다.

바울 윤리 이해를 위해서 그 기초를 밝히기 전에 앞서 고려해야할 것은 우선, 바울은 장차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자신의 서신을 써서 보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바울서신의 수신인은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은 인의자(認義者)의 윤리이다. 그것도 바울의 윤리는 신(新)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처럼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윤리"(kirchliche Ethik) 내지는 "신앙 공동체의 윤리"(Gemeindeethik)이다. 그것은 바울서신이 신앙공동체에게 보낸 교회서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빌레몬서조차 수신자가 빌레몬 개인이 아니라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였다(몬 1-2절 참조). 그러니까 "신약성경윤리의 본래적인 주체는 어떤 사회 단체나 개인이 아니라 교회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하는 바울 윤리 이해를 위한 전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의 신학에로의 통합성이다. 바울은 윤리를 신학에 통합하였다. 바울의 윤리는 자율적 이성이나 양심에 기반을 둔 철학적인 윤리나 도덕적인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그 근거가 되는 '신학적 윤리'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수 윤리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윤리적 성찰의 토대요 근거"이다. 그것은 몇몇 바울서신(로마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그리고 후기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이 보여주는 교리-윤리의 이분(二分) 구조에서 잘 나타난다. 곧 서신의 첫째 부분은 케뤼그마 내지는 기독론, 종말론 등의 교리를 다루고, 서신의 둘째 부분은 윤리를 취급한다. 이러한 순서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서신의 둘째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권고 단락이 "그러므로"라는 불변사(ou^n-paraeneticum)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보여 준다(롬 12:1; 갈 5:1; 살전 4:1; 골 3:1; 엡 4:1 참조). 이로써 바울의 윤리가 어떤 자율(自律)적인 윤리나 목적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바울의 윤리를 단순한 "어떤 인과(因果)적 윤리"(eine konsekutive Ethik)로 규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경우 교리와 윤리가 단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의존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경우 "구원 에토스"(Heilsethos)가 "세상 에토스"(Weltethos)에 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권면은 당시 헬라 세계에서 통용되던 '권고'(paraivnesi")라기 보다는 '신적 권고'(paravklhsi") 내지는 '위로(격려)적 권고'이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권고 부분에 사용된 속격 전치사 '말미암아'(diav)-어구(語句)에서 입증된다. 특히 로마서의 권고 부분이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diaV tw'n oijktirmw'n tou' qeou') 너희를 권하노니"(롬 12:1)로 시작하는데서 권면의 위로적 내지는 격려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서신 안에서 자주 사용된 '주님과 함께'(suVn kurivw/) 내지는 '그리스도와 함께(suVn Cristw'/) 공식문도 바울 권고의 토대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있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바울 윤리 이해에 있어서, 특히 바울 윤리의 토대 혹은 근거 이해에 있어서 먼저 고려해야할 점은 바울 윤리의 기초가 기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위에 세워져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를 "종말 윤리"(Telos-Ethik), "영 윤리"(Geistethik), 혹은 "성례전 윤리" 중 쉽게 어느 한 용어로만 규정하는 것은 바울 윤리의 다른 면을 배제시키는 감축주의(reductionism)의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윤리의 기초를 다양하게 언급한다. 혹자는 이러한 바울 윤리의 다양한 근거의 이유를 바울신학의 변화에서 찾기도 한다. 예를 들면 슐츠(S. Schulz)는 바울 윤리를 데살로니가전서의 초기 국면과 그외 바울서신의 후기 국면으로 구분하고 초기의 바울은 자신이 구원의 토대와 기독교적인 삶의 규범으로 이해한 구약의 도덕법을 강화했던 반면 후기의 바울이 그 이후에야 비로소 모세 율법의 구원 중재성에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 윤리에 있어서 이런 '발전 가설'(Entwicklungshypothese)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 전장에 걸쳐서 '율법'(novmo")라는 용어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슐츠가 가정하는 "구약성경에 대한 많은 간접적인 암시" 역시도 거의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윤리의 다양한 기초의 원인은 바울 신학의 변화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서신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서신은 '상황서신'(Gelegenheitsbrief)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신과 관련된 개교회에 실제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러니까 바울의 윤리는 개교회의 상황에 관련된 윤리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에게서처럼 바울의 경우에도 어떤 윤리 체계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도 윤리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지침이 아무런 구심점도 없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거나 아무런 관련도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신학적인 맥락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위에 언급된, 바울 윤리 이해를 위한 이런 세 가지 전제들을 염두에 두고 바울 윤리의 기초를 조사하기로 하자. 그전에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가 신학에 어떻게 통합되었는지를 좀 더 자세히 밝히기 위해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선물(Gabe)과 은혜의 선물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과제(Aufgabe), 즉 구원론과 윤리의 관계를 "직설법"(Indikativ)과 "명령법"(Imperativ)의 관계로 표현한 것은 스위스 바젤(Basel)의 신약학자 베른레(P. Wernle, 1872-1939)가 1892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과 죄』에서 양자의 관계를 다룬 이래로 보편화되었다. 바울 윤리의 기초를 묻는 문제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의 신학에 통합된 윤리의 성격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구원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직설법으로 표현되는가하면 다른 때에는 명령법으로 진술된다. 난해한 것은 동일한 내용이 한 곳에서는 직설법으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명령법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직설법)고 말하나, 동일한 바울서신인 로마서 13장 14절에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명령법)고 진술한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직설법적 진술과 명령법적 진술이 동일한 본문 맥락 안에서 사용된다는 점이다. 가령 로마서 6장의 예를 들면 2절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로 직설법으로 표현되나, 12절에서는 "너희는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로 명령법으로 진술되어 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한 본문에서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이 나란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4-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직설법),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명령법) 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직설법),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명령법), 또는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직설법),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명령법)처럼 직설법과 명령법이 한 본문에 동시에 언급된다. 이 양자를 동시에 진술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인가? 또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바울서신에서 직설법과 명령법 진술의 공존(共存)을 처음으로 문제 삼았던 베른레는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삶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을 바울이 알고 있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부인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종말론적 구원의 약속인 직설법과 그에게 요구된 권고인 명령법의 관계를 일치될 수 없는 한 '모순'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을 모순으로 여겼다면 한 본문 안에 직설법과 명령법을 동시에 나란히 진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서로 배타적으로 이해하여 양자의 관계를 모순으로 여긴 베른레와 다르게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상호 불가분(不可分)의 공속(共屬) 관계에서 해명을 시도하였다. 즉 불트만은 이 양자의 관계를 내용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진정한 이율 배반"(eine echte Antinomie) 혹은 "역설"(Paradoxie)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직설법과 명령법이 겉보기에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서로 공속되어 있다(빌 2:12-13 참조). 불트만은 명령법이 칭의(稱義)의 근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직설법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봄으로써 이전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획기적인 인식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불트만은 양자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변증법적으로 바라본 인간론(더 정확하게는 실존론)적인 관점에서 고대 핀다로스의 명언(Pindarwort)인 "너는 된 자가 되어라"(Werde, der du bist)라는 관념론적인 공식문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기독론적인 관점을 간과하였다. 게다가 불트만은 유죄(有罪)와 무죄(無罪)를 인간에 의해 경험적으로 인지될 수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선포되는, 그래서 단지 믿음 안에만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구원이 "우리 밖에서"(extra nos) 행해지는 하나님의 인의(認義) 판결의 우선성은 유지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의 실행에 대한 인의자의 참여라는 관점이 축소되고 단지 "이류(二流)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하는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양자의 관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을 보른캄(G. Bornkamm, 1905-1990)은 로마서 6장의 세례 본문에서 전반부(1-11절)의 주제인 세례(직설법)와 후반부(12-23절)의 주제인 권면(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넘어간다. 보른캄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수세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참여함으로써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들어가게 되며, 이때 선사된 새 생명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명령법의 근거이다. 명령법은 인의자의 어떤 선한 능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세시 이미 인의자에게 일어난 것을 반복하는 것이기에 명령법은 "호소하는 위로(aufrufender Trost)이며 위로적 호소(tröstlicher Aufruf)인 신적 권고(paravklhsi")"이다. 수세자에게 선사된 새 생명의 감추어져 있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시대가 종식되었으나 새 시대가 아직 보편적으로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론적인 관점보다 더 넓은 관점 안에 나타난다. 즉 보른캄에 의하면 직설법과 명령법 사이에서 인식되는 이율 배반의 근거는 불트만의 경우처럼 인간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성령론을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변증법 안에 있다. 요약하면, 보른캄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역설 관계를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을 포함하는 넓은 시계(視界)를 통하여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의 종말론적인 긴장 안에서 해명하였다.

보른캄과는 다른 각도에서 캐제만(E. Käsemann, 1906-1998)은 직설법과 명령법에 대한 불트만의 인간론적인 감축주의를 비판한다. 캐제만은 불트만의 경우 직설법이 일방적으로 순수한 선물로 간주되고 이로써 구원의 선물이 선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쉽게 분리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캐제만에 의하면 권고는 선물에 단순하게 추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선물이 주어질 때 처음부터 그 선물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직설법을 다만 명령법의 근거로 여기고 명령법을 단순하게 직설법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명령법은 단지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가능성을 실현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캐제만에 의하면 명령법이 직설법과 나란히 있지 않고 오히려 "직설법 안에 통합되어 있다(integriert)." 여기서 캐제만은 인간론적인 차원을 너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의 차원'을 고려하는데, 그 하나님의 의를 단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물'(Gabe)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Macht)으로 이해함으로써(롬 1:16-17 참조) 선물을 선물 제공(提供)자이신 하나님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롬 6:1-11 참조) 하나님의 의를 향해 뛰어들어(롬 6:12-23 참조) 이제는 "의의 열매"(빌 1:11)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캐제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긴장을 단지 인간론적으로만 보지 않고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폭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

요약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는 '모순'으로(베른레) 규정될 수 없으며, 단지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본 '이율 배반'이나 '역설'로도(불트만) 충분하게 설명될 수 없다. 그 보다는 인간론과 함께 기독론과 성령론을 포함한 종말론적 시야에서(보른캄), 나아가 구원의 선물과 선물 제공자이신 하나님을 분리하지 않는 통합적인 관점에서(캐제만) 양자의 관계를 보는 것이 바울의 본래 진술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로마서 5-8장을 한 단위로 이해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며(5장. 7장), 그 인의자에게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시대 전환'(Äonenwende)을 굳게 붙잡을 것과 그와 함께 '주권 교체'(Herrschaftswechsel)가 요구된다(6장). 그래서 수세자는 죄에게 순종하는 삶에서 벗어나 순종 없음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순종(nova oboedientia) 관계로 편입하게 된다. 이러한 '주권 교체'의 관점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양자를 함께 진술하는 바울의 본래 의도에 일치할 것이다.



4.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인 기초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에 관한 위의 서술이 보여 주듯이 바울 윤리의 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행하셨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이 바울 윤리의 근거이다.

이러한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인 기초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바울의 한 해석인 칭의론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복음"(eujaggevlion qeou')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eujaggevlion tou' Cristou')(살전 3:2; 고전 9:12; 고후 2:12; 9:13; 10:14; 갈 1:7; 롬 15:19; 빌 1:27)인 바로 "그 복음"(toV eujaggevlion)에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가 계시되었다(롬 1:16-17).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믿음의 의이다(롬 3:23).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의'는 단지 속죄하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창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3:25). 즉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롭다하는, 선물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일 뿐 아니라(롬 10:3; 빌 3:9), 동시에 의롭다 여김 받은 사람을 붙잡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적인 능력인 '능동적인 의'(iustitia activa)이다(고후 5:17 참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하게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법정적인 칭의'(iustificatio forensis)일 뿐 아니라 또한 칭의자를 실제로 의인(義人)되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役事)하는 '효과적인 칭의'(iustificatio effectiva)이다. 이처럼 바울의 칭의론이 그리스도 사건의 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바울 윤리의 기초는 기독론적인 기초이다. 이는 권고 맥락 안에서 서로 대체할 수 있게 사용된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어구와 '주 안에서'(ejn kurivw/)-어구에서도 분명하게 밝혀진다(고전 7:39; 11:11; 빌 4:4; 살전 4:1 등 참조).

바울의 경우 칭의론과 함께 화해론도 그리스도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적대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화해 사건이다(롬 5:10).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고후 5:17-18). 이로써 바울은 '칭의'를 '화해'와 연결하였다. 바울의 경우 '죄(aJmaritiva, 단수)가 하나의 권세인 것처럼 '의'(dikaiosuvnh) 역시도 어떤 권세이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을 창조하며, 그리스도는 그 의와 동일하다. 그리스도는 화해자로서 단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된 칭의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diakoniva th'" katallagh'")도 중재하신다(고후 5:18). 따라서 화목케 하시는 그리스도가 바울 윤리의 기초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이 윤리적 권면의 근거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oijktirmov")에서도 입증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로마서에서 윤리의 기초를 세우는 권면 단락(롬 12:1-15:13)의 서두인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롬 12:1상)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은혜의 선물을 주심'이나 '보호해 주심'의 뜻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서술했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증명된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윤리적 진술의 기초이다.

칭의와 화해, 하나님의 자비하심 개념에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동과 삶의 토대와 관련되어 있는 기준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인 토대를 밝힐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롬 15:2-3). 곧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 이웃 사랑 실천의 모범이 되는데, 이때 그리스도는 단순한 "본보기(exemplum)가 아니라 성례(sacramentum)"이다. 그 예로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예찬한 '그리스도-찬가'(Christus-Hymnus)를 들 수 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卑下)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기 부인(否認)의 문제라하여 이 찬가의 윤리적 의미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는 그리스도의 삶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는 성육신(成肉身)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인간되심이 윤리의 기초라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순종과 비하가 요구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같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 받을 것을 요구하고(고전 11:1), 또 주님을 본 받은 자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 대해 기뻐한다(살전 1:6-7).

요약하면, 칭의론과 함께 화해론의 관점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그리고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이웃 사랑 실천의 본보기에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계시된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바울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



5. 바울 윤리의 성례론적 기초


불트만이 『신약학지』(Zeitschrift fü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에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의 문제"를 발표한 직후, 빈디쉬(H. Windisch)가 같은 학술지에 게재한 "바울의 명령법 문제"에서 불트만을 비판하며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를 해명할 때 칭의론 뿐 아니라 성례론을 고려함으로써 바울 윤리에서 그 성례론적인 기초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후 바울 윤리를 "성례전적 윤리"로 규정한 폰 소덴(H. v. Soden), 그리고 이어서 보른캄과 고이만(N. Gäumann)이 발표한 세례와 윤리의 관계 연구로써 바울에게 있어서 성례와 윤리 주제에 대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몇 바울서신에서, 특히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인 기초와 함께 성례론적인 기초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기초는 각각 독립적인 기초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례론적인 기초는 기독론적인 기초 아래 놓여 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성례는 그리스도 사건의 현재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례는 바울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다. 바울 이전에 이미 초기 기독교회 안에서 성례가 행해지고 있었다. 바울은 그것을 기독론적으로 강화하고 심화하였다.

우선, 성례 중 세례의 윤리적 의미를 살펴 보자. 이 주제 연구에 대한 '전형적인 성경 본문'(locus classicus)은 로마서 6장이다. 세례를 통해서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된다(롬 6:3). 칭의자는 세례를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 하나됨은 어떤 '신비적인 합일'(unio mystica)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례로써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Schicksalsgemeinschaft)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가 된다(롬 6:4-9). 그리스도와 수세자의 이러한 하나됨은 "함께 장사되었고"(sunetavfhmen, 4절), "연합한 자"(suvmfutoi, 5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sunestaurwvqh, 6절), "그리스도와 함께"(suVn Cristw'/, 8절), "함께 살 것이다"(suzhvsomen, 8절)로 표현된 '함께'-공식문(suvn-Formel)에서 드러난다(갈 3:27. 29 참조). 세례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 사건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한다. 칭의자는 세례를 통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양도하며, 이로써 수세자는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된다(롬 6:19 참조). 그러므로 기독인의 자유는 모든 예속에서 벗어나는 자유 방임이 아니라 새로운 순종과 섬김에서 실현된다.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즉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생명 주신 분에 순종하고 섬기는 새로운 섬김 및 순종 관계에서 해명된다. 명령법은 인간의 선한 뜻이나 능력이 아니라 선물 받은 자유와 그 선물을 주신 새로운 주인에게 호소한다. 그러므로 보른캄이 올바르게 요약했듯이, "세례는 수세자에게 새 생명을 '증정(贈呈)하는 것'(Zueignung)이요, 새 생명이란 세례를 '제 것으로 삼는 것'(Aneignung)이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고전 6:11). 그래서 수세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 칭의자로서 동시에 부정(不淨)하게 살 수 없다(고전 6:15. 19). 위에 언급된 것들을 요약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은 윤리를 세례와 결합할 뿐 아니라 세례를 윤리와 관련시킨다.

둘째로 고려되어야 하는 성례는 성찬이다.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儀式)인 것처럼 성찬도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례이다. 두 성례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세례는 수세자가 단번에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유(唯)일회적인 의식인 반면에 성찬은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례이다. 곧 성찬은 단번에 선사되는 윤리의 기초라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삶 영위시 지속적으로 새롭게 현실화되는 기초이다. 이러한 성찬의 윤리적 관련 의미는 고린도전서 10-11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성찬에서는 수세자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communio)의 문제이다. 성찬시 받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koinwniva)"이며, 함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koinwniva)"이다(고전 10:16).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은 바울이 전해 받은 성찬 전승을 해석한 유일한 주석이다. 전승에서와는 달리 바울은 이 성찬 해설에서 '잔' 말씀을 '떡' 말씀 앞에 놓았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이유는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는 바로 다음 구절에 나타난다. 여기서 '떡' 말씀이 '잔' 말씀 다음에 언급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한 몸됨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성찬시 역사적으로 이해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고전 10:23). 기독교적인 자유는 무제한적인 또 "무절제한 자기 실현에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관계 개념"이다. 즉 기독교인의 자유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결정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자기의 만찬"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고전 11: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자기분여'(自己分與)인 성찬은 교회의 한 몸됨과 덕 세움 그리고 한 지체의 다른 지체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고려하는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약하면, 세례와 성찬, 곧 기독교 성례는 바울 윤리의 또 다른 한 기초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렇기는 하나 세례와 성찬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거룩한 예식이라는 점에서 바울 윤리의 성례전적인 기초는 크게는 바울 윤리의 기독론적인 기초와 분리될 수 없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6. 바울 윤리의 성령론적·은사적 기초


바울 윤리의 성령론적인 기초 역시도 성례전적인 기초처럼 그 기독론적인 기초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권세인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며 "주님의 영"(고후 3:17)이다. 즉 성령은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 자신의 종말론적인 현재하심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성령이 특별한 경우 기적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 안에서 가끔 나타난다는 열광주의 사상에 반대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에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이 성령의 사역이며 "영적인 예배"(롬 12:1)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어떤 황홀경에서 영적인 활동을 과대 평가하는 것에 대해 눈에 띄지 않는 성령의 은사의 가치,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됨, 그리고 그 은사의 다양성과 교회를 향한 방향 설정을 강조"한다. 성령이 어떤 비상(非常)한 경우나 예외적인 상황에서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관여한다면 이로써 성령은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의 한 기초가 된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6장에서 8장까지의 맥락에서 이 주제를 살펴보면,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와 운명 공동체가 된 그리스도인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롬 6:4)은 곧 "영의 새로움 가운데서 섬기는 것"(롬 7:6)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수세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며(롬 8:2), 영을 좇아 행하는 자는 성령의 주도 하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롬 8:4).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므로(고전 3:16) 성령은 믿는 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주인이다. 성령을 통해서 수세자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며"(롬 15:16),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다(고후 3:18). 이로써 수세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롬 8:15-16). 즉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롬 8:14). 이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는 성령은 어떤 강제적인 권세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품행은 "육체의 일"(갈 5:19-21 참조)이 아니라 소위 '덕 목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갈 5:22-23 참조)이다. 물론 "성령의 열매"란 성령에 의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어떤 자연적인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22절에서 바울은 "너희의 열매"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와 "너희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행위에 자신을 참여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자신을 움직여 순종하고 따를 때 변증법적인 합일(合一)에 이르게 된다.

바울의 경우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은사 역시도 성령과 비슷하게 바울 윤리의 기초로 언급될 수 있다. 성령과 은사는 바울의 경우 서로 공속되어 있다(롬 1:11; 고전 12:1. 4. 9. 11; 14:1 등 참조). 그래서 바울은 때때로 "영의 선물"과 "은혜의 선물"을 바꾸어 사용한다. 왜냐하면 '은사'(cavrisma)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며(고전 7:7), 성령에 의해 각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고전 12:4). 각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는 "은혜의 구체적인 표현"이기에 은사는 인간 스스로의 어떤 가능성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는 인간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선물(donativum)이다. 여기서 '성령의 선물'인 은사와 '성령의 열매'를 비교해보면, 양자는 모두 성령에 의해 유래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전자가 "은혜대로"(롬 12:6),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참조. 엡 4:7),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성령의 "뜻대로"(고전 12:11) 각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것인 반면, 후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된 것이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어떤 것이 아니지만 '성령의 열매'는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게다가 은혜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개인적인 은사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곧 "은사는 개인의 자기 표현이나 자기 실현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다"(고전 14:3-5. 17. 26). 각 그리스도인은 선물 받은 이 은사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하나가 되어 섬겨야 한다(롬 12:3-13 참조). 이로써 바울의 경우 은사는 바울의 성령론과 교회론, 기독론과 윤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령론적·은사적론인 관점에서도 바울 윤리의 기초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7. 바울 윤리의 종말론적 기초


예수의 경우 자신과 함께 시작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아직 밖에 있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변증법적인 긴장으로부터 윤리와 종말론의 관계는 임박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기대가 사라졌을 때 윤리가 비로소 시작되는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동시에 공존하면서 서로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공속(共屬) 관계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경우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는 종말론적인 윤리요, 종말론은 윤리적인 종말론이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의 경우처럼 종말론에 있어서 그 현재적인 차원과 미래적인 차원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정말로 세대 교체의 시작이요 현재적 구원을 가지고 오는 종말론적인 사건의 실재"로 이해하였다(고후 5:17; 6:2 참조). 동시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기독인의 삶이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삶이며 소망을 가진 삶으로 서술한다(갈 5:5; 살전 4:13-17; 롬 8:19-23 참조). 그러니까 바울의 윤리는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 뿐 아니라 현재의 그리스도 사건 안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현재적인 구원이 미래적 구원의 근거가 되며(롬 5:8-11),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적인 구원이 현재의 삶의 기초가 된다(고후 4:16-18). 이처럼 바울의 경우 현재적인 구원과 미래적인 구원은 양자 택일적인 대립 관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미리 선취(先取)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해질 미래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자신의 행동과 삶을 일치해야 하는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 안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 윤리는 종말론적인 기초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것도 바울 윤리의 다른 기초들처럼 인간론적이 아니라 기독론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울 윤리의 종말론적인 기초는 바울의 종말론적인 세상관 내지는 세상 이해라는 측면에서 해명될 수 있다. 바울의 세상관은 헬라 세계 철학자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라 유대 묵시 문학의 그것과도 다른 점이 있다. 즉 세상에서 자아(自我)로 방향을 돌리는 에픽테투스(Epiktet)와 달리 바울은 인간의 자유를 자아 밖에서(extra nos) 찾으며, 유대 묵시와 다르게 이미 일어난 세대 교체(Äonenwende)와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고 현재 세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음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책임을 함께 언급한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세상 이해는 혼인 문제에 대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고린도전서 7장의 권고 맥락 안에서 "때"(kairov")와 "세상"(kovsmo")을 언급하는 단락(고전 7:29-31)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정해져 있는 '때'는 점점 단축되고 이 세상의 존재는 소멸하도록 정해져 있는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바울의 경우 기본적으로 미래적인 종말론에 의해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종말 이전의 것이 제거되거나 무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진술은 권고의 맥락 안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예. 고린도전서 7장이나 로마서 12-13장). 그것도 이 단락에서 종말론이 기독론으로부터 해석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의 종말론적 진술에 이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32절 하반절)라는 구절이 뒤따른다. 여기서 '세상의 일'(taV tou' kosmou')은 "주의 일"(tav tou' kurivou)에 의해 상대화되어 있으며, 종말론은 윤리 뿐 아니라 기독론과도 관련되어 있다. 또 로마서에서 권면 단락(롬 12:1-15:13)의 첫 부분인 일반 권고(롬 12:1-13:14)의 종결 요약 단락(롬 13:11-14)에서도 고린도전서 7장 29-32절 단락의 경우와 동일한 구조를 보여 준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고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롬 13:11하-12상). 그러므로(ou^n) 어두움의 일(세상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토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롬 13:12하-13절).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가능하다(롬 13:14). 여기서도 종말론-윤리-기독론의 구조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윤리는 "종말론에 대한 보충"이 아니라 "종말론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처럼 바울 역시도 이 세상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던 열광주의자(Enthusiast)는 아니었다. 바울의 경우 윤리는 종말론이 후퇴하거나 현실적인 관심이 우세할 때 나타난 "비상 해결책이나 타협 또는 세상에 순응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한 세계가 시작되었으며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승리와 하나님의 홀로 다스리심을 겨냥한다는 것의 발효(發效)이며 표현"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을 윤리와 관련해서 고려해 본다면 그것은 "묵시적인 정적(靜寂)주의(Quietismus)"나 "세상 도피적인 열광주의(Enthusiasmus)"가 아니라 윤리를 자극하여 유발하는 중요한 한 동인(動因)이다.



8. 나가는 말


위에서 살펴본 대로 바울 윤리의 근거는 기독론, 성례론, 성령론·은사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다양하게 댈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바울 윤리의 동인들은 바울 신학의 변천이나 발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교회 상황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은 어떤 '문학적인 구성'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세웠거나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신앙 공동체에 실제로 보낸 '상황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적 권면의 다양한 동기(動機)들 중 한 요소를 절대화하여 그 동기의 이름 아래에서만 바울 윤리의 기초를 설명하려 하거나 다른 동인(動因)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나 바울의 경우 이러한 다양한 윤리의 근거들이 나열식으로 아무런 맥락 없이 놓여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상호 의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바울의 경우 성례는 그리스도 사건의 현재화이여, 성령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종말론적인 현재하심이고,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의 변증법적인 긴장 역시도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 선포의 공존에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을 가능하게 하고 지지(支持)하는 바울 윤리의 토대이다. 다시 말하면 "윤리 지침에 대한 모든 근거 대기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하시고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해명이외 다른 것이 아니며, 그가 속해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입증하는 것이며 주님의 부활 이후 살고 있는,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공동체에 대한 그분의 신실함을 알리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권고의 기본적인 토대는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행위이다. 그것이 바울 윤리의 기초요 토대이며, 전제요 발단이며, 동기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