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바울의 生涯와 神學

바울의 영감인식론과 피스티스의 함의

好學 2010. 6. 27. 01:38

 

바울의 영감인식론과 피스티스의 함의


유승원


1. 들어가는 말

종교적 의미로서의 ‘피스티스’(pi,stij)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신약의 특성이다. 유대에 기원한 당시의 어떤 종파나 운동도 믿음을 요구하는 일을 신약성서만큼 그 핵심으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피스티스’는 신약성서가 주창하는 종교적 태도와 행위를 대표하는 개념이라 해도 무리함이 없다. 특히 루터가 ‘솔라 피데’(sola fide)를 제창한 이후 개신교의 슬로건이 되다시피 한 용어가 ‘믿음’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약성서 내에서 획일적인 의미를 갖고 사용되지는 않는다. ‘피스티스’는 다양한 개념과 뉘앙스를 담고 있는 용어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입는 것이라면 그 ‘구원하는 믿음’은 다양한 뉘앙스의 여러 개념 중에서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그에 부합하는 인간의 영적 현상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신약적 믿음의 특성과 의미를 조명하면서 바울의 영감인식론이 그러한 믿음의 개념에 어떤 이해를 더해주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1)

2. 신약성서의 ‘피스티스’ 개념

‘피스티스’(명사형) 또는 ‘피스튜오’(동사형)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갖고 있는 뉘앙스를 인위적이나마 몇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다.

(1)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경우는 주어진 메시지를 수용하여 지적인 동의를 보이는 마음의 상태로 바울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개념이다(갈 3:6; 고전 15:2; 롬 10:9-10).

(2) 반면에 갈라디아서 5:22에 나열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가 ‘피스티스’인데 개역성경에서 ‘충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지속적인 신실함(faithfulness)과 순종의 의미가 강한 경우이다(롬 1:5; 16:26; 히 11).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데 있어서도 같은 단어인 ‘피스티스’가 사용된다(고전 1:9; 롬 3:3).

(3) 그런가 하면 기적과 능력을 일으키는 강한 신념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기적의 능력을 누리는데 필요한 마음의 자세로서 자주 언급되고(막 9:23-24; 11:22-24)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피스티스’를 사용한다(고전 13:13; 살전 1:3). 물론 여기서 강한 신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trust)를 암시한다.

(4) 그러다 보니 ‘피스티스’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삶의 총체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피스티스의 풍성’(고후 8:7)이나 ‘피스티스의 증가’(고후 8:7) 또는 ‘피스티스의 부족함’(살전 3:10) 등의 표현은 ‘피스티스’에서 시작되어 자라고 발전되어 열매를 맺는 쪽으로 진행하는 역동적인 삶의 현상으로 보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을 주로 ‘믿는 자들’(pisteu,wntej)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스펙트럼의 다양한 뉘앙스는 특정 명제나 메시지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서의 ‘믿음’(belief)과 인격적 관계의 상태로서의 ‘신실함’(faithfulness), 두 가지 개념을(위의 1번과 2번) 양극으로 하고 있다. ‘피스티스’의 상태를 담지하는 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 전자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마음의 동조 상태(mental-intellectual assent)를 묘사하고 후자는 대상에게 ‘신뢰감’(trustworthiness)을 주는 주체의 긍정적 자세와 행위의 총체이다.

기적과 능력을 수반하는 신념으로서의 ‘피스티스’(위의 3번)는 그러한 현상의 원천인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의심 없는 마음의 확신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메시지의 수용인 지적인 동의로서의 ‘피스티스’를 시작으로 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에 충성하는 ‘신실함’(faithfulness)의 ‘피스티스’로 살고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피스튜온테스’(위의 4번)로 정의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신약의 피스티스가 갖는 종교적 독특함을 규정하는 것은 첫 번째 개념이다. ‘지적인 동의’ 또는 ‘인식’으로서의 믿음의 개념은 구약에서 부각되어 드러나지 않는다.2) 구약에서 믿음의 개념을 담은 동사로서 !ma의 Hiph‘il 형인 !ymah은 「70인역」에서 거의 다 신약에서 ‘믿는다’는 뜻의 동사로 쓰인 pisteu,w로 번역되었는데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고 있다(대하 20:20; 시 78:22; 116:10; 사 7:9 등).3) !ma의 명사형인 ‘애매트’(tma)와 ‘애무나’(hnwma)는 ‘신실함’ 또는 ‘진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이 로마서 1:17에서 인용한 하박국 2:4에서의 ‘애무나’도 문맥상으로 볼 때 ‘신실함’(faithfulness)의 뜻으로 읽혀야 한다. 따라서 구약의 믿음의 경우, 인간의 행위로서 동사 차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며 명사 차원에서는 인간 쪽의 도덕적 자질로서 ‘신실함’ 또는 ‘진실됨’을 가리킨다. 특정 명제나 사실 또는 메시지에 대한 지적인 동조로서의 믿음은 구약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고 이러한 특성은 유대교에서도 계속 이어져 중세에 가서야 비로소 신약적 특성을 지닌 신조(信條)에 대한 지적인 수용의 의미로서 ‘애무나’가 사용되었다.4)


1)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

불트만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구약과 연속성을 지닌 생각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순종, 신뢰, 소망, 신실 등의 개념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70인역」의 pisteu,w 자체가 결코 종교적 용어가 아니었고 신약에 와서야 종교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고 본다. 신약에서 pisteu,w에 부가된 개념들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대한 믿음(belief), 그리스도에 의해 부담된 구원에 대한 믿음, 회심이나 열심의 의미로서의 믿는 마음 등이다. 불트만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행위’, 즉 신약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강조로 설명한다.

구약에서 의인들은 (신실함과 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행위들 자체를 믿을 것이 요구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의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명약관화하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믿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다.5)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행위가 당연한 현실이었고 이슈가 되는 것은 그 안에서 발생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올바름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현상적으로 볼 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고전 1:23).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같이 곧바로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복음의 메시지로 듣는 사람들은, 특히 비유대인들에게는 우선 그것이 하나님의 행위임을 믿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불트만에 따르면 신약 시대의 이런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루신 하나님의 행위가 곧 믿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6) 여기서 요한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로고스’라 명명하게 된 사고의 유추가 추적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일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메시지를 인지적으로 믿어야 하는 일이 우선하게 된다.

2) 전환점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예수의 지상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믿을 것을 요구하면서 ‘피스티스’ 개념의 전환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유대교와 헬레니즘 세계의 어디에서도 신약적인 믿음과 동일한 개념을 찾지 못한 윌리엄 해취(William H. P. Hatch)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직후의 상황에서 종교적 의미의 ‘피스티스’ 개념의 발원지를 끄집어낸다.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에서 예루살렘에서 형성된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행하게 될 때 우리는 ‘피스티스’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는 것을 즉각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부터 명사형인 ‘피스티스’(pistis)와 동사 ‘피스튜에인’(pisteuein) 둘 다에 있어 확신이나 믿음(belief)의 개념이 신뢰의 개념을 우선하게 되기 때문이다.7)

여기서 예수의 부활 사실, 그의 메시아 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그의 재림 등의 명제 등이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주님이시며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중심을 두게 되었고, 그 믿음은 성격 상 주로 지적인 것이었다.”8)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강조했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 사건의 의미를 복음의 메시지로 선포할 때 듣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된 것은 그 메시지의 진리성에 대한 지적 동의에 입각한 진리 인식으로서의 ‘피스티스’였고 그 믿음은 회심의 통로로 정의되었다.

특히 비유대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는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의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심을 믿게 하는 일이 우선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그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이라는 점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믿게 만드는 일이 뒤따라야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이후의 문제였다.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신득의’ 논쟁의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했던 선교 메시지로서 문헌 기록의 차원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확인되는 데살로니가전서 1:9-10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믿음의 소문”(1:8)은 이러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1)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말하니 (3)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살전 1:9-10).

바울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갖고 ‘야훼’도 ‘예수’도 ‘그리스도’의 개념도 모르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사람들에게 요구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선교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믿음(belief)이었다. 그 ‘믿음’(belief)이 우선되어야 하나님을 ‘신뢰’(trust)하는 관계가 형성이 되고 그 이후에야 수용자들의 ‘신실함’(faithfulness)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즉, 지적 동의로서의 ‘피스티스’ 개념은 복음 선포자의 ‘설득’과 듣는 사람들의 ‘믿음’이 요구되는 초기 교회의 선교 상황에서 유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상황을 구성한다.9)

3.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과 ‘피스티스’

복음 선포자가 일반 대중에게 믿음(피스티스)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설득의 노력을 다하는 초기 교회의 선교 상황은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볼 때, 연사가 청중을 설득하여 ‘피스티스’를 가지게 하려는 수사학적 상황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용어인 ‘피스티스’는 사실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에서도 중심적인 개념이다. 수사학은 다름 아닌 ‘설득’의 기술이다.10) 설득이란 듣는 사람들이 화자의 말을 ‘믿게 하는’ 것이다. 즉, 설득의 목적은 청중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는 데 있다.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겨나면 그 연설(또는 談話, speech)은 성공한 것이고 그러한 연설의 과정과 효과에 대한 학문이 ‘수사학’(rhetoric)이다. 그런데 여기서 ‘설득’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에 똑같은 헬라 단어 ‘피스티스’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제임스 키니비(James Kinneavy)의 지적대로 주목할만한 점이다.

‘그리스의 수사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병렬의 위치에 두는 것은 다소 기괴하고 전혀 적합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일 것이다. 양자가 상당한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사학이 설득의 기술이며 설득이라는 헬라 단어가 ‘피스티스’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가리키는 그리스도교 용어도 ‘피스티스’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두 의미의 구성이 동일한 한 단어에 중첩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 두 가지 생각은 서로 그렇게 소원(疎遠)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암시된다.1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을 싫어했지만 철학적 진리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의 수사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12) 하지만 두 철학자 모두 인식론적 측면에서 수사학은 철학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수사학은 오직 개연성만을 달성할 수 있지 진리의 확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3) 수사학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일 뿐이라 했다.14) 플라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의견이나 개연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상 열등한 위치에 놓인 단계의 지식이었다.15)

하지만 인간이 플라톤 류의 절대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애초부터 ‘피스티스’가 그러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당대의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참된 수사학을 제시하려 했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도 인간이 존재의 절대적 본질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설득 가능한 지식을 존중하면서 ‘피스티스’를 건전한 지식의 위치에 올려놓았다.16) 그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그저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었다.17)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파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과학에 절대적 확실성의 진리를 적용하려는 이상주의를 완화하여 ‘피스티스’의 범위에서 작용하는 과학과 예술의 영역들을 허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설득”, “증명”, “믿음”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피스티스’는 설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다. ‘피스티스’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일뿐 아니라 그로 인해 “결과된 마음의 확신 상태”이기도 하다.18)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주로 설득의 수단인 ‘피스테이스’(pi,steij)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피스테이스’가 바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화자의 윤리적 호소인 ‘에토스’(h;qoj), 청중의 정서적 호소인 ‘파토스’(pa,qoj), 전달되는 내용의 논리적 호소인 ‘로고스’(lo,goj)이다. 연사가 이 세 가지 ‘피스티스’를 잘 구사하면 듣는 사람에게서 ‘피스티스’가 발생하게 되며 그때 그의 연설은 성공한 것이 된다.19) 이 세 가지 ‘피스티스’에 대한 설명의 서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연사는 자신이 신뢰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이는 방식으로 말을 할 때 도덕적 특성에 의한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에토스’를 말하는 것 --역주].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그리고 더 기꺼이 신뢰감을 갖게 되기(pisteu,omen) 때문이다 … 말하자면 도덕적 특성은 가장 효과적인 증명의 수단을 구성한다(e;cei pi,stin to. h=qoj). 청중이 연사의 말에 의해 감정이 고조될 때 그는 청자들을 수단으로 해서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파토스’를 말한다 --역주]. 왜냐하면 기쁨이나 슬픔, 사랑이나 증오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 우리가 전달하는 판단들에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우리가 각 개별 주제에 적용이 되는 설득의 수단들로부터 ‘참’이나 ‘참처럼 보이는 것’을 설정할 때, 설득은 연설 내용 자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로고스’를 가리킨다 --역주](dia. de. tw/n lo,gwn pisteu,ousin).20)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스티스’를 “증명(proof)” 또는 “논쟁(argument)”으로 번역하는 고전적 관행을 접어둔다면, ‘파토스’, ‘에토스’ 또는 ‘로고스’의 형태로 수사학적 상황 안에 내재해 있던 ‘피스티스’가 언어행위를 통해 듣는 사람 마음 속의 ‘피스티스’로 전이되는 것이 수사학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교회의 선교 현장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듣는 이들의 지적 동의인 ‘피스티스’를 이끌어내는 설득의 수사학적 상황이었다.


4, 신약과 수사학적 피스티스

신약의 선교 활동이 수사학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누가가 그리고 있는 바울의 선교에서는 잦은 논쟁이 있었고 그러한 정황 속에서 바울의 주 역할은 청중의 설득을 통해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evpei,sqhsan = persuaded]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행 17:2-4, 새번역).

바울의 선교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설득과 듣는 사람들의 믿음 유발을 목적으로 한 전형적인 고대의 수사학적 상황이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의 로마 체류 상황도 다를 바 없다. 여기서도 그의 선교는 설득과 수용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바울과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그날이 되자 많은 사람을 데리고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잘 설명하여 증언하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려고[pei,qwn] 힘썼다. 어떤 이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evvei,qonto], 어떤 이들은 믿지 않았다[hvpi,stooun](행 28:23-24, 새번역).

선교의 상황이 수사학적 상황이라면 선교의 상황이 목적하는 ‘믿음’에 구약과 유대교에서 보지 못하던 그레코-로마의 수사학적 함의가 전면에 나타나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당시의 수사학적 ‘피스티스’의 개념과 결합되었다는 것이 대단하게 특별한 주장도 아닐 것이다. 키니비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믿음’ 또는 ‘믿다’는 개념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이 사실을 검증하려 했다. 그는 신약에 등장하는 동사 pisteu,w와 명사 pi,stij가 포함된 문장 491개를 모두 정리하여 그 내용과 정황이 수사학적인 ‘설득’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이를 위해서 살펴 본 수사학적 상황의 구성요소들은 여섯 가지이다.

회심 - 회심이나 회심 상태를 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의 여부.

확실성 - 확실한 지식과 비교되는 의견이나 개연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의 여부.

윤리적 호소 - 에토스에 입각한 설득의 노력.

정서적 호소 - 파토스에 입각한 설득의 노력.

논리적 호소 - 로고스에 입각한 설득의 노력.

외적 요인 - 고문, 맹세, 선물이나 보상 등의 언어 외적 수단을 활용한 설득의 노력.

이 여섯 가지가 해당 문장 491개에 나타난 정도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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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도                      백분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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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334                         68
확실성        135                         27
윤리           281                         57
정서           301                         61
논리           229                         47
외적           176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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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결과가 말해주는 바는 신약성서의 ‘믿음’ 또는 ‘믿다’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들 중 50 퍼센트 이상의 경우에 있어 회심의 요소와 더불어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등의 수사학적 설득의 요소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개념의 상당 부분이 설득이라는 수사학적 개념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22) 분명히 신약의 ‘피스티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제자들이 대면한 복음 선교라는 상황 속에서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의미에서의 ‘피스티스’ 개념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것이 구약과 유대교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지적 동의’로서의 그리스도교 믿음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인간의 충성과 신실’ 등으로 대표되는 ‘인격적 관계’로서의 믿음 개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피스티스’의 개념을 유대적 관점에서 그레코-로마적 관점으로 완전하게 전환시킨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설명일까?


5. 피스티스와 영감인식론

신약에서 수사학적 설득과 그에 따른 지적 동의를 가장 크게 부각시킨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다. 그의 ‘이신득의’ 논쟁은 행위와 대립되는 ‘마음의 믿음’을 종교적 회심의 정수(精髓)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자주 암송되어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활용되는 로마서 10:9-10은 다름 아닌 수사학적 개념이면서 ‘지적 동의’로 이해되는 믿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주장을 큰 목소리로 천명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설득된 승복]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명제에 대한 지적 동의]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수사학적 믿음이 구원한다].” 이런 구절만 보면 바울은 구약-유대교적 믿음의 요소를 완전히 포기하고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믿음의 개념에 함몰 당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읊?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수사학적 인식론과 대립하면서 구성하여 기술한 영감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다.


1) 고린도의 수사학적 소피아

마침 믿음과 수사학의 관계가 표면에 부각되어 있는 문헌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들이다. 고린도 공동체는 모종의 “말의 지혜”와 관련된 혼동을 겪고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언변과 지혜의 문제에 독특한 방법으로 저항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의 유일성과 그것을 ‘믿게’ 되는데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고전 1:17; 2:1-5). 바울이 고린도전서 1:17-2:5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지혜’(sofi,a)는 주로 말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이 사명을 입은 복음의 선포가 “말의 지혜”에 의존한 것이 아님을 굳이 강조하고 있다(1:17). 1:20의 수사학적 반어법에서는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라는 질문을 통해 고린도의 ‘지혜’ 상황이 말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고린도후서 10:5에서 문제가 된 ‘로기스모스’(logismo,j 개역 성경에서는 “이론”으로 번역)도 고린도 공동체의 혼란이 분명히 수사학적 말의 지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수사학적 언어 능력에 대해 거의 신경질적이라 할만큼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후 10:10; 11:3-6). 그는 고린도 공동체를 바울의 가르침과 권위를 거스리는 방향으로 유도해 간 이들의 능변에 마음이 상해 있었으며, 그래서 11:6에서 저들의 ‘수사학적 설득력’을 자신의 ‘진리 인식의 정통성’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23)

 

여기에다가 고린도 공동체의 분열의 한 축으로 언급되는 아볼로를(고전 1:12) 사도행전에서는 수사학적 전통이 강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행 18:24). 그레코-로마 세계의 중요한 수사학 이론가들은 대부분 지혜를 수사학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을 시켰고 실제로 수사학을 ‘소피아’라 부르기도 했다.24)


2) 수사학의 인식론적 전제

고린도의 ‘소피아’가 모종의 언어 표현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2:1-5이다. 1절에서 그의 선포가 저들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치에 있는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로 나타난 구절은 역시 고린도에서의 지혜의 개념이 언변의 탁월함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2:4에서 바울의 말은 그의 케리그마인데, 케리그마는 ‘설득하려는 지혜의 말’로(evn peiqoi/ sofi,aj lo,goij)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바울이 자신의 케리그마를 지혜의 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2:5). 여기서 바울은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이 전제하는 인식론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바울 자신도 말의 지혜에 능한 다른 연사들과 마찬가지로 ‘피스티스’를 발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피스티스’가 수사학적 기술로 인해 생겨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 한가지는 바울이 4절과 5절에서 언급하는 ‘뒤나미스’(du,namij, 능력)의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청중에게 믿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du,namij로(재능, 능력) 정의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은 “일종의 논증법의 한 부분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느 특정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단지 논쟁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뒤나미스’이기” 때문이다.25) “그래서 수사학은 가능한 설득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뒤나미스’로 정의될 수 있다.”26)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리고 그의 체계를 거의 변동 없이 전승 받은 1세기 그레코-로만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청중이 특정 주제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피스티 스’들을 잘 조직할 수 있는 ‘뒤나미스’이다.

 

반면에 바울은 뒤나미스를 하나님과 성령에게로 돌리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ouvk evn peiqo/ij sofi,aj lo,goij)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avllV evn avpodei,xei pneu,matoj kai. duna,mewj)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evn duna,mei qeou/)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바울에게는 ‘피스티스’가 수사학적 ‘뒤나미스’나 “말의 지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뒤나미스’ 안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바로 이어 이 ‘피스티스’가 인간의 마음 속에 발생하게 되는 원리를 기술한 것이 고린도전서 2:6-16이다.27)


3) 영감인식론의 내용

이 본문에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구분선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대의 관원이나(2:8), 멸망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인간의 오감(五感, 눈과 귀)이나 지성(마음)으로는 전혀 그것을 알 길이 없다고 한다(2:9). 이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 불리며 하나님의 영의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2:14).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이다(1:21, 25). 역설적인 표현을 빌자면, ‘인간 지혜의 무지’가 너무 깊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메시지가 인간적 지혜를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천치(天痴, mori,a) 같이, 또는 스캔들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1:22-23). 그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 보면 인간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3:18). 이러한 혼동의 상황에서 바울은 판별력의 역전(逆轉)을 천명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기준으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천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2:6-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에 갇힌 천치들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1:27).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모가 없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와서 그들과 복음으로 만났을 때 ‘인간의 지혜’보다는 ‘인간의 무지’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 그는 오히려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었다(2:2).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무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의 회의적 인식론은 2:10a에서 정지된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 개입에 의해 인간 무지의 상태가 유보된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필자 역, h`min de. [ga,r] avpeka,luyen o` qeo.j dia. tou/ pneu,matoj). 사본 상의 변이인 de.나 ga,r 중 어느 것이 옳은가에 상관 없이 상태 역전의 분위기는 명백하게 드러나며, 2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 h`min은 문장 내 강조의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저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도록 해 주셨다. ‘저들’의 무지와 ‘우리’의 앎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어서(2:10) ‘알고’ 있으며(2:12), 아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2:13) 그리스도의 마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2:16).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범주로 분류된 일군(一群)의 사람들이란 말이다.

‘아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는 2:15의 “신령한 자들”(oi` pneumatikoi,)로 정의된다. 이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로서 “육에 속한 사람들”과 구분이 되며 후자는 하나님의 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소위 ‘프뉴마티코이’라는 용어가 고린도 신앙 공동체 내에서 특별히 구분된 일부 특수 집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28) ‘프뉴마티코이’가 이 단락에서 “육에 속한 자”와 대조를 이루면서 정의가 되듯이, 1:18-2:16 전체에서 이분법적 인간 구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맥락에서 볼 때 1:18의 “구원을 얻는 자들”은 ‘프뉴마티코이’와, “멸망하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과 동일한 집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고(갈 6:1), 그의 편지들 여러 곳에서 믿는 자들을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롬 8:9, 14-16, 갈 3:2; 4:6, 빌 3:4, 살전 1:6; 5:19).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자들은 바로 ‘프뉴마티코이’이고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일은 필연적으로 성령(프뉴마)의 역사와 관련을 갖는다.

무지에서 인식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즉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을(2:9)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했다(2:10). 성령은 모든 것을 꿰뚫어 찾아낼 수 있고 하나님의 깊숙한 곳까지 알아낸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을 찾으실 수(evrauna,w) 있기 때문에 성령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프뉴마티코이’이고 그 성령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프뉴마티코이’의 내적 인식 과정이다. 이른바 영감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여기서 획득되는 지식은 다름 아닌 2:5의 ‘믿음’이다. 믿음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4) 영감인식론이 ‘피스티스’ 개념 이해에 주는 의미

이러한 영감인식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선교 메시지에 대한 지적 동의를 중요시하는 수사학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획득되는 방법과 그 믿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수사학이 전제하고 있는 인식론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청중들에게 발생하는 ‘피스티스’(믿음)는 연사가 ‘피스티스’들(에토스, 파토스, 로고스)을 잘 조직하는 자신의 ‘뒤나미스’에 있다고 보는 수사학적 관점이 바울에 의해 부정된다. 즉, ‘피스티스’는 인간 자신의 내적 사고과정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바울에 따르면 ‘피스티스’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 인식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구약-유대적인 사고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하나님께서 주셔야 획득되는 것이라는 지혜 전승은 바울 당대의 「솔로몬의 지혜서」, 「벤 시라」(집회서), 사해사본, 필로의 글 등에서 자주 확인된다.29) 즉, ‘피스티스’라는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내면과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다는 관계론적 신념이다. 지식과 믿음은 인간의 분석과 판단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계시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바울은 그레코-로마의 수사학적 지혜관과 구약-유대적 전통에 입각한 자신의 지혜관을 대비시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고전 2:2)을 선포할 때 그들이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은 연사가 어떤 명제를 가지고 청중을 설득하여 ‘믿음’을 갖게 하는 것과 표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는 이 ‘피스티스’는 이른바 인간의 지식도 세상의 이해도 아니다. 그것은 육신에 속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비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 2:7).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일의 지식이기 때문에(고전 2:10-11)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신성한 지식이다. 이러한 영감인식론(고전 2:6-16)의 차원에서 볼 때 신약의 독특한 개념인 ‘지적 동의’로서의 종교적 ‘피스티스’는 사실상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구약-유대적 관점의 관계적 지식임이 밝혀진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신비한 인식이다.

신약의 수사학적 믿음에서 설득을 목적한 화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청자인 인간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피스티스’는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차원에서의 인격적 신뢰가 된다.


6. 이신득의 논쟁과 피스티스


또 한가지 ‘피스티스’에 담겨진 구약-유대적 개념은 ‘신실’과 ‘순종’으로서의 실천적 의미였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는 믿음이 수사학적 ‘피스티스’의 형태로 표면화되었는데 이것은 특별히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이신득의’ 또는 ‘이신칭의’의 논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바울은 ‘행위’를 배제한 믿음만으로의 의롭게 됨을 역설하는 것 같이 보인다(갈 2:15-3:22; 롬 3:19-4:25). 그런데 같은 신약성서 내에서 야고보서는 그와 같은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대답은 단호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죽은 믿음이란 사실 믿음이 아니란 말이다. 순종의 실천이 수반된 ‘신실함’이 없으면 그것은 전혀 ‘피스티스’가 아니란 말이다.

구약적 의미에서의 ‘애무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위와 무관한 ‘피스티스’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야유를 보낸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30)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18-20). 그래서 표면상으로 볼 때 바울의 서신에 있는 내용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론을 발언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24).

이것은 신약 내에서 발생하는 ‘믿음’ 개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이다.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믿음이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피스티스’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에 대한 인간 마음의 지적 동의인가? 아니면 구약적 ‘애무나’의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 그분과의 지속적 관계 안에 머무는 ‘신실함’으로서의 ‘피스티스’가 구원하는 믿음인가? 야고보는 분명하게 후자가 참 믿음이며 이렇게 행위가 뒷받침되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밝혔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의 한계상 별도의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31) 하지만 분명히 바울이 야고보서의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피스티스’를 구원하는 믿음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이다. 하지만 그의 편지들 어디에서도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는 자신의 그리스도인들이 행위상 문제를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강력하게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원리를 전투적으로 주창하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마치 앞에서 진행한 논쟁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구원에 있어 행위의 필수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고린도전서 6:9-10도 참고하라)?

믿음으로 구원을 입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려고 계속 죄 가운데서 살 것인가? 바울은 단호하다. 그런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메 게노이토!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바울의 사역은 수사학적 피스티스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그의 목적지는 “이방인 중에서 믿어서 순종케” 하는 데 위치해 있다(롬 1:5; 15:18). 바울은 실천이 수반되지 않아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믿음은 상상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그의 배경이 그렇듯이 구약-유대적 개념의 ‘충성’과 ‘신실’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7. 맺는 말

확실히 신약의 ‘믿음’에는 구약-유대교 전통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부분이 첨가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일을 지적으로 동의하여 수용하는 수사학적 개념의 ‘피스티스’이다. 이러한 수사학적 함의를 지닌 ‘피스티스’가 신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선교’(missionary preaching)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전하는 선교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의 설득을 목적으로 하며 그것을 들어 동조할 것을 요구받는 청자들에게는 당연히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함의를 담은 ‘피스티스’가 요구된다.

하나님이 지적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관계의 대상으로 ‘당연시된 전제’였던 유대의 경우 하나님의 존재 인정이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이 별반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우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을 전해주어야 하는 선교 현장에서 그 내용에 ‘설득되어 지적 동의를 보여주는’ 일차적 (지적 동의의)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시작도 할 수가 없다(이것은 물론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설득해야 하는 유대인 선교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신약의 ‘피스티스’가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사학적 ‘피스티스’의 요소를 담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역사적 정황이 있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 상황에서 첨가된 수사학적 개념의 ‘피스티스’가 구약-유대적 의미의 ‘신뢰’의 관계와 ‘순종’ 및 ‘신실’을 포함하는 ‘애무나’를 대체해 버린 것은 아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복음 선포자들이 의도했던 믿음은 수사학적 상황에서 시작되지만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순종하는 실천의 신실함으로 불연속성 없이 일체를 구성하며 이어진다. 굳이 분석을 위해 양자의 구분을 강제한다면 수사학적 믿음은 총체적 의미의 ‘피스티스’라는 긴 터널의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이를 긴 터널의 초입이라고나 할까? 터널 저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 터널에 진입해야 하지만 그 터널을 다 빠져나가지 않으면 들어온 의미가 없어진다. 시작하는 수사학적 믿음은 터널의 진입이라 보고 저쪽 출구까지의 나머지 터널은 ‘신실’[faithfulness]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도의 두 개 터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입구와 출입구는 하나로 이어진 연속체이다. 진입하여 그 길을 계속 가다보면 결국 터널을 빠져나가게 된다. 그 터널에 들어가서 통과하는 과정 전체를 신약의 ‘믿음’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러한 구약-유대적 개념은 신약시대에서 이어지는 선교의 상황이 수사학적 ‘피스티스’를 이슈로 표면에 부각시키는 이유로 해서 신약성서의 ‘믿음’ 이야기의 표면 아래로 잠수한다. 하지만 본고의 도입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개념들은 다양한 뉘앙스로 엄연히 존재한다. 수사학적 ‘피스티스’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이해되던 바울의 경우에조차 영감인식론을 통해 ‘믿음’이란 인식의 관계적 특성을 밝힐 수 있었고 ‘이신득의’ 논쟁의 이면에 담겨진 ‘신실함’(faithfulness)의 전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명제에 대해 심각한 제고와 묵상이 요구될 것이다. 오도(誤導)된 ‘이신칭의’ 교의가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1) 영감인식론(靈感認識論)이란 표현은 필자가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사용한 신조어(新造語)이다. 영문 표현은 pneumatic epistemology이고 바울의 고린도전서 2:6-16에 담겨진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필자의 학위논문제목은 Paul's Pneumatic Epistemology: Its Significance in His Letters(Ph.D. Dissertation, Duke University, 1998)이고 그 주요부분을 정리하여 “바울의 영감인식론과 고린도의 수사학: 진리인식으로서의 믿음에 이르는 길”로 「기독교사상논단」(1999, 창간호)에 발표한 바 있다. 본고에서는 그 내용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이것이 신약의 ‘믿음’을 정의하는데 어떻게 일조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D. M. Baillie는 신약적 의미의 ‘믿음’을 구약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구약성서는 ‘믿음’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즉, 구약에는 적절한 차원에서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없다”(Faith in God and Its Christian Consummation: The Kerr Lectures for 1926 [Edinburgh: T. and T. Clark, 1927], 5). 그래서 O. Michel은 “그리스도교가 독특한 ‘믿음’ 사건”이라고 했다(“Faith,” i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1).

3) E. C. Blackman, “Faith,” in The Interpreted Dictionary of the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62), 222.

4) 성서와 탈무드에서 ‘애무나’와 동의어로 쓰이던 ‘비타혼’(1AxJB)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믿음의 ‘신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애무나’가 새로 등장한 ‘~을 믿음’(belief that)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때 전용되었다. 다원의 종교 속에서 유대교의 위치를 변증해야하는 상황이 만들어낸 현상이었을 것이다. Louis Jacobs, Faith (London: Valentine, Mitchell, 1968), 12-13.

5) Rudolf Bultmann, “pisteu,w, etc,”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VI, ed. Gerhard Kittel, trans. and ed. in English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64-1976), 215.

6) Ibid., 215.

7) William Henry Paine Hatch, The Pauline Idea of Faith in Its Relation to Jewish and Helllenistic Religion, Harvard Theological Studies II (Cambridge, Mass.: Harvard Univesity Press, 1917; reprint, New York: Kraus Reprint Co., 1969), 26-27.

8) Ibid., 28.

9)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이 살던 시대는 사회의 유력자들이 수사학의 교육으로 교양과 능력을 삼던 시대였다. 능변은 대중을 장악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 모으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주요 도시국가에 도착한 정치인들이나 유력자들은 그들의 연설에 의해 시민들의 평가를 받았다. 바울 같은 순회 전도자가 유사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높고 그들의 복음 선포는 수사학적 상황으로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수사학적 관행과 그 속에서의 바울에게 향했던 대중의 기대에 대해서는 Bruce W. Winter, Philo and Paul among the Sophis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116-144; E. A. Judge, “The Early Christians as a Scholastic Community,” Journal of Religious History (1960-1961): 25 등을 보라.

10) George A. Kennedy, Classical Rhetoric and Its Christian and Secular Tradition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0), 4.

11) James L. Kinneavy, Greek Rhetorical Origins of Christian Faith: An Inquir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3.

12) Plato, Phaedures 275e-277c를 보라.

13) Plato, Phaedrus 267a. Aristotle, Art of Rhetoric II 24.11.

14) Plato, Phaedrus 271a; Gorgias 452d-453a.

15) Plato, Gorgias 452d, 454c, 459a 등. 불트만이 키텔의 신약신학 사전에서 공화국 VI 511d-e에 나타난 플라톤의 지식관을 잘 요약 설명해 주고 있다(“pisteu,w kt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I, trans. Geoffrey W. Bromiley [Wm. B. Eerdmans, 1968], fn 19).

16) Isocrates, Antidosis 271; Against Callimachus 25, 30, 46. Trapeziticus 11, 19, 44; To Archidamus 20; Helen 20, 22; Panegyricus 110; Antidosis 125, 256, 278, 280. 이소크라테스가 ‘피스티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예들에 대해서는 James L. Kinneavy의 Greek Rhetorical Origins of Christian Faith: An Inquir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37을 보라.

17) Isocrartes, Antidosis 62; Against the Sophists 11, 14, 18.

18) Kinneavy, Greek Rhetorical Origins of Christian Faith, 33.

19) Aristotle, Rhetoric I.2.4-6.

20) Aristotle, Rhetoric I.2.4-6.

21) 이것은 키니비의 “표 8”에서 중요 부분만 추출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의 Greek Rhetorical Origins of Christian Faith, 132-133을 보라.

22) Ibid., 143.

23) 바울의 고린도후서 10:5-6은 창세기 11:4에 대한 알레고리인 필로의 언어의 혼돈에 대하여 128-131과 상당한 정도의 용어 및 개념적 친밀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필로는 헬라세계의 수사학적 사변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바울도 비슷한 용어를 동원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 학자인 필로와 같은 생각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바울의 영감인식론과 고린도의 수사학,” 「기독교사상논단」 창간호(1999), 67-68을 참고하라.

24) 이를 위해서는 Ibid., 69-70을 참고하라.

25) Rhetoric I.2.7.

26) Rhetoric I.2.2. 이점은 이소크라테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철학” 또는 “du,namij”라 불렀다(Antidosis 50).

27) 전통적으로 이 단락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가르치는 초기 기독교의 교의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Bultmann이 이 구절에 영지주의의 신화가 담겨 있다는 주장을 한 이후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정설처럼 통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주장을 구체화한 대표적인 글이 Ulrich Wilckens의 Weisheit und Torheit: Eine exegetisch-relig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zu 1 Kor. 1 und 2 (Tübingen: J. C. B. Mohr, 1959)이다. Wilckens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이 영지주의자인 자신의 적들과의 논쟁 중 그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과정에서 부지중(不知中)에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이 단락에 옮겨놓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2:6-16은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Wilckens 자신이 이러한 무리한 주장을 철회하고 1979년의 논문, “Zu 1 Kor 2,1-16”에서는 이 단락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독특한 방식의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라고 수정 언급을 한 바 있다. 고린도 전서 2:6-16이 담고 있는 사상은 영지주의가 아니고 헬라적 유대교의 것이라는 점은 Birger Albert Pearson의 The Pneumatikos-Psychikos Terminology in 1 Corinthians: A Study in the Theology of the Corinthian Opponents of Paul and Its Relation to Gnosticism, SBL Dissertation Series 12 (Missoula: SBL, 1973)에 의해 상세하게 밝혀졌다. 영지주의자들이 바울의 글을 선호하고 그들이 이 본문을 종종 인용했던 것은 바울의 성령론이 영지주의에 부합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야지, 바울 자신이 영지주의와의 싸움 속에서 고린도 전서를 썼다는 것은 현존하는 증거상 무리한 주장이다. 후대의 영지주의 문헌들이, 특히 발렌티니안 문서들이 어떻게 바울을 활용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Elaine Pages, The Gnostic Paul: Gnostic Exegesis of the Pauline Letters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75)를 읽으라.

28) 혹자들은 pneumatikoi,를 6절의 te,leioi와 동일시하며, 이것들이 고린도에서 문제가 되었던 한 패거리들이 스스로를 명하던 용어들로 생각한다. Hans Conzelmann, 1 Corinthians, trans. by James W. Leitch (Philadelphia: Fortress, 1975), 65; 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7), 102. 하지만 te,leioj는 도덕적-행위상의 범주를 정의한 용어이고, pneumatiko.j는 일군의 사람들의 위치(status)를 정의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29) 여기 바울의 관계론적 인식론과 유사한 당대의 문헌 몇을 살펴보자. “…하느님은 바로 지혜의 인도자이시며 현자들의 지도자이시다./ 우리와 우리의 하는 말이 다 그분의 손에 달렸으며/ 모든 현명함과 생활의 지혜 또한 그분께 달려있다…/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서/ 나는 드러나 있는 것은 물론 감추어진 모든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지혜서 7:15-21, 공동번역). “이 세상에 있는 일을 짐작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누가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않고/ 당신께서 하늘에서부터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고/ 누가 당신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지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가르쳐 주었으며/ 사람들을 구원해주었습니다”(지혜서 9:16-18, 공동번역). “위대하신 주님께서 뜻하신다면/ 그는 깨우침의 영검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지혜의 말씀을 두루 전할 것이며/ 주님께 감사기도를 올릴 것이다./ 그는 공정한 판단력과 올바른 지식을 얻을 것이며/ 주님의 신비를 명상할 것이다”(집회서 39:6-7, 공동번역). “당신께서 제게 주신 영에 의해/ 저는 당신을 아나이다, 오 하나님/ 당신의 성령으로 저는 당신의 놀라운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당신의 지혜의 신비 속에서/ 당신은 내게 지식을 주시며/ 당신께서 내게 열어준 당신의 자비 속에서/ 당신의 능력의 샘을 여셨나이다”(1QH 12:11-13).

30)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오 안쓰로페 케네’(w- a;nqrwpe kene,)로서 이를 직역하면 “아, 빈 사람이여!”로서 ‘머리 속이 빈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다. 이렇게 신약성서의 야고보서 저자는 믿음만의 원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골이 빈 놈’이라고 악담을 했다.

31) 여기서 이 점에 대한 논의를 다 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전국 신학대학원 협의회의에서 선정하여 지원해주고 있는 필자의 연구논문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이신득의 교의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오해와 이해”에서 충분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또한 조태연, 차정식과의 공저인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찾기」(대한기독교서회, 1999)의 21장에 있는 필자의 “믿기만 하면 된다고요?”와 「복음과 상황」(2000년 1월호), 94-101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를 참고하라.


나사렛 대학교 교수(듀크 대학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