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바울의 生涯와 神學

바울의 신학에서의 복음

好學 2010. 6. 27. 01:41

 

바울의 신학에서의 복음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in the Theology of Paul," Interpretation 33 (1979): 339-350.


장흥길



"복음"이란 나사렛의 예수의 인격, 생애, 사역, 수난, 죽음, 부활 및 주 되심이 인류의 역사와 존재에 대해 지녔던 그리고 지금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나타내는 바울의 개인적인 표현 방법이다.


네 권의 정경 복음서가 형성되기 오래 전에 예수께서 어떤 일들을 하셨으며, 무슨 말씀을 하셨고, 그가 어떤 분이셨으며(who he was) 그가 무엇이었는지(what he was)에 대한 전승이 초대 교회 안에 계속된다는 사실은 오늘날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라는 전승으로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금방 알 수 없다. 또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후에 글로 작성되었을 때에 왜 "복음"으로 명명되었는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실제로 euangelion이라는 단어는 바울서신(벧전 4:17; 계 14:6 참조)을 제외하고는 복음서나 신약성경 내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글 속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대조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사용하는 euangelion이라는 단어와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용법 및 바울이 사용한 그 단어가 이후에 "복음"이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과 갖는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초의 복음서 첫 다섯 구절에 사용된 이 euangelion이라는 단어는 4복음서의 제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여기서 euangelion은 이후에 그 명사형이 사용되었던 것처럼 지금 소개되고 있는 문학 양식의 제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 1:1에서 이 단어가 "복된 소식(또는 좋은 소식; good news)"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전승에서는 마태나 누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진술을 소개하기 위해 마가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진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마태는 biblios(a book)라는 단어를 사용하며(한글개역에서는 이 단어가 생략되어 있음) 누가는 diēgēsis(이야기, a narrative accoun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제 4복음서에서 이와 비견할 만한 표현을 찾는다면 그것은 martyria(증거)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1:19). 그러나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사용된 euangelion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형태의 구원 행위에 대한 메시지- 는 이 초기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14. 15; 8:35; 10:29; 13:10; 14:9 [및 16:15] 참조). [339/340]

우리는 마가가 사용했던 것만큼 euangel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마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용어의 사용에 대한 거부는 누가복음(행 15:7; 20:24과 비교)과 요한복음에서 보다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대조는 동사 euangelizesthai를 고려해 볼 때에 보다 강화된다: 마가와 요한은 한 번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마태는 한 곳에서만 사용한다(11:5). 그러나 누가는 이 단어를 누가복음(10번)과 사도행전(15번)에서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그는 "전파"(예를 들면 kēryssein 또는 lalein)라는 포괄적인 의미로만 사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euangelion이라는 단어의 명사형과 동사형이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난다. 그 사실은 이 초기 신약성경 책에서 이 용어가 풍성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용어가 바울의 가르침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중요하다. 이처럼 바울서신에서 이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마가복음에서 euangel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한 요인이 되는가? 또는 이러한 사실이 다른 복음서 기자들로 하여금 그 용어 사용을 꺼려하게 만든 요인이 되는가?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마가복음이 주후 65년경이 되어서야 기록되었다면 이미 바울서신 대다수가 기록되어 있는 상태였을 것이고, 특히 euangelion의 명사형이 빈번히 사용되는 바울의 저작임이 확실한 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euangelion과 euangelizesthai의 두 용어를 사용한 것과 복음 전승과의 관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 신학에서의 "복음"이 갖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바울의 개념에 대한 본 고찰은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Ⅰ) euangelion/euangelizesthai 용어에 대한 바울의 용례; (Ⅱ)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 주요 특성들; (Ⅲ)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 기원과 배경.



Ⅰ. Euangelion/Euangelizesthai 용어에 대한 바울의 용례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euangelion이라는 명사를 56회 사용한다(그리고 목회 서신에서는 이 단어가 4회 등장한다). 동사 euangelizesthai는 21회 사용된다(목회서신에서는 사용되지 않음). 일반적으로 euangelion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 1:1)이 그가 살던 시대에 선포했고 서신을 통해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요약하여 표현하기 위한 표지(label)이다. [340/341]

바울은 때때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euangelion이라는 명사를 사용했다(갈 2:7; 빌 4:3. 15; 고전 9:14b. 18b; 고후 2:12; 8:18).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종 euangelizesthai라는 동사를 독립적으로 사용했다(갈 1:8f. 16; 4:13; 고전 1:17; 9:16a. b. 18; 15:2; 고후 10:16; 롬 1:15; 15:20). 그러나 대부분의 본문에서 euangelion은 바울이 전한 사도적 메시지의 내용 - 그가 설교하고, 선포하고 알리고 이야기했던 내용을 의미한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속격이 일반적으로 목적격으로 이해되는, 즉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인 "그리스도의 복음"(살전 3:2; 갈 1:7; 빌 1:27; 고전 9:12; 고후 2:12; 9:14; 10:14; 롬 15: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살후 1:8) 또는 "그의 아들의 복음"(롬 1:9)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 가운데 몇몇에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복음의 기원자이라는 미묘한 차이(nuance)를 발견하게 된다(예를 들면 롬 15:18f).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좋은 소식"(고후 4:4),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여기서 바울은 특히 그의 부활한 상태 때문에 그리스도의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종종 복음의 내용은 "믿음"(갈 1:23, 문맥상) 또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엡 3:8)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복음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다른 단어는 "말씀"(살전 1:6) 또는 "하나님의 말씀"(고후 2:17)이다. 그가 복음에 대해 논할 때에 종종 그는 이 동의어들을 사용한다(고후 4:2; 빌 1:12-14; 살전 2:1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내포하는 것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직접 빌려온 더 전통적인 용어로 표현된다(대상 17:3 [Hebr.]).

그러나 "복음"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나사렛 예수의 인격, 생애, 사역, 수난, 죽음, 부활 및 주되심이 인류의 역사와 존재에 미쳤던 그리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종합하는 뛰어난 바울의 개인적인 요약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 바로 이러한 이유도 바울이 종종 "나의 복음"(롬 2:16; 16:25), "내가 전하는 복음"(갈 2:2; 참조, 1-8. 11) 또는 "우리의 복음"(살전 1:5; 살후 2:14; 고후 4:3; 참조, 고전 15:1)에 대해서 언급한다.

비록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의 아들에 관해 선포하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감의 특수성에 대한 바울의 개인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것이지만(갈 1:16), 그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에게만 특수하거나, "내 앞서 사도였던 자들"(갈 1:17)이 가르쳤던 것과 다른 복음을 자신이 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341/342] 왜냐하면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후 15:11)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하나의 복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으며(갈 1:6)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해서는 저주를 선포했다(갈 1:8). 복음에 대한 이와 같은 진술의 이면에는 초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사도로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첫 부분(갈 1:1-2:10)과 그의 여러 서신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다른 본문들(예를 들면 고전 9:1-2; 고후 11:4-6)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복음"의 진정한 전도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바울 자신의 싸움이 숨겨져 있다.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그에게 주어진 사도 직분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메시지, 곧 "하나님의 복음"(살전 2:2. 8f; 고후 11:7; 롬 1:1; 15:16)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풍부함을 인류에게 전해 주었듯이, 이제 선포되는 복음의 대상으로서 그의 사역은 지속되고 있으며 그 복음은 그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구원의 풍부함을 선사하고 있다. 그 복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초대하며 그들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신다. 복음이 하나님 자신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은사"와 "은혜"로서의 특성을 보여 준다(고후 9:14f 참조).

확실히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했던 내용은 때때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복음"의 동의어로 사용된 단어들은 이러한 개념의 몇 가지 단면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용법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3; 참조, 15:12; 고후 1:19; 빌 1:15. 17)와 같은 선언, 또는 "십자가의 이야기"(고전 1:18, 한글 개역에서는 '도'로 옮김), "믿음의 말씀"(롬 10:8), 및 간단히 "예수"(고후 11:4)라는 표현 안에서 발견된다. 실제로 마지막에 인용된 표현은 "복음"과 "예수"와의 일치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용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 그 자체가 지닌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의 사고에 있어서 이 필수적인 요소를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바라보았으며 그 효과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바울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롬 4:25),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고전 1:30), 인류를 위해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자 노력했다. 바울은 결코 그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께서 하신 일과 말씀에 대한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 자신의 "복음"을 제시했다. [343/344]



Ⅱ.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 주요 특성들


위에 언급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말했던 다양한 형태에 대해 대략적인 검토를 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의 특성들 또는 양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음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지니는 여섯 가지 특성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우리가 살펴보게 될 첫 번째 특성은 복음의 계시적 또는 묵시적 성격이다.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는 방법이다. 로마서의 주제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데 그것은 구원 행위의 뿌리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의"(롬 1:17)가 복음 안에 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새로운 시대의 실재(reality), 종말(eschaton)의 실재(reality)를 알려주기 때문이다(엡 3:3-6 참조).

(2)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역동성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예수가 하신 사역과 말씀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리스도 사건과 그 영향을 전달해 주는 데에 보다 선명하고 덜 추상적인 방법일지라도 "복음"이라는 표현을 포함하여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것과 같은 추상적 표현들을 바울이 사용했다고 해서 복음이 지닌 이 중요한 측면, 곧 그 역동성을 가려서는 안된다. 로마서의 주제를 선포함에 있어서 바울은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시작을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dynamis theou)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복음을 단순히 구원에 대한 추상적인 메시지로 보거나 사람들이 직시하고 그것에 순복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일련의 명제들(예를 들면 "예수는 주시다")로 보지 않고 인간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오는,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인격, 사역, 수난, 죽음 및 부활을 통해 인류의 역사 속으로 폭발시키는 구원의 힘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바울의 인간적인 말로 표현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자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구속하시는" 예수(살전 1:10, 굵은 글씨는 저자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아들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며 동일한 이유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en dynamei)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다"(살전 1:5)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최초의 서신 속에서 바울은 복음과 관련된 능력이 성령 하나님 그분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더 자세한 내용은 엡 1:13 참조). 바로 이런 까닭에 그는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는(energeitai)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3)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갖는 또 하나의 특성은 선포적 관계성(kerygmatic relationship)이다. 이러한 특성은 복음이 갖는 선포적 특성을 강조하는 제1부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복음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동사들에 의해 표현될 뿐만 아니라, 복음이 바울 이전의 전승과 갖는 관계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의 내용 안에 원시적 선포의 요소들을 깊숙이 파묻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전의 어떤 전승에 대한 의존을 암시하는 언어를 사용한다("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15:1-2). 이 본문에서 주의할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한" "양식" 또는 "용어"(tini logō)에 관한 언급이다(15:2). 이것은 원시적 설교 또는 복음이 문서화되기 이전의 전승 안에서 어느 정도로 고정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깊숙이 박힌 조각 속에 나타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바울의 복음이 케뤼그마에 대해 갖는 이러한 관계성 때문에 바울은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kērygma는 (a)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전서 15:1-9에서처럼 기독교 설교의 내용(롬 16:25; 고전 1:2)을 의미하거나; (b) 선포를 하는 행위(고전 2:4; 15:14) 또는 (c) 설교자 또는 선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임무를 의미한다. Martin Kähler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예수전 연구(Leben-Jesu Forschung)의 과장된 노력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참 예수는 설교로 선포된 예수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진정 바울의 복음이 갖는 사신(使信)적 특성(Botschaftscharakter)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목적은 예수가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이래로 그를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새로운 양태에 사람들을 대면시키는 분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와 같은 선포적 측면은 위에서 언급한 복음의 역동적 특성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줄 뿐이다. 비록 수년 전에 C.H. Dodd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용에 대한 바울의 생각 속에서 설교 또는 복음 어느 하나를 제거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강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복음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가 "단번에"(롬 6:10)으로 행하셨던 그 일에 대한 회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그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내용"을 진술한다. [344/345] 이 두 측면 모두가 복음이 갖는 선포적 또는 설교적 특성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의 선포적 성격이 갖는 또 하나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바로 복음(내용으로서)과 전도(행위로서)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공적인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함의(含意)이다.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교회의 구조로서 우리는 공적인 복음 선포자들(euangelistai [이들은 복음서의 저자들에 대한 오늘의 개념 하에서 이해되는 "복음 전도자"들과 혼돈되어서는 안된다])의 등장을 간파하게 된다. 교회의 구조 안에서 이 성직이 등장하게 된 것은 부활절 신앙의 공동체적 인식 때문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는 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있어야 한다(롬 10:8-17). 고린도전서 12:8-12. 28-30 또는 로마서 12:6-8에 기록된 은사와 직분들은 점차적으로 복음 선포자(euangelistai)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엡 4:11). 그러나 이 함의(含意)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그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1) 그 안에는 구조적 공동체(또는 "교회")에 대해 복음이 갖는 논리적 우선성이 숨겨져 있다; 복음이 그 자체로서의 교회를 존재케 만드는 것이다. (2) 오직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전승의 과정 때문에 복음의 선포적 특성이 그에 대한 공동체적 믿음의 반응과 관련을 맺는다: 어느 개인 또는 공동체도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선포된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전 12:3).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본래의 "양식" 또는 "개념들"에 대해 기독교 공동체에게 상기시켰던 것이다. 바울은 그들 속에서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부여 받은 도전을 지닌 복음의 선포자, 곧 euangelistēs로서, 이미 존재하는 전승으로부터 그들을 불러내었고 이제 새롭게 등장하는 조직된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복음이 갖는 선포적 특성의 이러한 다양하면서도 서로 관련된 측면들은 복음이 지닌 또 하나의 특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4) 바울의 사고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이 갖는 특성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복음의 규범적 역할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기독교인의 행위, 교회의 감독자들, 교회론적 가르침 및 기록된 성경 자체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은 "복음(the gospel)"에 대한 바울의 다양한 사용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은 어떤 적대자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대적할 그 어떤 "다른 복음"도 존재하지 않는다(1:7). 이러한 선언은 몇몇 유대적 관습들(할례, 음식에 대한 규례 및 유대력에 있는 특정 절기들의 준수)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초대 교회의 유대화 문제의 맥락 안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345/346] 비록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대해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살전 2:8),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변형 또는 오염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이 지닌 주권(sovereignty)과 조작 불가능한 성격(unmanipulability)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바울은 인간이 그 복음을 경청하고(엡 1:13),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고후 11:4) 심지어는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살후 1:8; 롬 10:16) 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은 복음 안에서 선포된 그리스도 예수를 "믿거나" 또는 "신뢰"해야만 한다(롬 1:5. 17; 10:16). 복음을 듣는(akoē) 그들의 행위는 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순종(hypakoē)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롬 10:16-17; 1:5; 16:25). 즉, 복음은 인간에 대해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그것의 선포적 특성과 연관된 규범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복음은 그들을 불러내어 복음 자체가 선포하는 바에 상응하도록 도전한다.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관하여 바울은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한 동기(inspiration) 및 안내자(guide)로 인식한다: "너희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도록 하라: 내가 너희를 방문하거나 또는 너희와 함께 하지 못할 지라도 너희가 한 뜻으로 함께 확실히 서 있으며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해 서로 협력하여 노력한다는 소식을 내가 듣게 하라"(빌 1:27). 여기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복음 자체에 의해 지배되는 그리스도인의 통일된 증거를 보고 있다.

바울 서신 안에서 복음과 교회의 관계를 명확하게 표현한 본문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저 유명한 안디옥 사건(갈 2:11-14)을 통해 바울이 교회와 복음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교회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게바를 비판했다(2:9). 왜냐하면 게바가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정직하게 걷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14). 갈라디아서의 첫 몇 장에서 게바와 바울 각각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규범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복음의 "진리"는 심지어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의 행위까지도 측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함축된 의미는 복음이 교회의 직분자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범"이라는 단어는 그 정의상 제한, 범위 또는 한계를 의미하는 것을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특별히 그것이 율법과 복음을 두 개의 독립된 반명제로 구분하고자 했던 마르시온 이후에 이루어진 복음의 이해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때에 오히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갈라디아서의 다른 본문에서 발견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이것을 복음을 방해하고자 하는 "거짓 형제들"의 도전에 대해 보호해야만 하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2:4)의 맥락 안에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하는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해방하는 역할을 하는 복음의 기능을 올바르게 이해했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이 만든 율법주의를 강요하고자 했었던 유대화의 문제로 인해 위협받고 있었다. [346/347] 규범적인(normativie) 동시에 자유로운(liberating) 것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바울의 이해 속에서 우리는 일종의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율법주의(legalism)의 제한에 관해서는 해방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복음이 갖는 하나님을 근거로 하는 기원 때문에 규범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제공되고 있는 새로운 방식(mode)의 구원을 수용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요구를 수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바울이 게바에게 따르도록 요구했었던 "복음의 진리"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인간이 행한 오염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아이러니가 여전히 존재한다.

한편 복음은 성경 자체에 대해서도 규범적인 역할을 갖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에 관한 이러한 논의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 간주하였으며 그것을 "말씀"(살전 1:6)의 함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복음서 이전,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이전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말씀"(고후 2:17)으로 다루어왔다. 그러나 성경 -특히 신약성경- 은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역동적으로 및 선포적으로 작용한 몇 십년 이후에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 신약성경의 글들은 그 역동성과 케뤼그마의 희석된 형태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그 어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의적 공식과 견줄 수 없는 특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여전히 복음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회고, 영감된 회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도 규범으로 작용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갖고 있는 의미에서의 복음과 기록된 복음서들과의 관계가 지닌 측면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5) 바울의 복음이 지닌 또 하나의 특성은 복음의 언약적(promissory) 성격이다. 로마서 첫 서두 공식문에서 바울은 "오래 전에 성경 안에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1:2) 하나님의 복음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실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약속"과 이처럼 가깝게 관련시키는 곳은 이 본문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선포자들이 필요하다는 문맥 안에서 로마서 10장 15절의 내용 속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에 대해 기록한 이사야 52장 7절의 예언적 본문을 명백히 인용한 점을 감안할 때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로마서 4:13-21; 9:4-13 및 갈라디아서 3:14-29; 4:21-31에서 "율법"과 대비하여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하는 바울의 진술에 있어서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언약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본문들 어느 곳에서도 복음이 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명백히 제시되거나 관련을 맺는 것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347/348]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 두 개념, 곧 복음과 약속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13 및 특히 3:6 참조).

(6) 앞서 언급했던 복음의 특성, 곧 언약적 성격은 그것이 에베소서 3:6에 제시된 형태로 고려될 때에는 또 하나의 특성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갖는 보편적 성격이다. 복음의 이러한 측면은 복음을 "모든 믿는 사람, 첫째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도"(1:6)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술한 로마서의 주제 속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선포되어진 말씀 및 구원의 측면에서 믿음을 유발하고자 하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선언된다. 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간에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동일하신 주님이 모두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롬 10:12).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자들을 위한 복음에 대해 책임을 맡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할례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복음에 대한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갈 2:7). 만일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다면(2:10 참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약속과 복음과의 관계 및 바울이 비록 그리스도인 사도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전 종교적 동반자들(롬 3:1-2 참조)에 대해 고백했었던 특권, 곧 "언약들이 … 그들에게 속했다"(롬 2:11)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차별이 없다"라고 강조했다(롬 2: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인류에게 제공되는 구원의 풍성함은 유대인 및 이방인 모두에게 유효한 것이다.



Ⅲ.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 기원과 배경


앞서 살펴보았던 euangelion/euangelizesthai의 용법과 바울 신학에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에 관한 고찰은 이 용어가 사도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을 어떻게 이 용어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는가?

본 연구의 서두에서 살펴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의 euangelion/euangelizesthai의 용법에 대한 초기의 조사는 바울과는 대조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 논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자료들은 예수 자신도 이 용어 또는 euangelion에 상응하는 아람어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고 쉽게 단정할만한 것이 못된다. 이 희랍어 명사는 예수에 의해 마가복음의 다음 구절들에서 사용된다: 막 1:15; 8:35; 10:29; 13:10; 14:19; [16:15].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세 구절에 상응한 마태의 본문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더욱이 마가복음의 부록에 실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16:15)이 복음의 개념 하에서 진술되고 있지만(복음서 자체 내에 있는 하나의 주제와 일관되게) 마태복음에 나오는 지상명령은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28:18-20). [348/349] 그러므로 마가복음 13장 10절 및 14장 9절(마 24:14 및 26:13이 이 구절들에 의존하고 있다)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마가의 표현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그것이 마가의 표현이라면 더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다. Willi Marxsen은 마가가 공관복음 전승 자료 안에 euangelion이라는 개념을 소개했으며, "복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비록 직접적인 의존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가적 용법의 전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주어진 증거에 대한 적절한 해석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바울이 이 용어를 그토록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했는 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만든다.

명사 euangelion은 바울 이전에 이미 희랍 문헌과 비문에서 사용되었다. Homer의 Odyssey에서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는 상급"(14.152, 166)을 가리켰다. "좋은 소식" 또는 단순히 "소식"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는 희랍 문서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 단어가 "좋은 소식을 얻기 위하여"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칭할 때에는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 대한 보다 중요한 용법은 1899년에 최초로 출판된 소아시아 지방의 프리에네(Priene)의 달력 비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비문은 새해 첫날을 9월 23일이었던 황제 아우구스도와의 탄생일과 일치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로마의 아시아 주(州)에서 율리우스력(曆)을 사용하도록 소개하는 글의 일부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신(= 신의 아들 [divi filius]인 아우구스도)의 [탄생일]은 그로 말미암은 세상을 향한 모든 선한 소식의 시작이었다(ērxen de tō kosmō tōn di' autou euangeli [ōn hē genethlios] tou theou). 여기에서는 복수 euangelia의 신탁적인(beneficial), 심지어는 신성한 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당대에 euangelion의 용법에 관한 상당한 희랍적인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은 euangelion에 대한 바울적 용법을 전부 이 배경 하에서만 설명하는 일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euangelizesthai라는 용어가 희랍어 구약성경에서 보다 가까운 종교적 의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시 68:12; 96:2; 나 2:1; 사 52:7; 참조, 솔로몬의 시편 11:1). 이는 종종 히브리어 명사 bēśôrāh, "(사자에 의해 선포되는) 좋은 소식"의 번역이다. 종교적인 용법에 있어서 바울이 당대의 황제 숭배에 크게 의존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바울이 말하는 euangelion의 종말론적인 함의(含意)와 황제 숭배의 신탁적인 함축 의미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더욱이 바울 자신이 "복음"(10:16)의 선포에 대해 말하는 문맥인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정확하게 이사야 52장 7절을 의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euangelion의 개념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의 메시지에 대한 개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물론, 기독교적 선포(kerygma)가 고린도전서 15:1-2이 암시하듯이 바울 이전에 euangelion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쨋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주되심과 그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새로운 방식(mode)에 대한 좋은 소식을 euangleion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적 용례는 당대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행해지던 황제 숭배에서의 euangelion에 대한 소위 신성한 또는 신탁적인 용법과는 독립적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을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문서들에 나타난 용법과 관련 짓는 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복음"(롬 1:2)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 바울 자신이 전했던 복음의 언약적인 특성 간의 미묘한 차이를 더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비록 euangelion이라는 단어를 문학적 구성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용법이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가정이다. 우리는 앞서 바울의 euangelion에 대한 용법이 마가가 예수의 활동과 말씀에 대한 자신의 진술에서 그 개념을 도입하게 된 전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거기서부터 이 용어는 다른 "복음서들"(정경 및 외경)을 지칭하는 기독교적 단어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 용어가 지닌 독특한 기독교적 용법은 희랍어 euangelion이 라틴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nuntius bonus로 번역되지 않고, 희랍어 euangelion이 지닌 독특한 내용과 의미 때문에 단순히 evangelium으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라틴어에서 evangelium으로 표기된 이 단어는 후에 로망스 말에서 évangile, vangelo, evangelio 등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