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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6·25] [미니 戰史] [14] 38선 돌파와 북진… 美, 서울 수복 후 38선

好學 2010. 6. 2. 18:02

 

[나와 6·25] [미니 戰史] [14] 38선 돌파와 북진… 美, 서울 수복 후 38선 돌파에 미온적 李대통령, 국군에 단독 진격 명령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전선 반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말까지 사실상 전쟁 이전 상태를 회복했다.

38선 돌파는 1950년 8월 말 이후 뜨거운 논쟁의 중심이 됐다. 북진 찬성측은 한반도 통일이 유엔의 궁극적 목표이며, 추격을 중지하면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의 재침략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반대측은 38선을 넘으면 소련·중공 개입을 초래해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이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의 목적은 침략자를 격멸하고 국토통일을 달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미국은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9월 29일 유엔군사령관이 '진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단독 진격을 선언하고,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에게 즉각 북진을 명령했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된 상태에서 국군의 단독행동은 지휘체제의 혼선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일권 총장은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동해안 전선의 국군이 전술상 38선 바로 북쪽의 고지를 점령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해 동의를 얻었다. 그 결과 국군의 선두부대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그동안 미국은 유엔군의 북진작전계획을 구체화하는 한편, 유엔을 통한 법적 근거 마련에 힘썼다. 유엔군 작전계획이 9월 29일 미 합참으로부터 승인을 받자, 맥아더 장군은 10월 1일 항복권고 방송을 한 후 다음 날 전 부대에 '작전명령 제2호'를 하달했다. 주요 내용은 미 제8군을 주공, 미 제10군단을 조공으로 하여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이른바 '맥아더라인'까지 진출, 그 선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을 국군에게 전담시킨다는 것이었다.

10월 7일 유엔 총회는 한반도의 인위적인 분단을 해소하고 유엔의 권능을 확립한다는 취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틀 뒤 맥아더 장군은 두 번째 항복권고 방송을 한 후, 제8군에 북진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국군에 이어 유엔군도 전면적인 북진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