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한반도 북부의 대표적인 도시로 전쟁 당시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였다. 도시를 북서와 남동으로 가르는 대동강을 기준으로 본평양과 동평양으로 구분됐다. 양쪽을 연결하는 교량은 인도교인 대동교와 복선화된 대동강 철교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작전은 성패(成敗)의 문제라기보다는 누가 먼저 입성하느냐하는 '선착순'의 문제였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제17사단과 제32사단 잔류병 약 8000명으로 평양방위사령부를 급조했지만, 이들의 임무는 평양 방어라기보다는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평양탈환을 책임진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처음엔 기동력을 고려해 미 제1기병사단과 제24사단에 각각 주공(主攻)·조공(助攻) 임무를 부여했다. 국군 제1사단은 후방작전을 맡도록 했다. 그러자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이 밀번 군단장에게 국군도 평양 탈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국군 제1사단이 미 제24사단의 조공 역할을 맡게 됐다.
미군의 북진은 파죽지세였다. 1950년 10월 12일 미 제1기병사단은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퇴한 뒤, 서흥(16일)-사리원(우회)-황주(17일)-평양 남측 흑교리(18일)를 거쳐 19일에는 대동강 남쪽에 도착했다.
이에 질세라 우측에 있던 국군 제1사단도 11일 아침 고량포에서 38선을 넘은 이후, 중·서부 험한 산길을 따라 최단거리로 진격을 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고 밀명을 내림에 따라 국군 제7사단도 평양 진출 경쟁에 합류했다.
국군과 미군은 대동강을 건너는 데서 결정적으로 갈렸다. 미군은 유속이 빠르고 깊은 대동강을 만나게 되자 20일 아침이 돼서야 부교를 가설하는 등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한 반면, 국군은 하루빨리 강을 건넜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미군의 도하 장비가 도착하기 전인 19일 밤에 대동강 도하를 감행했으며, 이 무렵 제7사단 8연대도 강을 건넜다.
평양시내에서는 10월 30일까지 잔적소탕작전이 전개됐고, 작전 완료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시청에서 입성환영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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