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나와 6·25] [미니 戰史] [16] 韓·滿 국경선으로 진격

好學 2010. 6. 2. 17:59

 

[나와 6·25] [미니 戰史] [16] 韓·滿 국경선으로 진격

 

 

1950년 10월26일… 국군 7연대, 압록강 국경선에 태극기 꽂고 수통에 압록강 물 담다
美7사단, 두번째로 국경 도착… 국군 6사단은 정체 모를 적과 격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을 제외한 유엔군의 북진 한계선을 청천강 하구(정주)-영원-함흥 선으로 통제했다. 이는 1950년 9월 27일 자 워싱턴 훈령에 따른 것인데, 훈령에는 "한·만 국경선에는 국군만 진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10월 7일 유엔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는 '통한(統韓)' 결의안을 내놓자 맥아더는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서는 유엔군 진출 한계선을 좀 더 북쪽으로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선 진출한계선을 일명 '맥아더 라인(선천-고인동-평원-풍산-성진)'으로 조정한 뒤, 10월 24일에는 진출한계선을 아예 철폐, 제8군사령관과 제10군단장에게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 속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아군 기세에 북한군은 혼비백산해 소총·장비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국군 제2군단은 10월 21일 오전 6시부터 제6사단 7연대를 선두로 순천에서 개천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북한군이 버리고 간 150여대의 차량을 노획해 사용함으로써 전진속도를 높였다.

제7연대는 차량의 전조등을 밝히고 전진하면서, 북한군을 향해 "전쟁은 끝났다.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장병들은 군가를 부르면서 행진했고, 총격전 없이 개천을 점령했다. 국군 제7연대 용사들은 마침내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압록강 국경선까지 진출해 태극기를 꽂고, 수통에 압록강 물을 가득 넣었다.

북한 지역 동해안에 상륙한 미 제7사단도 군단장 북진명령에 따라 11월 20일 삼수와 갑산에 진출했고, 21일 아침 마침내 혜산진을 무혈점령함으로써 한국군 제6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국경선에 도착하는 부대가 되었다.

하지만 서부와 동부 전선에선 이미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었다. 10월 26일 제6사단 2연대는 벽동을 목표로 진격하던 중 정체 모르는 적 부대를 만나 격전을 치렀고, 선두부대가 분산되는 상황을 맞았다. 38선 돌파 이후 이제까지 없었던 사태였다. 아군은 적의 저항이 갑자기 강력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에 앞서 10월 25일 오전 11시 국군 제1사단도 운산의 텅 빈 시가지를 진격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적 부대와 교전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의도적으로 유엔군을 한·만 국경선 가까운 곳까지 깊숙이 유인해 아군의 퇴로차단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