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미니 戰史] [17]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15일에도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中개입 가능성 적다" 말해
김일성은 서울 탈환되자 毛澤東에게 파병 요청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에 있는 절해의 고도 웨이크 섬. 오전 7시 36분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중공·소련의 개입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는 "아주 적다"고 잘라 말했다. 만일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전례 없는 대학살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고도 했다.
그 무렵 한반도에서는 10월 11일 밤부터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 선발대가 북한 집결지에서 위장을 끝내고 있었다. 이어 19일부터 본격화된 중공군의 북한전개는 전쟁 후반부엔 최고 17개 군단 120만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첫 도강은 압록강 중·하류의 장전하구, 집안, 안동(현 단둥) 등에서 이뤄졌으며, 중공군은 매일 어둠이 깔릴 때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강을 넘은 뒤 철저히 은닉했다. 일부 병력은 긴급히 제조한 북한군 군복과 군장을 착용하고 들어왔다.
제1차로 북한에 진입한 병력은 4개 군단(제38·제39·제40·제42군단), 3개 포병사단과 여타 공병 등 25만여명이었는데, 그들은 22일까지 희천-구성-운산-덕천선 이북지역에 배치를 완료하고 아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또 10월 23일부터 기동을 개시한 제50군단과 제66군단이 10월 25일~11월 6일 사이에 들어와 병력은 총 6개 군단 18개 보병사단과 3개 포병사단 약 29만명으로 늘어났다. 중공군총사령관은 52세의 백전노장 팽덕회였다.
김일성은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탈환이 임박했을 때까지도 중공의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다.
9월 21일 소집된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박헌영·김두봉·박일우 등 당내 지도적 인물들이 찬성한 것과 달리 그는 중공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길 거부했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발을 붙이면 중공이 육성한 연안파들이 득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고, 그것은 곧 김일성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이 탈환되자 결국 그는 중공의 파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미군을 "종이호랑이"로 여긴 모택동은 대규모 초전 기습으로 미군에 타격을 입히면 전쟁의 주도권 확보가 가능하다고 봤고, 미군의 현대 무기 장비에 대해선 엄청난 수의 병력과 인간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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