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1해병사단 후퇴하며 중공군 9병단 궤멸시켜… 흥남항으로 10만 병력 철수
중공군은 제1·2차 공세 때 서부전선에 18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12개 사단을 투입했다. 중공군 공세로 후퇴를 거듭한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23일쯤에는 임진강-춘천북방-양양을 잇는 38도선까지 물러섰다. 전선은 6개월 만에 다시 개전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이 과정에서 향후 전쟁의 판세를 좌우할 주요한 전투(철수작전)들이 벌어졌다. 군우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작전 등이다.
- ▲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AP·미 해병대(USMC)
동부전선에서는 미 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역사에 남을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 제9병단 예하 12개 사단을 투입해, 미군을 유인·포위 공격했다. 미 1해병사단은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과 아군을 완전 포위한 중공군의 공격을 뚫고 2주일 만에 철수 작전을 완수했다. 당시 스미스 사단장은 "우리는 철수하는 게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장병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켰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9병단은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고 궤멸돼 4개월 동안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만약, 이곳에서 중공군이 미 1해병사단 격멸에 성공했다면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더 나아가 한반도 전체의 전세가 기울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 흥남철수작전을 통해서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 작전을 통해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1만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후송했고, 9만1000여명의 민간인도 대피시켰다. 이때 흥남항 일대에 대규모 함포·공중폭격을 실시했는데, 미 해군함정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만8637발로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70%나 더 많은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