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하여 20선]<9>장미 비파 레몬
◇장미 비파 레몬/에쿠니 가오리 지음/소담출판사
《“결혼한 지 7년, 부부싸움다운 싸움 한 번 안 하고 지내왔지만 그건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쓰치야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레이코는 전혀 모른다. 부부가 늘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보지만, 제 손으로 만든 리소토를 혼자 먹자니 서글프고, 쓰치야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그 사람을 필요로 할까.”》
‘몹쓸 감정’에 손내민 여자 9명
여인 9명이 있다. 가정주부이거나 꽃집 주인, 모델 혹은 학생, 잡지 편집자. 다양하지만 평범하고, 흔하지만 서로 다른 그들. 그리고 그들에겐 아내로 연인으로 엄마로 친구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일상이라는 삶이 있다.
이들의 일상은 얼핏 보기 좋다. 나름의 질서를 갖고 성실하게 흘러간다. 그들 역시 그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혹은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한다. 행복, 그렇게 불러도 좋을 시간. 다만…, 그 아래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일상을 어그러뜨리는 ‘비일상적인’ 상념. 누구는 이를 ‘사랑’이라 부른다.
‘장미 비파 레몬’은 연애소설이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연애를 하고 있건 아니건, 사랑이란 감정을 다루면 모두 연애소설이란 전제 아래 그렇다. 평범한 일상 속에 문득문득 피어나는 감정의 변이. 그 흔들리는 마음과 그 마음을 흔드는 바람의 세밀한 풍경을 꼼꼼히 잡아낸다.
이 소설엔 모두 9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좋은 남편 미즈누마와 평온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는 도우코, 그리고 그의 결혼식 때 부케를 만들어 준 꽃집 주인 에미코, 도우코의 고교 동창인 잡지 편집자 레이코, 레이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쿠라코…. 이리저리 연결돼 관계를 형성한 이들과 또한 이렇게 저렇게 ‘관계’를 맺은 남성들. 부부로 연인으로, 심지어 불륜으로 형성된 이들의 네트워크가 복잡하게 꼬이고 풀렸다가 얽히고설킨다.
“뭔가를 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젊고 자신의 정열을 믿을 수 있고 무언가가 뒤틀려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 생활의 자잘한 부분까지 스스로 해결하는 데 길들기 전의 나이. 타인과 자신 사이에 놓인 어둠이 무엇인지 모색하기 귀찮아지면 이미 때는 늦다.”
서로 다른 위치와 나이를 지닌 ‘주인공’ 9명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 ‘뭔가’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 “사랑과 연애, 결혼.” 서로 다른 이름이자 때론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 물론 그들은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랑이 꼭 행복은 아니라는 걸, 결혼이 모든 걸 해결하진 못한다는 걸.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몹쓸’ 감정에 손을 내민다. 일상을 무너뜨리는 비일상을 향해. 그게 삶의 가장 큰 활기이니까.
“소우코가 말했다. ‘선생님이 전에 내게 그랬어요. 자신에게는 다른 여자들 같은, 연애에 대한 강렬한 에너지가 없다고.’ 마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 에너지가 있어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가 에너지를 낳는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장미 비파 레몬’은 일본 여성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일본에서 2000년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도쿄타워’ ‘반짝반짝 빛나는’ 등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꼽히며 팬 층이 두껍다. 일본 소설이지만 유럽풍 세련미를 한껏 머금어 여성들의 향취를 자극하는 에쿠니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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