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하여 20선]<8>세설
《“사치코의 바로 아래 동생 유키코가 어느새 혼기를 놓치고 벌써 서른이나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면…마키오카라는 집안의 명예, 요컨대 지체 높은 집안이었다는 옛날의 격식에 사로잡혀 집안에 어울리는 혼처를 바랐다는 데 있었다.”》
간사이 풍속 그린 일본판 ‘오만과 편견’
마키오카 가(家)는 다이쇼 시대(1912∼1926년)까지 명문가로 인정받았으나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다. 집안에는 네 딸이 있다. 맏이답게 어른스러운 쓰루코, 동생들을 섬세하게 챙기는 사치코, 내성적이고 말이 없지만 고집스러운 유키코, 자유분방하고 매사에 당돌한 다에코 등 네 딸의 성격은 제각각이다.
이 집의 현안은 셋째 유키코의 혼사다. 쓰루코와 사치코는 결혼해 아이도 낳았지만 셋째와 막내 다에코는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에코는 인형 제작과 양재로 자립한 데다 10대 시절 함께 가출했던 오쿠바타케 가의 아들과 혼담도 오가는 상태. 하지만 유키코는 다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맞선을 볼 때 “침울해 보인다”는 평을 듣는 데다 나이도 서른이 넘었다. 결국 자존심을 굽혀 재취 자리나 나이가 많은 남자라도 너무 늙어 보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는 데까지 물러선 상태다.
‘세설’은 결혼 이야기를 중심으로 자매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이 베넷 가의 둘째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 과정을 그렸다면 ‘세설’은 결혼보다 결혼을 둘러싼 풍속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마키오카 집안이 내세우는 결혼 조건은 까다롭다. 서로 격이 맞아야 하고 사윗감은 건실한 직업과 장래성을 갖춰야 한다. 외모가 지나치게 늙어보여도 곤란하고 재혼이라면 아이들 성격이 유순한지도 관건 중 하나다.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고 상대방의 배경을 조사하기 위해 흥신소에 일을 맡기는 일도 다반사다. 맞춤 남자를 만나더라도 상대 집안의 정신병력이 드러나는 등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 같은 관습에 개의치 않고 자유분방한 넷째 다에코는 마음껏 연애를 즐긴다. 별 볼일 없는 사진사 이타쿠라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그가 병으로 죽자 오쿠바타케 가의 아들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텐더를 유혹해 임신한다.
동생과 달리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유키코는 결혼을 모두 언니 사치코와 형부 다이노스케에게 맡기고 물러서 있다.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 씨는 이 소설에 대한 평론에서 유키코는 언뜻 과거의 수동적 여성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간사이(關西)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키코는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가 지적인 멋이 없다거나 재혼한 부인의 위패를 집에 모시고 있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퇴짜를 놓는다. 마침내 유키코의 혼담이 성사돼 혼례 의상이 도착한 날, 그토록 동생의 결혼을 기다리던 사치코는 자신이 결혼 직전 지었던 ‘오늘도 옷을 고르느라 날이 저무누나/시집가는 몸의 공연한 서글픔이여’라는 시를 떠올린다.
저자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첫 부인 이시카와 지요코가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사토 하루오와 사랑에 빠지자 두 사람을 결혼시키겠다는 인사장을 보냈던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1923년 간사이 지방으로 이사한 뒤 현지 문화에 매료돼 1938년 세 번째 부인 마쓰코의 집안을 모델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에는 계절마다 즐기는 꽃놀이와 반딧불이 잡이, 가부키 공연, 토속 음식 등 1930년대 간사이 문화가 녹아 있다. 제목 세설(細雪)은 ‘가랑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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