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創造論]창조.신학.과학

과학적 창조론의 허구성

好學 2010. 4. 12. 20:55

 

과학적 창조론의 허구성

 

 

 

모든 물질이 다 부서져도 남는 게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를 들면, 바둑 같은 것은 바둑판과 바둑알이 부셔져 버린다 할지라도 여전히 바둑 두는 기술과 원칙은 남아 있게 된다. 알이 없으면 조개와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 그 놀이를 즐길 수 있고 나무판이 없더라도 땅에다 그려서 그 놀이를 계속 할 수 있다. 결국 바둑은 놀이하는 주체인 인간이 살아 있는 이상 여전히 바둑은 존속된다.

 

인간에게 있어 최종적인 중심체는 인간 그 자체이다. 모든 물질이 다 사라져도 인간만 살아 있다면 인간은 여전히 뭔가를 생각하고 행위 하게 된다. 이처럼 세상은 전부 인간 중심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위해 봉사할 때만 비로소 인간다움을 실감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의미 있는 인간임을 늘 확인하는 것이 삶의 보람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인간과 하나님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서로가 우호 있게 지내던지 아니면 상호 배척하던지 간에 어떤 식으로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인간 자기 자신이 사라져도 하나님만 있으면 만족한가? 인간 세계가 몽땅 사라져도 하나님 나라만 있으면 즐거움이요 기쁨인가? 인간 나라를 전부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드러나 있다. 이런 종말 와중에서 과연 과학 하는 자로서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인간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 작업도 예외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직접 다루시는 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참여시킨 채 인간에게 제공될 자연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탐구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듯 자기 입장에 서서 탐구한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자기 손으로 거룩하게 손질해서 하나님의 중심 사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을 때 과연 이런 발상은 옳은 것인가? 하나님이 세계를 소멸시키겠다는 의지는 과학자들이 아무리 자연 세계를 탐구해 봐도 밝혀지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파멸은 자연이 자친 나머지 자체적으로 지닌 에너지가 스스로 소진되어서 생긴 혼돈의 일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과 세우신 새언약에 기준 해서 이루어지는 심판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애써서 자연 세계를 연구하여 하나님의 작업을 숭고하고 경건하게 재정립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새언약과 심판의 이유가 드러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새 언약은 그 자체로서 이러한 인간 중심적 정신 상태를 죄악으로 이미 규정한 바탕 위에 내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과학 하는 행위는 그 결과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많은 아부를 하느냐와 상관없이 더러운 작업들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원래 창조 행위와 전혀 상관없고 연결이 안된다. 그런데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작업과 하나님의 깨끗한 작업으로 하나로 통일시키고 일치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실 과학 세계 안에는 과학자 자기들끼리 통하는 개념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그 개념들은 죄악된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개념들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서로 교류한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와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 사이에 서로 대화가 되려면 먼저 공통적으로 통하는 언어 소통 영역이 먼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은 항상 각기 나름대로의 논리 세계를 꽁지에 달고 다닌다. 그러나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가 성경 구절을 놓고 해석하거나 풀이할 때도 성경에서 말하는 본래의 의도를 무시하고 과학 내에 통용되는 언어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을 들이대어도 마찬가지이다.

 

과학 세계에서는 과학적 개념에 의해서 분석되어야만 하는 것 중의 하나 하나님 말씀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결국 처음에 형성해 놓은 개념 규칙만이 절대 진리가 되고 나머지 들고 들어온 성경이나 과학적 증거물들은 불완전한 상대적 대상으로 전락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즉 분석하는 절대 기준으로서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과학적 개념에 부합되도록 아부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구절 갖다 대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음”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다만 보편 계시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계시 중에 일부 계시로서 특별 대우받게 해 주겠다는 것이 과학적 창조론들의 배려이다.

 

그러니 성경이라는 증인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판결은 나 버린 것이다. 이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론, 성령론, 창조론 이전에 이미 저들 유신론적 과학자들에 의해서 나름대로의 계시론, 성령론, 창조론이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성경은 자기네들을 뒤에서 후원만 해 주면 된다고 여긴다. 그것도 과학적 개념 안에서 과학적 의미라는 옷으로 새 단장된 채….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성경 구절을 인용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나 ‘천지’, 혹은 ‘창조’라는 뜻을 모르고 있는 상대에게 말하는 것은 이미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이 단어를 하나의 낱말로 인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말을 한 낱말로 받아 드린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사전에 담겨 있는 낱말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해 놓은 있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내뱉는 단어를 계속 듣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고민을 하게 된다. 즉 판단, 분석을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보충할 것인가 아니면 수정하고 교체할 것인가를 아니면 되받아 상대의 허점을 공격할 것인가를 순간 순간 결정하게 된다.

 

만약에 상대방의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면 그만이다. “지금 당신이 주장한 것은 당신 주관에 불과한 철학이요 신학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주장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지요?

 

만약 당신이 생각하기를 ‘내 생각도 완전치 않다고 여긴다’고 하신다면, 그래 그 불완전 것을 가지고 건방지게 상대방의 옳음을 반박할 기준을 갖추었다고 감히 여겼단 말입니까?” 이러면 여기서부터의 대화는 소통이 안되고 제각기 따로 취급하고 있는 개념 화살을 가지고 상대방을 향하여 분노의 화살을 퍼붓기 바쁘다.

 

언어 소통이 깨어지는 것이다. 과학 안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화는 결국 이렇게 끝난다. 이점이 인간의 언어 세계가 지닌 한계이다. 하여튼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신학과 철학이 이미 정립되어 있다고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 과학은 이런 명확한 사실에 대해서 외부인을 속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라 과학을 하는 일개 평신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지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서 조그마하게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일조를 하려고 하는 것뿐이지 진리 전반에 대해 독자적인 새 조직 신학을 새로 창출해서 그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또 말하기를 “우리는 목사만이 복음을 전파할 은사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평신도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 안에서 제한적이나마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교회나 하나님 앞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이들은 성경 신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 아니, 검증 받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자적인 계시관이 따로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만이 계시가 아니라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여타의 과학들도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이들의 전체 신학을 비판한다.

 

1. 계시론

 

(1)구약 때의 계시

 

하나님이 자신을 보이시는 것은 ‘선택 작업’을 통해서 진행하신다. 모든 민족 가운데 아무데도 계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선택된 나라인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시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다른 민족을 복의 근원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나라만을 복의 나라로 삼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할 때에 오직 자기들에게만 계시함을 알았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편 147:19-20)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아모스 3:2)

 

그렇다면 이방 민족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무신론자들인가? 아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0-21)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의견에 의하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신의 존재성을 부인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단 모든 인간이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단언해 버리신다.

 

특히 로마서 1:20에서 ‘핑계치 못한다’는 강한 표현까지 거론된 것을 보면 정말 이들의 마음 속 깊이 신의 존재성과 능력에 대해서 본인들이 핑계하지 못할 무슨 요소를 하나님께서 창조해 집어넣으신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2:14에 보면, 이방인의 양심도 그들 세계에서는 율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그 취지는 단순히 신의 존재성을 확약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해 주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는 이방인이 저들로 ‘계시’ 받았다고 운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 말씀을 받고 보니 단순히 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 결코 참다운 계시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인간은 모두 종교적이다. 종교성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려하여 그 민족들과 대결 구조로 몰고 가서 전쟁을 치르게 한다. 이방인을 치는 근거는 오직 하나,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이스라엘에게만 출현하신 그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신봉하지 아니하면 저주와 심판과 멸망을 받는다고 규정된 상태에서 있다.

 

이 확고한 규정을 위해 이스라엘이 이라는 독특한 국가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출현의 의미를 도외시하고 계시론을 정립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결코 그들과 합작해서 보다 더 분명한 계시 정립에 나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이방 민족의 신은 신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결코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인격적으로, 생활 면에서 훌륭해서가 아니다.

 

오직 참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따라 ‘선택되었다“라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9:5)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이사야 44: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이사야 43:10)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기생 라합이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남의 나라인 이스라엘 편에 붙은 것은 그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기의 신 개념과 이스라엘의 신 개념을 적당하게 혼합하거나 절충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20:1-3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미 기존의 신들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애굽인들이 가나안 이방인들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의미에서 무신론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의 신은 신도 아니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편 96:5) 이방들이 주장하는 신 개념은 자신들의 입장이나 그들의 세계 안에서는 통용되는 신이 될는지 모르지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전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구태여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고 참작할 필요성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되었음”의 의의가 오직 자기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기를 그들과 전쟁하라고 하신다. 결코 타협이나 설득이나 의견 조정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다. 아예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들이 진멸당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신을 참 신으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이사야 60: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명기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명기 7:16)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예레미야 10:25)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들의 신을 섬기면 진멸당한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명기 7:26)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신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든 누구든 인간이 자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단지 ‘선택 행위’를 통해서 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만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백성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방 민족들이 구원받는 길은, 이스라엘처럼 그들도 참 여호와에 의해서 선택되는 경우뿐이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이사야 55:5)

 

이스라엘이 증거하고 전해야 될 일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이지 결코 신의 존재성이 아니다. 이런 유신론 철학은 계시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지 신을 아는 인류의 보편성에다 기대를 걸고 그 안에서 대화를 성사시키려는 술책이다.

 

마치 가나안 민족끼리 한 자리에 앉아 서로가 알고 있는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신의 존재하심에 대해서 다짐을 받고 확답을 얻고자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비계시 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무신론자 내지는 우상 숭배자 안에 갇혀 있는 처지이다.

 

문제는, 이런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들을 마치 성도인 것처럼 화관을 쒸어주고 같은 형제인 것처럼 간주해 주는 병폐가 있다. 마치 가나안 민족들이 자기네들이 알고 있는 초월적 신의 존재와 창조성에 신앙을 표한다고 같은 여호와 백성인 것처럼 평화를 선포해 버리는 경우와 같다. 여호와만의 새로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태어난 신자라는 것이다.

 

 

(2)신약 때의 계시

 

신약 때, 종말 때의 계시의 본질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성과 계시성을 누구보다도 주창하는 무리 안에서 피어난다. 즉 오직 이스라엘만 선택된 민족이고 여호와만이 참 신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에 의해서 도리어 배척받은 그 분이 바로 계시가 되는 세대가 신약 시대이다. ‘신약’이란 글자 그대로 ‘새 언약’이라는 뜻이다.

 

‘새 언약’이란 늘 ‘옛 언약’을 염두에 두면서 나온 개념이다. 즉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거론하지만 마지막 때에 그 여호와께서 구약과는 달리 새로운 법칙의 계시를 제공했음을 알아야 제대로 계시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태복음 9:16-17)

 

그 당시 유대인들이 참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는 ‘여호와 개념’은 결국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도리어 죽이고 면전에서 없애 버리는 귀절로 이어졌다.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한복음 8:44)

 

참 하나님이 그 당시 우상 숭배자라고 지칭되던 이방인들 통해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물론 그들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했지만) 사실 주동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인간들이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율법을 자기네들이 옛날부터 받아 쥐었기에 이것을 행함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터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발상이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마귀의 술책으로 그만 폭로되고 만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마귀의 앞장이며 악마의 자식 인줄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자신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민족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워 할 만한 거룩한 백성인 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이 되었기에 자기들만큼은 참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늘 “율법, 율법”만을 주창했다.

 

그러나 새 언약 앞에서 이 법칙이 악마가 심어 준 법칙임으로 탄로나 버린 것이다. 기쁜 소식이 율법과는 별도로 온다는 것을 몰랐고 또 그 복음을 아는 자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에게만 돌아간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0-24)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태복음 11:25-27)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다. 그러니 정말 참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오직 “예수, 예수”만을 고집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7-8)

 

결코 “창조 과학, 창조 과학”를 부르짖지 않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앎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에서 출발하지 않음을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론적 과학을 안 것과 예수님을 안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 무슨 ‘상관 있는 것’으로 타인에게 증거 해서 타인이 오해할 기회를 제공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예수 안에서’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메시야 수난’의 원인이 바로 창조론적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결부시켜 온 유신론적 종교철학에 있음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악마적 발성의 아류인 줄을 증거하면서 투쟁해 나갈 것이다.

 

 

2. 성령론

 

과학적 창조론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들은 분명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주장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그런데 진짜 성령 받아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이나 여러 사도들의 고백들을 도외시하고 있다. 진짜 성령 받아 예수님의 증인된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거했는가 아니면 과학적 창조론을 증거하고 있는가? 사도들의 주장과 일치될 경우만 진짜로 성령 받은 자이지 자청해서 예수, 성령 외치며 전도한다고 성령 받은 자가 아니다.

 

복음의 내용은 한결같아야 하고 일치되어야 한다. 다같이 그리스도가 내려 준 계시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 1:8-12)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7-18)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라디아서 3:1)

 

만약 사도 바울이 물리학 교수라고 해도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고 전도의 내용으로 삼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사람들의 뜻을 기쁘게 하고 이해시켜서 사람들의 구원해 줄 마음이 전혀 있기 때문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린도전서 2:6-9) 사도 바울이 이 세상 지혜를 기초로 한 복음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 지혜를 기반으로 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납득과 이해가 안되는, ‘비밀로서의 복음’을 전했다. 그 동안 세상 인간들의 추측할 수도 있고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혀 상관없는 ‘감추인 비밀로서의 복음’이다. 세상 인간들의 한계는 기껏해야 다음과 같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린도전서 1:22)

 

창조과학론자들은 기적과 지혜를 기초로 하여 참 하나님을 증명하고 증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즉 창조과학론자 인간의 수준과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들이 단지 미흡함이나 모자람 때문에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지혜로서 뭔가 할 수도 있음을 주장하는데서 그 악마성이 드러난다. 즉 이들이 정리하고 있는 성령은, 자신들의 하는 일을 옹호하고 힘 보태 주는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실재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것만 소개하면서 인간들의 모든 부분을 공격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분이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7-8)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한복음 16:13-14)

 

이 본문에 의하면, 성령님은 자의의 것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활동하신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을 알리고 적용시키려 오시는 분이다. 그래야 죄에 대해여,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제대로 책망하실 수 있지 않을까? 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혜나 과학이나 철학은 정죄받는다.

 

인간이 자기 의나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될 수도 없고 따라서 구원되어지지도 아니한다. 그런데 창조과학론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내용을 담아서 겉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노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창조론이 복음 전파의 발판으로 개입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들도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정신이 대견스럽고 갸륵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교묘하게 인간의 의와 가치를 삽입시키려든다. 하나님이 홀로 해야만 하는 일에 자기도 끼어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전환하고 표현해 내려고 한다. 책망과 심판의 대상으로 머물러야 할 존재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협조자로 둔갑해서 세상을 정죄하고 책망하려는 성령님의 활동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몸부림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에 흠집을 내려는 악마의 최후의 지향점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몫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오신 분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3)

 

성령은 인간들이 일 할 때 이용 가능한 수단이나 방식이나 도구가 아니다. 활동의 주체는 바로 성령뿐이다. 이 성령님은, 인간 자신들이 활동의 주체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주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되심은 한시라도 인간에게 양도하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업적으로 동원해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의 도움이 되리라 여긴다. 즉 불신자가 신자로 바뀌는데 있어 다리가 되어 주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를 택하여 일이 시키시든 그것은 성령님의 임의대로의 사역이다. 인간들의 기도나 헌신과 열성과 그 어떤 노고도 이 성령님의 작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성령님이 인간들이 걸쳐놓는 다리를 늘 철거하고 정죄해 버리신다. 그리고 불신자와 신자 사이가 단절되게 유지하신다. 이 단절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의 공로성만 부각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한 톨이라도 이 공로성을 인간에게 빼앗길 분이 아니시다. 온전히 자신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게 되어 있다.

 

성령님의 행함은 인간들의 행함과 한시라도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늘 투쟁하고 정죄하신다. 인간에게는 주님의 일에 보탬이 될 만한 그 어떤 의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정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수시로 죄짓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로마서 3:9)

 

성도가 되었다고 인간에게 기대 걸 만한 나오리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성도에게 나오는 것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도 성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은 그 작업의 결과로서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참된 성도라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증거하고 고백할 뿐이다. 그런데 이 고백을 타인에게 전한다고 그들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십자가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성도들의 구체적인 고백일 뿐이다. 이것을 활용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님의 몫이다.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성령님을 인간이 하는 일을 협력해 주고 힘 되어 주고 도와주는 분으로 알고 있다. 실상은 인간을 늘 공격하고 심판하여 죽이시는 분인데…. 결국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정반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왜곡된 진리관으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자신들이 하늘 나라의 일꾼으로 간주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3. 창조론

 

제대로 성령 받아, 제대로 된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대로 복음 전파하는 주님의 증거자로서 바울이 말하는 창조론은 어떤 창조론 일까?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9-10)

 

이 본문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자연 만물은 모두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위하여, 통일을 내다보면서도 지음 받은 것들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과학적 노력을 아무리 경주하고 탐구해도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증명되지도 발견되지도 않는다.

 

세상 만물이 지향하는 바를 놓치고 있으면서 이들은 창조론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성은 진화론자들의 주장에서 확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자들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라는 요소를 빼고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창조론이 될 수 있다고 우기는 고집은 도무지 용납해 주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점이 과학의 한계가 아닙니까”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다. 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죄인의 한계일 뿐이다. 돌멩이 하나 집어들고서 그 속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발견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물론 성도에게도 안된다.

 

그러나 성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돌이든 모래든 간에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됩니다” 다른 이가 나서서 “당신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묻는다면 성도는 당당하게 부끄러움이 없이 다음과 같이 답변하게 되고 또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성령 받은 사도가 에베소서 안에서 그같이 증언했습니다”

 

창조과학론자들은 자꾸 성경의 계시를 과학적 사고의 틀로 번역해서 이해하려든다. 즉 ‘믿음’에 관한 것을 ‘아는 것’으로 변경해서 소지하려고 한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그 어떤 단절도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이해력과 이성을 북돋아주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보고 있다.

 

즉 납득이 안 되는 계시 내용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서 그 깨달음으로 인간이 제대로 계시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인간과 성령의 관계로만 형성되어 있지 결코 성도 안에 따로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들어 갈 자리가 없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성도 안에 계시게 하여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 자신의 의지, 자신의 이해력이 더불어 계시는 예수님의 이성과 의지와 이해력과 얼마나 동떨어지는 가를 늘 비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를 유도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이해력과 불신으로 인해 십자가 사건을 유발케 했음을 인지시킨다. 그래서 왜 인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일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확인케 한다. 즉 인간의 이성과 관찰과 분석과 경험에 토대로 한 과학 안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가 되는 일이 왜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저주의 내용물인가를 알게 한다.

 

골로새서 1:15-17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본문에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만물이 그 안에 함께”라는 말이 나온다. 과학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출발하기 때문에 결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이 존재함을 증명할 재능이 없다. 주의 할 것은 결코 “하나님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세상 창조를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보편적 속성이다. 그러나 이 속성은 어디까지나 죄 아래 있는 상태에서 나온 한계를 갖고 있는 엉터리 창조론이다. 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참여하셨다는 사실에 완전 무지한 채 구성되는 창조론이다. 그러니 이 창조론이 복음으로서도, 영광에도 다 미흡하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의 안에서 나온 창조 고백이 아니라 죄 아래서 도출된 더러운 창조 신앙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인 그리스도 지향점과 그리스도 중심점을 다 빼먹고 주장하는 창조론이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것은 자연을 통해 증명해 낼 방도가 있는가?

 

이것도 증명 못하면서 무슨 복음을 전하고 계시를 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단 말인가! 고린도전서 8:6을 보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결코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우리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느니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받은 가나안 이방 민족들도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스도를 빼먹고 인간 창조와 세계 창조를 논하는 것은, 사실은 그 그리스도가 설자리에 죄악된 인간 자신들의 파고들었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처음 난 하나님 형상’이 그 후에 태어난 하나님 형상인 인간으로부터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러하다. 그리스도가 차지해야 될 자리를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자신의 처지와 신분과 위치를 망각한 채 하나님과 바른 관계하고자 나서고자 그 자리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물론 배후에 악마의 조종한 결과이다. 어쨋던 인간들은 자기 등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런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정상적인 창조론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고 스스로 믿고자 하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된 창조론 이라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살해당한 이유를 밝혀 주고 보여주는 창조론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 창조론 자들이 창조론이 과연 그러한가?

 

베드로후서 3:4-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주의 강림’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또한 ‘세상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을 대상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들이 전해 줄 때 어디를 근거에서 그들에게 알려 주었겠는가? 과학적 작업으로?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세상이 물로 된 것과 노아의 홍수 같은 것을 과학적으로 재조립하여 사람들을 납득시켜 주려고 덤벼들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 학문’으로 형식으로 전파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내용이나 자신들의 과학적 추리나 동일한 내용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창조의 흔적이 분명히 이 대자연 안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증거들을 추려서 정돈하면 성경도 비과학적 책으로 천대받는 경우도 적어질 것이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처럼 자진해서 말씀을 우대하고 성경의 권위를 누구에게도 뒤질 새라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5:44-47)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말씀을 귀히 여기고 말씀 그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예수님을 배척했다. 이 배척하게 만든 발상이 오늘날 과학적 창조론을 갖고 있는 이들 안에 그대로 존속한다. 유대인들이 말씀으로서의 창조와 노아 홍수와 십계명은 재대로 알았지만 단지 예수님만을 못 알아 본 경우에 해당될까? 아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모세가 너희를 고소할 것이라”고 하셨다.(모세는 창세기 내부터 신명기까지를 기록한 분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의 타고난 이성을 치고 공격하고 심판하는 말씀이라고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인간들의 이성과 의지를 긍정하고 거기에다가 추가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힘을 제공하는 분으로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39-41)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알려 왔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19-20)

 

왜 하나님은 자연 세계를 불로서 파멸하려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안에서 성실하게 법칙을 만들고 그것으로 유익하게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 나가는 그 인간들 때문에 소멸시키려 하는 것이다. 즉 뭐든지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할 줄 모르는 그 인간들 때문에 심판하려 하시는 것이다.

 

상태 계를 보존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 생태계를 보존하려는 저의가 바로 그 자연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쏠려 있기 때문에 그 생태계 보존 운동도 죄악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 운운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계속해서 자기 중심적 위치를 유지, 고수하려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 중심이라면 십자가 안에서 늘 자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죽어 있는 자라면 오직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만 증거 할뿐이다.

 

예를 들면, 칼이라는 과학 기술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강도가 쓰면 악이요 요리사가 쓰면 선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을 통해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서 밀치고 있는 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만약 6.25 사변 때, 북한 괴뢰군 주방에서 일하는 주방장의 요리 칼 사용은 남한의 착한(?) 국군 장병들에게는 여전히 악이 된다.

 

왜냐하면 건강한 괴뢰군은 보다 결국 많은 국군 장병들을 죽이도록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선이냐 악이냐 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각자 각자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비교도 무의미하다.

 

다리를 건축하는 토목 기술에 응용되는 중력의 원리들이 강도들이 강도 짓 하는데도 얼마든지 이용된다. 건너 집집을 더 털기 위해 다리를 과학적 기술을 응용하여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것을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죄악이 아닌가?

 

마을 어린아이들이 나룻배로 힘든 등하교길을 계속하고 있다. 보다 못해 어떤 목수일 하는 성도가 자진해서 과학적 토목 기술을 사용으로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하자. 이 일이 선한 일일까? 물론 마을 사람들 중심으로 봐서는 선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오늘밤이라도 당장 재림하셔서 불 심판으로서 그 다리를 부수시려는 의도를 갖고 계신다면 다리를 놓는 목수의 생각과 다리를 부수는 주님의 생각과 과연 일치되고 있다고 봐야 하는가? 일치되지 않으면 결코 선이라고 볼 수 없다. 도대체 자연의 중심 인물이 누구신가? 그리스도신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인가? 하나님은 누구를 중심으로 통일시키려 하시는가?

 

착함과 악함의 구분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드러났다. 참된 성도로서 토목 기사라면 다리를 놓아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 성경에 보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고 하셨어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나이지만 이 다리를 놓아 가는 일을 하면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함과 인간들의 과학적 기술과 그 효용성에 대해서 여전히 어떤 선한 가치를 두지 싶어하는 마음도 함께 쏟아 올라오고 있어. 아 이 곤고한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 라고 회개하는 자가 참 성도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중심적 위치를 여전히 고수한다. 이러한 자신의 죄악성에 눈을 뜬 자가 성도이며 이런 성도만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성경적 창조론 안에는, 쉴새없이 인간의 회개를 배출시키고 그 성도를 죽이는 작업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창조론이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중심의 창조론으로 계시된다. 그래야지만 불로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그리스도의 작업에 제대로 찬양 할 것이 아닌가!

 

 

결 론

 

오늘날에 퍼지고 있는 창조론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진화론을 의식해서 진화론 주장과 반대로 외치면 곧 그것이 하나님 영광이 되리라 여기는 유대교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인간이 종교적이 될 때, 인간의 범죄가 어떤 거룩을 뒤집어쓰고 등장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증거물로서 창조론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와 진신을 비교하지 않는다. 자신과 진화론자를 늘 비교한다. “나는 저들보다 더 낫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무신론과 유신론은 다 한 통속이다. 왜냐하면 둘 다 자기 중심으로 한 진리관을 갖고 잇기 때문이다. 마치 공부 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몰래 두 학생이 바둑을 두다가 둘이 다투는 식이다. “선생님, 재는 나한테 하수이면서도 자꾸 자기가 나보다 더 잘 둔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제발 제 편이 되어 주세요”라고 우기는 학생과 같다.

 

선생님이 그 학생의 잘못을 나무라니깐 그 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그러면 바둑의 법칙에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바둑의 원리 원칙이 비진리란 말입니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논리적이고 진리의 일부인데 왜 선생님은 나무라기만 하시는 거예요”라고 도리어 선생님에게 대들기 마련이다. 딴 동네에 가서 딴 데 정신 팔려 있는 것이다.

 

계속 거기에 흥미가 있고 거기에 인생을 자존심을 투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이성 체제로 재편성으로 다시금 인간 자기 세계 안의 사건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과학적 창조론자들의 노력들이다. 이렇게해서 찾았다는 진리는 결국 인간의 관찰과 이성으로 증명 가능한 과학의 일종이 되어버렸고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얼마든지 포착 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런 창조론 안에서는 악마의 실존적 의의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존재적 차원에서, 진화론자들은 생성적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다루고 있을 뿐이지 모든 삼라만상이 무엇을 겨냥하고 지향하고 있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인간의 이성 작용이 인간 자체의 의의를 겨냥해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들의 이성을 긍정해 놓고 출발하는 작업이기에 궁극적으로 엉뚱한 신 개념과 메시야 개념이 나온다는 것은 애초부터 확정되어 있는 일에 불과하다.

 

논리란 처음 것을 바탕으로 순서적으로 이어나가기 때문에 종국에는 처음 가설이 고스라니 핵심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나머지 논리들은 덧쒸우기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이들 안에서 지식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론 안에는 인간과 가상의 신만 남아 있지 결코 그리스도라도 제 3의 인물이 포함되지 않게 된다. 아무리 그들이 복음을 거론해도 과학적 창조론 자들은 가상의 신과 전파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기존의 창조 신앙을 과격하게 심판해서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메시야이기 때문에 이 역시 가짜 아들이다. 이들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보편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엉터리 우상 개념으로서의 신을 구원의 하나님을 신봉하라고 부추기는데 크게 공헌했다.

 

바로 이런 가짜 신이 판을 칠 때 참된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더욱 더 외롭게 배척받는다. 하지만 성령은 오늘도 이런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유일한 창조론으로 증거할 따름이다.

 

 

 

[ 부 록 ] 가상으로 꾸며 본 어느 철학자와 어느 과학자간의 논쟁

 

과학자 : 나는 과학자이고 당신은 철학자입니다.

 

철학자 : 과학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없습니다.

 

과학자 : 과학자라는 것이 없다니요?

오늘날 고도도 발달한 과학 문명을 보고도 과학이 없다고 하십니까?

철학자 : 과학이라는 단어나 언어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마는 과학이라는 것이 따로 실재 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과학이라고 보지만 나는 단지 인간 의 행위라고 간주하고 싶군요.

과학자 : 당신네들 철학 하는 사람은 입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렇게 과학 기술 을 모독하려면 당신 앞에 놓인 T V를 사지도 말지 뭐 때문에 사서 보고 있습니까?

철학자 : 내가 안 산다고 당신네들이 T V를 안 만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가 본능적으로 창작하고 싶고 만들고 싶어서 즐겨 (물론 좌절과 고통은 따르겠지만) 만들어 내어 놓고서는 이제와서 마치 인류 사회가, 또는 타인이 자기에게 요구했기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 것처럼 위장하지 마시오. 우리가 비록 입만 가지고 살지만 우리 철학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당신 과학자들은 어떠하오. 과학자의 부족함을 교묘하게 감추고 싶어 날마다 실험하고 연구하면서 마치 인간이 영원한 신처럼 된 양, 무에서 유를 창조라고 할 수 있는 양, 사람 손에 안되는 일이 없는 양, 헛된 환상을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온 자들이 아니요? 그러니깐 당신네들은 과학이라는 특별한 구획과 이미지를 심어 놓고서는 그 영역을 신비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늘 하고, 또 행할 수밖에 없는 자기 몸부림과 해탈 행위에 불과한 작업을 가지고 과학이라는 신비로운 이름이 덧붙여서 마치 하늘 나라를 대리하는 세계로 탈 바꿈시켜온 것입니다.

 

과학자 : 당신은 당신 자식이나 부모나 가족이 오래 살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금방 죽기를 바랍니까?

 

철학자 : 그거야 오래 살기를 바라지요.

 

과학자 : 그렇다면 의료 기술의 발달로 당신의 자식이 병치레 안하고 잘 자라 온 것에 대해 과학자들의 숨은 노고에 조금이라도 감사할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철학자 : 그 질문을 고대인들에게 물어 보세요.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신께서 좋은 곳으로 데려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찍 죽는 것은 악이요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의가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현대인들끼리 통용되는 행복 법칙에 준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불과한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늘 가져왔던 것은 나름대로의 현대 과학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소박한 행복이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인구가 증가하니깐 몸에 불편이 오고 양식 고갈을 걱정했겠지요. 그럴 때 그들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약한 노인과 아이들의 죽음을 이들은 곧 신의 사랑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이해하는 것만큼 과학이 그렇게 진리가 아닙니다. 아마 대량 생산과 과잉 생산, 충동 구매, 소비력 향상에 눈독이 들여 있는 자본가들에게만 아마 과학이 진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달나라에 사람이 가든 안가든 상관없이 시인에게 있어 달의 아름다움은 나름대로 늘 진리입니다.

 

과학자 : 그러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이 전문 작업이 의미가 없으니 과학자 되기를 그만두고 산수화나 그리면서 심산유곡에 묻혀 도인이라도 되라는 이야기입니까 뭡니까?

 

철학자 : 당신들만이 과학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연과학만이 과학이라고 편이상 구분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구분된 이 자연과학 이외에 다른 구획에는 상대적으로 과학에 비해서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 사고를 한다고 여기지 말라 달라는 것입니다.

 

결코 철학은 입만 가지고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기술자가 손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자신이 과학자임을 말하지 말고 또 내가 철학자임을 말해서도 안되고 단지 우리 모두는 보편적 인간임을 고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