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創造論]창조.신학.과학

하나님의 창조 1

好學 2010. 4. 12. 20:53

 

하나님의 창조 1

 

 

1강

 

지금부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린이들과 중학생들이 함께 모였으니까 될 수 있으면 쉽게 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그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에서 시작해서 그림으로 끝내주겠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그 근본은 어디서 왔느냐가 문제지요.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떤 요술쟁이도 이런 요술을 한 적은 없을 거예요. 사람의 그림자는 사람이 가는대로 이리 가면 이리 가고 저리 가면 저리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저리로 가는데 그림자는 가만히 서 있다. 아! 이것은 신기한 마술이죠? 이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림자는 이럴수가 없지요. 그림자는 주인님이 이리 가면 아이고! 내 정신좀 봐라. 하면서 쫒아가는 거지 따로 노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겠지요.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항상 붙어 있잖아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다면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것이 뭡니까? 대체 누구 때문에 내가 여기에 와 있느냐?하는 것은 그림자처럼 늘 따라붙는 생각이 되는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마음 나도 몰라. 나는 내 끌리는대로 살거야. 이렇게 분주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나라는 것이 여기 왜 있지? 하고 보니까 다른 여자 분도 있어요. ??당신은 왜 여기 있어요? 여자여! 당신은 여기 왜 있는데? 남자여! 당신은 여기 왜 있는데??? 하면서 보니까 늙은 아버지가 있어요. ??아버지는 왜 거기 계시는 겁니까??? ??내가 왜 있지???라는 이것을 근본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근본이 궁금해! 왜 내가 여기 있는가? 하는 그 문제가 상당히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 내가 있는 것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주욱 이어져서 그 이어진 것이 나에게까지 이어져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사람은 빨간색으로 그립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아버지에서 왔지.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에게서 왔지. 내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계속 죽 이어지는 그 가운데 내가 있겠지요.

 

나라는 것은 그 근본이 어디 있느냐? 제일 처음에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 사람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몰라요. 여기서부터 이렇게 죽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죽어서는 어디가느냐? 여기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11번 죽 있는데 그들에게 묻는 겁니다.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디 갑니까???

??몰라. 할아버지한테 물어봐라??

??할아버지! 죽으면 어디 갑니까???

??몰라! 나도 다 죽어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안되겠구나. 내 자식한테 물어봐야지!

??얘야! 예! 아버지! 너는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도 모르는 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어디서 생겼는지는 알 듯말듯 한데,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합니다. 근본을 몰라요. 근본을 모르면서 그냥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잘 몰라요. 잘 모른채 그냥 열심히 일하고 밥먹고 사는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 아저씨가 95세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자기가 곧 죽게 되죠. 만약 8월 7일에 죽는다면 며칠 남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8월 7일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갈지 그 할아버지는 모르는 거예요. 자신이 95년동안 살아 왔지만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세월 따라 그냥 밀려 밀려 살아 온겁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사람은 결국 근본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참 많이 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이 한국인인데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이분이 한국인인데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지? 하니까 단군할아버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단군이라는 것이 실제 인물도 아니지만) 단군이라는 분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주몽도 있고, 김유신장군, 이순신장군도 있고 여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은 누가 지었는가??? ??신의 아들하고 곰하고 결혼해서 애기를 낳은 것이 단군이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수 있나 하면서 코웃음 칩니다.

 

사람들이 공부를 해도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또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됩니다. 근본이 무엇이냐?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봅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성경은 정답을 내려 줬어요. 정답을 그림으로 내려보겠습니다. 방금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근본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할 때 옛날 사람들, 그리고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죽 확인해서 나는 이쯤에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다 통째로 묶어 버립니다. 통째로 묶어 버리고, 근본은 어디 있느냐? (통째로 묶인 그 바깥에 계신)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예수님이 (통째로 묶인 그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떤 신이 창조해서 낳고 낳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가지를 창조했어요. 하나는 천국을 창조하고 또 하나는 지옥을 창조했어요. 그런데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나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에라! 모르겠다. 그것을 알아 낸다고 해서 돈을 버나?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에라 모르겠다 내맘대로 살자.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생각하는데 둘다 맞아요? 틀려요? 둘다 틀렸어요.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만 알아요. 사람들은 몰라요. 사람들은 동그라미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지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 양쪽을 만든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세상에 지옥가는 사람과 천국가는 사람이 섞여 있어요. 파란색은 천국가고 빨간색은 지옥가는 사람이라 합시다.

 

둘다 섞여서 놀러가고, 바둑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어깨동무 하면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다. 그지??? 함께 놀러가고, 함께 좋은 대학가지고 하면서 공부하고 시험친다고 하고 있어요. 빨강이냐, 파랑이냐 하는 그것은 아무리 돋보기를 가지고 들여다봐도 구분이 안돼요. 사람이 빨강입니까? 구분이 안됩니다. 누구만 알아요? 예수님만 알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갈지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지 우리가 모르잖아요. 똑같은 인간으로만 보이니까 모른다는 말이죠. 그것을 아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창조를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분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까 양쪽이 다 보이는 것이지, 옆에 있는 사람이 지옥갈 사람인지 천국갈 사람인지 우리는 몰라요.

 

나하고 똑같아요. 밥 먹는 것도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똑같고 노는 것도 똑같고요. 다를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똑같아요. 예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기에 간섭하지 말고 맡겨야 합니다. 만약에 두 식구가 있는데 하나는 아들이 살고 엄마가 사는데, 예수님 보시기에 엄마는 지옥 갈 사람이고 아들은 천국 갈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들 눈에, 엄마 눈에 서로가 영원히 떨어진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그냥 같이 사는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둘 사이를 쫙 갈라지게 해서, ??너는 원래 이 자리였어. 지옥 갈 자리였고, 너는 원래 천국갈 자리였어.?? 이렇게 갈라놓는 이 일은 아들이 합니까? 엄마가 합니까? 예수님이 합니까?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사람이 못해요. 강의 첫 시간부터 결론을 내릴게요.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못합니다. 사람이 못하니까 관여하지 마세요. 그것은 거들면 안돼요. 거든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을 내가 좀 도와드릴게요. 제가 힘이 된다면 좀 보태드릴까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우리는 창조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빽을 쓰고 힘을 쓴다고 해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권한 밖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주제넘게 시비 걸고 간섭하고, ??예수님!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브레이크를 걸고 나서면 안돼요. 제가 이렇게 하니까, 여러분이 듣기에 좀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나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야 사는 보람이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상당히 속이 상하고 기분 더러울수가 있거든요.

 

내 운명을 내가 노력해도 못 바꾼다는 것이 기분 더럽지 않습니까? 상당히 불쾌하고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기분이 좋든지 더럽든지 간에 골로새서 1장 15-17에서 아주 맹렬하게 이야기합니다. 지옥이나 천국이나 모든 만물은 예수님 맘대로입니다. 예수님 자기 맘대로 이미 결정을 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뜻대로 이미 갈라놓은 것을 어느 인간이 ??예수님! 일을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사람은 이리로 가야 하고요, 저 사람은 저리로 가야 합니다?? 하면서 건방떨면서 거기에 관여하면 안돼요. 절대 관여하면 안됩니다. 창조에 관해서는 내가 말할 입장이 못되고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이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대로 알아서 하시면 되겠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아! 배짱 편하지요. 이 사람은. 배짱 되게 편한 거예요. 그런데 이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창조하는 것을 인정치 않고 내 운명은 내가 창조하고, 내 인생이니까 내가 결정해나가고, 내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골로새서 1장 16,17절에 도전합니다. 이것을 마구 비난하고 나서는 겁니다.

 

이것을 막 험담하는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그런 것은 말도 안돼. 그럴수 없어. 그것은 예수님의 횡포야. 우리 인간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있을수 없어. 우리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들고 일어나야 돼. 하나님이 우리의 가치를 모욕하도록 허용하면 안돼지.?? 이런 식으로 대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먼저 이렇게 정답을 내립니다. 골로새서 1장 15, 16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미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확정해 놓으시고, 이 땅에서 섞여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몰라요. 그냥 섞여서 살게 하는 거예요. 나중에 분리가 될 때 예수님 맘대로 분리되는 거예요. 지금 누가 누군지는 예수님만 알고 우리는 몰라요. 어쨌든 같이 섞이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결론적으로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그러면 목사님! 더 이상 이야기할것이 없네요.?? 이렇게 결론 다 내렸으니 집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성경이 상당히 두껍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 17절만 있으면 성경이 한 장도 안돼요. 엄청나게 두꺼운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있습니까?

 

이게 왜 이렇게 두꺼우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6, 17절에 있는 대로 ??모든 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의 그 뒤틀린 심사가 만만치 않아요. 그 반발하는 가운데 누가 있느냐? 지금도 열심히 천국가고 있는 우리가 그 파업에 함께 가담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가면서도 지옥 가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님!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일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모독해도 유분수지 예수님은 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얕봐도 너무 얕본다. 정말! 그러니까 이 성경이 두꺼울 수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대들고 또 대들고, 계속 시비를 건 그 역사의 현장.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처음에 한 것을 기억하는지 시험을 쳐 봐야 겠어요. 문제 나갑니다. 천국가는 사람이나 지옥가는 사람이나 사고방식이 똑같은데 천국가는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정답은? 예수님 맘대로 하는 겁니다. 신자는 이것이 믿어진다니까요. 반발을 하면서도 돌아서서 이것이 믿어진다니까요.

 

반항할때는 열심히 반항하죠. 왜 반항하는가? 우리의 육의 본성이 걷잡을수 없잖아요. 솔직합시다. 우리는 활화산처럼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들끓는데 때로는, 가끔씩은 세상만사 내뜻대로가 아니고 주님뜻대로 되는데 내가 신경쓸 필요가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이 우발적으로 번쩍 떠 올라요.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예수님 하시는 일에 인간들이 달려들어서, (정말 예수님을 뜯어 먹듯이 달려들어서, 뜯어 먹는 다는 표현보다는 사실 죽이지요) 십자가에 창으로 찌르고 못박아서 죽이는 대목도 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선지자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핍박했습니다. 그 긴긴 기록을 하다 보니까, 또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이 고생한 것들을 기록하다 보니까 그것이 이만큼 두꺼워진거예요.

 

이 두꺼운 것을 간단하게 한 두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셔서, 세상이 어떻게 반발하고 반항하더라도 그것마저 주님이 다 익히 아시는 코스라는 겁니다. ??반항은 반항대로 하고, 나의 자비로서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가는 코스가 그 코스입니다. ??원대로 한번 반항해 봐라. 너를 지옥에 보내는가??? 그겁니다. 성도에게는. 지옥갈 사람에게는 ??네 원대로 나한테 한번 아부해봐라. 내가 반드시 지옥보낸다.?? 이것이 지옥갈 사람들의 코스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 맘대로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입니다. ??모든 만물은 주의 뜻대로,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그렇게 인도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말하니까 여러분이 굉장히 믿음이 좋은것처럼 보이는 것같은데 이것을 한번 지워보겠습니다. 이것을 지우고 이렇게 구분되는 것을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누구냐? 신기하지요?

 

남는것이 뭐예요? 아주 정상으로 돌아오지요. 근본? 나는 그거 몰라도 돼.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 돼. 우리 조상? 다 그렇게 살아 왔잖아. 우리 자식들? 다 그렇게 살건데 뭐.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 별거냐 이것이 전부지 라고 아주 생각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골로새서 1장 16, 17절이 투입되면 갑자기 정상적인 사람이 바뀝니다.

 

아니야! 세상이란 것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다 결정났어 라고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딴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늘 그런 것이 아니고 가끔은 그래요. 한 달에 한 5초쯤은 그래요. 세상은 주의 뜻대로 되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만 지워 버리면 정상으로 돌아오죠. 사는 것 뭐 별거냐? 근본 그런 것은 알아서 뭐할거냐? 애 키우고 살면 되지. 죽은 다음의 일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지. 그런것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데.

 

어떤 사람 만나도 지옥과 천당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요. 악수나 먹으면서 인사나 하면서 , ??날이 무지 덥죠. 수박이나 함께 드십시다. 내일 비 온다고 하던데 좀 시원해 지겠네요.?? 이렇게 슬슬 날씨 이야기나 하면서 아주 정상으로 돌아오죠.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골로새서 1장 16,17절이 머리에 딱 떠오릅니다.

 

그러면 아니야! 아니야! 비온다고 그것이 구원이 아니야! 비오건 안오건 간에, 우산을 쓰고 비 안맞든, 우산을 안쓰고 비맞든 전혀 상관없이, 내가 지금 중동지역에 갔다가 탈레반에 잡혀서 총에 맞아 죽으나, 몇십년 더 사나 상관없이, 술집에 가서 술먹고 꽥꽥거리든, 기도한다고 두손을 모으든 전혀 상관없이 구원은 누구 맘대로 된다? 내가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술먹는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예수님 자기 맘대로입니다.

 

예수님 맘대로 입니다. 아주 신기해요. 이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괜히 이런 소리 오래 했다가는 욕 얻어 먹으니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부터 이 정상적인 세상 안에서 인간은 어떤 종교생활을 하는가를, 지금부터 이 성경 전체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뭐는 빠져 있는 상태입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빠진 상태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생활하고, 신앙생활하고, 종교생활 할 때, 그 교회가 얼마나 비 신앙적이며 예수님과 성경과 딴판이고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와서 얼마나 그것이 고상하게 보이는지를, 제가 한국교회와 성경을 비교하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참석을 안 하신 분이 계심으로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되풀이 할 겁니다. 지금 앞에 이야기한 것을 빼먹어 버린 채, 이 후의 이야기만 들어버리면 아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은, 신을 섬길 때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 열심히 매진해야지라고 되어 질 공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뭐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뭐가 나타나요?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아하!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것이 주님보시기에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숨길 수 없는 나의 양심에다 신에 대한 알수 없는 두려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심, 전능하신 신에게 의지하는 의존심들이 짬뽕이 되고 비빔밥이 되어서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괜히 마음이 허전해서 믿어야만 약간의 마음정돈이 될까 싶어서 짬짬이 신앙생활 폼내는 것이었구나 라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 기독교, 종교. 이것은 무서운 허상입니다. 가짜입니다. 십자가마을 수련회 강의를 들어보면 갑자기 못 듣던 특수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강의하면서 강조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용어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늘(매일같이) 가짜다??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표어로 걸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면서 기독교, 종교라는 것을 분석할 때, 골로새서 1장 16,17절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고상하게 종교성을 발췌해서 얼마나 고상하게 꾸미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우리가 그것을 다 이미 아는데 그것을 꼭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는데 본인들의 대다수의 신앙을 제가 방금 이야기한 아니올시다 하는 그것으로 저나 여러분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제가 미리 알고서 그렇게 안하면 안하는거죠. 뭐?? 아닙니다. 그것부터 고쳐야 돼요. 세상이 자기 안하고 싶다고 해서 안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뭘 하고 안하고에 관계없이 자기 감정이 우선입니다. 내 똑똑함이 우선이 아니고, 내 절제력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고 안하고의 계제가 아니라 터져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터져 나오는데.

 

제가 예를 한번 들어 볼까요?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잡혀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온 한국교회가 지금 그사람의 죽음과 잡혀간 사람들의 일로 눈물로 지샙니다. 순교자 하나 났다는 거죠.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장신신학교 나와서 칼빈주의 강의를 그렇게 잘했던 분인데, 남들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그 죽음의 길을,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그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기철도 그렇게 했으니까) 갔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야! 그 배00의 순교자정신을 본받아야 돼.??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린다는 거죠. 신께서 배목사를 순교자로 만든것은 타락한 한국교회 정신차리라고 스데반집사처럼 하나의 선지자적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안타까이 보다보다 보기 힘들어서 제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밤에 모기 한 마리 죽잖아요. 모기 죽으면 애도합니까? ??아이고! 모기야! 아이고! 모기야! 네가 죽었구나?? 하고 애도합니까? 배00씨 모기 한 마리밖에 안된다고 했어요. 왜 사람들이 모기 죽는데 애도하지 않습니까? 그 모기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낼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하찮은 모기에서는 보람있고 참다우며 가치있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 하나님보시기에 가치있는 인생 같은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모기는 죽으면 너는 내 피를 빨아먹으면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면서 잘죽었다고 시원해 하면서, 모기 한 마리 같은 배00목사, 그 인간 죽은것 보고는 그렇게 애도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대체물이라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 없어서 못한 일을, 용감하게 먼저 죽음에 뛰어 들어서 한 그의 선교활동과 이슬람의 악마의 소굴에서 죽는 최후의 장렬한 모습은 평소에 내가 죽어도 저렇게 죽어야 하나님의 종답다 라는 일종의 이미지 같은 것을 발췌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은 모기의 죽음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아주 갸륵하고 의미 있는 죽음으로 보고 사람들은 애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지금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다 맞는것 같은데 그게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할 분이 계시는데, 이쯤되어서 다시 한번 정상적인 생각을 깨버리고 정답으로 갑시다.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뭐라고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은 누가 합니까? 예수님만 하잖아요. 예수님만 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배00규 이야기 안하고 다른 것을 이야기 할 때는 ??목사님! 더 이상 강조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다가도 막상 어떤 고상한 죽음, 갸륵한 죽음, 순교자의 죽음이 나오니까 ??야! 그 사람은 정말 휼륭해!??라는 이미지가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훌륭한 작자는 없습니다. 휼륭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어떻게 된다고요? 예수님 자기 맘대로 하는 거예요. 지금 열 번도 넘게 이야기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다른 창조 염두에 두지 마세요. 그게 성경의 뜻인데 여기에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는 그냥 창조가 아니고 고상한 창조라서 고상한 사람만 뽑아서 천국에 보내고, 더러운 개떡 같은 놈들만 골라서 지옥 보낸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인간들의 창조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윤리, 도덕, 종교, 기독교, 선교, 순교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열이 안날수가 없어요.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인간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니.) 그것을 그림으로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다시 사람 그리고요. 사람 속에는 부글부글이 있어요. 이게 뭐죠? 욕망이죠. 이렇게 욕망이 끌어 오릅니다. 이 욕망에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야지의 인간답게가 딱 떨어지니까, 이 욕망을 절제하면서 살아가요.

 

그런데 우리 속에는 밑에서 욕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고, 그 욕망이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그것을 가지고 자꾸 채우는 거예요. A라는 사람 것도 채우고, B라는 사람의 것도 채우고, C, D 자꾸 채우는 거예요. 지금 배낭이라고 여기고, 내속에 있는 것을 다 열어보면 이것은 203호 엄마의 교육이고, 이것은 옆 동 아파트에 사는 506호 아저씨의 가르침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교훈하신 것이고, 이것은 교회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이 들어 있어요.

 

전부 다 우리는 텅텅 비어 있는데, 내 속에 남들이 어떻게 살았다는 것이 하나, 둘, 배낭에 물건 담듯이 그 수북한 쓰레기들이 담겨서 나라는 것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중에 무엇도 들어오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이런 일이야라는 것도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같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내가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들이 기뻐하는 일을 내가 해줘야 내가 인정을 받아요. 아까 제 숙소에서 TV를 켜니까, 하이킥이라는 드라마에서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는 애가 등장합니다. 부모가 그 애가 신경이 쓰여서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쟤는요.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춰요. 왜 저렇게 춤을 춥니까??? 하니까 소아과 의사가 잘 답을 했습니다.

 

??저 애가 음악을 이해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엄마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애가 눈치를 채고 아, 이게 잘하는 짓이구나 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주위 반응도 아이고 내새끼 잘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19세기 말에 파블로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실험이 뭐냐 하면, 개한테 먹이를 줄때마다 종을 치면서 줬어요.

 

??어이! 멍멍아! 이것 먹어라!?? 이렇게 준것이 아니고 ??멍멍아! 땡!?? 이런식으로 먹이를 준겁니다. 그렇게 먹이를 줄때마다 종을 치니까 어느 때부터는 그 개가 아, 내가 맛있는 먹이를 먹는 때는 종소리가 울리더라는 것이 머리에 딱 새겨지는 거예요. 그래서 먹이를 먹을때마다 흘리던 침이 이제는 종소리만 들려줘도 질질 흘리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파블로프의 유명한 심리실험입니다.

 

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교육한 대로 나라는 배낭속에 그대로 수북히 쌓여 있어요. 쌓여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 쪽으로 그것만 골라서 끄집어내서 아부하고 재롱잔치를 벌이는 식으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돈을 물어다 줘요. 돈!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먹여 살리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하고 종교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종교라는 것은 (이런 것은 어린이들한테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신을 나 혼자 알고 있을 경우를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회 모두가 인정하는 신, 백명이면 백명이 다 동의하는 신이 참된 신입니다. 저는 이것을 강강수월래라고 합니다. 강강수월래 알아요? 긴 옷입고 손에 손을 잡고 노래하면서 돌잖아요. 이 사회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슨 낙으로 사는지 압니까? 사람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살아요. 외롭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아무리 돈많고 아무리 재벌이 되어도, 사람이 외로우면 다 갑자기 불행해져요. 그런데 부도나서 좀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친구야! 고생했지??? 하면서 많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고, 옆에서 격려해주면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혼자 못살고 강강수월래 하는 것처럼, 손에 손잡고 마음이 하나 되어서 살 때 마음에 평안과 평화를 누립니다. 사람이 누구 한사람이 삐질 때 제일 싫어해요. 만일에 이 호텔 305호실에 한 열명이 함께 2박3일을 묵는다 할 때,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면 좋겠지만, 그중의 한명이 삐져서 밥도 안먹으면 나머지 아홉명은 다 속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갈라놓는 것을 싫어해요. 다 같이 지옥가면 다 가고, 천국을 가도 다 함께 가야지 누구는 천국, 누구는 지옥으로 이렇게 갈라놓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하나님도 적당히 타협적으로, 조정과 조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순수증여자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증여란 선물(GIFT)입니다. 순수하게 선물주시는 분, 더 쉬운 말로 해서 “거저 은혜주시는 분”, 이 일곱자를 한자로 줄여서 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류사회가 생각하는 신이란 주기만 하고 보답을 강요하지 않는 분, 베풀기만 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사회도 다 이런 신입니다. 이렇게 강강수월래 하는 사람 위에 신이 있으면 이 신께서 베풀어준 순수증여를 받은 A라는 사람은 그냥 있으면 안되고 그것을 그 옆에 있는 B한테 줘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C에게 또 D에게 주게 됩니다. 그러면 이 증여를 받은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순수증여자 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너에게 거저 주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 우리 조상들인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이사를 가게 되면 그냥 있지 않고 떡을 해서 이웃을 찾아갑니다. ??왠떡입니까??? ??이사왔습니다.?? ??뭐 이런걸 다.?? ??제 호의니까 받아 주이소.?? 옛날 사람들은 그랬는데 요새는 이 떡이 얼마짜리지? 500원 짜리지. 다음에 갚을때 500원짜리로 갚아주면 되겠구나 이래요.

 

요새는 돈과 상품의 교환가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돌아가지만 옛날 모든 것이 종교에 푹 절어서 살아갈 그 시대에는 인정, 사랑, 정성, 자비성, 애정이 담겨 있는채로 이웃과 이웃이 만나서 살아가는 겁니다. 두레마을이죠. ??너의 집에 초상나면 내가 도와줄게. 모내기 할때도 내가 품앗이 해줄게. 허물없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뿐이 아니고 전세계 모든 민족이 일구고 살아온 사회의 힘이 되었던 겁니다. 하나의 힘을 형성했습니다.

 

여기에 불교가 들어오든, 기독교가 들어오든, 무슨 종교가 들어오든 그 기독교와 불교는 다 무엇으로 변합니까? 이러한 자연종교로 다 변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리 되었어요. 다 변해요. 이쯤해서 다시 정답 들어갑니다. 이거 맞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신다고요?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님 맘대로 입니다. 이게 골로새서에 나오죠?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목사님! 말을 들어보니 그런 사회가 그립다. 그런 사회가 더 좋네,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런것 보다는 인정 넘치고, 사랑이 푸근하고요.?? 여러분! 이것이 더 맘이 땡기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봅시다. 사람이 사는 것은 서로 한덩어리되어서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함께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왕 같이 사는 거, 이왕에 호텔방에 한 열명이 묵기로 했으면, 서로 안싸우고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열 명이 있는 중에서 누가 한사람이 토라지면, 종교 떠나고 제사를 떠나서, 나는 기독교 너는 불교 이런 것을 떠나서, 같은 식구, 올케 시누이 동서 사이에 그저 마음맞게 살아 주면 부모님 살아생전에 그것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독교건 복음이건 때려치우고, 형제간에 안 싸우고 우애 좋게, ??너 얼마 부조했나? 5만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뭘 하든 인정과 애정이 담긴 채 서로 하나 되는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이 아닙니까? 종교니, 복음이니, 예수 그리스도니 그런 것 다 때려치우고요. 사람 사는 것은 강강수월래입니다. 다 함께 손에 손잡고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거요.

 

그렇게 화목하려면 무엇이 같아야 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같아야 화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순수증여, 그것이 말이 어려우면 거저 주시는 분, 한글자로 줄여서 신입니다. 못난 자도 거저 주시고, 잘난 자도 거저 주시고. 김수미가 부른 노래도 있잖아요.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짠짠 젠틀맨이다.??

 

모든 인간은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말고 강강수월래 하면 된다는 겁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면 된다는 겁니다. 거저 받은 사람이 다른 이웃에게 거저 주는 겁니다. 얼마짜리냐고 묻는게 아닙니다. 정성이라고 하면서 주는 겁니다. 그러면 받은 이웃이 또 다른 이웃에게 계속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A는 하나님을 통해서 B에게 주고, B는 하나님을 통해서 C에게 주고. 이렇게 서로 서로 돕고 사는 이것이 조선시대의 두레정신, 상부상조, 네것 내것이 없는 사회, 하나님도 하나가 된 사회, 그것이 바로 외롭지 않은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돈많아도 외로운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외롭지 않고 어려울 때 친구들이 많아지고, 좋으면 좋은것도 함께 나누고, 슬프면 같이 울어주는 이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마음의 본성입니다.

 

??우리 다 약하니까, 약한자들끼리 뭉쳐서 힘을 모아서 분열 없이 다툼 없이, 잘났다, 못났다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다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수여자 입장에서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세.?? 이것이 종교를 떠나서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까?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정상을 난데없는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믿는자를 비정상으로 바꿔버려요.

 

이게 바로 천국 가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질문답변) (질문의 내용이 들리지 않네요. 답변만 녹취했습니다)

 

1. 진짜는 인간에게서 찾지 마세요. 찾는 다는 것 자체가 스톱되어 버립니다. 스톱되어 버리면 그것 자체가 절대화 된다고요. 절대화 되어서 남하고 자기하고 비교하게 돼요.

 

2. 인간이 사는 것은 이것 하나로 굳어집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것. 그것을 이웃사랑이라고 보거든요. 세상에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가짜라는 것이 나올 길이 없어요. 이것이 가짜라는 것이 되려면 진짜인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이 개입할때입니다. 가짜라는 생각이 신자는 괜찮지만 불신자 같으면 뭔가 화가 나지요. 동서간에 잘 지내 왔는데, 새로 시집온 동서가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이야기 해 버리면 그 집안 다 깨져 버리잖아요.(*)

 

 

2강

 

 

지난시간에 한 것을 복습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사귀면서 사는데, 여기서는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물어 봤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같으니까 모릅니다. 그렇게 모른채 사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성경에서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모든 세상 만물은 예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뒤에 손 떼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다는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골로새서 1장 16절, 17절)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인간세계만 달랑 남잖아요. 이것만 남으니까 서로 서로가 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강의한 것을 제가 적어 보면 이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을 알아야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같은 인간인데 하나는 천국에 가고, 하나는 지옥에 가게 되거든요.

 

이것은 누구 맘대로 입니까? 이것은 예수님 맘대로 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지워버리면, 천국이나 지옥은 의미 없고 우리가 그냥 하나 되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창조를 모른다는 것이고, 창조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근본을 모르고 사는 겁니다. 이것을 적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창조(근본)를 모른다.

 

2. 인간은 근본을 알고 싶지 않다.

 

두번째가 정말 중요합니다.

별표 네 개. 강조!!!!

 

3.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외로우면 싫다.

사람은 이유 없이 혼자 살기 싫다.

 

4. 정(情)으로 산다.

인정으로 살아요.

정이 그리워. 정에 웃고 정에 울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보다 시집가는 것이 좋고, 애도 낳고, 하나가 아니라 세명낳고 얼마나 좋아요. 정으로 살지 근본이니 뭐니 다 귀찮아요. 그냥 몸과 몸이 부딪히는 그 정으로 사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순서대로 적는 이유는 지금 강의한 이 내용을 누군가 불러내서 그대로 시킬 참입니다. 적은 그대로 하면 됩니다. 남자분도 시키고 여자 분도 시키고.

 

5. 남이 아는 신에 동의한다.

 

정으로 살려면 남과 의견이 일치가 되어야 하니까요. 옛날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시집안간 예쁜 아가씨가 있다면 요새 같으면 남자와 사귀기 위해서 다방에 가든지 나이트클럽에 가면 되겠지요. 그런데 옛날의 양반집의 정숙한 규수는 절에 갑니다. 장옷으로 얼굴을 덮어 쓰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으면 그 뒤에 남정네가 멀쑥하게 서 있다가 자기도 거기서 합장을 하죠.

 

부처고 뭐고 그런 것에 관심 없고 그 여자를 사귀기 위한 거죠. 이렇게 두 손 모아 합장해서 부처 앞에 비는 것이나, 두 손 모아 꿇어 앉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이나, 남의 종교에 동의함으로써 자기가 땡기는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정으로 사는 겁니다. 신이 뭐냐 하는 것은 물을 필요도 없이, 내가 정이 가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무조건 동의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6. 화목을 이룬다.

 

화목을 이루면 정으로 산다는 것의 성취를 보는 겁니다.

 

7. 화목된다는 이것이 진리다.

 

요한복음의 나는 진리다 그런 것은 다 필요 없어요. 나하고 마음 맞춰 사는 그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제가 안 지웁니다. 곧 강의를 시킬 겁니다.

 

8. 이것이 나의 종교다.

 

나의 종교이고, 우리가정의 종교다.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1. 사람들은 근본을 모른다.

2. 근본을 알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근본을 알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몸에 관한 겁니다. 내 몸이 외로우면 싫어요. 창조고 신이고 우주의 비밀이고 다 귀찮아요. 몸이 힘들면 다 힘들어요. 아픈 것도 힘들지만 아플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그것이 더욱더 내 맘을 아프게 해요.

??많이 아프냐? 물 떠줄까? 약 사줄까??? 이런 이야기를 옆에서 누가 해주면 그것이 굉장히 큰 위로가 된다고요. 사람이 외로움보다 더 큰 아픔이 없어요. 외로우면 자살하잖아요. 자기 맘을 맞춰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의욕을 상실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우니까 쉽게 말해서 땡긴다는 말이죠.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나와서 강의하실 때 정 힘들거든 동그라미 친 것만 이야기하세요.

 

1. 모른다.

2. 알고 싶지 않다.

3. 땡긴다.

4. 님 그리워.

5. 같은 생각.

6. 화목이 된다.

7. 화목이 진리다.

8. 그 진리가 나의 종교이고 나의 안식이다.

9. 이 종교로 미래까지 보장함.

10.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잘 보면 인간은 창조를 모른다에서 마지막에 무엇으로 끝납니까?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로 끝납니다.

 

전부다 1번부터 10번까지 화살표가 어디로 꽂힙니까? 결국 뭡니까? 나! 나인데 뭘 몰라요? 10번에서 11번으로 넘어가지 말고 1번으로 돌립시다. 10번이 나의 운명인데 뭘 모른다? 창조도 모르는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근본은 알고 싶지 않은채 나의 운명이고 세 번째 나의 외로움이죠. 그러니까 나의 운명을 3번과 연결 지으면 뭡니까? 나는 결국 내 몸만 편하면 최고라는 겁니다.

 

이 열가지가 첫시간에 했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김대식 선생님이 나와서 강의하세요. 1분정도의 시간에 다 할 수 있습니다. 강의의 주제는 종교란 무엇인가? 김대식 선생님을 궁굼해 하는 분들이 전 세계에 많으니까요. 저는 잠깐 빠져 있겠습니다.

 

 

(김대식선생님의 강의)

 

1. 인간은 창조를 모른다.

2. 인간은 근본을 알고 싶지 않다(***).

3. 사람들은 외롭다.

4. 정이 그립다.

5. 남의 신에 무조건 동의한다.

6. 그래야 화목한다.

7. 화목이 진리다.

8. 이 진리가 안식이고 종교다.

9. 이 종교가 미래를 보장한다.

10.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해 봐야 확실하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강구만 집사님이 나와서 해보세요. 그냥 읽기만 해 보세요. 저는 진도 많이 나가는것 싫어요. 하나라도 확실하게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강구만 집사님의 강의)

 

1. 인간은 창조(근본)를 모른다.

2. 인간은 근본을 알고 싶지 않다(***).

3. 사람은 외롭고

4. 정이 그리워서

5. 남의 신에 동의해서

6. 화목을 이루고

7. 그 화목이 진리고

8. 종교이며

9. 나의 미래이며

10. 나의 운명이다.

 

참 잘했습니다.

김도영 집사님 해보세요.

 

(김도영 집사님의 강의)

 

1. 인간은 창조(근본)를 모른다.

2. 인간은 근본을 알고 싶지 않다(***).

3. 사람은 외롭다.

4. 정이 그립다.

5. 남의 신에 동의한다.

6. 그래서 화목을 이룬다.

7. 그 화목이 진리가 된다.

8. 그 진리가 종교가 된다.

9. 그 종교가 나의 미래까지 보장한다.

10.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잘 하셨습니다. 특히 두 번째요. 신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왜 알고 싶지 않지?라고 묻지도 않죠. 그렇다면 이 몸이 3번에 일치되니까 미래까지 보장된다는 말은, 내몸이 이세상에서 편하게 살았으니까, 아마 미래에도 내 몸 편하게 하는 그런 천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걸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나 중심의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겠죠. 이것이 7번의 나의 종교이고, 이것이 8번의 진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어떤 심오한 철학책, 어떤 심오한 진리책, 불교든 뭐든 어떤 것을 해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한번 더 할까요? 어떤 예쁜 규수가 절에 가니까 불교에 관심도 없는 남정네들도 줄줄 따라 가서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 합니다. 그것이나 오늘날 교회 와서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것이나, 관심사는 사람이 정이 그리우니까 하나 되기 위해서, 나를 위한 미래, 나를 위한 진리, 나를 위한 편안함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렇게만 되면 이것을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이 행복을 깨는 것을 사람들은 ??악!(惡)??이라고 봅니다. 행복을 깨는 것이 악입니다. 행복을 깨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가? 행복이란 화목한 단합이고 이것을 깨는 것이 악입니다.

 

이 행복을 깨는 것이 어떤 종류가 있는가?

 

1. 부모공경 안하기.

2. 우리 가족 중의 하나가 탈레반에게 살해당함.

3. 간음당하기.

4. 도적질 당하기.

5. 사기 당하기.

6. 내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욕심 올라오기.

 

여러분! 이 여섯 가지 어디서 많이 본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십계명에 나옵니다. 부부십계명도 있고 십계명이 좀 많습니다. 십계명의 앞에 있는 1-4계명까지를 고려하지 않고, 5-10계명 까지를 생각해 버리면,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사람들의 행복, (아까 1부터 10까지 그 절차가 있었지요?) 열 가지 단계를 거쳐서 오는 이 화목한 단합에 반대되는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누구 중심의 악입니까? 나중심의, 내 몸 중심의 악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부모공경 하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화목한 행복을 깨는 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우리 식구중의 누구 하나라도 죽기를 싫어해요. 왜? 화목한 나의 행복을 깨기 때문입니다. 간음당하고 도적질 당하는 것이 싫어요. 화목한 가정을 깨기 때문이죠. 사기 당하는 것도 싫어요. 화목한 나만의 삶을 깨잖아요. 내속에 욕심이 많은 이것도 내 속의 악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문제 나갑니다. 평소에 이것을 안 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돼요? 행복한 사람이 되지요. 이 행복한 사람의 미래, 죽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갈까요? 천국 간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종교입니다. 모든 교회 나가든, 천주교에 가든, 절에 가든, 뭘 믿든지 사람의 사고방식에는 바로 이런 악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지금 나의 행복한 단합이 더욱더 증가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누구의 몸 중심이라고 했습니까? 내 몸 중심이죠. 만일에 연세가 한 80세가 되었다고 합시다. 내 몸이 80세가 되었을때 그 80세된 분이 단합과 행복을 추구했는데, 자기 스스로 5-10까지의 계명을 지킵니까? 못지킵니까? 몸이 불편한데 어떻게 지킵니까? 못지킵니다. 자꾸 살고 싶어 하고, 자식들이 잘 안찾아 온다고 짜증 잘 냅니다.

 

행복을 방해하는 악들을 내 몸이 부실하면 지켜내지 못합니다. 쉽게 해 봅시다. 자식들이 부모집에 가는 것이 부모공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공경을 해야 행복을 이루는 가정이 되는 선한일임을 아는데, 자식이 그것을 알면서도 여름철에는 부모 집에 가기가 싫어요. 제가 지금 예를 드는 겁니다. 가기 싫은 이유가 부모 집에는 에어컨이 없어요.

 

에어컨이 없으니까 그 집에 가도 대화하기가 짜증이 나요. 옛날 금성 선풍기 덜그덕 덜그덕 거리면서 돌아가고, 땀이 죽 흐르면 한쪽은 땀 닦아야 되고, 그러면서 늙으신 부모님의 하소연을 다 들어줘야 되고. 더워서 탈출하고 싶어진다는 말이죠.

 

??야가 오랜만에 집에 와가지고 너는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나???

??아임니더.??

??근데 와 니 저녁도 안하고 집으로 도망치려고 하노???

??그게 아이고 좀 덥네요.??

 

??야야! 그래도 늙은 이 부모는 이 더운데서 한여름 보낸다. 그래도 너그들만 기다린다. 휴가철만 되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강냉이 삶아놓고, 감자 삶아놓고, 가는 편에 줄라꼬 고추 따 놓고 이래 다 하는데 네가 그라나? 부모한테는 신경질 못내니까 아아덜 한테 조용히 하라고 나가 놀아라고 큰소리나 치고. 느그도 이 짧은 휴가인데 마 얼굴 봤시믄 됐다. 마 고추나 싸들고 가라마??

 

??너그들 때문에 부모님이 가라카잖아.??

??엄마! 어디 가는데???

??풀장이나 가지뭐!??

 

화목한 행복을 위한 부모공경이라도 날씨가 더울 때는 이게 안 됩니다. 안되면 여기에 행복이 깨어지는 악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돌아오고 난 뒤에 부모가 저 애가 십년전만 해도 안저렇게 했는데. 그 때 부모가 뭐라고 합니까?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합니다. 늙어서 죽으면 어디 갑니까? 아까 몇 번에 그게 나왔습니까? 미래가 보장된다가 아까 몇 번이었어요? 9번이었죠. 9번.

 

야, 부모 공경하는 자식 믿다가 자식도 이제 소용없구나. 하지만 나는 부모 공경하라고 잔소리했기 때문에 그 덕으로 내 미래는 아마 천국에 갈걸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그러면 부모공경하려면 자식들은 통밥을 잡고 다 알기 때문에 부모집에 갈 때 그냥 갈 것이 아니라 하이마트에 가서 에어컨을 하나 사들고 가는 겁니다.

 

??어므이! 어떻십니꺼???

??야아! 이 바람이 야야! 시원하다!??

 

뭐가 됩니까? 부모공경 되지요. 그때 다시 다운되던 행복이 업 되지요. 그러면 행복한 가정이 되면서 악은 일단 제거 되었습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가 제가 아까 이야기한 1-10까지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부모집에 에어컨 살 돈이 없다고 할 때 교회와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부모공경 해야 할텐데, 부모님집에 에어컨이 없습니다. 부모님 에어컨 하나 살정도의 돈은 주셔야겠습니다??라고 하죠.

 

아까 자기 종교가 몇 번입니까? 화목한 것이 진리고 그 진리가 곧 종교다. 6번, 7번이 해당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들어와도, 불교가 들어와도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의 몸 편한 것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기몸 안편하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괜히 부모공경 안한다고 땀흘려 일하는 자식이나 험담하고. 이 늙은 내가 죽어야지. 내가 살아서 자식들 다 죄인 만든다. 내가 죽어야 돼. 자식들 죄인 만들지 말고. 내가 죽으면 자들 저희끼리 얼마나 행복한데 이 쓰레기 같은 내가 아직 살아 있어서 안돼.??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착하고 거룩하냐 이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의 미래는 뭡니까? 천국이 보장되는 거예요. 방금한 1-10까지의 단계를 다시 한번 적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진도 빨리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모른다.

2. 알고 싶지 않다.

3. 외롭다.

4. 정이 그립다.

5. 살고 싶어 남의 신에 동의.

6. 그래서 한마음(화목)되기

7. 이것이 진리다.

8. 이것이 종교다.

9. 이것이 미래보장

10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이것이 1-4계명의 십계명을 대신해서 그 뒤에 5, 6, 7, 9, 10계명까지 이렇게 건너가는 거예요. 여러분은 십계명을 다 아시잖아요. 인간은 1-4계명을 빼버리고 그 빈자리에 나 중심의 10가지가 들어와서 5-10까지 되어서 이런 식으로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종교생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모른다. 몰라도 돼. 나 외롭다. 나를 안 외롭게 해줘. 그러면 뭐든지 다 해줄게. 내가 안외롭게 해줄게?? 이것이 1-6까지입니다. 사람이 너무 욕심 많아도 자기가 괴로워요. 나의 유전자가 왜이래? 내가 자꾸 욕심을 크게 부려. 욕심 많아도 곤란하다고요. 남들은 고만고만하게 사는데 욕망이 한정이 없어요. 어제 밤에 별관에서 자는데 바로 밑에서 아주머니 둘이서 술을 잔뜩 먹고 ??내가 운전한다!!! 내가 운전해!!!?? 남자 둘이서 ??이게 와이카노? 술먹고 네가 왜 운전을 해??? ?????????

 

밤새 잠을 못 잤어요. 새벽 세시가 되었는데 또 꽥꽥 거리고요. 그 사람들은 1-10까지에 포함된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 저 진리에 대해서.?? ??진리고 나발이고 내 몸 좋으면 그게 진리지 다른 진리가 어디 있어??? 알고 싶지도 않죠. 특히 2번. 알고 싶지 않다니까? ??그런데 왜 외로운데??? ??그냥 혼자 있으면, 그냥 외로워 그냥.??

 

혼자 노래방 가도 재미없고, 혼자 영화 보면 그것도 재미없고, 같이 영화 보러 가고, 같이 노래방 가고, 밥을 먹어도 혼자 먹으면 야윕니다. 싸우든 말든 부부가 같이 먹으면 살이 쪄요. 이상해요, 하여튼. 외롭고 그립고. 이 자리에다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창조의 근본을 이야기합니다. 이 자리를 치워버리고 뭘 넣는가?

 

첫 번째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아까 봤던 그 1-10까지의 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나 중심이죠. 나. 내가 중심인데 여기에 새로운 나가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네 번째 계명이 뭐냐 하면, 안식일이 나오죠.

 

안식일은 뭐냐? 제사입니다. 제사는 뭐냐?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 외에 다른 신은 누가 좋아서 만든거예요? 나 좋으라고, 나를 위하여 만든 다른 신이 들어가는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해서 다른 신에 대해서는 제사를 통해서 죽여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꺽어 버립니다. 꺽어 버리고 그 다음에 ??부모를 공경하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5-10까지의 계명은 누구 좋으라고? 내 몸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써야 합니다) 사명입니다. 사명! 아하! 주님께서 나를 죽이고 나를 새사람으로 새로운 창조를 하신 것은 이런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신거구나. 나 좋으라고 한것이 아니고 사명을 감당하는 거예요.

 

여기서 사명과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방금 사명이라고 했고, 전에 1-10까지 적은 것은 내 몸 편안함이라고 이야기 했지요. 이 둘의 차이는 사명은 새 창조가 나옵니다. 늘상 새로운 것이 나오는 반면에, 내 몸 편안함이란 보수주의입니다. 기존의 자기 것을 변명하고, 사수하고,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이 안나와요.

 

목사가 설교를 하게 되면, ??목사님은 우리교회 처음 오셨을때의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변한 것이 없습니까??? ??나는 목사다. 내가 당회장을 해서 이 교회 숫자가 얼마나 불어났나??? 이것은 뭐예요? 보수주의죠. 사수하는 거죠. ??그러면 목사님! 당신이 이 교회 당회장으로 온 것은 내 몸 전문직업인으로 편하기 위해서죠. 자기 몸 편하면 자기가족들이 편하고 교인들이 있으니까 정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러 떠나는 이유가 정이 그리워서 갑니다. 하! 정말, 이거 아는데 오래 걸렸다. 선교사들이 가는 것은 정 그리워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그리워??입니다. 한국에서 당회장으로 오라고 하는 것을 거부한채 선교사로는 잘 안갑니다. 한국에서 부교역자로 갈데가 없어서 선교사 갑니다. 말 안 통하는데 가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일단 말이 통하는데를 가려니까 자리가 없지요.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못하고 그리움에 사무쳐서 살거든요. 이런 좋은 말을 할때는 좀 적어 놓으세요. 사람이 밥을 못 먹으면 훔쳐서라도 먹고 살지만, 배신을 당하면 자살해 버립니다. 사람은 사랑에 배신당하면 자살해 버려요. 돈 10억 있고, 20억 있어도 사랑에 배신당하면 죽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문제냐???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수 없어요. 남편이 월급준다고 해서 그것이 가정이 아닙니다.

 

예뻐 해줘야 돼요. 당신 없으면 못살겠다고 정을 표시 내 줘야 돼요. 둘 다 되면 너무 오지랖 넓은 것이 되고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있어야 되거든요. 정을 내야 그것이 가정입니다. 사람은 별게 아니에요. 외로워서 울고 배고프면 짐승처럼 먹을 것을 찾습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이 나와요. ??종교를 찾아서 빌어요. 외롭지 않게 해 달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

 

사랑받는 재미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먹고 사는 일에 힘들지 않도록 해 달라는 이 두 가지 빼놓고 뭐 다른게 있습니까? 사람은 정에 굶주리고, 돈에 굶주리고 이 두 가지를 빼놓고 말할것이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남자가 경마나 그 밖의 도박에 빠지고 스포츠에 푹 빠지는 이유가 뭡니까? 몰입할수 있는 다른 대상이 없어서 그래요. 한창 연애할 때는 남자가 자기 좋아하는 취미나 스포츠까지 다 끊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뭐고? 네가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한다. 네가 가고 싶은데 내가 다 보내줄게.?? 이렇게 나옵니다. 처음에 연애할 때는 자기 자아를 부인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여자를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면 그것으로 끝나요. 챙길 것을 챙겨버렸는데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사람은 정에 굶주립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아이들은 엄마의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자아가 분열되어 나온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끊어짐으로 어머니의 포근함을 그리워하면서 어머니의 대체물을 찾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엄마를 찾아가려니 아빠가 저지를 한다. 그것이 오디푸스 콤플렉스다. 아빠와 아들이 경쟁자가 되어서 아빠 하나를 차지 하려고 한다.??

 

아빠가 ??엄마를 넘보지 마!??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오줌을 똑바로 누고, 너는 밥 제자리에 앉아서 먹고, 밥풀 흘리지 말아야지.?? 이러한 윤리적인 모습을 띠면서 ??이제 너는 엄마는 잊어버리고 네 짝은 네가 알아서 찾는 식으로 너 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게 된다는 식으로 프로이드의 이론이 진행됩니다.

 

인간의 머리에는 뭐가 담겨 있습니까? 이것은 나쁜 일, 이것은 좋은 일. 그것을 통해서 자기 몸 편한대로 살아가다가 부모를 떠나면 그 외로움을 가정이라는 대체물로 또는 다른 대체물로 찾는 거예요. 찾아서 내 몸 위주의 외로움도 덜하고 밥도 먹을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미래까지 보장되고, 자기에게 해가되지 않는 것을 위해서 새벽으로 밤으로 교회와서 그저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 남편 사고 안나게 해주시고, 우리 자식 말썽 안나게 해주시고.?? 이것이 전부다 뭐냐 하면, 내가 확보한 행복이 깨어지는 것이 싫다는 말이죠. 교회 가서 기도할 것이 그것뿐입니다. 돈과 사랑. 그것 외에는 달리 기도할 것이 없어요. 엊그제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욥기를 강의 했거든요. 마귀가 하는 말이 ??이 세상에 이유 없이 교회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하나님! 이 세상에 이유 없이 교회 가는 사람 없습니다. 다 자기몸 편하기 위해서 갑니다.?? 욥이 돈 되고 사람 되거든요. 돈도 있고, 몸도 건강하고, 가족도 평안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겠지 이 세상에 이유 없이 교회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자기 챙길것 챙기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라고 마귀가 이야기를 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없다고 보나???

??나는 없다고 봅니다.??

??나는 있다고 보는데.??

??그런 사람 누구입니까???

??욥을 봐라!??

??욥은 이유없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다가 ??이유있고 교회 온 사람은 나가주세요??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유 달고, 얻고자하고, 뭔가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다 교회에서 나가주세요?? 하는 이야기 하고 똑같습니다. 까닭없이 이유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릴수 없는 입장.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로운 창조, 끊임없는 창조입니다. 사명에서는 새 창조가 나오고, 내 몸 위주로 하면 사람은 보수주의가 돼요. 옛날에 나도 한가락 기도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를 지키고, 소극적으로 이것 깨지면 안 돼. 이것 깨지면 안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로울 것이 없어요.

 

부부사이에서 힘든 것이 있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새로운 것이 계속 나오면 여자는 부부생활 할 맘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여자한테 새로운 면, ??당신에게 그런 면이? 그렇게 좋은 솜씨가??? 이렇게 자꾸 새로운 면이 나올 때는 참 신기해요. 뭐든지 사람이 옛날 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참 서글픕니다. 하지만 옛날 것이 회상이 안 될 정도로 새로움이 새록 새록 나와야 돼요.

 

아까 제가 이야기하다가 말았습니다만, 어떤 목사가 날마다 새로움이 나와야 할텐데 새로움이 안나오니까 교인들이 짜증을 내는 거예요. ??목사님은 사명을 받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밥이나 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사명? 그런 것이 어디 있나? 내가 여러분을 통해서 밥이나 먹고 살면 되지.??

 

이러면 그 사람은 다른 종교, 까닭있는 종교, 마귀 손에 잡힌 그런 주의 종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이 어떤 것이 나오는가? 10분 쉬면서 나에게는 어떤 새로운 것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20대에는 새로운 것이 나와요. 그런데 90넘어서 새로운 것이 나오기가 상당히 힘들 겁니다.(*)

 

3강

 

 

강의 시작합시다.

 

제가 일 번부터 십 번 할 때 처음에 모른다 했지요. 처음에 근본에 대해서 모른다 했는데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왜 모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가르쳐줬어요. 제가 이번 시간 강의하는 게 뭐냐 하면, 아까 내 몸 위주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새 창조, 사명. 사명하고 차이난다 이렇게 했습니다. 사명에서는 새로운 창조고, 내 몸 위주는 보수주의죠. 지키려고 한다 말이죠.

 

보수주의 지키려고 할 때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첫 번째가 모른다 했거든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모른다는 게 정상인 게, 이게 남한테는 안 알려주고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집니다.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려면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언약 백성, 하나님의 언약이 어려우면 약속으로 고칩시다. 약속된 백성에게만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내산 꼭대기 구름 위에서 누굴 만납니까? 모세가 올라가서 누구와 만나요? 진짜 여호와 하나님하고 만나잖아요. 다른 민족, 단군의 자손한테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까지 단계에서 첫 번째 모른다죠. 두 번째가 뭐였습니까? 모른다. 그 다음에 뭡니까? 알고 싶지 않다에요.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게 있으면 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약점을 스스로 제거하려는 본성이 있어요. 저거 내 모른다. 하면 그 자리를 피하면 모르는 무식하다는 아픔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근본에 대해서 모르면 그냥 기피하는 거죠. 그냥 알고 싶지 않다. 기피죠. 그냥 모른다. 두 번째 자동적으로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언약백성,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어요. 도망치는 걸 어디다 도망쳐. 이게 어디다 도망쳐. 하고 도망 못 치게 꽉 잡아서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 그때는 그들은 모른다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하면,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뀌어요.

 

다시 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 10분간 쉬면서 새로운 창조가 여러분 속에 나왔는가 검토하라 하니까 갑자기 간식이 새로운 게 들어와 버려요. 간식이 새로운 게 아니고, 새로운 창조가 여러분 속에서 나왔습니까? 이래 이야기했다 말이죠. 제가 이렇게 물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만약에 공부를 하는데 새로운 수학공식을 몰랐었는데 새로 안다.

 

이런 걸 아는 게 아니고, 이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열 가지 내용에서 없었던 것이 새로운 게 나온 거예요. 기존의 열 가지에서 안 들어있는 새로운 거. 이것은 바로 신학적으로 언약내용인데. 하나님이 알려줬고 성령으로 알려줬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새롭게 하는 것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라는 투로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내가 알려고 애썼더니만 아는 게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두 번째, 알고 싶지도 않은데 기피하고 싶었는데 뭔가 알게 된 것.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직장에 있던지 간에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여러분에게 튀어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아하, 세상만사는 예수님 지 마음대로 하는구나. 그런 언약, 새 언약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 짧은 수련회기간에 언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다 할 수는 없지만 제가 군데군데 그 알맹이 같은 것, 핵심만 이야기합니다. 언약이란 뭐냐? 기존의 열 가지 내용 속에 포함되지 않는 외부에서 주는 건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알고 있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해줍니다. 그래 되면 우리는 모른다에서 안다가 되고.

 

두 번째 봅시다.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뀌고, 두 번째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여러분 말 좀 해보세요. 내가 여러분 축 처져 앉아 있으니까 힘든데. 두 번째 뭐라고 했어요. 알고 싶지 않다였지요. 우리 권사님 수고해주세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뭐냐? 억지로 알게 해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꾸 오해하기를 나는 안다. 이제부터 즐겁게 하나님 알아 가야지. 이런 인간 없습니다. 알아도, 알긴 알겠는데요. 저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또 도망칩니다. 도망치면 억지로 알게 해 줄 게가 나옵니다. 억지로 알게 해 주시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개시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어디로 갑니까? 내 몸은 보수주의지만 하나님은 보수주의 같은 내 몸을 통해서 언약 내용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사명으로써 그게 튀어나오도록 해주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처음부터 근본 되신 주님의 뜻이 강제로 우리를 사용해서 우리를 활용해서 자신의 뽑아낼 것은 자기가 뽑아내는 식으로 우리를 평생 동안 다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있으면 얻어터지게 돼있습니다. 내가 나를 얻어터지게 때리지 마시고. 내가 날 때리지 마세요. 가만있으면 우리는 모른다. 두 번째, 알고 싶지 않다. 세 번째 뭡니까? 다른 분 이야기하세요. 세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김경숙 권사님, 세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정 그리워죠. 간단하게 정이 그립지요.

 

그러면 이걸 강제로 뭐 하겠어요. 정 그립다. 하는 보수주의적 경향을 버리고, 나에게도 새로운 게 있네. 라는 기쁨을 줍니다. 여러분들이 새 차 바꿀 때 기쁘고, 새 집 바꿀 때 기쁘고, 새 티비 바꿀 때 기쁘고, 애들 새 자전거 바꿀 때 기쁘고, 새 신발 바꿀 때 기쁘죠. 신발 새로 살 때. 강아지도 새로 살 때 기뻐요. 수련회장도 새로 바꾸니까 좋잖아요. 내년 또 하고 내년 또 하고 오년 하면 이것도 지겨워요. 또 딴 데 가야 돼.

 

새로운 게 나오면 기쁜데 사람은 정 그리워하고 있다가 내가 원하는 정, 내가 원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 하다가 갑자기 열 가지 단계에 포함하지 않는 낯선 단계가 새로운 게 발생되면, 우리는 그 순간 큰 기쁨이 몰려옵니다. 야, 내가 성도 맞구나! 내가 오늘밤 죽어도 낙원에 가겠네. 왜?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기쁨이 등장하니까.

 

그 기쁨이 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기쁨이 언약 내용이에요. 그 언약 내용이 뭐냐 하면, 그겁니다. 세상만사는 예수님 마음대로 되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이걸 적어서 여러분 기쁜지 한번 시험해 보세요. 세상만사는, 우리 미래 것입니다. 우리 미래를 보장, 우리 세상만사, 미래. 다 예수님 마음대로. 이래 적었다 합시다. 같이 읽었다 합시다. 기쁩니까? 안 기뻐요. 안 기뻐요. 안 기쁘지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그래 예수님, 니 마음대로해라. 그래, 니 잘났다. 나도 잘났다. 이래 된다 말이죠. 안 기쁜데 언제 이것이 기뻐지냐 하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될 때, 그때 야, 세상만사는 내가 공연히 걱정했구나.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내가 왜 부질없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지. 난 기도하면 되는 줄 알았고, 금식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말짱 소용없구나. 세상만사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다 되게 돼있는 걸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 라는 새로운 것에 창조되는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수련회 하면서 마지막 날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자기의 구원의 근거를 자기의 손에서 찾지 마세요. 이거는 시험 듭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우리 바깥에 있어요. 십자가가 구원의 근거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와 상관없이 구원은 내 안에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을 전에는 그걸 몰랐었는데 내 바깥에서 이미 내 구원이 확정됐다는 그걸 알았단 말이죠. 알지만 우리의 내 몸 중심은 고집이 세서 돌아서서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수련회 때만 알고 그 다음부터 잊을 랍니다. 그런데 내 하는 일이 가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새로운 일이 하나님이 날 통해서 일한다는 걸 깨달을 때 난데없는 큰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뭐라고요? 역시 나는 착해. 이게 아니고, 역시 나는 열심히 기도한 보람이 있어. 이게 아니라 기도하든 착한 것 관계없이 뭔가 주님께서 나를 주무르는구나. 나를 놓지 않는구나. 이걸 깨닫는 새로운 것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거예요.

 

이게 문제 들어갑니다. 제가 쉬는 시간에 여러분 하는 일 중에서 새로운 것이 뭐가 있습니까? 물으라고 여러분한테 점검해보라고 했는데, 그 새로운 게 뭐였습니까? 자, 지금까지 강의 내용이 그 새로운 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심이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그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 뭐, 사명 감당한다고 두 명 전도한 걸 열 명 늘이는 게 그게 새로운 게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누가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 이게 새로운 겁니다. 나와 상관없이 누군가 내 허락도 없이 내 몸이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새로운 겁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탕자가 집 나갔습니다. 재산 날렸습니다. 몽둥이 들고 기다릴 줄 알았지요. 몽둥이 들고 자기를 기다릴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새 옷에다가 새 가락지에다가 소를 잡고 잔치를 나를 기다릴 줄이야! 이것은 예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죠. 그 새로움이 탕자를 기쁘게 한 겁니다. 그런 새로움.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묻지도 않고,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미리 장만한 것을 놀랍게도 새롭게 느껴지도록 하는 새로움.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부모공경, 이웃사랑,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그런 걸로 등장해요. 욕심내지 않고 그런 걸로 등장한다 이 말이죠. 이게 수련회에요. 여러분들 절에 가면, 이래 못합니다. 지금 불상에다 탑돌이하고 있다고. 여기 탑 있데요. 거북이 탑. 앞에서 빙 돌고 돈이나 툭 던지고. 십 원짜리 동전이나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던지고. 그저 재수 좋으라고.

 

제가 아까 했지요. 재수 좋으라고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가정, 열 가지 다 포함되어 있죠.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가정 화평하고. 해돋이 가서 뭐 빌었습니까? 우리 남편 사업 잘되고, 몸 튼튼하고, 술 좀 줄이고 그저 그거 비는 겁니다. 보름달 뜰 때 빌고, 해 뜰 때 빌고, 틈만 나면 빌미 대고 다 빌고. 그 비는 거, 우리는 욕하지요. 그럼 우리는 그럼 거 안 빌고 집구석에 앉아 있어도 뭐 빕니까? 맨 똑같은 것 빌어요. 교회 가도 그거 비는데.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까닭 있는 이유 있는 하나님 섬기기 아닙니까.

 

욥은 까닭이 없는데 이유도 없는데.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는 이도 하나님인데 우리는 교회 나갈 때마다 까닭을 가지고 들어가요. 뭔가 이것만큼은 이번에 이루고 말리라. 뭔가 이것만큼은 금식해서 성취하리라. 뭔 까닭이 있어요. 그것은 결국은 아까 열 가지 단계에 해당된다 말이죠.

 

이쯤에서 열 가지 단계 다시 한번 또 갑니다. 여러분 지겹다고 욕해도 할 수 없어. 다 외울 때까지다, 씨. 다 외울 때까지. 나도 못 외우는데 자꾸 외워야 돼. 일 번. 이거 빨간 걸로 합시다.

 

1번, 근본을 모른다. 2번, 알고 싶지 않다. 3번, 정 그리워. 네 번째 뭐였습니까? 아, 3번 틀렸다. 3번이 외로움. 외로움을 이길 수 없어. 너무 외로워. 네 번째, 정 그리워. 다섯 번째, 종교로 하나로 만드는 것. 여섯 번째, 그래서 뭐가 됩니까? 화목 됐죠. 한 마음. 일곱 번째, 그 하나 마음된 걸 가지고 이걸 종교고. 여덟 번째, 그것이 뭡니까? 한 마음 이것이 진리고, 진리라 하는 것은 확고부동한 거죠. 이 진리가 뭐가 됩니까? 종교가 되고. 아홉 번째는 쉽지요. 종교로써 나 죽고 난 뒤에 미래보장. 나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아마. 왜? 나는 행복했으니까. 열 번째,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이것 전체가 예수쟁이든 예수쟁이 아니든 다 갖고 있어요. 이걸. 전부다 이거 안에서만 움직여요. 이게 아이 엠 어 나에요. 내가 이거라고. 내가 이거에요. 이것뿐이에요. 여기서 이래 되면 뭐가 되냐 하면, 내가 나 지키기에요. 이게 종교를 통하든 신을 빌려오든 예수를 빌려오든 성령, 삼위일체 다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내가 나지키기입니다. 화살표가 나한테 와요. 이걸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걸 주체라 하지요. 이걸 주체라 하거든요.

 

이것을 누가 다루신다? 이것을 외부에서 이게 난데 나. 이게 나다 말이죠. 전체를. 난데 이것을 누가? 외부에서 가지고 노는 거예요, 이걸. 다루시는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 가지고 노는 분을 우리는 뭐냐? 이게 바로 근본입니다. 근본,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새로운 창조가 나와요. 여기까지 아시겠지요.

 

자, 이거 안다고 하고 다 지웁니다. 새로운 창조만 놔두고 다 지웁니다. 다 지우고 새로운 창조가 그림으로 그리면, 새로운 창조가 나, 나를 다룹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창조는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목적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이게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사십 살 때, 이거 열 살 때, 이거 오십, 이거 구십, 이거 백 살. 백 살까지 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있다 하면, 이게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스키장에 리프트카 달리듯이 리프트카에 타서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쭉 가면서 이게 어디로 갑니까? 이게 하나의 목적이 있는 거예요. 그 목적이 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17절. 뭐였습니까? 세상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거 목적이 뭐냐? 똑같이 살아도 한쪽은 어떤 사람은 천국에 한데 모아놓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한데 모아놓습니다. 그런데 천국 모아놓고, 지옥 모아놓는데 이거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살아오면서 우리가 하는 겁니까, 우리 행함입니까? 아니죠. 외부 아닙니까. 외부니까 외부는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 못하잖아요. 외부에서 맛보기 식으로 십대, 이십대, 삼십대 맛보기 식으로 장차 천국과 지옥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준 거예요.

 

보여주다가 그때는 희미하게 보이지만 나중에 죽고 난 뒤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때는 실제로 보고 예수님의 창자국을 실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창자국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이 철딱서니 없는 매달려 있는, 매달리면서 오직 나.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오직 나만 생각하면서 나를 위하여 대신 나만 챙기면서 평생 동안 나밖에 모르는 나의 행복, 나를 위해서 이 외부에 있는 케이블카에서 대신하여 대신, 대신, 대신. 대구신학교 말하는 거 아닙니다.

 

대신, 대신, 대신하여 다 십자가에 피 흘렸다는 것을 마지막 가서 천국 가서 가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우리의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주님한테 던지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주님의 덕분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한 것 없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은 주님께서 내 대신 기도해서 이루어진 성과입니다. 이래 나오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이십대, 삼십대 살아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맛보기 식으로 딱딱 보여준 거예요.

 

자식이 아프다든지, 남편이 사업이 잘 안 된다.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교회가 문제가 있다든지 이런 걸 통해서 내가 행복을 위해서 붙잡고자 했던 모든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하, 이게 바로 내 중심의 엉터리 같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고, 보수주의의, 밑에는 보수주의입니다. 이 밑에 나나나 이거는 보수주의, 위에는 새로운 창조, 목적을 향한 새로운 창조죠.

 

그 목적이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 17절인데 그 성경구절 한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24페이지. 이건 죄송합니다. 16절, 17절이 아니고, 14절부터 17절까지. 길게 한번 해봅시다. 골로새서 1장 14절부에서 17절. 아하, 죄송합니다. 13절부터. 자꾸 죄송하네요. 13절부터.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아멘. 17절 계속. 14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대신 죄 사함 얻고. 그 다음에 계속.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 보이지 않는, 형상의 목적이고, 그 다음에.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먼저 나신 자, 우리는 모를 때부터 먼저 계신 자, 그 다음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분은 케이블카잖아요.

 

벌써. 그 다음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먼저 계시잖아요. 우리보다 먼저 계시잖아요. 그 다음에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함께 연결했잖아요. 함께 연결돼서 맺어졌잖아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담는 긍휼의 그릇이고, 이쪽은 진노의 그릇이고.

 

이걸 지금 이 강의를 우리교회 교인들 앞에 하는데, 만약에 동화사 주지들 모아놓고 한다 합시다. 동화사 주지하고 그 다음에 보현사 주지하고 주지들, 불자들 모아놓고 이 강의를 고대로 했다. 불자들 쭉 모아놓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들이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반발하겠지요. 왜? 성령 안 받았으니까. 그 반발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런 반발이 우리 속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기 때문에. 그럴싸한데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고 대번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럼 불자들, 대순진리회나 이런 불자들, 원불교 이런 사람들이 또는 불신자 철학가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할 때 나올 수 있는 제일 큰 질문을 제가 스스로 여러분 앞에서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답변할 차례에요. 아까 우리 김대식 선생이 강의했기 때문에 답변해야 돼요.

 

이 케이블카는 안 지우겠습니다. 그림은 딱 있으니까. 강의의 첫 번째 반발이 이겁니다. 아까 이 목사님께서 1번 ??모른다??에서 '안다??로 바뀔 때 이 목사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거는 세상 사람에게는 모르고, 오직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에게만 안다고 했는데, 이 목사 당신 답변 해보세요. 왜 하나님은 이 세상사람 다 만들어놓고, 왜 택한 예정된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알게 하는 이유를 대 보세요. 대식 씨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예수님 마음대로.

 

정답 나왔습니다. 예수님 마음대로라 하죠. 그때 김대식 성도의 얼굴에 겁 두 잔 날아갑니다. 에라이, 씨. 그리고 간식 복숭아 두 개 더 날아옵니다. 스데반 집사 돼버립니다. 그것 가지고 죽진 않지만. 사도 바울이 뭐라고 욕 얻어먹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미친놈이란 소릴 들어버렸어요. 사도 바울이. 당신이 일을 다 듣고, 다 듣고, 다 들어보니까 남는 건 딱 한 개야. 이유 없이 무조건 예수님은 뭐다? 하나님이다. 딱 그거 하나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에 하나님을 다 믿었어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딴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내고? 내가 열 가지 담겨서 내가 지어낸 내 몸 위주로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진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흔히 진짜 하나님이다. 이러한 전제, 인식의 전제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방금 김대식 선생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구약적으로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 마음대로라. 그러니까 김도올, 김용옥 교수. 김용옥 교수가 신학대학 나왔잖아요. 이것을 알아요. 그래서 얘기합니다. 기독교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토속민족이 주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을 믿는 그 사람들이 조작해낸 것이 기독교다 했어요. 그 기독교 안에는 오직 선택사상과 메시아사상으로 중무장돼있다고 김용옥이 욕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맞지요. 김용옥,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에요. 한국 목사들보다 더 똑똑해요. 다만 문제는 그게 그 사람이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왜 모든 민족마다 신이 있는데 그 많은 신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남의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어떤 소수민족의 여호와가 유일하게 어떻게 참된 신이고, 나머지는 전부다 우상이 되느냐 이 말이죠.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십계명에 뭐라고 돼있어요? 그걸 하나님이 아시고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면, 신을 몇 가지 알아야 돼요. 우선 여호와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뭡니까?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를 모르고 있으면, 지는 여호와, 여호와 하지만 그 여호와가 알맹이 빼보면 전부다 다른 신이에요. 자기 욕심이 들어있는 신이에요. 그래서 여호와라 하는 것은 다른 신에 의해서만 알아지는 게 여호와입니다.

 

자, 그것이 어떻게 알아지는지 제가 지금부터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 신, 참 신이죠. 나와 다른 신의 차이점은 다른 신이 이 땅에서 승리자가 되고, 나 신은 이 땅에서 뭐냐?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이쪽은 가해자, 이건 피해자. 이렇게 나타나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왔을 때 그분은 승리자로 오신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몰매 맞고, 사람에게 뺨 맞고, 사람한테 놀림 받고, 결국에는 사람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신, 그런 메시아, 그런 메시아로써 오신 분이 참 신이고, 그것을 그렇게 학대하게끔 우리 마음속에 작열하는 신이 이게 다른 신, 가짜 신, 우상인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마차 타고 가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빌립 집사란 사람이 등장했어요. 그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책을 봅니다. 성경책, 이 두꺼운 책을 봐요. 이 두꺼운 책을 보는데 성경책을 보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런 대목 보고,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리라. 이런 거 볼 줄 아는데, 그 하필이면 내시가 본 책이 이사야 53장을 봤습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 하는 그 대목이 나왔을 때 그 에티오피아 내시가 질문을 합니다. 저, 집사님. 여기서 그가 누굽니까? 라고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 아닙니까? 그 소리 듣고 빌립, 내시가 가던 마치를 멈추고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즉시로 이제부터 내가 새 사람입니다. 세례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것은 기존에 내 중심으로 살다가 내가 바보 중에 바보다. 왜? 이 세상에 근본이 계신데 내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걸로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분이 내가 지금 빌립, 내시를 만난 것은 케이블카처럼 외부에서 나를 지금 구원시키려고 미리 다루고 있다는 것을 그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이 신과 신의 싸움이다 이렇게 생각되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신과 신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하나님과 신의 싸움으로 어떤 특정 사람과 인간들이 신의 싸움으로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한번 봅시다. 사도행전 17장 31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사도행전 17장 31절. 30절, 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됐습니다. 거기에 뭡니까? 정하신 뭐가 나와요? 뒤에. 야~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정하신 사람이에요. 신을 논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하신 사람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서 사람을 확인해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누굴 무시합니까? 사람을 무시하잖아요. 하나님이라 하면 우리는 누구라도 약간 겁을 냅니다. 안 믿는 사람도. 아이고, 하나님 뜻 아이가. 이렇게 겁을 내는데, 같은 사람이라면 지나 개나 똑같은 인간인데 니가 뭐 별나나.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시할 만큼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보내셨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뭐 별다른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미움 받아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사람, 그 정하신 사람을 보내서 옛날에는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허물치 않았습니다.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마지막 때에 이 사람을 보내셔서 이 사람을 믿지 않는 자는 한 날을 정하사 모든 인류를 이유 없이, 이유 있죠. 그때는. 예수 안 믿었다고 다 심판해버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사람입니다, 사람. 정하신 사람이에요. 정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정하신 사람이라고요.

 

사람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 정하신 사람과 나라는 사람과 늘 비교하면서 연결지우면서 살아가야 되겠지요.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이렇게 연결지우면서 살아야겠지요. 나는 하나님 안다. 자꾸 나하고 신하고 연결시키지 마세요. 그 신은 내 행복을 위한 신이고, 나 말고 사람하고 연결시켜야 돼요.

 

얼마 전에 배형규 씨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배형규 씨를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하다, 대단하다. 제가 이야기해봐야 알아주지도 않지만 저는 초를 쳤습니다. 차라리 십자가에 배형규 목 달아라. 십자가에 배형규 달아서 흔들어대라. 사람들이 얼마나 정하신 사람하고 비교할 줄 모르고, 자기가 알고 있는 신과 자기와 자꾸 연결시키니까 내가 지금 배형규 목사를 높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을 비교해야 할 것인데 누구 말입니까? 예수님하고 배형규 하고 비교해 보면, 누가 의인이에요? 배형규 믿어서 구원받습니까?

 

그래서 너무너무 답답해서 유행가 가사를 하나 적어놨어요. 마리~아, 아베마리~아. 하는 노래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에요. 천주교가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예수 빼놓고 그 자리에다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가장 모범적이고 신앙적으로 댓길이라고 여기는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여인을 하나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집어넣어버려요. 마리가 그냥 마리아가 아니에요. 아베 마리아.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가 뭐냐 하면, 거룩한, 이거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집어넣을 때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가면서 먼저 뭐 합니까? 이거부터 먼저 하지요. 그거 누구 상입니까? 예수 상입니까, 누굽니까? 마리아 상, 그거 하지요.

 

정하신 사람이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심판을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에요? 나사렛 예수에요. 마리아하고 나사렛 예수 차이점은 마리아는 모범적인 사람이고, 예수님은 우리한테 얻어터진 사람이에요. 내 죄 때문에 내 고집 때문에 얻어터진 분이고, 피 흘린 분이고. 마리아는 면사포 쓰고 곱상한 사람이에요. 마리아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내가 기피하고 싶은 인물이에요.

 

지금 만약에 이근호 목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총 맞아 죽었다. 우리교회 앞에 플랑카드 붙이시지. 이근호 목사 드디어 순교하다. 자기 소원대로. 일찍 천당 가고 하더니만 드디어 이근호 목사 먼저 갔다. 우리는 그 뒤를 본받자. 우리교회 그거 붙이면 우리교회 이단입니다. 갑자기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십자가 이근호 되고 흔들어 대고 사모 우는 거 YTN에서 찍고 난리에요. 여보~. 진주, 진주는 아빠. 돌발 영상 다 하는 거예요.

 

예수 어디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예수 안 믿어요.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야 돼. 갑자기 예수 본받는 거 그거 믿어야 돼. 예수님을 우리는 본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되거든요. 평소부터 평소에 우리는 예수 싫어한 사람입니다.

 

아베마리아 이제 치웁시다. 천주교만 아베마리아가 아니고, 개신교도 아베마리아에요. 주기철, 손양원 전부다 아베마리아 역할 다 해버려요. 배형규 이런 사람들. 그래서 배형규 그 사람은 개죽음 당했다 이 말이에요. 미쳤다고 가나? 왜 가는데? 왜 갑니까? 정이 그리워서. 자기 교인 없으니까 거기 가는 거예요. 자기 존재 의미를 하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부터 이번 시간 몇 분 안 남았지만 할 때까지 인간의 존재의미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상당히 심사숙고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 김종환. 김종환이란 사람은 가순데 그 사람이 부른 노래, [존재의 의미]란 게 있습니다.

 

기다려. 내 달려 갈 테니. 참, 그 노래 들으며 저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백수의 한. 취직은 안 되지, 결혼은 해야 되겠지. 그 사람은 취직 안 됐다고 딴 남자하고 지금 결혼하려고 하지, 미치는 기라. 조금만 기다려. 내 달려갈 테니까. 실직자의 서러움, 백수의 서러움을 달래는데.

 

그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는 반드시 자기가 욕망하는 것이 있어야 여기서 존재의 의미가 발생돼요. 아, 이게 약점이야. 인간은. 어떤 의미라 하는 것은 내 욕망과 연결고리가 가질 때 비로소 그쪽은 나에게 의미가 되는 거죠. 어디 자장면 먹고 싶다. 할 때 스파게티 집 많이 있어도 나한테 의미 없어요. 자장면 먹고 싶다. 싶은데 어디서 자장면 굽는 냄새 풍기면, 아하, 그때 중국집이구나. 존재의 의미가 중국집에 나는 자장면 먹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존재의 의미가 되려면, 먼저 내 욕망이 어디서 생기는가 알아야 돼요. 내 욕망이. 이거 또 설명해야 되는데 이건 내 쉽게 하겠습니다. 이건 어렵게 하면 힘드니까. 욕망이 먼접니까, 따지는 게 먼저겠어요? 어느 게 먼저겠어요? 내 욕망이 내 감정의 분출이 항상 먼접니다. 따지는 것은 나중이에요. 이웃 사랑을 해야 된다. 따지지요. 하지만 미울 때는 미움이 나오게 마련이에요. 아, 밉지만 성경 보니까 이웃 사랑해야 돼. 하고 억지로 웃으면 상대방이 눈치 챕니다. 그거 아주 추합니다. 상당히 추해요.

 

욕망의 특징은 이것이 나를 지키기 위한 욕망이기 때문에 보수적입니다. 보수적 경향이 있어요. 내 욕망은 나의 하인인데 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욕망이에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욕망이다. 나를 위한 욕망이기 때문에 내가 시장 가서 물건을 고를 때 시장 몽땅 내 것, 이러진 않아요. 나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고릅니다.

 

저녁에 잡채를 해 먹는데 뭘 사야 되지? 옳지, 당면을 사야 되지. 국수? 의미 없어요. 칼국수? 의미 없어요. 어, 당면? 그건 나한테 의미 있다고. 그래서 나한테 의미라 하는 것은 반드시 취사선택이라. 취사 다음에 뭐가 나오죠? 선택. 선택권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선택은 내가 나를 선택해요. 왜? 그래야 나한테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선택이 나가보면 신이죠, 신. 예수, 성령 이것도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해요, 내가. 하나님의 계시, 이건 내가 선택해요, 내가. 야, 어제 꿈에 예수님 나타나는데 아아, 인물 좋데. 키가 훤칠하니. 허연 도포 휘날리면서. 자나? 누구십니까? 나는 나사렛 예수다. 아이고, 주여. 니가 나의 충성됨을 내가 보았다. 얼마 수명을 몇 년 더 연장해 줄꼬? 25년, 30년 골라잡아라. 내가 니 원하는 대로 수명 연장해 줄게. 제가 욕심 없습니다. 주여, 50년만. 알았다. 50년 더. 이런 거.

 

히스기야가 재미있는 건 히스기야가 15년을 더 보너스 받은 줄 알지요. 히스기야, 이 바보라.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어요. 뭐냐 하면, 15년 더 살은 게 아니고, 15년 원상복귀, 뒤로 되감기 한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 날 그 설교하면서 했지요. 오 목사님 찾아서 오 목사님, 다시 군에 갈래요. 지금 제가 30년 만약에 주님 앞에 더 보너스 받는다면, 지금부터 30년 더 사는 게 아니고, 다시 이 나이로 군에 가 있습니다. 나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해요. 되감기해서 다시 살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기도나 이 모든 것이 자기 욕망이 우선입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우선이며, 그 욕망에서 취사선택을 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내 몸 지키기 위한 쪽으로 선택해요. 취사선택하는데 거기에 하나님, 예수, 어떤 용어도 좋습니다. 그것도 내게 맞는 나한테 의미 있는 예수가 돼요. 남의 예수 말고, 내 욕망을 채워주는 나의 예수로서 지가 임의로 우상으로 만들어내요. 매일같이. 내일 되면 또 딴 걸 원하니까.

 

그러니 난 날마다 가짜지요. 진짜는? 진짜는 없지요. 평생 가도 가짜밖에 없지요. 맨 날 내 몸, 내 욕망이 맞는 욕망이 끌리는 대로 나는 거기에다가 취사선택해서 내 의미 찾기 바쁜 거예요. 의미 찾기.

 

그러데 여러분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성경이나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기도한 것은 다 피해가요. 근데 감사한 것은 내가 기도하지 않은 것만 다 주세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면서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아하, 기도도 하지 않는데 주시는구나. 그렇게 내 욕망을 다 피해가.

 

그래 되면 나의 존재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예수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케이블카처럼 계속해서 지금도 관계를 엮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요. 아,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새로운 창조물로써 팍팍 새 창조가 나오라고 그렇게 한다는 걸 안다 말이죠.

 

자, 그러면 이래 놓고 의미에 대해서 좀 더 가봅시다. 의미는 어디서 생기는가? 조금 참으세요. 지금 한 10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5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5분하고 마치겠습니다. 밥 먹으러 가면 됩니다. 참, 적어 놓으면 좋은데. 의미란, 좀 적어놓으세요. 차이에서 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하나 이번에 꼭 알아야 돼요. 의미는 차이에서 나는 거예요.

 

백화점에 갔다. 이거는 늘 써 먹었던 거지만 식상하지만 한 번 더 들어주세요. 50만 원 들고 50만 원 옷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갔다. 목표는 내 현재 욕망은 50만 원짜리에요. 돈 50만 원 마련됐어요. 50만 원짜리 봐 놨던 원피스 하나 사면 돼요. 그러면 내 욕망은 달성된다. 내 뜻입니다.

 

갔는데 50만 원 딱 했는데 50만 원짜리 원피스 있기는 있는데 뒤로 밀리고 앞에 새로 나온 신제품 150만 원짜리 딱 걸려있을 때 안 삽니다. 왜? 내 존재의 의미가 이동해요. 어디로? 그전까지는 주여, 50만 원짜리 하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다가 150만 원짜리 보고, 50만 원짜리 저건 옷도 아니다. 아이고, 사고 후회하겠다. 사고 후회하는 건 솔직해요. 왜냐하면, 이미 150만 원짜리 봐 놨기 때문에 사도 뭐가 뱅뱅 돕니까? 150만 원, 150만 원 돕니다.

 

이건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애들도 배고플 때 된장에 고추 찍어 먹으면 맛있다 해요. 그런데 뷔페 가서 음식 쭉 깔아 놓으면 야, 고추 찍어 먹으라 하면, 엄마 미쳤나. 고추 찍어 먹게. 여기 와서 고추 찍어 먹나. 딴 것도 있는데. 이미 내 존재의 의미는 이 차이에 의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 이미 발전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알았던 50만 원짜리로 내 치장하면 나는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나와 150만 원짜리 원피스의 나와 이만큼 차이가 질 때 이 차이가 지는 것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것도 알아야 돼요. 여기서 운동이 나와요. 아, 앞으로 내가 300만 원짜리 할 거야. 라고 사람이 목적하는 바가 생기죠.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거든이 뭐냐. 이게 나로 하여금 사람 살아가는 보람을 줍니다. 그 차이가 지니까.

 

지금 과장이니까, 과장이 제일 높은 게 아니죠. 차장 있고, 부장 있고, 상무 있죠. 이 차이가 나로 하여금 버텨야 돼. 저 차장, 부장 될 때까지. 새로운 나에게 운동의 힘을 나에게 지어줍니다. 요것이 뭐냐? 이 운동 있을 때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존재의 뭐라? 존재의 내가 생존하는 의미다. 존재의 의미입니다. 존재의 의미에요.

 

누가 만들어냈어요? 내 욕망이. 욕망의 끝은 없지요. 욕심이 잉태하여 욕망이 잉태하여 뭘 낳고?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여 뭘 낳는다? 사망을 낳는다. 결국은 이 차이 지지요. 그러면 이건 우리 운동이고.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하고 이번 강의.

 

이건 우리 운동이고, 그럼 주님은 운동합니까, 운동 안 합니까? 새 창조 하지요. 그럼 새 창조하면 주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주의 의미 있잖아요. 의미 있으니까 운동할 거 아닙니까? 그럼 주님의 의미는 뭡니까? 처음에 근본이 뭐예요?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지요.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고,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토기장이가 그릇 만들 때 지 마음대로 만들어요.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지요. 의미에서 뭐가 생긴다 했어요? 차이에서 뭐가 생겨요? 운동이 생기지요. 맞지요. 답변도 안 하니까 이상하다. 나 혼자 사기 치는 것 같다. 지금 예수님이 활동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활동합니까, 활동 안 합니까? 우리도 활동하지요. 우리는 무슨 중심으로? 내 욕망 중심으로. 욕망은 뭘 낳는다? 차이를 낳지요. 차이를 따라 잡는 게 우리의 사는 보람이잖아요. 이건 우리의 운동이죠.

 

그럼 주님의 운동 있잖아요. 주님의 운동은 뭡니까?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죠. 이 운동하고 우리하고 같이 섞여 있는 것이 이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 말이죠. 우리는 내 욕망대로 살아요. 이것이 우리는 못 벗어납니다. 내 욕망을 내가 못 벗어나요. 기도 백날 하고 절제해도 안 돼요. 우리는 나의 욕망을 못 벗어납니다.

 

예수한테 빌어도 주여, 150만 원짜리. 뭘 해도 전도 많이 했으니까 이젠 150만 원짜리 줄 때도 됐지요. 헌금을 해도 하나님 이젠 복 줄 때도 안 됐습니까? 내 자식 서울대학 가는데. 뭘 해도 차이지는 만큼 내가 150만 원짜리 몰랐더라면 그래 안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목표를 향하여 나는 갑니다.

 

그런데 군데군데 뭡니까? 야야, 니가 그런 거 안 해도 이미 자리 다 예약돼있다. 니는 천국 가는 사람이야. 주여, 누구 마음대로? 이거는 예수님이 널 위해 대신 죽었던 예수님 내 마음대로 널 해서 네게 차후 통보하는 중이다. 라는 주님의 운동이 내 속에 들어옵니다.

 

나는 지금 150만 원짜리를 얻고자 하는 그 운동에다가 갑자기 주님께서 야야, 그런 거 하나 안 하나 상관없는데 어쨌든 간에 니 운명은 내가 결정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다 이루었어. 라고 운동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 순간 뭘 느끼느냐? 제일 중요합니다.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이게 새로운 창조입니다.

 

내가 뭘 해도 착한 일 해도 내 중심이고, 바른 일 해도 내 중심. 이게 내가 죄인이고 죄인인 내가 주님한테 뭘 한다는 것도 뭐가 됩니까? 이것도 죄였구나. 나는 내 일하면 죄고, 주의 일하면 의로운 줄 알았더니만 세상에, 주의 일 한다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운동하고는 상관없는 그저 내 몸부림치는 것에 해당되는구나.

 

그때 뭐냐 하면, 주여 주의 뜻대로 마음껏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거 2.5초갑니다. 이거 2.5초가요. 나머지 스물 세 시간 오십구 분 동안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가끔씩 나요. 어떤 사람 한 달 만에 2.5초 나온 사람 있고, 2년 만에 나오는 사람 있는데 어쨌든 주여, 주의 뜻대로 하이소. 나는 내 뜻대로 밀어붙일 테니까. 나는 내 뜻대로 강냉이 먹든 감자 먹든 뭐든 먹을 테니까 주여, 이거 상관없이 주의 뜻대로 하실 줄로 제가 믿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