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가악의 하나. 신라 내해왕 때 물계자가 지은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는 않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물계자는 포상싸움과 갈화 싸움에서 군공이 컸으나 포상되지 않자, 그의 아내에게 "내 듣건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만나서는 몸을 잊고 절의를 지키어 사생을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 하는데, 무릇 보라,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국난이요 임금의 위태함이었으나,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친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심함이요,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누를 아버지에게 끼쳤으니 어찌 효라고 하겠는가. 이미 충효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설 수 있겠는가."하고는, 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에 들어가서 대나무의 곧은 성벽을 슬퍼하여 그것에 기탁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서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점 정리
주제 : 충성을 다하지 못함에 대한 자책
내용 연구
물계자는 신라의 충신으로 209년(내해왕 14)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아라가야국(阿羅伽倻國:함안)을 침범하여 아라가야국이 구원을 요청하자, 왕자 날음(捺音)의 휘하에 들어가 전공을 세웠다. 212년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古史浦) 등 3국이 신라를 침입,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였을 때도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음의 미움을 사서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집에 돌아와 국가위기에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음을 자책,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師析山)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대나무의 성벽(性癖), 계곡물소리를 흉내낸 《물계자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물계자가'는 개인적, 서정적인 내용으로 지어진 금곡의 가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초기 부족연맹 국가시대에 개인 작가의 기록으로는 이 노래가 처음 보이는 것이므로, 신라의 시가문학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래라 하겠다. 어떤 학자는 이 노래에 이르러 신라 초기의 종합예술 형태인 가무악이 비로소 가악과 무용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논급하기도 한다.
이해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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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의 성벽(性癖), 계곡물소리를 흉내 낸 《물계자가》 (사진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탐시 선인
생몰년 미상. 가락국 ( 駕洛國 ) 거등왕(居登王 : 재위 199 ∼ 259) 때의 도류 ( 道流 ).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칠점산(七點山)에서 내려왔다고 하며, 그 모습은 옥과 같이 빛났고, 말소리는 경을 읽는 소리 〔 梵音 〕 와 같았다고 한다.
거등왕이 그의 뛰어난 덕을 사모하여 초현대(招賢臺)를 짓고 초빙하자, 배를 타고 금(琴)을 안고 와서 왕과 더불어 즐겁게 지냈다. 홍만종 ( 洪萬宗 )의 ≪ 해동이적 海東異蹟 ≫ 에는 왕이 앉았던 연화석과 바둑판이 당시에 남아 있었다고 전하며, 초현대는 김해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가 왕에게 “ 임금이 자연의 이치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도 저절로 자연스럽게 살 것입니다(君以自然治, 則民以自然成俗). ” 라 하니 왕이 기뼈하며 소를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단풍나무진 〔 楓香脂 〕 과 도라지를 요구하여 먹었다.
조여적 ( 趙汝籍 )의 ≪ 청학집 靑鶴集 ≫ 에 따르면, 신라 초의 호공 ( 瓠公 )에서 시작된 선가의 별파가 탐시선인에게로 전하여지고, 다시 물계자(勿稽子)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 참고문헌 ≫ 海東異蹟, 靑鶴集, 朝鮮道敎史(李能和, 李鍾殷譯, 普成文化社, 197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물계자가
신라 내해왕 때 물계자가 지은 노래. 가사는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내력만이 전한다. 이에 의하면, 물계자는 포상(浦上) 싸움과 갈화(竭火) 싸움에서 군공(軍功)이 컸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에게 “내 듣건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만나서는 몸을 잊고 절의(節義)를 지켜 사생을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 하는데, 무릇 보라(保羅)·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국난이요 임금의 위태함이었으나,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친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심함이요,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누(累)를 아버지에게 끼쳤으니 어찌 효라고 하겠는가. 이미 충효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市井)에 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師巡山)에 들어가서 대나무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여 그것에 기탁(寄托)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서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물계자가〉는 개인적·서정적인 내용으로 지어진 금곡(琴曲)의 가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초기 부족연맹국가시대에 개인 작가(作歌)의 기록으로는 이 노래가 처음 보이는 것이므로, 신라의 시가문학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래라 하겠다.
어떤 학자는 이 노래에 이르러 신라 초기의 종합예술 형태인 가무악(歌舞樂)이 비로소 가악과 무용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논급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上古文學硏究(金承璨, 第一文化社,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