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원효(元曉)가 지었다고 하는 불교가요. 제작연대는 미상이고, 가사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의 유래가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와 ≪파한집≫ 권하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에 따르면 ‘무애’란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寐人一道出生死)”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효가 파계하고 한 때 속인 행세를 하며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일컬을 때, 광대들이 큰 바가지를 들고 춤추며 노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을 본떠 무애라 이름하고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이에 불교를 민중에게 널리 전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후자의 기록에는 원효가 파계했을 때 호리병박을 어루만지면서 저자(市)에서 노래부르며 춤추니, 이것을 무애라 하였고,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호리병박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채색 비단을 장식하여 두드리며 음절에 맞게 춤 동작을 하고 여기에다 경론(經論)에서 가려 뽑은 게송(偈頌)을 지어 이것을 〈무애가〉라 했다.
밭 가는 늙은이들까지도 이것을 본받아 놀았다고 한다. 고려 때 이 노래는 〈무애무 無寐舞〉로 바뀌어져서 궁중의 정재(呈才) 춤의 하나로 되면서 기녀가 창하였고, 조선말까지 〈무애희 無寐戱〉라 하여 무악(舞樂)으로 전승되었다.≪참고문헌≫ 三國遺事, 破閑集.
심화 자료
원효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신라시대의 승려.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경상북도 압량(押梁:지금의 慶山郡)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그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원효의 집은 본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고 전하며 또,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행 적〕
원효는 15세경에 출가하여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시대적으로 보아 자장(慈藏)으로부터 불도를 배웠을 가능성이 많다.
원효는 34세 때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요동까지 갔다가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잡혀 귀환하였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여행 도중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 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것은 655년에서 660년, 즉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 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실계 뒤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 無寐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 혹은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혹은 ≪화엄경≫에 대한 주소(註疏)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坐禪)하는 등 임의로 기회를 좇아 생활하되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행적 또한 뚜렷한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또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뱉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한날 한시에 여러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온 천하를 다 찾아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교화방법은 중국의 고승 배도(杯度)나 지공(誌公)을 닮은 데가 많았다.
〔업 적〕
원효가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찬술할 때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여 온다. 한번은 국왕이 100명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초청하여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를 열었을 때 상주(湘州) 사람들이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이 그 인품이 나쁘다고 헐뜯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어서 아무리 좋은 약을 다 써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왕은 왕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영험이 있다는 명산대천을 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던 중 한 무당이 말하기를,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약을 구하게 하면 그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곧 당나라에서 좋은 약과 의술에 능한 사람을 구하도록 사신을 보냈다. 왕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바닷물 속으로부터 한 노인이 솟아올라 사신들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다.
용왕은 자기의 이름을 금해(鈐海)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경들 나라의 왕비는 바로 청제(靑帝)의 셋째공주요. 우리 용궁에는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경이 전하여 오는데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으로 되어 있소.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菩薩行)을 설명하여 주는 불경이오. 신라 왕비의 병으로 인하여 좋은 인연을 삼아, 이 불경을 당신들의 나라로 보내어 널리 알리고자 사신들을 부른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효가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금강삼매경≫의 강설을 끝내고 원효는 “지난 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속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그 뒤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寐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사 상〕
(1)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2)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화쟁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쟁론(諍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이견(異見)의 논쟁이 생겼을 때, 가령 유견(有見)은 공견(空見)과 다르고 공집(空執)은 유집(有執)과 다르다고 주장할 때 논쟁은 더욱 짙어진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같다고만 하면 자기 속에서 서로 쟁(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도 아니요 동(同)도 아니라고 설한다.”
또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無寐無方)하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철저한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화쟁을 주장하였다.
(3)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寐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