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한상동 목사

好學 2009. 10. 7. 17:11

한상동 목사님 생애 요약




1. 출생과 성장

한상동목사는 경남 김해군 명지면 명지에서 염전을 하는 한치명씨와 배봉애 여사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한목사가 네 살 때에 큰 해일을 만나 염전이 피해를 입는 바람에 집안이 하루아침에 망했다. 그의 아버지 한치명씨는 여섯식구를 거느리고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6살 때에 다대포에 살고 있는 오촌당숙 한금출의 양자가되어 어린시절을 보냈다. 3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910년 졸업했다.

다대실용학교를 졸업한 한상동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하였다가 좁은 부산에서 공부하기 보다는 일본에 건너가 큰 꿈을 키우고 싶어 양부모 몰래 일본 유학을 위해 밀항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시모노세끼 경찰에 붙잡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후 한상동은 동래보고를 그만두고 중학공부를 독학했다. 1918년 한상동은 부모의 권유로 모교인 다대실용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가르쳤고 1921년 여름 기장에 사는 김두경의 딸 김차숙과 결혼했다.


2. 믿음생활의 시작

그런데 그 해 가을 어느날 아침 한상동은 핏덩이를 토해 내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당시 결핵진단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한상동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1924년 봄 전도인 박창근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한상동은 박전도사의 첫 열매가 되었다.

그런데 한상동의 믿음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양부모는 예수쟁이가 된 아들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또 동네 사람들도 양귀신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르친다고 야단이었다. 그래서 한상동은 파양선고를 받고 학교도 그만두게 되었다. 1927년 한목사는 다대포를 떠나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진주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928년 복음을 전하고 싶은 불타는 마음으로 먼저 성경공부를 철저히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 입학하여 1년여의 신학을 수학한 후 조사가 되어 경남노회 부인전도회연합회 후원을 얻어 1929년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에 들어가 전도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3. 교회 개척

1931년 한목사는 다시 삼량진으로 파송되어 전도에 힘쓰다 몸이 쇠약해져 다대포로 돌아와 요양한 후 어느 정도 회복지자 다시 하동군 진교로 세번째 개척을 나섰다. 그는 전도에 앞서 먼저 기도를 했다. 폐병으로 골골하면서 1주일간의 금식기도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주여 살든지 죽든지 이 몸 하나를 주님의 뜻에 맡깁니다. 이 몸은 주의 것이오니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몸부림치며 기도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는 영음을 듣고 전도에 열중한 결과 언덕에 천막으로 시작한 교회가 교인이 차츰 늘어나 흙벽돌로 된 60평의 교회를 세웠다.

1933년 한 목사는 신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여 양떼들에게 잘 양육하기 위해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마펫선교사였다. 신학교 3년 동안 한목사는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또 이 신학교에서 손양원목사도 알게 되었다.

4. 신사참배반대

1936년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32회)하기까지 3년여동안 한상동목사는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졸업과 동시에 강도사로 인허를 받고 주기철목사가 시무하던 부산초량교회에 임시교역자로 청빙되어 10여년간 시무하였고 1937년에는 마산 문창교회의 청빙을 받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문창교회는 한석진, 함태영, 주기철 등 유명한 목회자들이 시무한 전통 있는 교회였다.

이무렵 일제는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장로회 총회는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불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이를 교인에게 알리는 한편 마산경찰서에 호출되어 가서 마산경찰서장 앞에서 신사참배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이에 마산경찰서는 한목사를 교회에서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문창교회 장로들을 차례로 불러 한목사를 몰아내라고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러나 제2의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장로들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데 몸이 약한 장로 한명이 고문을 당하다 쓰러졌다. 이를 이용하여 경찰은 쓰러진 장로의 가족에게 한목사 배척운동을 펼 것을 종용했다. 장로의 가족은 아버지요 남편인 장로를 살리기 위해 한목사를 몰아내자고 교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를 안 한상동목사는 문창교회를 떠날 것을 결심하고 1939년 3월 문창교회를 떠나 무임목사가 되어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해 4월 한목사는 농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주기철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채정민, 오윤선, 이광록, 방계성, 안이숙, 박의흠, 김의창, 최봉석 등 신사참배 반대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직적인 신사찬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인재 주남선 최상림 손명복 최덕지 등과 함께 경남지역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주로 부산과 밀양지역에서 활약하였다.

5. 옥중 항거

그러던 중 1940년 전국에 걸쳐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이 검속을 당할때 그해 7월 한목사도 천황에 대한 불온분자로 몰려 검거되어 경상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구금되어 있으면서도 한목사는 일경의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몸은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한목사는 평양으로 압송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주기철목사 등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병으로 고문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굳게 믿음을 지켰다. 그는 일본 천황께 충성한다는 말 한마디면 풀려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 외에는 여념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였다. 고통스럽고 힘들 때마다 더욱 기도와 성경공부에 열중했다.       

6. 해 방

한목사는 해방이 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패방이 분명해질 무렵 그는 해방 후에 할 일 두 가지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것은 수양관과 신학교 설립이었다. 일제하에서 신앙의 지조를 버린 교역자들의 신앙적 회개를 위한 기도처로 수양관을 세우고 신앙의 보수와 생활의 순결을 생명으로 삼은 성경중심의 신학교 설립이 그의 기도제목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감격적인 옥문이 열려 한목사는 6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했다. 석방된 그는 이기선 목사등과 같은 출옥성도들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재건을 외치는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목사의 후임으로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산당이 그를 목회만 전념하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공산당은 그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정치행사에 참여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그를 감시하며 그의 목회활동을 방해했다. 그래서 그는 1946년 월남했다.

월남하여 부산에 머물면서 그는 한국교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자신이 할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옥중에서 생각했던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신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주남선, 박윤선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고려신학대학의 모체이다. 그리고 그는 38 선이 굳어버리자 부산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그해에 고려신학교란 명칭으로 정식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때 경남노회 내에서 내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되었던 한상동 주남선 등의 고려신학교 중심목회자들과 신사참배를 감수했던 대다수의 기존 노회지도자들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갈등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최덕지처럼 "교회 밖에서" 재건운동을 벌이자는 극단주의에 반대한 한상동은 처음에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교회재건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세력이 너무도 강했다. 1945년 12월 47회 경남노회에서 교직자 자숙안이 통과될 때까지만 해도 출옥성도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48회 노회에서 일제하에 교단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으로 피선되면서 사태는 역전되었고 오히려 고려 신학교 학생추천을 취소하기로 가결함으로 고려신학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한상동을 비롯한 고려신학교측 목회자들(고려파)은 경남노회를 탈퇴하고 1951년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하였고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결성함으로 세칭 고려파 예장총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 1951년 초량교회를 떠나 부산에 삼일교회를 개척한 그는 박윤선 목사, 송상석 목사 등과 함께 고려파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제2차 세계대회에 고신교단에서 4명이 초청되어 한목사는 박윤선 이약신 박손현 세목사와 함게 대표로 참석했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24개국 대표들자이 모인 만찬석상에서 한목사는 한국교회 소식 동향을 이야기해 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을 받고 한국교회가 걸어온 수난의 역사를 이야기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연합회와 교단적 연결을 맺게 되었다.

한편 그는 허대전 선교사가 봉직하는 페이드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처음 그에게 학위를 준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자신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극구 사양했으나 주위의 강한 권고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이는 후일 고려신학교 교장취임을 위해 문교부에 서류를 제출할 때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크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했다.

1969년 고려신학교가 교수와 이사장(송상석 목사) 사이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제9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난관을 극복했으며 이듬해에는 고려신학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 삼일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74년 1월에는 고려신학대학장직에서 은퇴하여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신학대학 건축모금을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또 캄펜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네덜란드까지 방문하여 건축비를 조달하는데 앞장서 1975년 신축교사를 마련하여 고려 신학대학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이처럼 일제시대 옥중에서 구상했던 신학교 설립을 이루고 발전의 기틀 위에 세워 놓은 뒤 그는 1975년 말 병을 얻어 부산 복음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76년 1월 6일 별세했다. 바로 그 이튿날 한상동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키워 온 오종덕목사도 별세하여 1월 9일 고려신학교에서 두분 목사의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철마면 기독교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동생 명동도 목사가 되었으며 부인 김차숙과는 1921년 결혼했으나 후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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