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유럽

[E.U] 키프로스

好學 2010. 1. 4. 20:05

 

[E.U]  키프로스

그리스어: Κυπριακή Δημοκρατία
터키어: Kıbrıs Cumhuriyeti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자유의 찬가
수도 레프코시아
35°8′N, 33°28′E
공용어 그리스어, 터키어[1]
정부 형태 공화제
디미트리스 흐리스토피아스
독립
 • 독립 선언
 • 승인
영국에서 독립
1960년 8월 16일[2]
1960년 8월 16일[3]
면적
 • 전체
 
9,251km² (167위)
인구
 • 2009년 어림
 • 2001년 조사
 • 인구 밀도
 
801,622[4]명 (155위)
689,565명
85명/km² (85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8년 어림값
$227.03억[5] (107위)
$29.830[5] (29위)
HDI
 • 2008년 조사

0.912 (30위)
통화 유로1 (ISO 4217:EUR)
시간대
 • 여름 시간
EET (UTC+2)
EEST (UTC+3) 
ISO 3166-1  196
ISO 3166-1 alpha-2  CY
ISO 3166-1 alpha-3  CYP
인터넷 도메인 .cy
국제 전화 +357
12008년 전에는 키프로스 파운드를 썼다.

 

(그리스어: Κύπρος 키프로스, 터키어: Kıbrıs 크브르스, 문화어: 끼쁘로스)는 동부 지중해에 있는 섬나라로,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가 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며, 해마다 240만 관광객이 찾아오는 인기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60년에 독립하여 1961년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매우 선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 2004년 5월 1일부로 유럽 연합의 일원이 되었다.

1974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터키계 키프로스인 사이에 11년 간의 내부 분쟁(1963–1974)이 끝나고 키프로스 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계 키프로스 민족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37%를 점령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 개입을 하면서 미국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지원을 몰래 받았다. 그리하여 수 천 명의 키프로스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키프로스 북부에 터키계 키프로스의 분리 국가가 성립하였다. 이 사건과 이후 정치 상황으로 계속된 분쟁이 이어졌다.

국제적으로 국가로 승인받은 키프로스 공화국은 법적으로 키프로스 섬 전체 및 영국에 할당된 일부 군사 기지를 제외한 모든 해역에 주권을 갖고 있다. 이 섬은 사실상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어원

키프로스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이 지명은 지중해 사이프러스 나무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퀴파리소스(κυπάρισσος)에서 나왔다고 하며, 혹은 그리스어로 헤나를 뜻하는 퀴프로스(κύπρος)에서 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학설로는 구리를 뜻하는 원키프로스어(Eteocypriot) 낱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령 조지 도신(Georges Dossin)은 이 섬에 구리 광석이 풍부하여 지명 '키프로스'가 구리(zubar) 혹은 청동(kubar)를 뜻하는 수메르어 낱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였다. 해외 무역을 하면서 키프로스 섬은 금속을 의미하는 고전 라틴어 낱말이 이름으로 붙어 "키프로스의 금속(aes Cyprium)"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이 말이 Cuprum으로 축약되었다. 키프로스는 "아프로디테(사랑)의 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여신이 키프로스에서 태어났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역사

고대

레메소스 시 외곽의 일라티스에 있는 아폴론 신전.
레메소스 시 외곽의 쿠리온 극장.

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며, 키뉘라스 왕테우크로스, 퓌그말리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인간 활동 흔적이 남은 곳은 남부 해안의 아이토크렘노스(Aetokremnos)로, 기원전 10,000년경에 이 섬에서 사람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기원전 8200년경에 마을 공동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첫 인간의 등장은 키프로스 난쟁이 하마키프로스 난쟁이 코끼리의 멸종과 서로 관련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비롯하여, 인구와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으며, 기원전 3800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취락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질 높은 철기가 드물지만, 소아시아에서 온 일부 사람들은 발전된 철기 가공 기술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아나톨리아인들이 키프로스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왔는데, 이 시기 정착지는 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 집단들이 기원전 1100~105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키프로스는 그리스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오늘날 라르나카와 살라미스 근처의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 등 일부 페니키아 식민시도 들어섰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기원전 49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도시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키프로스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키프로스는 완전히 헬레니즘화되었으나, 기원전 58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45년 예수의 제자 파울루스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다.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하였다.

중세

카트린느 코로나로, 키프로스의 여왕.

395년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649년 아랍인에 섬을 내어주었고 966년에야 다시 섬을 요구하게 된다. 제3차 십자군 당시 1191년에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사라센인에게서 비교적 안전한 주요 보급 기지로 이용하였다. 자신의 왕국을 잃었던 뤼지냥의 기성전 기사단에게서 섬을 매입하였다.

카트린느 코르나로 여왕이 퇴위하여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여왕은 자크 2세의 미망인으로, 키프로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상업 중개지로 이용하였으며, 오늘날 키프로스의 수도인 레프코시아를 이내 유명한 베네치아 성벽으로 요새화하였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39년 오스만 제국레메소스를 파괴하고 악명을 떨쳤는데, 베네치아는 암모호스토스레프코시아, 키레니아를 요새화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의 지배

1570년 오스만 제국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60,000명의 대규모 군대가 레프코시아암모호스토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레프코시아 사람 20,000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든 교회와 공공 건물, 궁궐이 약탈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에 밀레트 제도를 시행하여, 종교 기관이 非무슬림 소수집단을 다스리도록 허용하였으며, 동방 정교회을 이들 기관과 그리스도 교도 키프로스인의 중개자로 삼아 정치ㆍ경제상의 권력도 부여하였다. 무거운 세금 때문에 1572년에서 1668년까지 대략 28번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 개입해야 하였다. 1831년 오스만 제국에서 첫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남자의 수만 세었는데, 무슬림은 14,983명, 그리스도교도는 29,190명이었다. 1872년 키프로스의 인구는 144,000명으로 늘었는데, 그 가운데 무슬림은 44,000명이고, 그리스도 교도가 100,000명이었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 중 키프로스.

터키-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1878년 이 섬의 행정권(주권이 아닌)은 대영제국에 양도되었다. 대영제국에 있어 키프로스는 자국 식민지 통로에 자리잡은 군사 요충지였다. 1906년 암모호스토스항이 완공되자 키프로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바라보는 해군 요충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신생 터키 공화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의 Crown colony로 선언되었다.

1950년 동방 정교회는 터키계 키프로스인 집단이 참가를 거부하는 가운데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90%가 넘는 지지로 '통합(Ένωσις)', 즉 그리스와 통합하는데 찬성하였다. 영국 당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제한적인 자치권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결국 철회되었다. 1955년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Εθνική Οργάνωσις Κυπρίων Αγωνιστών, EOKA)이 창설되어 무장 투쟁으로 독립하여 그리스와 통합하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에 맞서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 저항단(Türk Mukavemet Teşkilatı, TMT)을 조직하여 국가 분할을 요구하였다.

독립

1960년 16일 8월 키프로스는 영국, 그리스, 터키가 맺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독립을 얻었다. 영국은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에 두 군사 지역만 보유하고, 정부 공직과 공무는 두 민족에게 할당을 두고, 터키계 소수 집단에 영구 거부권을 부여하며, 의회와 행정부에 30% 비중을 보장하고, 세 국가의 모국 보장권을 부여하였다.

1963년 내부 분쟁이 일어났는데, 부분적으로 두 "모국"(그리스와 터키)가 뒤에서 도와주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은 보호 구역으로 물러갔으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지도자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국제 연합이 개입하여 급박한 시점에 키프로스 국제연합군(UNICYP)이 파견되었다.

분단

1970년대 초에 집권엔 그리스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 3세의 정책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그리스-키프로스 병합에 진전을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까닭도 있고, 또 국내 반대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군사 정권은 1974년 7월 13일 키프로스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군사 정권은 강제로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이긴 하였으나,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병합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키프로스가 계속 독립 상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불안을 느끼고 이에 항의하며 영국의 개입을 구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터키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지 7일만에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헌정 질서를 복원하기 위하여 개입한다. 그리스는 새로운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 준군사 조직을 조직하여 침략자에 저항하리라 발표하였으나, 이는 역효과를 내어 터키가 점령한 지역의 그리스인 추방을 죄어쳤다. 수적으로 불리한 그리스 군대는 터키의 진격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아야 나파 지역만 터키의 점령을 피하였는데, 이 지역은 터키가 신중하게 접근한 영국의 군사 지역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사회는 휴전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당시 키프로스 국토의 37%가 터키 점령지로 떨어지면서 북쪽에 있던 170,000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과 남족에 있던 50,000명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이 각각 터전을 잃었다. 1983년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터키 외에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현재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1,534명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502명이 행방불명 상태이다. 1974년 여름의 사건은 그리스-터키 외교 관계 뿐 아니라 키프로스 정치의 중요한 사안이다. 제네바 협약국제연합 결의안을 위반하고 약 100,000여명의 터키인들이 북부 키프로스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침공으로 터키 군대가 북부 영토를 장악한 이후 키프로스 공화국은 북부 지역의 모든 통관항을 봉쇄한다고 발표하였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남쪽의 그리스계는 2004년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유로존에 가입하였다.

최근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키프로스는 분단되어 북부와 남부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입헌 민주주의 국가이며, 호경기와 훌륭한 인프라로 높은 수준의 번영을 이루고 있다. 또한 국제 연합유럽 연합 등 여러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며, 키프로스 섬의 유일하게 적법한 정부로 승인받고 있다. 키프로스 공화국이 실효 지배하지 못하는 지역인 북키프로스는 터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키프로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아난 계획이 있다. 이 계획은 터키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리스계는 거부하였다.

2006년 7월 키프로스 섬은 이스라엘헤즈볼라 사이의 분쟁으로 피신한 레바논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2008년 3월 수십년간 그리스계 키프로스 통제 지역과 국제 연합 완충 지대 사이 장벽이 철거되었다.이 장벽은 레프코시아 중심부의 레드라(Ledra) 가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어, 32년간 키프로스 분단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2008년 4월 3일 레드라 가 터키계와 그리스계 공무원이 각각 주재하는 가운데 다시 개방되었다.

지리

2001년 1월 30일 미국 항공우주국테라 위성에서 찍은 키프로스 섬. 이 섬의 뚜렷히 구분되는 세 지질대를 보여주고 있다. 섬의 중부와 서부는 트로도스 고원으로, 트로도스 산맥의 표면층은 대개 현무암질이며, 산맥의 최대 고도는 1953 m이다. 석회암질의 키레니아 산맥이 키프로스 섬의 북동쪽 끝까지 뻗어있다. 두 산맥 사이의 공간에 수도 레프코시아가 있는데, 사진 한가운데에 회색빛 갈색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키프로스는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이다. 시칠리아사르데냐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세번째로 큰 섬이며, 세계에서 81번째로 큰 섬이다. 키프로스 섬은 오늘날 터키인 소아시아 반도의 남쪽에 있다. 이 섬은 서아시아 또는 중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아시아, 남부 유럽, 북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은 키프로스 섬은 오랫동안 그리스 본토의 지배를 받았으며, 가끔은 아나톨리아, 레반트, 비잔티움 제국, 영국의 영향을 받았다. 키프로스는 유럽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4]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 5월 1일부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키프로스 섬은 위도로는 240km, 경도로는 100km에 이르며, 터키와는 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다. 다른 인접 육지로는 동쪽에 시리아레바논(각각 105km, 108km 떨어져 있음)가 있다. 이스라엘과는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져 있고, 이집트와는 남쪽으로 380km, 그리스의 경우 키프로스와 로도스의 거리는 400km, 그리스 본토와는 800km이다.

이 섬의 생물 환경은 산지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중앙 평원인 메사오리아로 산맥이 지난다. 트로도스 산맥이 섬 남부와 서부 지역을 지나며, 이 지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좁은 키레니아 협곡은 북부 해안선을 따라 뻗어 트로도스 산맥보다는 훨씬 좁은 지역을 차지하며, 고도도 낮다. 키프로스의 이 두 산맥은 터키 본토의 타우루스 산맥과 보통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타우루스 산맥은 키프로스 북부에서도 그 능선이 보인다. 섬 주변으로는 폭이 들쭉날쭉한 해안 저지가 둘러싸고 있다.

1974년 이후 이 섬은 사실상 국토의 36%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의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과 64%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다.

행정 구역  키프로스의 행정 구역

수도레프코시아이다. 영국의 해외 기지인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가 있다. 키프로스는 여섯 주로 나뉜다. 레프코시아, 암모호스토스, 케리니아, 라르나카, 레메소스, 파포스가 바로 그러하다.

키프로스 지도 그리스어 표기 터키어 표기
레프코시아라르나카레메소스파포스아크로티리케리니아암모호스토스데켈리아Cyprus districts named.png
암모호스토스    Αμμόχωστος     Gazimağusa   
케리니아 Κερύvεια Girne
라르나카 Λάρνακα Larnaka/İskele
레메소스 Λεμεσός Limasol/Leymosun
레프코시아 Λευκωσία Lefkoşa
파포스 Πάφος Baf/Gazibaf

기후 지중해성기후

정치

수도 레프코시아의 대통령궁.
 

키프로스는 대통령제 공화국이다.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은 대통령으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5년간 재임한다. 행정권은 행정부가, 입법권은 의회가 가지며, 사법부는 입법부ㆍ행정부와 독립되어 있다.

1960년 키프로스 헌법에서는 3권 분립과 대통령제를 규정하였으며,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력 분점 비율로 정하여 복잡한 견제와 균형 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리스계가 대통령이고 터키계가 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는 각 시군의 선거로 선출하여 임기는 5년이며, 각각 입법부나 행정부의 어떤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입법권은 의회가 가지는데, 의회 역시 선거로 선출된다. 두 집단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뒤 1964년부터 터키계 키프로스인에 할당된 의석은 공석 상태로 남아있다.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키프로스 공화국의 법적인 분단을 시도하기 전까지 터키계 사람들은 국가를 설립하는 데 거부하였다.

1974년 키프로스는 사실상 키프로스 남쪽 2/3를 차지하는 그리스계와 나머지 북쪽을 차지한 터키계로 분단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터키계 사람들은 독립을 선언하여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터키 외에 세계 다른 나라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1985년 북키프로스는 헌법을 채택하고 첫 선거를 치렀다. 국제 연합을 비롯한 (터키 외의) 모든 외국 정부들은 키프로스 섬 전체에 대하여 키프로스 공화국의 주권을 승인하였다. 터키는 유럽 연합 가입 회담에서 자국이 실패할 경우 북키프로스를 병합할 의도를 갖고 있다.

키프로스 의회는 현재 59명의 의원이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의원 중 56명은 비례 대표제로 선출되고, 나머지 3명은 마론파, 라틴계, 아르메니아인 소수집단을 대표하는 참관 의원이다. 터키계 키프로스인에 할당된 의석으로 24석이 있으나, 1964년 이래 공석이다. 정계는 공산주의 노동자 진보당(AKEL), 자유 보수주의 민주 연대, 중도 민주당,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운동(EDEK), 그리고 중도 유럽당이 있다.

2008년 2월 17일 노동자 진보당의 디미트리스 흐리스토피아스가 키프로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처음으로 광범위한 연정 구성 없이 선거 승리를 이루었다. 덕분에 키프로스는 몰도바네팔과 더불어 현재 세계에서 민주적으로 집권한 공산주의 정권이 되었으며, 현재 유럽 연합 가입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산당이 집권한 나라이다. 흐리스토피아스는 2003년 2월에 집권한 민주당의 타소스 파파도풀로스에게서 정권을 넘겨 받았다.

인권

키프로스는 분단 문제가 늘 부각되다보니 그 밖에 인권 문제에 관심이 소홀해질 수 있다. 그리스계 지역이건 터키계 지역이건 섬 전체에 매춘이 만연하며, 두 지역 모두 동유럽에서 이어지는 인신 매매 경로의 주요 성매매 지점으로 비판받고 있다. 북키프로스 정권은 신문 편집자에 심하게 개입하여 언론의 자유 문제로 비판받기도 한다.가정폭력에 대한 법규는 거의 시행되지 않으며, 북키프로스에선 관련 입법도 없는 실정이다. 대개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 노동자 집안에서 일어나는 가정 학대에 대하여 종종 그리스계 키프로스 언론이 보도하기도 하며, 반인종주의 자선단체인 평등, 원조, 반인종주의를 위한 운동(KISA)의 캠페인 주제가 되기도 한다.

주민 [편집]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역사적으로 키프로스 섬 전역에 퍼져 살고 있었으나, 1974년 남북 분단 때 북부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 대부분은 터키군의 지배를 싫어하고 남부로 떠났고, 남부에 사는 터키계 주민 대부분 또한 그리스계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터키군 지배 지역으로 피신한 결과, 그리스계의 99.5%가 남키프로스에, 터키계의 98.7%가 북키프로스에 산다. 그 외 주민은 99.2%가 남키프로스에 거주하고 있다. 덧붙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키프로스에서는 상당수 터키계 주민이 터키유럽으로 돈벌이로 이주하는 한편, 터키에서 많은 터키인이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에 터키계 키프로스인의 정확한 인구는 알기 어렵다.

그 외에도 소수의 미국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두호보르파), 아랍인도 거주한다.

언어

그리스어터키어(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가 공용어이다. 영어도 사용된다.

키프로스는 2006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의 결과 준회원국이 되었다.

종교

키프로스는 사도 바울이 선교활동을 한 곳인데, 그 실례로 키프로스 파마구스타(famagusta)는 사도 바오로와 동역자 성 바르나바가 선교활동을 한 살라미스의 현재지명이다.(사도행전 13.5) 정교회그리스사람이 78%, 이슬람교터키계가 18%이라고 된다. 그 외 4%에는 단성신학을 지지하는 마론파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그리스도인, 약간의 두호보르파가 있다. 키프로스 정교회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아테네그리스 정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대주교가 중심인 키프로스 정교회로 자치를 실시하고 있다. 그외 교회로는 2006년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일원이 된 성공회 성 마가교회(st.mark's anglican chapalincy in famagusta and kapaz cyprus)가 있다.

군사

이 나라 그리스 사람과 터키 사람간의 분쟁 때문에 징병제를 실시한다.

대한 관계

남북 모두 수교국이다. 한국은 1960년 키프로스를 승인하였으며 1995년에 공식수교하였다. 북한과는 1991년 수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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