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교육 3/[시조]古時調

내원성가

好學 2009. 11. 9. 18:15

 

 

내원성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dia_bluve.gif 요점 정리

circle01_blue.gif 지은이 : 미상

circle01_blue.gif 연대 : 미상(고구려로 추정)

circle01_blue.gif 갈래 : 고대 가요로 추정

circle01_blue.gif 특징 : 내원성의 유래를 읊은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변방인 정주(靜州) 섬에 있던 성(城)에 오랑캐의 투항자들을 정착시켰는데, 그 성의 이름이 내원성이며, 이를 다시 노래로 지어서 '내원성가'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고려사' <악지(樂志)>에도 그 곡명과 유래가 적혀 있다.

 

dia_bluve.gif 심화 자료

circle01_blue.gif 내원성

 고려 초 여진이 장악하였는데, 991년(성종 10) 거란이 성장하면서 고려와 송(宋)나라의 교통을 차단할 목적으로 이곳을 점령하였다. 993년에 거란이 소손녕(蕭遜寧)을 보내어 침략한 다음에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외교관계가 성립되자, 양국을 왕래하는 교통 요지가 되었다. 또한 거란의 2차 침략이 실패로 끝난 뒤 양국 사이에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1012년(현종 3)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오던 김은부(金殷傅)가 이곳에서 거란의 조종을 받은 여진에 의해 납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3차 침략도 실패로 끝나고 양국 사이에 국교가 성립한 뒤인 32년(덕종 1) 거란의 사신이 이곳에서 고려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고려측에서 거절한 일도 있었다.

 55년(문종 9)에 이 성의 군사가 고려의 성 부근에 정사(亭舍)를 지으려 하자 이에 항의한 일이 있었으며, 1116년(예종 11)에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抱州城)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자 거란 장수의 요청으로 고려가 이들 성을 접수하고 포주를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삼았다. 그러나 내원성은 다시 금나라에 점령되었고, 83년(명종 3)에는 금나라에서 내원군(來遠郡)으로 개칭하였다고 알려오기도 하였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고구려 이래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설치되었던 성. 고구려 멸망 후 여진족(女眞族)의 소굴이 되었다. 991년(성종 10) 경 거란(契丹)이 압록강 가에 위구성(威寇城)·진화성(振化城)과 함께 이 성을 다시 쌓아 여진이 송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막는 한편, 고려 서북면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 뒤 고려와 거란 사이를 왕래하는 요지가 되었다. 1012년(현종 3) 거란에 사신으로 갔던 형부시랑 김은부(金殷傅)가 돌아오는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납치된 일이 있었다.
이듬해 고려에서 이 성에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을 보내어 외교를 닦았고, 1032년(덕종 1)에는 거란의 사신이 이 성에 이르러 입국하려 하는 것을 고려에서 거절한 일이 있었다. 1035년(정종 1) 거란의 내원성사(來遠城使)가 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 첩(牒)을 보내어 조공을 독촉하였다.
1055년(문종 9) 이 성의 군사가 고려의 성 근처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정사(亭舍)를 지으려 하자, 고려에서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 : 遼陽)에게 국서를 보내 항의하였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당시 내원성은 군사상 뿐만 아니라 외교상으로도 요지가 되었던 것이다.
1116년(예종 11) 내원성이 포주성(抱州城 : 의주)과 함께 금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3월 요나라 장군이 고려에게 내원성과 포주성을 접수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해로로 철수하자, 고려는 두 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포주를 고쳐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를 삼고, 압록강으로서 경계를 삼았다.
금나라가 요나라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공격한 것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가 두 성을 접수, 점령하는 것을 금나라가 쉽게 승인한 것은 고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내원성은 금나라가 점유해, 1183년(명종 13) 이 성을 내원군(來遠軍)으로 고쳤음을 고려에 통보해 왔고, 1217년(고종 4) 내원성이 고려의 영덕성(寧德城 : 의주)에 첩(牒)을 보내어 동진국(東眞國)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거란의 군대를 서로 방어할 것을 약속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원성은 고려와 금나라 사이에서도 국방상·외교상의 요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circle01_blue.gif 내원성가

 고구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내원성가(來遠城歌)라고도 한다. 원래의 노래와 한역한 노래 모두가 전하지 않으며, 작품의 제목과 그 유래만이 고려사 권71 속악(俗樂)에 전하며, 그 내용이 증보문헌비고 권108 악고(樂考) 17에 옮겨져 있다.
내원성은 고구려 정주(靜州, 지금의 平安北道 養州 부근)의 물 가운데 있는 땅이다. 오랑캐들이 투항해오면 여기에 두었는데, 이에 따라 성의 이름을 내원성이라 하였고, 노래도 이에 따라
내원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용과 형식을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이다. 희귀한 고구려가요 중에서 이름 정도만을 제공하여주는 자료이다.참고문헌 高麗史, 增補文獻備考.(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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