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정리 지은이 : 미상 연대 : 미상(고구려로 추정) 갈래 : 고대 가요로 추정 특징 : 내원성의 유래를 읊은 노래로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변방인 정주(靜州) 섬에 있던 성(城)에 오랑캐의 투항자들을 정착시켰는데, 그 성의 이름이 내원성이며, 이를 다시 노래로 지어서 '내원성가'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고려사' <악지(樂志)>에도 그 곡명과 유래가 적혀 있다.
심화 자료 내원성 고려 초 여진이 장악하였는데, 991년(성종 10) 거란이 성장하면서 고려와 송(宋)나라의 교통을 차단할 목적으로 이곳을 점령하였다. 993년에 거란이 소손녕(蕭遜寧)을 보내어 침략한 다음에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외교관계가 성립되자, 양국을 왕래하는 교통 요지가 되었다. 또한 거란의 2차 침략이 실패로 끝난 뒤 양국 사이에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1012년(현종 3)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오던 김은부(金殷傅)가 이곳에서 거란의 조종을 받은 여진에 의해 납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3차 침략도 실패로 끝나고 양국 사이에 국교가 성립한 뒤인 32년(덕종 1) 거란의 사신이 이곳에서 고려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을 고려측에서 거절한 일도 있었다. 55년(문종 9)에 이 성의 군사가 고려의 성 부근에 정사(亭舍)를 지으려 하자 이에 항의한 일이 있었으며, 1116년(예종 11)에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抱州城)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자 거란 장수의 요청으로 고려가 이들 성을 접수하고 포주를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삼았다. 그러나 내원성은 다시 금나라에 점령되었고, 83년(명종 3)에는 금나라에서 내원군(來遠郡)으로 개칭하였다고 알려오기도 하였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고구려 이래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설치되었던 성. 고구려 멸망 후 여진족(女眞族)의 소굴이 되었다. 991년(성종 10) 경 거란(契丹)이 압록강 가에 위구성(威寇城)·진화성(振化城)과 함께 이 성을 다시 쌓아 여진이 송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막는 한편, 고려 서북면에 압력을 가하였다.
내원성가 고구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내원성가(來遠城歌)’라고도 한다. 원래의 노래와 한역한 노래 모두가 전하지 않으며, 작품의 제목과 그 유래만이 ≪고려사≫ 권71 속악(俗樂)에 전하며, 그 내용이 ≪증보문헌비고≫ 권108 악고(樂考) 17에 옮겨져 있다.
|
'好學의 교육 3 > [시조]古時調'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주가 (0) | 2009.11.09 |
---|---|
대악 [방아타령] (0) | 2009.11.09 |
구지가(龜旨歌) (0) | 2009.11.09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0) | 2009.11.09 |
태산이 놉다 하되~ (0) | 200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