쟌 칼빈의 성령론 (Jea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3]
V. 성령과 교회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에서 교회의 본질, 교회의 정치, 교회의 직제와 권세, 다음으로 성례 등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였다. 칼빈의 교회론 중에서 성령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몇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칼빈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장로교회의 4중 직제와 조직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1541년의 제네바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에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논하였다.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의 직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들의 선출 방식이나 임무 등과 같은 외적인 측면을 다루었고, 그들의 소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 주석과 설교 등에서는 성직자들의 소명을 성령론과 연결시켜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성직자들에 대한 소명과 성령의 관계와 함께 설교와 성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성령과 목회자의 소명
교회의 사역자에 대한 칼빈의 교훈은 공적 사역의 제도적 측면과 영적 차원이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은 목사의 소명을 자신의 내적 소명과 함께 교회의 청빙에 의한 외적 소명을 연결시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Inst., IV.3.11) 칼빈은 공적 사역론에서 4중 직제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성취해야 할 기능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Briam Amstrong,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Teaching on the Ministry," Calvin Studies V(1989), 99-100. Amstrong은 현재까지 칼빈의 4중 직제론이 너무 강조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은 직제의 숫자는 바뀔 수 있다고 보았고, 기능의 성취를 더 중요시하였다고 보았다.
교회의 다양한 사역은 웬델의 지적과 같이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Francis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New York: Harper & Row, 1963), 303.
교회의 각 직분의 기능은 성령의 은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칼빈은 4중 직제 중에도 특별히 목사의 소명과 성령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목사의 직분론에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데 반해, 칼빈은 성직자들의 계급 제도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카톨릭의 입장을 반대한 점에서 루터와 동일하게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받아들이나, 교회의 직제를 논하면서는 거의 만인제사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에서 봉사자로서 목사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 김 영재, 한국 기독교의 재인식(엠마오, 1994), 100-103. 목사직의 위치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이해가 다른 것은 루터가 초기에 회중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인제사장직에 입각하여 교직자의 위치를 평신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만,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목회자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서 목사의 직분은 말씀의 설교와 성례의 집행을 통한 교회의 다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수단으로 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Inst., IV.3.3) 하나님은 사람들을 시켜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기로 작정하셨으며,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택하신다.(Comm. Luk. 10:16) 목사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직분자로 큰 위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직분의 위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직분의 올바른 수행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것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권을 가진 사신과 우리에 대한 그의 선의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파송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엄이 아닐 수 없다. 사역자들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이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더욱더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임명받은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되셨다는 점을 복음으로 선언할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을 우리에게 선언할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Comm IICor. 5:18)
칼빈은 말씀을 통한 교회의 통치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목사의 소명과 공적 사역자로서의 기능 수행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성령의 비밀한 혹은 내적 소명이 없이는 목회 사역에 대한 어떤 근거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영원한 구원의 대사직을 수행하며,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사람을 하늘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목회 사역의 성격과 임무의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목사는 사역의 수행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가 그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임명해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유한한 인간치고 그렇게 어려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성령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져서 그 분은 각자에게 적절하게 성령을 부어 주실 수 있으시다. --- 그리스도는 목회 사역(pastorale munus)으로 부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다.. Comm. Joh.20:22.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먼저 주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그 직분에 연결되어 있는 은사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나 목회자를 세우실 때, 그 사람들에게 외면적으로만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들을 주어서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신다.(Comm. Eph. 4: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목회에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 사람들이 목회자로 부름 받게 된다.
칼빈은 교회의 교화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말씀의 선포를 통한 공적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목사들의 통치는 세상적인 통치자들과 같이 물리력을 사용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칼빈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고 교회의 종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면서, 목사와 종이란 용어를 교대로 사용한다.(Comm IICor. 4:5) 목회자는 말씀을 가지고 섬 기는 사역을 감당할 때, 스스로의 능력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의 교훈이 무익하지 않고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Inst., IV.1.6) 칼빈은 목사들의 말씀 선포의 사역의 결과로 성도들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Comm. Eph. 4:12-4) 이와 같이 목사의 이론적 지위보다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지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칼빈 신학의 근본적으로 실천적이고 목회적 차원이 드러난다.
2. 성령과 설교
칼빈은 목사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부름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성실하게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러 나가야 한다. 그는 만일 내가 겸손하게 책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고 경솔하게 아 좋아,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할 말을 내게 주실 꺼야라고 하면서 선포해야 할 것을 읽거나 생각해 보는 수고도 하지 않고, 성경을 회중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강단에 나왔다면 나는 매우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T. H. L Parker, 김 지찬역,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생명의 말씀사, 1986), 189에서 재인용.
목사가 성실하게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합력하도록 하신다.(Comm. Gal.4:1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의 사역자로 뽑아 그들의 노력을 자신의 교회 건설에 이바지하게끔 하실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의 영의 숨은 능력으로 그들을 다스려 그들의 노력이 효과적으로 열매를 거두게 도와주신다. .(Comm. Luk1:16) 성령이 교역자를 통하여 열매맺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차적이요 인간의 노력은 이차적이지만 목회자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말씀 선포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결실을 맺는다. 목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설교한다. 목사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설교자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시행해야 하고,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길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설교 말씀이 들린다.(Inst., II.20) 성령께서 내적인 교사가 되어 조명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밝혀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Inst., III.2.25) 칼빈은 히4:12이 설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설교의 효율성이 틀림없이 사람의 혀로부터 오지 않고 목소리 자체에도 놓여 있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에 귀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Comm. Heb. 4:12)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차원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결실이다.
3. 성령과 성례
성례는 주께서 세우신 약속이신 언약(foedera)의 표(symbola)로 주신 것으로, 주께서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신 것이다.(accomodat)(Inst., IV.14.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비준하는 것으로,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례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믿음의 기둥,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는 거울로 비유할 수 있다.(Inst., IV.14.6) 이러한 성례의 효력은 성례시에 선포되는 말씀을 믿음으로 생긴다.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선포가 필요하다.(Inst., IV.14.4)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례의 효력이 발생하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Inst., IV.14.7) 칼빈은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키는 것은 성례 자체의 비밀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제정하신 목적에 기인하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가게 하신다.(Inst., IV.14.8) 칼빈은 성령과 성례를 구별하여,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 있다고 하였다.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Inst., IV.14.9)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으로 전달한다.(Inst., IV.14.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Inst., IV.14.17)
칼빈은 세례가 성령과 분리된다면 아무런 남는 것도 없을 것이라 하였고, 물세례를 받을 때 양자의 영과 신생의 일반적인 은혜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뿐이고,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성령이 내린 것에 대해,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물세례받을 때 양자와의 영을 받아 중생한 것이고 성령이 내리신 것은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이라 하였다.. Comm. Acts. 8:14,16.
그는 성찬식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성령의 능력에서 나오는 풍부한 선물을 받는다고 한다.. B. A. Gerrish, Grace &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Edinburgh: T&T Clark, 1993), 129.
칼빈은 이와 같이 목사들의 소명과 그들의 핵심적 임무인 말씀 전파와 성례의 시행이 모두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목사가 선거를 통하여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지는 공적 사역과 함께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영적 차원이 통합될 때 목회 사역은 실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역자의 위치 보다 오히려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는 칼빈 신학이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기여한다.
4. 성령과 은사
칼빈은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오늘날 많이 논의되는 바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이 초대 교회에 일시적인 은사들이며 그 이후 중단 것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당시에도 계속 된다고 보았는지를 검토해 보자.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의는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 사이의 중도의 길로 모색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모든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교회의 제도에 묶어 버렸고, 재세례파는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독립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이 성령의 은사를 논의하면서 제시한 입장을 검토해 보자.
칼빈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방언을 복음 전파를 가장 짧은 시간에 폭넓게 알리시려는 최선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말한 방언은 신속한 복음 전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셨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기존의 알려진 언어였다.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Comm. Acts. 2:4. cf.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s Gift?: An illustr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18.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설교를 듣고 세례받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안수해서 성령받은 사건을 통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한 몸으로 서로 결합하였다.. Comm. Acts. 8:14.
칼빈은 여기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빌립의 세례에서 중생의 성령을 받았고 사도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받은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받고 방언을 받은 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방언도 그들이 모르던 언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Comm. Acts 10:44, 46.
여기서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였다. 이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진정성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9장 1-7절의 에베소 교회의 사건에 대해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 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에베소 교인들이 재세례를 받아 중생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시초에 다양한 방법으로 분배하셨던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는 말은 성령의 은사가 있음을 듣지 못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안수하였을 때, 이 용어는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baptism with spirit)를 가리킨다.. Comm. Acts. 19:1-7.
이와 같이 칼빈은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신속한 복음 전파를 위해 은사로 주어진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존의 언어라고 보았고 세례 후에 주어지는 성령 받음은 중생의 성령이 아니라 모두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면 칼빈은 고전 12:8-10과 고전 14장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석하였는가?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에 대해 칼빈은 지식은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지식과 지혜가 동시에 사용될 때,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혜를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비밀하고 고차원적인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Comm. ICor 12:8)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기적에 관계된 믿음이고, 치유의 은사에 대해 칼빈은 간결하게 모든 사람들이 치유의 은사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로마 카톨릭의 종부성사의 오용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이 종부성사에서 기름을 부어 죄를 용서하고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한다고 말하나, 이것은 야고보서 5:14-5의 오해한 것이라 보았다. 종부성사에서 기름은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과 은사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했다.(Inst., IV.19.18) 그는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일시적으로 주셨으나 사라졌으며(Inst., IV.19.18). 칼빈은 막16:17절 주석에서 이러한 기적들이 임시적인 은사인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이러한 기적이 그 후 얼마 안되어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 실례가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동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 주께서 참으로 모든 시대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다름없이 필요한대로 그들의 연약함을 치료하신다.(Inst., IV.19.19) 여기서 칼빈은 치료의 은사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의 관습을 배경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칼빈은 능력 행함은 마귀를 대적하며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하였다.(Comm. ICor. 12:9-10) 영들의 분별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와 거짓된 사역자 사이에 예리한 판단을 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Comm. ICor.12:10) 특별히 로마 카톨릭의 공의회들도 오류에 빠지므로 칼빈은 모든 사람의 영을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 시험할 것을 충고한다.(Inst., IV.9.12) 칼빈은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 말하자면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Comm. ICor.12:10)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계시의 특별한 은사를 통해 예언을 문제되는 것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Eph. 4:11) 칼빈은 엡 4:11주석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선지자에게서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을 제외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은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Inst., IV.3.4) 그러나 고전 12:28절에서 칼빈은 선지자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해석하여 당시의 문제에 적용하는 교회에 대한 사역의 은사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선지자는 성경을 해석하여 당시의 필요성에 적용시키는 사람으로, 목사와 같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선지자는 장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교회의 필요성에 적용하는 인물로 보았다.. 칼빈은 교회가 다만 그 흔적과 그림자 정도만 유지하는 정도로 오랫동안 박탈당해 온 은사와 임무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사람의 견해도 인정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Comm. ICor 12:28)
칼빈은 선지자들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를 바울이 교회 교화의 큰 근원인 예언을 다른 은사들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언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배와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Comm. ICor 14:3) 결국 칼빈에게서 예언은 영감된 설교로 환원하거나 혹은 상호 관련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 인용된 요엘서의 예언한다는 말을 희귀하고 비범하고 뛰어난 지혜의 은사는 주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소수의 예언자들에게만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영적 지혜를 예언자들이 받았던 뛰어난 정도로까지 받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Comm. Act.2:17)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칼빈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방언 통역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의 놀라우신 계시로 받아 알게 되어 자국어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보았다.(Comm. ICor. 12:10) 칼빈은 고전 14장에 있는 방언도 사도행전의 방언같이 외국 언어로 해석한다. 그 자체로서 이 은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Comm. ICor 14:5) 이러한 방언의 은사들도 중지된지 오래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받은 은사들을 야심에 이끌려 자기 과시와 허영에 잘못하였기 때문이다.(Comm. Act. 10:44; 10:46. cf. Inst., IV.19.19)
칼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엘버트(Paul Elbert)는 칼빈이 사도 시대와 관련한 어떤 은사들의 가정된 이용 불가능성과 불연속성 때문에 16세기에 은사들을 분배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환원시켰다고 하였다.. Paul Elbert, "Calvin and the Spiritual Gifts,"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An Elaboration of the Theology of Calvin(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23. 칼빈이 그러한 견해를 취한 것에 대해 Elbert는 1) 초대 교회에만 나타나고 그 이후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한정된 것으로 보았으며, 2) 성경의 치유 실천과 관련된 로마 카톨릭의 익살스런 주장들의 비극적이고 무익한 사용의 환경적 맥락이었다. 3) 사람들의 불경건의 결점으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었던(강요1.16) 복음의 설교를 영원히 놀랍게 만들기 위하여(강요4.19.18)였다. 4) 어거스틴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있는 은사들의 일부는 하나님이 초대 교회를 세우신 뼈대이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아마도 더 이상 관찰되지도 않고 어떤 은사들의 시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뼈대 이론(scaffold theory)을 주장했는데, 이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37-9)
이러한 해석에 대해 스위트맨(Sweetman)은 첫째로 앨버트가 16세기의 문제가 칼빈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던 방법을 무시하였다고 하였다. 스위트맨에 따르면 고전12-4장의 방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그 당시 사회 환경에서 상황화되었다..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An Illumin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25.
칼빈은 고전 12-14장에서 방언을 사도행전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이전에 몰랐던 다른 언어로 보면서도, 교회의 건덕을 위해 방언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하는 통역의 은사를 언급한다. 칼빈은 14장 14절과 16절의 주석에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시켰다. 칼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음과 분리된다는 언급이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평신도들이 라틴어로 기도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암송하는 사적 기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16절은 공적 기도로, 사제가 라틴어로 기도하여 역시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적용시켰다. 이러한 것은 칼빈의 성경 해석이 당시의 상황에 따라 상황화하였다는 증거라고 스위트맨은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고전 12장과 14장의 방언을 오늘날과 같은 초자연적인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하게 알지 못하는 기존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고린도 전서의 상황을 당시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주석에서 방언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로마 카톨릭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기도하는 것을 방언으로 보는 입장과는 조화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칼빈은 고전 14:5절 주석에서도 우리 시대에도 방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부르짖음이 있으며,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로 방언들을 구원하여 빛을 주실 때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14장 27절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같이 예언에 도움이 되는 방언이라 말하는 것을 볼 때, 그가 14장 5절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한 지식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방언을 초자연적인 은사로 주어지는 외국어라고 보면서도, 말하는 본인이 이해력을 결여한 것은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고전 14:14절 주석에서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 초자연적인 은사로서의 방언의 중단이 무엇을 의미하며 뛰어난 외국어 능력의 소유와 방언의 은사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같다.
이와 함께 칼빈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해력과 분리되어 엑스터시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급진 개혁자들의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직접적인 신비적 역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Comm. ICor 14:14-16)
둘째로 스위트맨은 앨버트의 성령의 역동적인 초자연적 활동과 능력과 일반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분석이 칼빈에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Sweetman,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125.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이성이 사람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Inst., II.2.12.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의식 활동의 괴리를 칼빈은 분명하게 거부한다. 헬라어를 모르는 로마인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헬라어를 말하도록 인도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앵무새나 다른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m. ICor.14:14) 칼빈의 관점으로부터 성령은 자아의 합리적 활동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자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작용한다.
칼빈은 성령에 의해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이 분배되는 목적에 대해서는 교회는 세우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언과 신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중단되었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인 기독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은사를 받는다고 하였다.(Comm. ICor. 12:8) 왜냐하면 성령이 은사를 주지 않는 성도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받은 은사로 만족하고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Leonard Sweetman, Jr., The Gifts of the Spirit : A Study of Calvin's Comments on 1 Conrinthians 12:8-10, 28; Romans 12:6-8; Ephesians 4:11, in Exploring the Heritage of John Calvi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277-9.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의 개인 구성원들을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자격을 제공하는데 봉사한다. 칼빈은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 그의 다양한 은사들을 분배하셔서,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의 은사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은 그의 형제의 도움과 원조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교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정하신 결속이라고 하였다.. Comm. I Pet. 4:10; Inst., III.7.5.
칼빈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사들로 풍부해진 이유는 그들의 형제들을 세우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Comm. ICor.12:1) 칼빈은 교회 구성원들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교인들을 서로 서로에게 연결시켜 교회를 재활성화시키려는 시도로 은사들의 상호 봉사의 목적을 강조한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작용을 통해 강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개념은 유기적으로 한 몸을 구성하는데서 대단히 중요하다.(Comm. ICor12:20, 27)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그의 교회를 구성함에 따라 신자들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Comm ICor.6:15a; Eph. 5:30; Inst., IV.17.9)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 결합은 유기적 연결을 제공하고 여기서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생명을 쏟아 붓는 풍부하고 다함이 없는 샘으로 설명된다. 칼빈에게 주님은 교회가 성령과 밀접한 교제를 가짐에 따라,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의 몸인 교회와 접촉하고 친밀하게 결합된다.(Inst., IV.17.10)
로마서 12:4-8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주신 다양한 은사의 결과는 통일이고, 기독교의 덕들의 시행이며, 몸 안에서 영적인 성장이라 하였다. 낙관적으로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엡1:22,23참조) 몸의 사지들과 같이 함께 결합되고 짜여져서 한 몸으로 함께 성장한다.(롬12:5, 고전10:17, 12:12,27) 그들은 한 신앙, 소망과 사랑,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살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가 된다.(Inst., IV.1.2)
제네바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연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칼빈이 인정하는 인간의 몸의 공동체적인 일치를 가진 신자들의 교제는 분명하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시 인정되는 성령이 발생시키는 사람들 사이의 공유를 통해 강화되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관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상호 사랑의 연합(요13:34)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목표이다.
나가는 말
칼빈의 성령론은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강요의 거의 모든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 포괄적인 주제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거나 특성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과 급진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중도에서 성령론을 정립하면서도 루터나 츠빙글리 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래서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 언급하였고 대부분 학자들도 이에 동감하고 있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3위임을 강조하고, 성령께서 창조와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며, 모든 사람에 공통적인 일반 은총의 근원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주로 교회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의 역사의 우주적 사역, 인간 사회의 일반 은총의 사역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관련된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우주적 구원 사역을 주장하는 헨드리쿠스 벌코프나 몰트만의 성령론과는 다르다.
칼빈의 성령론은 당시 새로운 교리를 정립하면서 어디에 최고의 권위를 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는 입장이었고, 재세례파는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칼빈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객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객관적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인식되는데, 이 주관적 인식의 내용은 신앙 안에서 믿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재세례파의 견해를 극복하고 최고의 권위로서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정립하게 된다.
칼빈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intra nos) 그리스도가 되며, 그 이후에 우리는 중생, 믿음, 칭의, 성화, 영화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한다. 교회의 성직자들의 소명도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교회의 설교와 성례도 성령의 역사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은사에 대하여 방언, 치유 같은 특별한 은사들은 사라졌다고 보았고, 세례와 성령에 의한 중생은 연합되어 있다고하여 은사론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에게는 은사가 주어져 있는데, 이 은사들의 목적을 교회를 세우고 서로 돕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성령론은 대단히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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