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Jea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2]

好學 2009. 10. 9. 18:10

 

쟌 칼빈의 성령론(Jea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2]

IV. 성령의 내적 증거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인 사역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역과는 구별되는 구원론적인 사역에 가장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구원론적인 사역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이다.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신지식, 성경의 권위, 구원의 확신의 세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워필드는 기독교 강요를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게 만들고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는 성령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는 성령의 증언(testimonium Spiritus Sancti)의 위대한 교리로 시작하며, 이 교리는 성령의 내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하고 생명력을 제공하는 지식이 전달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의 증언이 없으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사람들의 눈앞에서 헛되이 퍼져 가게 된다..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486.
타락한 인간이 신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통한 신지식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칼빈의 성령의 증거 교리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의 두 제목 하에 고려될 수 있다. 이 두 증거는 후자가 전자의 실제적 적용이기 때문에 서로 서로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1. 성령의 말씀에 대한 내적 증거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부처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같이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가운데서 성령과 말씀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였다.. 루터, 츠빙글리, 부처의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지 원용, 루터가 본 성령론과 은사운동, 루터 사상의 진수지 원용편(컨콜디아사, 1986), 307-310; W. 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Oxford: Clarendon Press, 1986), 59-64, 129-138; W. Peter Stephens,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Martin Buc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129-156.

로마 카톨릭 변증가들은 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한 것이 교회이므로, 교회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칼빈도 우리가 성경을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말씀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 기원에 대하여 입증하셔야만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그 자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흰 것과 검은 것이 색에서 구별되고 단것과 쓴 것이 맛에서 구별되듯이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그 얼굴에 지니고 있으며(Inst., 1.7.2) 성경은 자증한다.(Inst., I.7.5) 성경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칼빈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에 대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성령의 권위 인식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을 특징적인 교리로 만들었다.. 다른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고,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고 해석자라는 것을 강조하나, 성령의 권위 인식이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칼빈은 성경이 객관적으로 분명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인식되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단지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먼 눈을 열어 성경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요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논쟁을 통해서 세워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 의해서만 세워질 수 있다.(Inst., 1.7.4).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성령의 권위 인식이란 칼빈의 주장이 너무 주관적이고 순환적이라는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다.(Otto Weber, Foundations of Dogmatics, Vol. 1.(Grand Rapids: Eerdmans, 1981), 242-5를 참조하라.) 이러한 반론에 대해 칼 바르트는 이것은 논리적 순환으로, 이러한 접근에서 주체(성령)와 객체(기록된 말씀)가 연합한다고 하였다.(Church Dogmatics I. 2(Edinburgh: T & T Clark, 1956), 535) 오토 베버는 성령의 증언은 성경의 증인(witness)들의 증언(testimony)에서 우리를 만나며, 그것에 의해 주체와 객체의 양극성은 극복된다고 하였다.(op. cit., 244)
합리적 주장들은 어떠한가? 성령의 증거가 선행하면 그 후에 합리적 주장도 일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Inst., I.8) 칼빈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확립된다고 보았다.
재세례파의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역사의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성경과 성령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직분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명령하는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이다.(Inst., 1.9.1) 말씀과 성령의 통일성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연결되어 있다.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나, 성령만 강조하고 말씀을 무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2. 성령의 구원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것들이 성령의 비밀한 사역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기독교 강요 제3권의 1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신자 개인에 적용시키는 사역의 나누어질 수 없는 연결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David Willis는 Calvin's Catholic Christology(Leiden: E. J. Brill, 1966)에서 칼빈의 성령론을 기독론적 성령론이라 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과 연합시키는 끈(bond)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수행하신 구원 사역의 축복은 그리스도가 우리밖에 머무르면(extra nos) 아무 가치가 없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in nobis) 거주해야만 한다.. Willem van't Spijker, "extra nos" and "in nobis" by Calvin in a Pneumatical Light," in Calvin and Spirit, 39-62. Spijker는 칼빈의 'extra nos'와 in nobis'의 통일성에 칼빈 신학의 역동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류에 대한 칼빈의 중요한 교리를 만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는다.(Comm. John 16:4) 성령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칼빈이 우리 안에 있는(in nobis)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면서 신비주의에서 논의되었던 내향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unio mystica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실제적인 통합도 본질에서의 동등함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교제만이 있기 원하는 것이 칼빈의 신비적 연합의 내용이다. 그래서 칼빈은 본질의 연합을 주장하는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주장을 예리하게 반박하였다. 칼빈에게서 extra nos와 in nobis의 관계는 우리의 구원의 객관적 확실성을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에 의한 생활의 새로운 변혁을 제시한다.. Ibid., 50-51.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III.2.25에서 신앙과 연합에 대하여 간략하게 묘사한다. 그(하나님)가 성령에 능력에 의해 우리를 신앙으로 조명할 때,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그의 몸으로 접붙여 우리가 모든 선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접붙임을 동시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III.11.10에서 신비적 연합을 언급하며, 이것을 여러 가지 용어로 묘사하는데 그리스도에 접붙임(engrafting)이란 용어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칼빈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의 연합에 대한 어떤 개념도 거부하며, 하나님과 신자의 연합은 성령을 통한 영적인 연합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삼위일체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105-6.

칼빈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믿음은 구원의 확신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이 구원의 확신을 포함한다는 칼빈의 견해와 확신을 믿음으로부터 구별한 청교도들의 견해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세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첫째로 윌리암 커닝햄(William Cunningham),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그리고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신앙과 확신 사이의 종교개혁 이후의 구별을 칼빈 교리의 질적 발전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칼빈의 견해가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취급되고 명료하게 밝혀진 목회적 관심들에 무지하거나 혹은 모순된다고 해석한다.. Randall C. Glearson, John Calvin and John Owen in Mortification: A Comparative Study in Reformed Spirituality(New York: Peter Lang, 1995), 21.
둘째로 켄달(R.T.Kendall)과 레인(Antony Lane) 등은 청교도들의 신앙과 확신의 구별이 칼빈의 입장으로부터 질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째로 헬름(Paul Helm)과 비크(Joel R. Beeke)는 두 번째 그룹의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확신을 믿음에 포함시키는 입장과 확신과 믿음을 구별하는 청교도의 입장이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켄달이 1979년에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를 저술하여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학 사이에 변질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이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켄달은 청교도들은 칼빈이 아닌 베자의 신학의 계승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특별히 칼빈은 믿음의 본질에 확신을 포함시켰으며, 인간 편에서의 믿음을 위한 준비를 부정하였고(믿음의 수동성 강조),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기 위한 자기 검토(실천적 삼단논법)를 부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R.T.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24-28.

켄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헬름(Paul Helm)은 두 가지를 비판하였다. 첫째로 헬름은 믿음이 확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칼빈의 정의는 믿음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인데 반하여, 칼빈은 여기에 약간의 제한을 가하여, 확신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믿음에는 확신이 수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Paul Helm, Calvin and Calvinist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서 종대역(생명의 말씀사, 1988), 49, 50.
두 번째로 헬름은 칼빈은 개인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나, 개인적인 구원의 증거는 영적, 도덕적 갱신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Ibid., 54.

그 후에 레인(A. N. S. Lane)은 헬름의 견해를 비판하여 칼빈의 믿음의 본질은 확신을 포함한다는 것과 함께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검토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레인은 칼빈에게서 기독교 강요 1권7장-9장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언과 기독교 강요 3권 2장에서 말하는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로운 약속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드는 성령의 내적 증언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한다.. Anthony N. S. Lane, "John Calvin :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 Calvin's Theology, Theology Proper, Eschatology, ed., by Richard C. Gamble(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Co., 1992), 107-121. 비슷한 견해에 대해서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Jelle Faber,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in Calvin and the Holy Spirit, ed., by Peter De Klerk(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2, 6.
성령은 내적인 교사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이 우리 심령에 파고 들어가는 하는 양자의 영으로(Inst., III.1.; III.24.1), 우리의 죄와 구원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킨다.(Inst., III.2.11; III.1.3) 그러므로 레인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주어지는 믿음은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비크는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서도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칼빈과 청교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에 포함된 확신과 신앙의 흔들림, 불안, 의심의 양자의 관계를 신앙의 정의와 경험, 영과 육의 구별, 신앙의 발생 대 신앙의 의식, 삼위일체적 구조와 실제적 삼단논법의 견지에서 논의하였다.. Joel R. Beeke, Assurance of Faith: Calvin, English Puritanism,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New York, London: Peter Lang, 1991), 47-77.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와 경험의 괴리를 인정하지만, 양자 사이에 말씀 안에서 유기적 통일성을 인정한다. 비크는 칼빈의 경우에 신앙은 성령의 씨이기 때문에 신앙은 확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확신은 규범적이지만 신자의 의식의 견지에서 정도와 지속성에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칼빈에게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차적으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선행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중요성도 강조되어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므로, 강조점은 다르지만 청교도와 연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한국신학연구소, 1997), 150-4. 이 양호는 칼빈의 신앙과 확신의 관계에서 성령의 역사가 중심적이고 인간 편에서의 실천적 삼단논법에 의한 검토는 주변적인 것이라는 그의 동심원적 해석 방법을 제시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검토해 볼 때 성령의 역사와 믿음의 확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칼빈은 헬름과 비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앙 속에 의심, 불안의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를 인정하지만, 그의 경우에 신앙은 사람 편에서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것으로 처음부터 확신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근본적으로 성장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노이저(Neuser)는 기독교 강요 3권 1장에서 칼빈이 모든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제공되는 그리스도와의 교류를 분별력 있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활동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러한 서술은 신앙의 발생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Wilhelm Heinrich Neuser, "Theologie des Wortes - Schrift, Verheissung und Evangelium bei Calvin," in Calvinus Theologus. Die Referate des Europaaischen Kongresses fur Calvin forschung vom 16. bis 19 September 1974 in Amsterdam, Hrsg. von Wilhelm Heinrich Neuser(Neukirchen-Vluyn : Neukirchener Verlag, 1976), 27-9.
노이저는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장 1-6절에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신앙의 토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III.2.33에 있는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말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음의 발생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에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Fella는 이사야 59장 21절 주석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발생과 확신의 양자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이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드디어 우리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도록 인도한다고 하였다.(Inst., 3.2.3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의 발생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의 객관적 사역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자들이 믿음을 의식하는데서 연약해서 언제나 이 확신을 붙잡을 수 없을 때조차, 믿음의 아무리 작은 씨라도 바로 본질에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 좌우로 구부러지는 것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재밑에 있다.(Inst., III.2.21) 이러한 믿음의 씨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선택된 사람의 믿음이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양자되었다는 확고한 보증과 날인을 해줌으로써(Comm. Eph.1:4; IICor1:22) 그가 새겨 주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말소되지 않는다.(Inst., III.2.12)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그 속에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도 구원의 확신을 부정하던 로마 카톨릭과 싸우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맹목적 신앙(implicit faith)에 반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수립하고자 하면서 그가 믿음과 확신을 분리시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강조점을 가져와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나중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증거를 자기 검토에서 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앙관을 대립적으로 파악할 것인가?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고 청교도들은 그것을 인간의 노력과 자기 검토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미 칼빈에게서도 비크가 지적한 대로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강조점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은 아니다.

3. 성령과 성화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3권의 2장에서 믿음에 대하여 논의한 후에 3장에서 회개, 즉 성화에 대하여 논의한다. 칼빈은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회개)과 신앙의 순서 대신에 신앙과 중생의 순서를 따른다는 사실은 구원의 적용에서 신앙의 전체적인 중요성과 위치를 설명해 준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루이스 벌코프는 칼빈의 표현이 형식적으로 신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주관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칼빈은 사색을 혐오하여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신앙의 관계를 강조했고, 신앙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여 주관주의의 덫에 떨어지지 않는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Herman Hoeksema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이 논리성이 없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칼빈이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일으키는 변화와 의식 가운데 일으키는 변화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모든 순서를 의식의 차원에서 논하였다. 칼빈은 모든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객관적 사역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주관적 사역을 충분히 구분하지 아니한 때문에 성화가 칭의보다 앞서는 이상한 순서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Reformed Dogmatics(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76), 447)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인간의 활동면에 치중하여 주관적인 경향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다.(Dictaten Dogmatiek(Kampen, 1910), De Salute, 17) 벌카워 교수는 칼빈은 구원서정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치중하고 신앙하는 사람에게 두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의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성령은 천국의 열쇠를 우리에게 열어 줄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현상이라는 입장이 칼빈의 구원 서정에 걸쳐 일관된 원리이다.(Faith and Justification(Eerdmans, 1977), 28)

그리고 칼빈에게서 협의적인 의미에서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Inst., III.1.2) 광의적 의미의 중생인 회개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일어난다.
칼빈은 복음의 전체 내용은 회개와 죄의 용서 즉 성화와 칭의 인데,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를 먼저 논했다. 칭의 후에 성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먼저 다룬 것은 성화를 올바로 이해하면 칭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Inst., III.3.19) 칼빈은 성령은 신앙뿐만 아니라 회개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이 지배하셔서 믿음을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체험한 사람이 회개를 한다.(Inst., III.3.2) 회심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효과에 달렸기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Inst., III.3.21)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에 뒤따라올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Inst., III.3.1) 회개의 근원이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과 회개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은혜가 앞서야 회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은혜가 선행하지 않으면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없다.(Inst., III.3.24)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것으로 옛 사람과 육을 죽이고 성령에 의한 삶으로써 성립된다.(Inst., III.3.5) 회개는 죄를 떠나고 마음이 변화되어 공의와 자비의 열매는 맺는 것인데, 성령이 우리 영혼을 감화시킬 때에만 일어난다.(Inst., III.3.8)
우리는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ex Christi participartione) 본성을 죽이고 영을 살릴 수 있다.(롬6:6) 그러므로 칼빈은 회개를 중생이라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이 필요하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게 하신다.(Inst., III.3.9)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싸움에게 이기지만, 중생한 사람 안에도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fomes)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꽃이 튀어나와서 죄를 꾀며 자극한다.(Inst., III.3.10)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르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재세례파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 않을 것이라 하나, 칼빈은 성령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라,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분별하는 총명이 가득한 분이시며, 사람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치시는 영이라고 지적하였다. 성령은 신자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파견되셨으므로,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싸여 있는 신자들은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하면서, 죄와 싸워야 한다.(Inst., III.3.14)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신다.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신다.(Inst, III.3.16)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죄악된 본성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하는 것이다.(Inst., III.3.20)
헤셀링크는 칼빈이 성화의 한 특수한 측면으로 성경 혹은 복음의 설교에서 분리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한 일반적이고 특별한 지혜와 지시를 성령으로부터 얻는다고 말한다.. I. John Hesselink, Governed and Guided by the Spirit - A Key Issue in Calvin's Doctrine of the Holy Spirit, Calvin Studies V, 1990, 29-34. 그는 여러 증거를 드는데, 두 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지도하고, 구부리고, 그리고 통치하고 그의 소유로서 마음 안에서 지배한다.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중생하여 그의 지도에 의해 감동받고 통치받는 것은 명백하게 선민들의 특권이다.(2.3.10) 우리가 이러한 시도에서 하나님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고(conduise) 다스리시도록 간구할 때, 사람들은 자비와 함께 공개적으로 언급된 것에서 화낼 수 없다.(Sermon Deut. 5:20)
칼빈은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삶의 구체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언급에는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성령의 이러한 인도가 성경의 교훈에 모순되는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없는 새로운 계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통치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를 부분적으로만 조명하시므로 어떤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온전하게 전달하실 때까지 은혜를 더욱 증가시키고, 그러는 동안에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통치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Sermon. Eph. 2:8-10.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개혁되고 변혁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인도에 대하여 밀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령의 비밀한 충동(arcano instinctu spiritus)이란 특별한 기술적 용어(terminus technicus)를 사용한다.. Milner, op. cit., 200-1. 밀러는 불신자의 경우는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충동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행동한다고 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갑자기 주님을 인식한 것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그가 제자들에게 이전에 제공했던 성령의 비밀하고 숨겨진 은혜의 생생한 인식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하나님은 때때로 잠시 동안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나, 오직 비밀한 충동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역사한다.. Comm. Luke 24:32.
이러한 언급에서 칼빈은 제세례파의 입장에 근접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칼빈은 기본적으로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의 전제 위에서 성령의 일상생활의 인도의 측면을 언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역사하신다.
칼빈은 구원 과정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배열하는 일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구원 서정의 순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역이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논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인간에게 믿어지게 되고(1장), 그 결과 믿음(2장)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회개(3장)가 가능하다. 이 회개의 과정은 6장-10장에 걸친 기독교인의 생활로 전개되며, 그 후에 칭의에 대하여 11-18장까지 다루고 19장 기독교인의 자유, 20장 기도 21-24장은 예정 25장은 최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이 모든 과정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간에게 적용되는데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칼빈이 말하는 회개는 중생이라고도 하는데, 회심, 성화, 신앙적 투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들의 최후의 소망인 영화도 성령의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라고 설명한다.. Fella, op. cit., p. 7.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마다, 성령을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하여 부활을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분이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살아나셨다(Inst., III.25.3)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화에서도 역시 생명의 주이고 수여자이다. 칼빈은 결론적으로 성령의 임재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없이 기독교는 설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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