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獨身), celibac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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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은 채 사는 상태. 독신을 뜻하는 영어 'celibacy'는 '결혼하지 않은', '혼자'라는 뜻의 라틴어 'caelebs'에서 유래했다. 원래 이 말은 동정 또는 배우자를 잃은 남자나 여자를 가리켰으나 후대에는 신성한 서약과 자기 부인(否認) 행위, 종교적 확신에 의해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독신은 전체 종교사를 통해 사실상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왔다. 독신주의는 어디서 나타나든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삶이 정상적인 사회구조 및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충동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심지어 상극적이기까지 하다는 견해가 뒤따른다. 반면에 독신을 멸시하는 유형의 종교는 종교의 우선적인 임무를 성욕 또는 가족·노동과 같은 '자연스런' 생활상태를 활용하고 정당화하는 데 둔다.
독신의 형태 독신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중 한 형태는 사제(司祭) 독신으로 남녀 사제들의 독신이다. 사제는 의례를 통해 사람들의 필요를 하늘에 전달하고, 하늘로부터 신성한 능력과 임재(臨在)를 회중에게 전달하는 성스러운 직책을 수행하는 중재자로 정의될 수 있다. 사제의 직책은 객관적이어서 그가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 열정이 뜨거운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의례를 적절히 수행하고 직분에 적합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의례의 정결을 지키면 그가 수행한 직책의 효력은 보장된다. 독신은 특별한 지위와 의례의 정결에 대한 객관적인 표시가 될 수 있다. 독신은 또한 성적(性的)인 힘을 성스러운 힘의 적대자로 여기며, 이성에 대한 성욕을 특히 성스러운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 대한 오염 요소로 여기는 금기(taboos)에서 유래한 듯하다. 독신의 2번째 형태는 수도를 위한 독신이다. 수사가 독신인 주요원인은 의례를 집행할 때 요구되는 제의적 정결 때문이 아니라 도덕 및 영적 진보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내적 자유, 금욕과 명상을 위한 기회, 그리고 종교적 공동체라는 '새로운 가족' 등을 통해 수사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장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 수도에는 숲이나 사막의 은수자(隱修者 hermit)를 비롯해 교회나 수도원에서 고립되어 사는 은수자(anchorite), 공동체에서 안정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원 수사(cenobite), 그리고 시주를 받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금욕적인 탁발수사(mendicant)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어떤 경우든 독신은 그 수사의 삶의 방식에서 뗄 수 없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여성의 제도적 독신은 보통 사제제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대개 영적 진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동정(童貞)과 독신은 영적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졌다. 일반적으로 제도적 독신 여성은 수도원에서 사는 수녀이다. 이들 중 은수자처럼 고립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14~15세기 영국 노뤼치의 성녀 줄리안을 꼽을 수 있다. 비제도적이며 사제제도와는 거리가 먼 개별적인 종교적 독신은 일반적으로 평신도 독신이거나 독신을 요구당하지 않는 성직자의 독신이다. 이들은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혹은 특별한 종교적 봉사를 위해 독신 서약을 한다.
원시종교에서의 독신 원시인들 가운데 독신 상태는 주로 샤먼(무당)과 의례적 정결에 관련되어 있다. 모든 샤먼이 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샤먼은 깊은 입문(入門) 체험을 하고 매우 독특한 소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독신의 전형을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고대문명에서의 독신 훌륭한 고대 문명 가운데 독신은 여러 맥락에서 나타났다. 로마에서 베스타 여신의 제단을 지키는 처녀들(Vestal Virgins of Rome)이 종교직을 맡은 후 최소한 30년간 독신으로 지내도록 하는 사실은 로마 종교에 매우 오래전부터 독신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전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2가지 종교적 형태의 남성 독신이 나타났다. 하나는 금욕적 철학자의 독신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 종교 사제의 독신이다. 전자의 대표적 예는 피타고라스학파이다. 피타고라스는 연구와 채식, 성적인 금욕 또는 절제에 우위를 두는 소규모 공동체를 설립했다. 후대 철학자들은 독신이 철학자들의 소임에 요구되는 초탈과 평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AD 50 출생)는 이상적 교사는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하며, 가족 부양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차분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신비주의 독신 사제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독신은 특별히 대모신(大母神) 숭배단 사제들의 특징이었는데, 예를 들어 잘 조직된 이시스 종교는 사제의 고요한 의례를 대표했다. 신성한 의례를 거행하는 이들에게는 성적인 금욕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마니교도·영지주의자·은둔주의자 등과 같이 증가해 신비종파도 전형적으로 엄격한 절제를 요구하는 내부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고대의 많은 주요 종교운동이 절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아 후대 그리스도에서 독신제도와 수도원제도의 배경이 되었다.
동양종교에서의 독신 힌두교에서는 사제직이 세습되기 때문에 사제의 독신생활이 시작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자손을 낳아 자신의 직분을 물려준 후, 곧 노년기가 되어서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성자(sadhu)로 존경받는 종교인들은 소유욕과 가정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며, 조직을 갖거나 공동훈련을 받지 않는다. 많은 남녀 성자가 결혼 후나 배우자가 죽은 뒤에 독신으로 지내며 어릴 적부터 독신으로 지내는 성자들도 있다. 성자는 해탈을 추구하며 다르마(法:우주와 사회의 법칙, 즉 카스트·가족·돈·지위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책임과 특권을 말함)의 질서가 지배하는 삶의 형태를 떠난 사람이다. 세속 일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활동과 마음의 혼란을 증가시킴으로써 영적 연마의 목표인 절제된 평정이나 신앙적 몰아(沒我)의 삶에 도달하는 데 악영향을 끼친다고 간주된다. 인도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독신 수도단으로 시작했다. 깨달음은 열정을 통제하고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진다. 불교가 세계 종교가 됨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수도단에서 1년을 생활한다. 티베트의 탄트라 승려는 결혼을 하고, 일본 불교의 대종파의 하나인 죠도 신슈[淨土眞宗]는 독신의 이상을 포기한 채 재가불교(在家佛敎)를 표방하고 있다. 중국 도교에는 은둔 집단의 도인(道人)과 독자적인 독신 도인이 있다. 원래 그 전통은 샤머니즘(무속)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도교 수도집단과 사제가 불교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일본의 신도(神道)에는 남자로서 승려나 독신 사제가 없다. 신당의 신(神)과 '결혼한' 여자 무당이 신당 안에 있고, 주요신당에는 독신 여사제가 있는데 특히 전근대기에 그러했다. 한국에서는 고대로부터 토착종교인 무속에 이미 의례적 정결을 위해 일시적 독신 기간을 지키는 전통이 있어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평생 독신생활을 고수하는 전통은 불교가 들어옴으로써 확립되었다. 신라의 위대한 승려 원효는 출가자라면 누구든지 필독하는 글인 〈발심수행장 發心修行章〉에서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하늘이 칭찬하고 도인이 여색을 생각하면 선신(善神)들이 떠나가네"라고 하여 수행자들에게 성욕에 빠지는 것을 더러운 것으로 경계하며 금욕적 독신생활을 권하고 있다.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조계종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고려의 위대한 승려 지눌도 〈발심수행장〉과 함께 널리 읽히는 〈계초심학인문 戒初心學人文〉에서 "여색의 화는 독사보다도 더 무서우니…… 항상 멀리해야 하느니라"고 하여 성욕에서 오는 해악을 강조하며 독신수도를 철저히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불교는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출가의 전통을 지켜왔다. 다만 일제강점기를 당하여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출가의 전통이 일시 무너지는 듯했으나 8·15해방 이후 청담(靑潭)을 비롯한 출가승려들이 강렬한 정화운동을 펼침으로써 독신수도의 전통을 확립했다.
서양종교에서의 독신 이슬람교에서는 원래 독신이 관행은 아니었다. 이슬람교의 독신은 제사를 위한 정결, 제도적 통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 영혼의 향상이나 열정을 위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유명한 성자들은 결혼했다. 엄격한 훈련과 실행이 요구됨에 따라 여러 곳에서 수피(sufi) 신비주의 종교 단체가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 수도단의 단원들 사이에서조차 독신은 예외적이었다. 유대교에서도 독신은 거의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례 및 희생과 관련해서 또는 성전(聖戰) 중에는 성적 금욕기간이 규정되었다. 구약시대 이후에 에세네파의 일부는 결혼을 거부했다. 독신이 그리스도교에 처음 나타난 것은 종말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는 현세대가 끝나가고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으며, 새로운 시대에는 모두 천사들처럼 될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자신을 바치기 위해 가족생활을 포기했다. 사도 바울로는 독신을 칭송했지만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1·2차 라테란 공의회(1123, 1139)는 이론적으로 금욕적이 될 수 있다는 사제 결혼의 합법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제직이 정식 결혼에 장애가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기는 하지만 간혹 예외도 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들(루터교·성공회·개혁교회 및 기타)은 사제에 대한 독신 요구를 중단했다. 평신도의 독신 역시 중단되었지만 1845년경 영국 교회에 수도단이 다시 등장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소규모 개신교 수도단이 유럽 대륙에 설립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와 관련해 사제의 독신은 로마 교회에서 다시 논란거리가 되었다. 공의회는 결혼한 부제직을 인정했다. 공의회 이후에는 사제직을 떠나 결혼한 사제의 수가 급증했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사제들의 독신은 선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 파울루스 6세는 회칙(回勅) '사제들의 독신'(Sacerdotalis Caelibatus:1967. 6. 23)에서 독신에 관한 전통적 법규를 재확인했다. 교황은 〈신약성서〉로 되돌아가서 그리스도와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위해 사제는 완전히 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가정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자신을 채우고 사로잡는 초월적 실재를 자신의 생활방식을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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