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역사
1. 한국 기독교의 발자취
1) 기독교의 성장배경
19세기 말 조선에서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시작된 이후 한국 개신교는 세계의 주목을 끌만큼 놀랍게 성장해왔다. 오늘날 4명중에서 1명은 개신교 신자일 정도로 한국 개신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왔다.
이와 같은 개신교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이런 논의들은 당시 개신교가 처해 있던 사회적 상황을 중심으로 볼 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개신교의 성장을 이해하면 개신교 성장의 원인을 서구 선교사들이나 개신교 지도자들의 공로로 돌리는 엘리트중심주의적인 주장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개신교 자체 내에 성장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는 주관적인 판단에 빠질 위험성도 막을 수 있다.
2) 도입기…교육과 의료를 통한 간접적 선교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개신교의 활동은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선교하기보다는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의 맥클레이(R. S. Maclay)는 고종을 만나 병원설립과 학교설립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 당시 조선정부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병원과 학교의 설립을 허가했지만, 이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884년 9월 22일에는 중국에 있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주한미국공사 공의로 부임하였고, 1885년 4월에는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이 설립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인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인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당시 외국의 종교는 배척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의 복음을 선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직후 미국 공사에게 "우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려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어 연구생이자 교육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 아래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지금은 선교사업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어떤지요?"라는 편지를 썼다. 언더우드의 편지에는 직접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라 학교교육과 병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하려는 자세가 나타나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에 '배재학당'을 세워 최초의 근대교육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 학교는 1887년 6월 8일 고종이 직접 '배재'(培材)란 이름을 지어주었을 만큼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또 다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은 1886년 5월 30일에 정동에 여학당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1887년 명성황후의 사명(賜名)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식 고등교육의 출발은 1886년 4월 29일 제중원의 의학부로 개설된 후 1899년 정식 의학교로 발전된 세브란스의학교이다. 이 학교는 최초의 의학교인 동시에 고등교육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3) 선교초기…근대 문명의 산파 역할
개신교를 통해 유입된 근대문명은 유교적 가치관과 사회질서에 묶여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난과 기근, 전염병과 문맹의 악순환에서 조선정부와 관리들은 문제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정부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문명을 안고 들어온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초기의 개신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라기보다는 근대문명의 산파로 생각되었다. 결국 개신교로 인해 도입된 근대문명은 한국사회와 문화체계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광수는 개신교에 대해서 "개신교는 어두운 한국사회에 구미의 새로운 문명을 제일 먼저 도입하여 문명개화와 자유인권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개신교는 봉건사회에서 양반에 의해 억눌렸던 상인, 천민, 여성들에게 인권, 자유와 평등의 관념을 제공했던 것이다.
4) 일제시대…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의 근원지
선교 초기의 개신교가 봉건사회를 근대문명으로 이행시키는 산파 역할을 함으로써 성장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오늘날의 개신교는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성장의 위기와 극복이라는 혼란을 겪으면서 생존력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 개신교는 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의 근원지였다.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개신교는 학교교육과 교회, 그리고 여러 단체를 통해 계몽활동을 전개하여 대중교육과 근대지식인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개신교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문맹률을 낮추었고,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자칫 일제하에서 상실되기 쉬운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에 기여했다.
5) 해방기…교세확장의 기회와 특권 획득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에 동조하고, 일본 정부의 통제 아래 단일한 교단으로 부속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개신교는 해방과 함께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종교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 개신교는 그 동안 계몽과 근대의 깃발을 휘두르며 전통종교와 민간신앙과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다. 많은 민간신앙을 미신과 사이비종교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전통종교가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틈을 타서 교세확장의 기회를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함께 정치사회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은 대개 기독교인들이었다.특히 이승만 정권 아래 관료와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정치와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주어진 혜택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의 예로 군대에 선교나 포교를 할 수 있는 군종제도도 주로 개신교에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6) 한국전쟁기…정신적·물질적 안정 제공
한국전쟁과 함께 월남한 북한의 교인들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교회는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을 토로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 공간이자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고향이었다. 한국전쟁이 안겨준 사회문화적 위기는 비단 월남민의 경험만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던 한국인들에게 물리적·정신적 안정을 제공했던 가장 활발한 종교단체는 개신교였다. 개신교는 선교 본국으로부터 대량의 구호물자를 제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복음을 꾸준히 전파해갔다.
7) 경제개발기…경제 선장에의 편승
한국전쟁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환경을 새롭게 조성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에 걸쳐 전통적인 관습과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시작된 1960년대의 경제개발은 한국 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부터 1982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8.3%였고, 1인당 GNP는 1962년의 82달러에서 1983년의 1,884달러로 25배나 급증했다. 정부 주도형의 경제성장은 국민의 의식과 생활방식의 변화를 함께 추구했다. 전국에서 실시된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구호로 하면서, 전근대적인 속성들을 인위적으로 제거했다. 전통적인 민간신앙은 배척되었고, 가옥의 구조와 식생활의 개량이 진행되었다. 산업화와 함께 이농현상과 도시화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성에 적합했던 개신교는 자연히 경제성장의 흐름을 탈 수 있었다.
8) 1970·80년대…민주화 운동의 산실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의 인권문제와 경제적 착취, 그리고 정치권력의 부패에 대한 저항세력으로서 1970년대와 80년대에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산실 역할을 수행했다. 개신교가 지닌 이런 긍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배경에는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물량주의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놓여 있었다.
대형화된 교회는 교단이라는 공동체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이기적인 개교회주의의 모습을 띠어갔다. 개교회의 공동체만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려는 이러한 이기적 개체주의는 군사독재정치에 의한 정치불안, 도시화와 그에 따른 공동체와 소속감의 상실, 급변하는 사회현상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과 아노미(anomie) 현상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개신교 성장의 원인은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는 교회의 고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 원인을 사회적·문화적 변동에 따른 종교의 성장 혹은 후퇴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사회학적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은 개신교의 성장이 정부의 주도하에서 실행된 근대화와 산업화에 개신교가 적절하게 적응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게 해 준다. 선교초기부터 근대성과 함께 전개된 개신교는 최단시간에 근대화를 추구했던 정치적·경제적 논리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교세를 확장해왔던 것이다.
2.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만남
1) 한국 문화 속의 기독교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아마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토착화'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지도 이미 한 세기를 넘겼고, 더 이상 기독교를 서구에서 들어온 외래종교라고만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기독교의 영성과 신학은 한국인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큰 흐름을 형성해왔고, 현재도 사회적 세력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전통과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지금까지 개신교가 한국 문화에 기여한 바는 극히 미미한 형편이었다.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차분히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할 시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내적 성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앞으로 개신교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풀어야 할 큰 숙제는 한국 문화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한국의 문화가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토착화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에서 토착화의 문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신학의 토착화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배 의식의 토착화였다. 그 각각의 추이와 성과를 살펴본다면 향후 한국 개신교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신학의 토착화
과거에도 토착화와 관련한 신학적인 논의들이 있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토착화 신학논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57년 신학 전문잡지로 창간된 《기독교사상》은 당시 한국 신학자들이 글을 발표하는 대표적인 잡지로서 신학 논의와 개신교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잡지는 이른바 '에큐메니칼' 진영의 초교파 연합기관인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되었고, 당시 진보적 신학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토착화 논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재해석하여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를 접목시키려는 신학적 논의들이 이 잡지에 실리면서 촉발되었다. 이런 논의들은 기존의 한국 신학계가 서구 신학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토착화 신학이라고 불린다. 이 토착화 신학은 '비서구화'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로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윤성범(尹聖範), 유동식(柳東植), 변선환(邊鮮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의 결합"을 한국 신학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특히 한국의 전통 종교와 대화를 하면서 한국 종교 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원형을 찾으려고 하였다. 윤성범은 고대 단군 신화와 유교 속에서, 유동식은 무교(巫敎)와 고대 풍류도(風流道) 속에서, 그리고 변선환은 선불교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내용인 창조론, 기독론, 속죄론, 구원론, 삼위일체 신론 등의 신학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신학의 '비서구화'에서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을 찾았던 이들은 196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주도하는 종교간 대화의 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타종교와 대화 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이들이 동양인이면서도 서구 신학에서 출발하여 동양 종교와 문화로 접근해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토착화 신학은 동양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서구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토착화 신학 논의에 대해 일군의 신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논쟁이 촉발되었다.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 문화와의 만남을 주장한 신학자들이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던 반면에,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한 사람들은 주로 장로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다. 특히 윤성범과 신학적 논쟁을 벌였던 박봉랑, 전경연, 이종성 등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소속이었으며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흐름에 속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제기한 반대론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즉 토착화 신학처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할 경우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론자들은 한국이라는 특수성보다는 기독교라는 보편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토착화 신학자들과는 반대로 보편적 진리인 기독교를 통하여 한국 문화와 종교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토착화 신학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착화 신학자들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서 긍정적인 가치와 기능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던 반면, 반대론자들은 그러한 노력을 오히려 기독교 전통의 보편성 유지에 쏟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3) 예배의식의 토착화
신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와 한국 문화의 만남을 모색한 것이 1960년대 토착화 신학 논쟁이었다면, 1970년대 이후 기독교 예배 형식을 토착화하려는 또 다른 논쟁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개신교 내에서 진보적인 흐름을 대변하는 기독교장로회 측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민중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을 해오던 허병섭 목사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동월교회에서 문화운동가 임진택을 초청하여 판소리 선교찬송이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각색한 『안묘수전』 『허제비전』 등과 같은 창작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4년 강원룡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의 경동교회에서는 추수감사예배를 이례적으로 추석에 맞추어 민속놀이 형식을 차용하여 진행하였다. 매년 가을 11월 세번째 일요일에 지내던 한국 개신교의 전통적인 추수감사절을 추석으로 앞당겨 지낸 것이다. 이 날 밤 예배는 기존의 개신교 예배 형식이 아니라 가면극 형식을 빈 민속놀이로 진행되었다. 교회 안의 의자와 강단, 그리고 피아노 등의 집기를 다 치운 상태에서 돗자리와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예배를 시작하였다. 제1부 행사에서는 연합 성가대가 농부가, 보리타작, 풍년가 등을 부르는 민요잔치를 벌였다. 특히 제3부 대학생부 춤판에서는 서울의 양반놀이를 개조하여 당시 사회 현실을 풍자한 가면극을 선보였다. 이어 가면극이 끝나고 나서 강원룡 목사의 기도로 추석 예배를 마쳤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1985년 '한국민중선교협의회'의 결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민중교회에서도 예배의 토착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단순히 한국적인 문화 전통과 기독교를 접목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배의 진행과정에서 민중문화의 저항적 전통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독교장로회 측의 대표적인 교회인 향린 교회의 주일 예배를 들 수 있다.
향린교회의 주일예배의 기본 형식은 죄의 고백과 용서, 성경봉독, 설교 등으로 구성되는 일반 개신교의 주일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독특한 점은 가야금, 장고, 아쟁, 대금 등을 함께 사용하여 반주하는 국악 찬송, 예복으로 한복을 사용하는 점, 성례전을 행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카스테라 빵이 아니라 전통적인 술떡을 사용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포도즙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성만찬 집기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서구식 은빛 그릇이다. 어떤 민중교회에서는 성만찬에서 시루떡과 막걸리를 사용하며, 그릇에 담긴 막걸리 위에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 꽃잎을 띄우기도 한다.
한국의 개신교가 1960년대 이후 토착화에 관심을 가지고 벌였던 신학적 논쟁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사회적으로 전통문화 계승운동이 확산되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신학의 토착화 논쟁이 당시 한국 사회의 전통문화에 대한 열기에 부응하는 것이었다면, 의례 현장에서 예배의 토착화 논쟁은 특히 전통문화를 저항문화로 이해하고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민중문화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민중교회의 사례들은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개신교의 예배 토착화 실험들은 약점을 안고 있다. 전통문화가 바탕하고 있었던 우주관이나 세계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몇 가지 상징물이나 상징적 행위, 음악이나 복식 등의 시청각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예배 중에 사용하는 수준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상징물의 대체가 일관적 규칙을 가지지 못할 경우에 개신교와 전통문화의 만남은 어색한 분위기로 끝나고 만다. 예컨대 향린교회의 경우에 전통적인 요소를 채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떡과 포도즙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담는 집기와 내용물이 어울리지 않는 등의 어색한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은 토착화라는 명목으로 개신교 예배에 삽입된 전통적인 요소들이 본래의 맥락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필연적으로 개신교 예배가 지닌 의미구조의 통일성도 위협받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출저:한국 컴퓨터선교회
'好學의 歷史,宗敎,哲學 > (역사)韓國敎會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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