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목민심서)牧民心書

목민심서(牧民心書) 소개

好學 2009. 6. 11. 06:38
 

목민심서(牧民心書)

 

 

정약용(丁若鏞)에 대하여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召川〕 마재〔馬峴〕)출신.

1. 가계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5세 때 풍천홍씨(豊川洪氏)를 취하여 6남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學淵)·학유(學遊)와 서랑 윤창모(尹昌謨)가 있을 뿐이다.

2. 관직생활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李瀷)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斗尾峽)뱃길에서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內降中庸講義》·《내강모시강의 內降毛詩講義》·《희정당대학강의 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舟橋〕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珍山)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마과회통 麻科會通》·《사기찬주 史記纂註》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3. 유배생활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禍機)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考三倉詁訓》·《이아술 爾雅述》·《기해방례변 己亥邦禮辨》 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破門壞墻 不許安接)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萬德寺) 소풍길에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高聲寺)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 周易四箋》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 喪禮四箋》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춘추》(1812)·《논어》(1813)·《맹자》(1814)·《대학》(1814)·《중용》(1814)·《악경》(1816)·《경세유표》(1817)·《목민심서》(1818)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지었다.

4. 저술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경4서·1표2서·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 외에 《시경강의보 詩經講義補》 3권이 있다. 시는 풍림(諷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며,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書)에는 《매씨상서평 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 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 尙書知遠錄》 7권이 있다.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사기》 양한서(兩漢書) 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선기옥형 璿璣玉衡》은 상천(上天)의 의기(儀器)가 아니요 《홍범구주 洪範九疇》도 정전형(井田形)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禮)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 四禮家式》 9권이 있다.
관혼상제 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太牢)·소로(少牢)·특생(特牲)·특돈(特豚)의 예에서 그의 변두(籩豆)나 궤형(簋鉶)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대부(大夫)·사(士)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 樂書孤存》 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유안(劉安) 등의 취률정성(吹律定聲)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이나 괘기월기(卦氣月氣)·정반변반(正半變半)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역(易)에는 《주역사전 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 易學緖言》 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추이(推移)·물상(物象)·효변(爻變)·호체(互體)로서 십이벽괘(十二辟卦)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中孚)·소과(小過)두 괘는 오세재윤(五歲再閏)을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先天卦位)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 春秋考徵》 12권이 있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禘)는 오제(五帝)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 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喪期)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 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 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 原義總括》이라 하였다.
그 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분목(分目)으로서 주자의 심덕(心德)·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 孟子要義》 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 유가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에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 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 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 心經密驗》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제·자(孝弟慈)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 經世遺表》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군현제도·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제·해세(海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봉공·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호·예·병·형·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欽欽新書》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써 6경4서로써 수기하고 1표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소개글


<목민심서>는 고금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다스리는 데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으로서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지방 관헌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한 책이다.


구성은 총 12강(綱)으로 구분으로 대분하고 이것을 다시 각각 6조씩 세분하여 12강 72조로 되어 있고 당시 목민관의 생활을 총망라한 것이다. 국가가 존립하고 정치가 행해지는 목적은 국민들을 잘 살 게 하데 두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못살 게 된다면 국가나 정치는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는 모든 정치인들과 일반 인사들도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목민심서>는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한 저서다. 지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일들을 자세하고도 예리하게 제사하고 있다. 다산은 이 저서를 내기까지 많은 경험과 견문을 쌓았으므로, 그 내용이 결코 실속 없는 설교에 그치거나 억지로 갖다 붙인 헛된 논리나 추측에 흐르지 않고 조목마다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찍이 수령을 지내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실정을 보았고,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 본 일도 있었다.


또 강진의 유배 생활 중 지방 관리의 횡포와 무능, 그리고 아전의 종간과 농민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많이 보고 들을 수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이책을 쓰게 된 동기였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 <목민심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 가르침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며 인격 수양에 도움을 준다는 점과, 오늘날에도 그대로 받아들여 배워야할 부분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목민심서>를 꼭 읽어 보도록 권하고 싶다.



저자소개


정약용 - 조선 말기의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 등 벼슬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과학 등에도 밝아 진보적인 신학풍을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금지한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좌천되어 귀양을 갔으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에도 <목민심서>를 비롯한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40년 동안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주요 저서에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 심서> 등이 있다.




목민심서 구성 및 목차



                       1.부임육조(赴任六條),


                       2.율기육조(律己六條),


                       3.봉공육조(奉公六條),


                       4.애민육조(愛民六條),


                       5.이전육조(吏典六條),


                       6.호전육조(戶典六條),


                       7.예전육조(禮典六條),


                       8.병전육조(兵典六條),


                       9.형전육조(刑典六條),


                      10.공전육조(工典六條),


                      11.진황육조(賑荒六條),


                      12.해관육조(解官六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