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스포츠)이야기

제4회 1950년 브라질 월드컵

好學 2009. 3. 18. 21:28

 

 

' 제4회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개최도시 : 벨로 호리존테, 쿠리티바, 파르토 알레그레, 레시페, 리오 데 자네이루, 상 파울루

 

발전을 거듭해오던 월드컵축구대회도 2차 세계대전 때문에 12년 동안의 불안하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다. 평화의 제전인 월드컵축구는 1942년과 46년 두 대회를 건너뛰고 12년 만에 1950년 브라질대회로 이어진다. 쥴 리메 컵도 전쟁기간 중 땅속에 묻히기도 하고 구두상자 속에 숨겨지는 등 수난을 잘 견디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1938년 파리에서 열린 FIFA총회에 1942년 월드컵대회를 유치하겠다고 신청한 나라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독일이었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는 결정을 미뤘다. 2차 대전으로 1946년에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FIFA총회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도 제4회 월드컵대회 유치를 희망하지 않았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남미 나라 중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대회개최를 희망했다. 브라질이 개최국으로 결정됐다. 이 총회는 아울러 54년 대회를 스위스가 개최하도록 함께 결정했다.

이 총회에서는 또 축구와 월드컵대회의 발전, 그리고 FIFA의 성장과 경기정신의 확립에 오래 동안 헌신한 쥴 리메를 기리기 위해 월드컵 트로피의 이름을 '쥴 리메 컵(The Jules Rimet Cup)'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Charles Miller라는 사람이 브라질에 축구를 처음 소개했다고 전한다. 밀러는 브라질에 이민 온 영국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민 2세로 잉글랜드의 사우스햄튼에 있는 학교에 유학하고 1894년 돌아오는 짐 속에 축구공 두 개를 가져온 것이 브라질축구의 시발이었다. 그는 상파울루 철도회사에 입사한 직후 동료들은 물론 개스회사와 은행에 근무하는 영국계 브라질 거주자들로 Sao Paulo Athletic Club을 만들었다. 이후 상파울루와 리우 데 자네이루에 축구 클럽 조직이 급속히 확산됐고, 1901년 다섯 개 클럽이 출전하는 첫 지역리그가 화려한 브라질축구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 월드컵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나라는 잉글랜드였고, 늦은 참여였으나 축구의 종주국이었기에 환영받았다. Maracana Stadium

브라질은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마라까낭 스타디움(Maracana Stadium 오른쪽 사진. 1990년대 좌석 설치공사로 수용규모가 12만 2268명으로 줄었음)을 건설했다.

제4회 월드컵축구대회는 더 많은 조와 더 많은 경기를 치르는 제도를 채택했다. 즉 4개의 조에 각 조는 4팀씩으로 편성하고, 2회전에 오르는 각 조의 1위 4팀들도 서로 한 번씩 경기를 치르는 리그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본선진출이 16개국이 되도록 짜여진 예선이 차질을 빚은 데다 예선을 통과하고도 본선출전을 포기하는 나라들이 꼬리를 물었다.

스코틀랜드와 터키가 본선진출을 포기했다. 두 나라가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미 예선에서 탈락한 포르투갈과 프랑스를 본선에 나오도록 요청했으나 포르투갈은 사양했다. 터키 대신 출전하기로 한 프랑스는 우루과이, 볼리비아와 함께 본선 4조 편입을 동의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브라질까지 3,500km의 머나먼 여행에 섭씨 35도의 폭염 속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 그리고 대회조직의 불공평을 이유로 경기일정 변경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대회조직의 불공평이란, 브라질은 여섯 개 경기 중 다섯 경기를 리오에서 치르도록 했고 다른 나라들은 대륙의 이쪽 저쪽의 수천 마일을 왕래하도록 짜여진 경기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는 불참을 통보했다. 개최국인 브라질은 이에 대해 1938년 프랑스월드컵 때 브라질이 겪은 불편을 지적하면서 프랑스팀의 합당하지 못한 핑계를 힐난했다. 결국 4조에는 우루과이와 볼리비아만 남게 됐다. 불균형한 형태의 조는 당연히 재편성돼야 했으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진행했다.

제4회 브라질 월드컵대회는 예선을 통과한 터키와 스코틀랜드의 포기, 그리고 아시아의 예선이 무산됨으로써 전 대회보다 줄어든 13개국으로 치르게 됐다. 유럽에서 6개국, 남미에서 5개국 그리고 북중미 2개국이 참가해 유럽과 남미의 균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대회였다.

 

4개조는 다음과 같이 짜여졌다.

 

1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
2조 잉글랜드 스페인 미국 칠레
3조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
4조

우루과이 볼리비아

 

브라질월드컵대회는 1950년 6월 24일 오후 4시에 남미에서의 두 번째 막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의 이 시각은 6월 25일 새벽 4시! 우리는 3년 동안 계속되는 민족의 대 비극 6.25전쟁에 휘말리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아직도 마무리 손질이 덜된 마라카낭 스타디움의 개막경기를 위해 브라질 선수들이 입장할 때 발사된 21발의 예포는 브라질 국민들의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브라질은 개막경기에서 아데미르가 2골을 넣는 등으로 멕시코에 4-0승을 거뒀다. 그러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스위스에 고전하다가 2-2로 비겼다. 브라질이 2회전에 오르기 위해서는 유고슬라비아라는 장애를 넘어야 했다.

스위스를 3-0, 멕시코를 4-1로 물리친 유고슬라비아가 브라질에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1회 우루과이대회 1회전에서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에 2-1로 패한 적이 있기도 했다. 2승을 거두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는 브라질과의 다음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반면, 브라질은 1승1무로 이겨야 결승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브라질팀이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14만 7천여 명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주도했다. 전반 3분만에 알프레도, 후반 24분에 발타자르의 골로 두려웠던 유고슬라비아를 영패시키자 축제분위기로 리우 데 자네이루가 발칵 뒤집혔다.

1회 대회 우승국인 우루과이는 두 팀뿐인 4조에서 볼리비아를 8-0으로 물리치고 결승리그에 올랐다. 월드컵 3연패를 노리던 이탈리아는 스웨덴에 3-2로 패하면서 2회전 진출이 막히고 말았다.

 

2조에서는 월드컵 사상 가장 충격적인 이변이 일어났다.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1-0으로 패한 것이었다. 축구의 종주국으로서 FIFA와 월드컵대회를 외면해오다가 1946년에야 FIFA에 복귀한 자존심 강한 잉글랜드는 모든 나라의 환영과 기대를 모으며 이 월드컵 축구대회에 처녀출전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 데뷔전에서 칠레를 2-0으로 이겨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고, 두 번째 상대는 칠레보다 약한 미국이어서 잉글랜드의 전도는 순탄하리라 믿었었다. 예측을 잘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이길 확률은 500 대 1로 잉글랜드의 절대 우위를 점쳤다. 그래도 잉글랜드는 베스트 멤버를 출장시켰다. 과연 잉글랜드는 축구의 종주국다웠고 콧대를 세울 만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화려한 경기를 펼쳤다. 미국의 문전은 줄곧 붐볐고 골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미국1-0영국

(오른쪽 사진 : 미국의 개트젠스(주장)의 골에 낙망하는 표정으로 공을 바라보는 잉글랜드의 버트 윌리암스)

 

그러나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골은 터지지 않아 손뼉 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관중들을 지루하게 할 무렵, 이게 웬 일인가! 전반 39분, 미국의 주장 머킬베니가 연결한 공을 바르가 좌측으로 밀고 들어가 센터링하자 아이티 태생인 래리 개트젠스가 잉글랜드의 골을 강타했다. 이 한 골로 잉글랜드가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것이 월드컵축구 이변 1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영국 신문들은 '1-0패'는 잘못된 뉴스로 보고 잉글랜드의 '1-0승'으로 고쳐 보도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 뉴욕타임즈의 편집자들은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이겼다는 전문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미국이 져도 크게 졌을 것이라고 판단해 1-0패도 아닌 '10-0패'로 오보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잉글랜드를 꺾은 미국팀은 골키퍼에 이탈리아계 2세 보르기, 공격수에는 벨기에계 마카를 비롯해 두 명의 포르투갈 계 소우사 형제를 갖고 있었다. 1930년 대회에서 3위에 오른 미국선수들은 이민 1세들이었으나 이번 브라질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들이었다.

잉글랜드의 알프 램시 경(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대회 우승팀 잉글랜드의 감독을 맡게 된다)은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대 이변을 직접 체험한 영국 최고의 공격수였다.

잉글랜드는 다음 경기에서도 스페인에 1-0패해 결승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억울한 패배였다. 잉글랜드의 잭키 밀번이 전반 14분 헤딩으로 완전한 골을 넣었다. 그러나 주심 이탈리아의 갈레아티가 오프사이드를 선언해 무효골이 되고 말았다. 밀번의 앞에는 골키퍼와 수비 한 명이 있었다. 분명한 오심이었다.

전 대회 2연속우승의 이탈리아는 상파울루에서 대규모 교민응원단의 열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3-2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스웨덴은 2년 전 올림픽축구에서 우승한 선수 3명이 주축을 이뤄 상당한 실력을 가진 팀이었다. 반대로 이탈리아는 브라질대회를 앞둔 1949년 토리노(Torino) 팀의 수페르가(Superga) 비행기사고로 대표팀 주전 8명을 잃어 전력에 심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38년 프랑스대회 때는 유일하게 전용비행기로 이동해 다른 나라 선수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이번에는 머나 먼 브라질까지 배로 오는 피로를 겹치고 있었다.

 

4조의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의 단 한 경기만을 거쳐 결승리그에 올랐다. 우루과이는 스키아피노의 4골을 포함한 소나기 골로 볼리비아에 8-0승을 거뒀다.

일주일을 쉰 뒤 결승리그가 시작됐다. 각 조의 1위 4팀이 리그 성적으로 우승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즉 결승전이 따로 없는 방식이었다. 1차리그 각 조 팀 수의 불균형으로 브라질과 스페인은 세 번의 경기를 치른 반면, 스웨덴은 두 번,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 단 한 경기를 치르고 결승리그에 올랐다.

결승리그 첫 경기에서 브라질은 아데미르의 네 골을 비롯해 모두 일곱 골을 넣어 스웨덴을 7-1로 쉽게 이겼고, 두 번째 경기에서 스페인을 6-1로 눌렀다. 스페인을 이길 때 마라까낭 스타디움을 꽉 메운 관중들이 브라질의 대승에 열광하다가 두 명이 압사하고 2백6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2승을 거둔 브라질은 우루과이와 우승을 다투는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고, 브라질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루과이는 결승리그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 전반을 2-1로 뒤진 채 마쳤으나 후반 18분 가까스로 동점골을 넣어 2-2로 비겨 출발이 순탄치 못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스웨덴에 3-2로 간신히 이겼다. 이번에도 스웨덴이 전반에 2-1로 앞섰으나 우루과이는 후반에 곤잘레스의 태클로 부상을 입은 스웨덴의 욘손이 밖으로 나간 틈을 이용해 3-2 역전승을 거뒀다. 이러한 우루과이의 저조한 경기력과 상 파울루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의 먼 여행에서 오는 피로를 감안할 때 브라질의 우승은 더욱 확실해 보였다. 브라질은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제4회 월드컵대회의 우승을 차지하게 돼 있었다.

7월 16일,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우승을 가리는 경기가 벌어질 마라까낭 스타디움에는 브라질 우승을 굳게 믿는 20만여 명의 대 관중이 입장했다.

 

우루과이우승선수들(왼쪽 사진 :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 선수들)

 

 

 

 

 

 

 

 

 

 

 

 

가슴 설레는 결승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브라질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경기는 보이지 않았다. 우월감을 가진 브라질의 공격은 우루과이의 탄탄한 수비에 부딪치기를 거듭하다가 0-0으로 마친 전반전이었다.
후반에 들어서자 브라질이 선제골을 넣었다. 후반 3분 아데미르와 공을 빠르게 주고받으며 우루과이 진영 좌측을 파고들던 프리아사가 벼락같은 슛으로 선제골을 올려 20만 관중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우루과이도 20만 명을 잠재울 줄을 알았다. 후반 22분 바렐라의 중앙선을 넘는 긴 패스로 이탈리아 태생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수비자세를 편 브라질에 압박을 가하던 우루과이의 기지아가 34분에 터치라인으로부터 출발한 단독공격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마라까낭의 대재앙을 브라질에 안겨주었다. 이후 브라질은 만회골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1930년 제1회 월드컵 우승에 이어 두 번째로 쥴 리메 컵을 안았고 이탈리아와 함께 월드컵 2회 우승국으로 떠올랐다.

브라질은 처음으로, 그것도 자국에서 월드컵대회의 우승국이 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설욕이 있을 것이나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이 큰 불행의 씨앗이었다. 우승을 확신했고 훌륭한 자국의 선수들을 너무도 믿었던 브라질 국민들은 그만큼 실망도 컸다. 브라질이 코앞에서 우승을 놓치자 축제를 위한 준비는 광폭으로 돌변했고 혼란은 정점에 이르렀다. 각 가정에서는 반기(半旗)를 내걸었고 자살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우루과이에서도 우승소식을 들은 심장 약한 축구 팬 6명이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대회는 관중 수와 입장수입에서 대 성공을 거뒀다.

13개 참가국의 경비를 지불하고도 많은 액수가 브라질 축구협회 재정으로 편입됐다.

13개국이 벌인 22개 경기에 관중은 1백33만 7천 명의 폭발적인 기록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으로 혼미했던 월드컵축구대회는 기력을 회복한 것이었다.

네 번의 대회를 치른 월드컵축구의 결과는 유럽 국가인 이탈리아가 두 번, 남미 국가인 우루과이가 두 번씩의 우승컵을 안았다.


 

본선경기들

 

 

54)브라질 4-0 멕시코(전반 1-0)

 

55)유고슬라비아 3-0 스위스(전반 0-0)

 

59)유고슬라비아 4-1 멕시코(전반 2-0)

 

60)브라질 2-2 스위스(전반 2-1)

 

64)브라질 2-0 유고슬라비아(전반 1-0)

 

65)스위스 2-1 멕시코(전반 2-0)

 

 

 

56)스페인 3-1 미국(전반 0-1)

 

57)잉글랜드 2-0 칠레(전반 1-0)

 

61)미국 1-0 잉글랜드(전반 1-0)

 

62)스페인 2-0 칠레(전반 2-0)

 

66)스페인 1-0 잉글랜드(전반 1-0)

 

67)칠레 5-2 미국(전반 1-0)

 

58)스웨덴 3-2 이탈리아(전반 2-1)

 

63)스웨덴 2-2 파라과이(전반 2-1)

 

68)이탈리아 2-0 파라과이(전반 1-0)

 

69)우루과이 8-0 볼리비아(전반 4-0)

 

 

결승리그

 

 

70)브라질 7-1 스웨덴(전반 3-0)

 

71)우루과이 2-2 스페인(전반 1-2)

 

72)브라질 6-1 스페인(전반 3-0)

 

73)우루과이 3-2 스웨덴(전반 1-2)

 

74)스웨덴 3-1 스페인(전반 2-0)

 

75)브라질 1-2 우루과이(전반 0-0)

 

 

'1950년 최종순위

 

나라(감독)

승점

경기

1

우루과이(LOPEZ Ivan)

7

4

3

1

0

15

5

+10

2

브라질(COSTA Flavio)

9

6

4

1

1

22

6

+16

3

스웨덴(RAYNOR George)

5

5

2

1

2

11

15

-4

4

스페인(EIZAGUIRRE Guillermo)

7

6

3

1

2

10

12

-2

5

유고슬라비아(ARSENIJEVIC Milorad)

4

3

2

0

1

7

3

+4

6

스위스(ANDREOLI Franco)

3

3

1

1

1

4

6

-2

7

이탈리아(NOVO Ferruccio)

2

2

1

0

1

4

3

-1

8

잉글랜드(WINTERBOTTOM Walter)

2

3

1

0

2

2

2

0

9

칠레(BUCCIARDI Arturo)

2

3

1

0

2

5

6

-1

10

미국(JEFFREY Bill)

2

3

1

0

2

4

8

-4

11

파라과이(SOLICH Manuel Fleitas)

1

2

0

1

1

2

4

-2

12

멕시코(VIAL Octavio)

0

3

0

0

3

2

10

-8

13

볼리비아(PRETTO Mario)

0

1

0

0

1

0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