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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30년 우르과이 월드컵(쥴 리메 컵)

好學 2009. 3. 18. 20:42

 

 

1930년 우루과이

 

 

 

wpe1.jpg (3930 bytes) 쥴 리메 컵

높이 35cm, 무게 3.8kg.
승리의 여신(A goddess of Victory)상은 순은,
그 위의 접시는 순금, 받침대는 푸른색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
승리의 여신이 8각형의 성찬배를 받들고 있다.
받침대 8면 중 4면에는 1개씩의 순금접시가
그려져 있다
., 받침대에는 트로피의 이름과
함께
1930~1970년 사이의 월드컵 우승국 이름 9개가 새겨져 있다.

 

본선 개관

개최도시 : 몬테비데오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면적 17만 6215㎢, 당시 인구 200만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우루과이(공식명칭 : Republica Oriental del Uruguay 우루과이동방공화국)가 장차 세계를 진동시킬 월드컵의 첫 테이프를 끊는 나라로 선정된 것은 1929년 5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총회였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유럽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도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나섰지만,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축구를 연속 우승한 축구강국이라는 점, 그리고 1930년은 우루과이의 독립 100주년이 되는 경축의 해이기 때문에 월드컵을 유치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 FIFA와 회원국들을 설득했다.

우루과이는 1680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아오다가 1822년에 브라질 연방으로 편입됐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아르헨티나의 지지를 얻어 J. A. 라바예하와 33명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브라질 군을 쫓아내고 1830년 공화국 헌법을 발표하여 독립공화국이 됐던 것이다.

우루과이에 축구가 도입된 것은 1870년대 영국의 이민과 노동자들에 의해서였다. 1882년 Montevideo 대학에 재직하던 잉글랜드 교수가 영국출신 선수들로 최초의 팀을 만들었다. 우루과이 축구리그는 1900년 5개의 아마추어 클럽으로 출발했다. 영국인들로부터 시작한 우루과이 축구는 전인구 중 주로 이탈리아계와 스페인 계의 백인이 89%를 차지하는 튼튼한 바탕을 가지고 출발해 강국이 안될 수가 없는 나라였다.

FIFA가 창립된 1904년부터 여러 차례의 논의가 진행되다가 세계 1차 대전으로 물거품으로 사라졌던 월드컵축구대회가 FIFA창립 26년 만에 우루과이에서 역사를 시작하게 됐다. 아마츄어 대회인 올림픽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프로선수를 철저히 가려내고, 대신 프로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독립된 월드컵대회를 출범시키게 된 것이다.

 

 FIFA가 우루과이를 첫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한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가)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축구를 연속 우승한 축구 강국이며
나) 참가선수단의 여비와 호텔 숙박비 일체를 우루과이가 부담하며
다) 결승전을 치를 새로운 스타디움을 몬테비데오 시내에 신축한다.

 

개최국으로 선정된 우루과이는 경제가 어려워 많은 인구가 실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밖에 주어지지 않은 기간에 여러 분야의 힘을 모아 문제들을 극복해 나갔다.

우루과이 정부는 관중 9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스타디움 건설에 착수했다. 우루과이 독립 100주년을 뜻하는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사는 너무 늦은 1930년 초에 착공됐다. 7월 13일 개막경기에 맞추기 위해 공사는 밤낮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역사적인 월드컵 축구대회의 개막경기인 프랑스와 멕시코의 경기는 메인 스타디움에서 진행하지 못했다. 경기장이 제 날짜에 완공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늦게 준공되기는 했지만 우루과이의 자존심이기도 한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을 적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건설한 기술이 찬사를 받았다.

개최국 선정에서 탈락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우루과이를 개최국으로 선정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 첫째 당시 선박에 의한 너무 먼 여행이 부담이었고, 둘째 월드컵 기간동안 자국 내의 경기들을 중단해야 하고, 셋째는 경제난이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는 이미 프로 축구클럽들이 존재했고, 이 클럽들은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거의 두 달 동안 봉급만 지불하고 경기를 못하는 것이 마땅치 않기도 했다.

월드컵 두 달 전까지도 유럽 나라들의 참가 여부가 불투명하자 남미축구연맹은 FIFA에서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근근히 마련한 월드컵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쥴 리메 FIFA회장과 부회장이며 벨기에 축구협회장인 실드레이어스가 발벗고 나섰다. 두 사람의 설득으로 프랑스와 벨기에는 출전을 수락했다. 쥴 리메의 간청에 따라 루마니아의 카롤(Carol)왕은 대표선수들을 직접 선발해 3개월의 휴가와 보수를 지급하며 귀국 후 복직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파견했다. 루마니아에서는 당시 축구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카롤 왕은 젊은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한 덕에 직접 나서 선수 선발은 물론, 월드컵을 전후한 90일 동안 선수들을 축구 외의 다른 일에 신경쓰지 못하게 까지 했다. 유고슬라비아도 뒤를 따랐다.

그래서 다행히 유럽의 4개국이 첫 월드컵에 출전하게 됐지만, 이 국가들은 유럽축구의 약체들이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영국연방의 4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1928년 아마추어 선수들에 대한 휴가기간 급료문제의 이견으로 FIFA에서 탈퇴해 첫 월드컵대회에 불참했다.

결국 유럽 4개국과 미주 9개국으로 13개국 대표팀들이 참가하는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의 구도는 완성됐다. 미주지역의 출전국은 브라질을 비롯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페루, 멕시코 그리고 미국이었다.

유럽 4개국 중 3개국은 1930년 6월 21일 프랑스를 출발하는 선박 '꽁뜨 베르드(CONTE VERDE)'에 동승해 먼 여행길에 올랐다. 15일 간의 항해 끝에 벨기에, 프랑스, 루마니아 대표팀들은 몬테비데오에 도착해 환영을 받았다.

 

쥴 리메도, 프랑스의 조각가 아벨 라플뢰르의 작품인 높이 31.28cm, 무게 약 3.8kg의 여신상이 새겨진 순금제 쥴 리메 트로피를 직접 갖고 동행했다. 이 컵은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 브라질이 세 번째 우승함으로써 영구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은 쥴 리메 컵은 끝내 도둑의 손에 의해 종적을 감추고 만다.

 

4일 후 유고슬라비아 대표팀도 도착했다.

참가국들의 집합은 끝났다.

첫 월드컵축구대회가 개막에 이르렀다.

13개 팀을 4개조로 나눴다.

아르헨티나(1조),

브라질(2조),

우루과이(3조)

그리고 미국(4조)이 톱시드로 배정됐다.

미국을 시드 배정국에 포함시킨 이유는 단순했다. 스코틀랜드 선수였던 오울드, 맥기, 알렉스 우드, 갤러처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 같은 선수들이 미국에 귀화했기 때문에 강한 팀일 것이라는 짐작이 그 이유였다.

대회 진행은 각 조의 1위 팀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여기서 이긴 두 팀이 우승을 놓고 결승전을 벌이도록 했다.

 

30입장식.gif조 편성은 다음과 같다.

1조 아르헨티나, 프랑스, 멕시코, 칠레
2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볼리비아
3조 우루과이, 루마니아, 페루
4조 미국, 벨기에, 파라과이


(사진 :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축구대회 개회식 장면)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제1회 우루과이월드컵대회는 성공적이었고 극적인 상황들도 많았다.

개막경기는 7월 13일 포시토 스타디움에서 프랑스와 멕시코가 장식했다.

개막경기에는 개최국이 출전하는 게 통례이나, 이날이 프랑스 혁명기념일이어서 우루과이가 양보했다. 프랑스가 멕시코를 4-1로 이겼다.

월드컵축구 1호 골의 영광은 프랑스의 루시엥 로랑이 차지했다.

로랑은 90세의 나이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관전했다.

그는 FIFA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우루과이월드컵 출전을 위해 15일 간의 선박여행을 하면서 훈련은 갑판에서 했고, 멕시코와의 개막경기는 눈이 오는 속에서 치렀다. 나의 월드컵 1호 골은 동료의 센터링을 오른발 발리킥으로 넣었다. 그러나 그 골이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이라는 사실은 경기가 끝난 뒤에 알았고, 아마추어 선수였기 때문에 어떤 포상도 받지 못했다"고 회상하면서 “오늘날의 축구는 그 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체력, 기술, 전술이 발전했으나 험한 태클이나 거친 경기 등 부정적이고 우려스러운 점들도 많다. 옛날의 축구는 동료는 물론 상대 선수들과 심판을 존중했다. 지금은 윙의 역할을 윙백이 대신하고 있는데, 진정한 윙의 역할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감독들은 지금의 감독들처럼 일일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와 멕시코의 개막경기에서는 필드플레이어의 GK대역이라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 전반 10분 경, 멕시코의 공격수 메히야가 슛하려고 뻗은 발이 몸을 던져 이미 공을 잡은 프랑스의 골키퍼 테포의 턱을 찬 것이다. 턱뼈가 깨진 테포는 들려 나갔다. 선수교체가 허용되지 않은 시절(선수교체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대회부터 시행됨)이라 레프트 하프인 샹트렐이 골키퍼의 역할을 대신했다. 월드컵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GK대역이 첫 월드컵대회 첫 경기에서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는 개막경기에서 10명이 싸우고도 이겼지만 다음 두 경기에서 패해 준결승에는 오르지 못했다.

 

주경기장인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의 개장경기는 개최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18일,

우루과이의 첫 경기로 페루 전이었다. 우루과이는 카스트로가 후반 15분에 넣은 한 골로 페루를 이겼다.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은 물론 초만원이었다.

1조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는 다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루과이 관중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프랑스를 응원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진행된 경기시간은 84분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장돌뱅이라는 별명의 몬티가 후반 35분 선취골을 넣었다. 10분밖에 남지 않아 다급해진 프랑스는 동점골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레프트윙이 프랑스 문전으로 센터링한 공을 프랑스의 피넬이 받아 재빠르게 전방으로 내 찼다. 역습이었다. 프랑스 공격수 랑기예르가 골키퍼와 맞서게 된 순간! 놀랍게도, 브라질의 주심 알메이다 레고가 경기를 끝내는 휘슬을 불고 말았다. 이때가 후반 39분이었다. 월드컵대회에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주심의 계시 착오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선수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관중들의 야유와 소란이 스타디움을 어지럽게 했다. 경찰이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들을 내보내고 주심이 자신의 우연한 실수였음을 인정한 후 남은 6분의 경기가 재개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없어 아르헨티나에 1-0패했다.

관중들은 훌륭히 뛰고도 진 프랑스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을 돌았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우루과이 관중들의 경쟁의식의 표출이었다. 두 나라의 경쟁은 전부터 있어왔지만 1928년 올림픽 축구결승에서 더욱 커져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주심의 오판 덕분으로 프랑스에 이긴 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스타빌레가 14분 사이에 2골을 넣는 등 골 풍년을 이루면서 6-3으로 압승하고, 칠레도 3-1로 물리쳐 준결승에 올랐다.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에 2-1, 4-0으로 패해 탈락했다.

4조의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에서는 월드컵 자책골 1호가 나왔다. 파라과이는 15분만에 곤잘레스의 자책골을 미국에 헌납한 뒤 기력을 잃어 3-0으로 패했다.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는 미국에 6-1로 대승했다. 미국은 전반 10분에 센터하프 라파엘 트레이시의 다리가 부러져 10명이 뛰면서 대량 실점했다. 또 하나의 준결승에서 우루과이도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이겼다.

결승전은 서로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첨예한 경쟁의식에 빠져있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지게 됐다. 1928년 암스텔담 올림픽축구결승의 재판이 된 것이다. 우루과이는 올림픽챔피언이고 아르헨티나는 남미챔피언이었다.

이 결승전을 응원하기 위해 3만여 명의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이 플라타 강을 건너왔다. 우루과이 월드컵조직위원회가 아르헨티나축구협회에 준 입장권은 10,000매에 불과했다. 우루과이 경찰은 플라타 강을 건너오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서 120여 정의 권총을 압수했고, 센테나리오 주경기장 입장 때도 80여 정을 색출했다.

대망의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 결승전에는 9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오전 8시부터 문을 연 경기장은 경기 두 시간 전인 정오에 초만원을 이뤘다. 입장하지 못한 수만 명이 경기장 밖에서 난동을 피워 무장경찰이 경비를 해야 했다.

경기를 앞두고 결승전에 어떤 공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해 관중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때만 해도 공인구가 없어 나라마다 선호하는 공이 따로 있었다. 주심 랑게누스는 전반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공을, 후반에는 우루과이에서 만든 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결승전은 오후 2시에 시작됐다. 광적인 양국 응원단 사이의 긴장 속에 시작된 경기는 살얼음을 밟는 듯 했다. 전반은 아르헨티나가 더 공격적인 듯 했으나 첫 골은 우루과이가 얻었다. 12분이 흘렀을 때, 우루과이의 외팔이 카스트로가 상대 페널티에리어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밀어주자 좁혀 들어오던 오른쪽 날개 파블로 도라도가 아르헨티나의 그물을 출렁이게 했다.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20분, 카를로스 페우세예가 단독으로 정면을 뚫고 들어가 동점골을 터뜨렸다. 두 나라 응원단의 함성과 신음이 교차했고, 기대와 실망을 되풀이하게 하는 경기가 전반 35분에 이르렀을 때, 아르헨티나의 18세의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역전골이자 이 대회 여덟 번째의 개인 골을 터뜨렸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이 골이 오프사이드라고 주장했으나 허사였다. 전반은 2-1로 아르헨티나가 앞선 채 끝났다.30골장면.gif

잠시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에 관한 얘기를 하고 넘어 가자. 주전이었던 페레이라가 첫 경기인 대 프랑스 전을 마친 후 학기말 시험을 위해 귀국한 자리에 고등학교 학생인 18살의 스타빌레가 대신 투입됐다. 스타빌레는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경기인 멕시코 전에 첫 출전해 3골을 넣어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스타빌레는 결승전의 한 골까지 모두 8골로 제1회 월드컵대회 최다득점선수가 된다.

 

(오른쪽 사진 : 우루과이의 Dorado가 첫 골을 넣는 장면. 아르헨티나의 Botasso가 펀칭에 실패하고 있다.)

 

후반에 들어서자 우루과이는 만회골을 위해 총공세를 펼쳐 13분만에 체아가 동점을 만들었고, 23분에는 이리아르테가 역전골을 터뜨렸다. 3-2. 우승을 확신하는 우루과이 관중들의 함성이 연발했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공격은 성난 파도였지만 완강한 우루과이의 방파제에 막혀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기 종료 1분전, 우루과이의 외팔이 헥토르 카스트로가 4-2로 우승을 굳히는 골을 작렬 시켰던 것이다. 어릴 때 오른팔을 다쳐 잘라낸 카스트로는 오른발의 위력이 특히 강해 그의 슛은 가히 대포알로 알려졌다. 그는 이 대회에서 2골을 넣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에바리스토와 마리오 에바리스토는 월드컵 결승에서 함께 뛴 최초의 형제다.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지는 월드컵축구 우승자로 쥴 리메 컵을 껴안은 최초의 선수다.

제1회 월드컵축구 결승전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경쟁의식은 더욱 커졌다. 우루과이 정부는 다음날을 축제일로 정했음은 물론 선수단에 포상하고, 우승을 기념하는 선수들의 조각상을 세우기로 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심판진의 편파 판정과 우루과이 선수들의 거친 경기 때문에 우승을 빼앗겼다고 주장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 수천 명이 우루과이 영사관 앞에서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여 경찰이 공포까지 쏘며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쪽의 과격한 행동은 상대의 흥분을 불러와 두 나라는 결국 국교단절에 이르러 6년 동안 서로 외면하기도 했다.

우루과이는 두 번의 올림픽 축구 연속우승과 월드컵 초대 챔피언의 위업을 달성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다음날을 경축휴일로 선포했다. 몬테비데오 시 전체는 축제분위기로 넘쳤다.

1930년 7월 13일부터 7월 30일까지 몬테비데오 한 도시, 3개의 경기장에서 전체 18개의 경기를 치렀다. 주심의 실수와 거친 경기들이 지적되는 대회였지만 처음 열리는 대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체로 무난했다는 평가였다. 수입도 모든 경비를 제하고 남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초청된 13개국만으로 치러진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는 예선전 없는 유일한 대회다.

제1회 월드컵 축구대회는 밝은 미래를 예고하면서 어둠과 함께 장엄한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본선 경기들(13국)

 

2)프랑스 4-1 멕시코(전반 3-0)

5)아르헨티나 1-0 프랑스(전반 0-0)

6)칠레 3-0 멕시코(전반 1-0)

10)칠레 1-0 프랑스(전반 0-0)

11)아르헨티나 6-3 멕시코(전반 3-0)

15)아르헨티나 3-1 칠레(전반 2-1)

4)유고슬라비아 2-1 브라질(전반 2-0)

7)유고슬라비아 4-0 볼리비아(전반 1-0)

13)브라질 4-0 볼리비아(전반 1-0)

3)루마니아 3-1 페루(전반전 1-0)

9)우루과이 1-0 페루(전반 0-0)

14)우루과이 4-0 루마니아(전반 4-0)

1)미국 3-0 벨기에(전반전 2-0)

8)미국 3-0 파라과이(전반 2-0)

12)파라과이 1-0 벨기에(전반전 1-0)

16)아르헨티나 6-1 미국(전반전 1-0)

17)우루과이 6-1 유고슬라비아(전반전 3-1)

 

 

최종순위

 

순위

나라(감독)

승점

경기

1

우루과이(SUPPICI Alberto)

8

4

4

0

0

15

3

+12

2

아르헨티나(OLAZAR Francisco)

8

5

4

0

1

18

9

+11

3

미국(MILLER Bob)

4

3

2

0

1

7

6

+1

4

유고슬라비아(SIMONOVIC Bosko)

4

3

2

0

1

7

7

0

5

칠레(ORTH Gyorgy)

4

3

2

0

1

5

3

+2

6

브라질(RODRIGUES Pindaro Carvalho)

2

2

1

0

1

5

2

+3

7

프랑스(CAUDRON Raoul)

2

3

1

0

2

4

3

+1

8

루마니아(RADULESCU Costel)

2

2

1

0

1

3

5

-2

9

파라과이(LAGUNA Jose Duran)

2

2

1

0

1

1

3

-2

10

페루(BRU Francisco)

0

2

0

0

2

1

4

-3

11

벨기에(GOETINCK Hector)

0

2

0

0

2

0

4

-4

12

볼리비아(SAUCEDO Ulises)

0

2

0

0

2

0

8

-8

13

멕시코(DE SERRALONGA Juan Luque)

0

3

0

0

3

4

13

-9

 

이글은 "박기만 축구세계"에서 요약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