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임진왜란 (壬辰倭亂) 3

好學 2012. 11. 30. 23:34

임진왜란 (壬辰倭亂) 3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 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 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전란 직전
전쟁 초기 부산진 전투
일본 에도시대 문학 《회본태합기》에 그려진 부산진 전투 모습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일치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여진족과 타툼이 빈번한 북부지방과 남부의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특히 기병의 경우에는 상비군으로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보병의 경우에는 이러한 이유로 병력의 질이 떨어졌다.

전쟁의 조짐이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면에서 군비를 강화하고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파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여 년이나 평화를 누렸으며 특히 경상도 등 남부지방은 그 이전 수백 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의 명을 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하였다.

 일본의 정세

센고쿠 시대 통일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고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 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다이묘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 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노부나가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피살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 가문을 장악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과 전쟁에 들어갔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되었고, 이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칭하며, ‘소부지(墜無事, 전국의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도록 강요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던 규슈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호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곧 강력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검지(檢地)라는 토지 제도 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라는 무기 몰수 정책이었다.

1591년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고의로 황무지로 이봉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불참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분리를 완성시켰다.

 일본의 군사력

15세기 중엽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의 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됨에 따라 전투의 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의 밀집 부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라는 경장비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조총)(텟포)와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 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다케다 군과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의 변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 보사 등을 두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 또는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즉, 제1진의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 업무), 하부(수송 업무), 선두 및 수주(순박운앙 업무), 대목부(감찰 업무), 의사, 승려(부대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지휘관 다이묘가 그리스도교 신도일 경우에 해당되었다. 일례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에서 성직자로서의 업무를 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등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요토미는 이와 같이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천여 척의 전함을 확호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 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西海道), 난카이도(南海道), 산요도(山陽道), 산인도(山陰道), 기나이 및 그 동쪽의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3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철포, 창, 궁시, 왜도 등 4가지의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주종 간의 단결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1368년 개국된 명나라는 15세기 초인 영락제 때에 이르러 그 국력이 막강해졌으나 영락제가 죽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49년정통제몽골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내부의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이에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양쪽에서 싸워야만 했으며,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자연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력제가 등극하면서 10년간은 장거정(張居正) 등의 대정치가의 등장으로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정사를 환관에게 일임해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명나라는 또한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知拜)의 반란과 귀주(貴州)지방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해야 했으며, 후에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