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임진왜란 (壬辰倭亂) 2

好學 2012. 11. 30. 23:32

임진왜란 (壬辰倭亂) 2

(1592년 음력 4월 13일 ~ 1598년 음력 11월 19일)
장소 한반도
결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승리
일본의 정권 교체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병력
조선

개전 당시 84,000여 명
개전 1년 후 175,000여 명
명나라
1차 원병 (1592–1593)
43,000여 명
2차 원병 (1597–1598)
100,000여 명

일본

1차 침입 (1592–1593)
약 160,000-235,000여 명
2차 침입 (1597–1598)
약 141,000여 명

피해 규모
조선

70,000여 명
명나라
최소 30,000여 명

일본

최소 140,000여 명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개전 1년여만에 창원이남으로 패퇴하였으며 결국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만력의 역(萬曆之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6]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배경 및 원인

15세기 후반 서세동점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기에 노력하였으며 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난립한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

그러나 1590년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를 종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신분이 미천하여 쇼군이 될 수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스스로는 태합(일본어: 太閤 (たいこう) 다이코[*])이라 칭하며 그의 천하 야욕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

 

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585년이며,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정벌을 준비하라고 명한 때는 이미 1587년 이었다.

또한,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에게 충성하던 자들이었으며, 도요토미에게 미온적이거나 비협조적이었던 다이묘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이 전복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들어서는 한 이유가 된다.

도요토미1591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통해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주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명나라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일거에 적으로 돌릴 수 없었고, 과거 삼포 왜란을 겪었던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명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선선히 조선의 길만 빌린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일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조선통신사

도요토미는 재차 대마도주를 통하여 교섭을 청하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침략할 뜻을 나타내며 조선을 위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교섭에 대한 답변과 더불어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서인을 대표하였던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동인을 대표하였던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성마저 황윤길의 입장을 옹호하였으나 당시 집권 세력으로서 백성들의 동요를 원하지 않았던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海運術)을 정비하고 특히 유럽에서 전래된 보고와 빈번한 일본 사신의 왕래로 사태를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 김수(金睟)·이광(李光)·윤선각(尹先覺) 등으로 무기를 정비,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하고 신립(申砬)·이일(李鎰)로 하여금 변비(邊備)를 순시케 하여 요충지(要衝地)인 영남지방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류성룡이 전란을 대비하여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에 배치하였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만이 제대로 된 전비(戰備)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의 정치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그 부패가 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 후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고 명종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 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은 선조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장애를 끼쳤다.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이 왜구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대마도 정벌)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를 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한 사대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 등으로 양국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나라와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당연시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와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나라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적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체제 아래 규정된 당초의 조공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여 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그리 원활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내부의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조선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전에는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명나라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명나라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에 비해 매우 강대한 국력을 가진 명나라에 대하여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