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임진왜란 (壬辰倭亂) 1

好學 2012. 11. 30. 23:27

임진왜란 (壬辰倭亂) 1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1597년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며

1555년 을묘왜변 이후에는 상설기구화 되었다.

그러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즉, 당시 동아시아는 명나라는 16세기경에 환관(宦官)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도 향리재주(鄕吏在主)의 관리나 과거급제자층이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반(反)환관운동·반(反)해금정책 등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농민봉기와 종실간의 반란이 잦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이 자주 침입해왔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영국경영(領國經營)에 기반하여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정권이 전국통일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로 철포대 등 총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토[關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 검지(檢地)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더욱이 삼포왜란,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唐入: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변혁전쟁'(體制變革戰爭)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편 서인의 영수인 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편당(偏黨), 특히 동인의 지배와 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즉,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나, 15세기말부터 정치의 실권을 가진 훈척(勳戚)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정파정치(政派政治)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심의겸(沈義謙) 문제로 인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고, 이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서 퇴계(退溪) 문하가 남인(南人)으로 분립하는 등 중앙정치세력의 알력 및 개편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권세가들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의 해택(海澤)·노전(蘆田)의 강점, 군역의 포납화(布納化), 수령·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상납물의 강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군제도 병농일치의 개병제 원칙이 붕괴되고, 각급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는 기능을 상실하여 국방력이 약해졌다. 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초기의 군사제를 규정대로 운용하면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公州敎授) 조헌(趙憲)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磎) ·이황(李滉) ·윤선각(尹先覺) 등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 ·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예 ·축성술(築城術) ·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총15만 8,700명의 육군을 1~9번대로 편성하고 11만 8,300명을 후속 병력으로 잔류시켰다. 그중 선봉대로서 최전선 투입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주장(主將)으로 하는 제1번대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 2만 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번대 1만 1,000명 등 5만 2,500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가덕도(加德島)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선봉대 18,000여 명이 700여 병선(兵船)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 ·전라도의 각 감영(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토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金汝杖)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근(金姻)을 좌도안집사(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 ·조령 ·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의 서천(西遷)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 ·강원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 ·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적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옥포(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한산도(閑山島) ·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을 진주성(晉州城)싸움 ·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즉, 7월 8일 이순신의 함대는 이억기·원균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이던 와키사카[脇坂安治]의 일본 함대 73척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공격하여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 ·동래의 수성전(守城戰)과 김해성(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鄭起龍)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선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의 해유령(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勤王)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趙憲)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거병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 ·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 ·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休靜) ·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宋應昌) ·이여송(李如松)이 4만 5000의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碧蹄館)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치(梨峙)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 승장(僧將) 처영(處英)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 ·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李德馨)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 ·겐소[玄蘇] 사이에 대동강변에서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즉, 1592년 10월의 진주성(晋州城) 전투의 승리가 돋보였다. 김해 주둔의 일본군이 전라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왔을 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판관 성수경(成守慶)·이광악(李光岳)의 지휘하에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최경회(崔慶會)·이달(李達) 등 의병장들이 성 밖에서 호응하는 6일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김시민은 전사했지만,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비를 마련하려던 일본군을 좌절시켰다. 하지만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沈惟敬)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 ·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大阪城]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勘合印: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金烏) ·공산(公山)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그리고 휴전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여러 무기와 화약이 발명되고 함선들을 건조했으며, 유성룡을 도제조로 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즉 속오법(束伍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살수(殺手)·사수(射手)·포수(砲手)의 삼수기(三手技)로 나누어 침략에 대비했다. 수군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여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세우고 기지의 방비와 포구 간의 연락을 강화했다. 한편 축성 작업도 활발하게 벌어져 남한산성·독산산성·무한산성·죽산산성 등이 새로 축조되었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 ·충청 ·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 ·순천(順天) ·김해(金海) ·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 ·초계(草溪) ·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 ·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즉,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모함에 의해 하옥되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거북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鳴梁)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는데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쟁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備邊司)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명의 제도를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마련했고 지방에는 초관과 속오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허용, 병사의 면역(免役), 노비의 방량(放良) 등이 일부 허용됨에 따라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근본적으로 군역(軍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책들은 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군비의 확장, 국가의 지출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역·공납·납세를 강요했고 이에 따른 이농현상이 광범하게 나타났다. 그결과 공물의 미납화, 양전수세의 간편화, 면세전 확대 방지책, 병역의 납세화, 환곡책, 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전란으로 궁전·관청건물들과 홍문관·춘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었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 내부 간에도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권세력·지식인층들의 사상에는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이는 이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전쟁을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정권이 등장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국내적으로 〈무가제법〉·〈대오법도〉·〈참근교대제〉 등을 제정하여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우고, 도요토미의 팽창주의와는 달리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외교역의 단일적 통일체제를 갖추었다. 더욱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과의 통교회복을 서둘러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귀환문제 등에 적극적인 유화책을 썼다.

그리하여 1604년 승려 유정이 일본으로 가 교섭을 하여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又吉) 등의 사절을 파견했으며,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일본은 전쟁중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활자·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건주위(建州衛) 및 하다[哈達]·휘파[輝發]·우리[烏拉] 등 여러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