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칼 바르트 [Barth, Karl] - 2

好學 2012. 11. 29. 22:03

칼 바르트 [Barth, Karl] - 2

 

칼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 

 

 

 

제2의 형태는 성경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특권적 증거이다. 끝으로 교회의 복음 선포가 세 번째 형태이다. 후에 말한 두 가지 형태는 도구적 의미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하여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정적으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적, 사건적 성격을 가진다. 말씀의 사건은 자신의 존재를 행동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은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 분의 말씀이 되도록 하시는 경우에, 그 분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교의학 I-1, 109)."

 

바르트의 성경관은 많은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자들은 바르트가 성경을 거의 전통적인 축자 영감 교리에서 가르치는, 특별한 위치에까지 격상시킴으로써, 그것을 역사 비평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비난했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바르트가 성경을 비명제적 계시의 사건보다 낮은 위치에 두었고, 성경의 무오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고 맹렬히 공격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신현대주의라고 부를 정도였다.

바르트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면서, "성경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어쨋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간의 말과 사상들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들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반복하고 재현하려는 인간들의 시도이다(교의학 I-1, 113)"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권적 증거인 성경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위, 즉 성경의 신적 영감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성경의 영감은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분명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우리 믿음의 기저에는 성경이 있으며, 또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요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의 객관성을 더 잘 보장해 주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리, 즉 그 밖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존재치 아니하며, 인간의 주관성이라는 힘 앞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능력임을, 또 우리가 그것을 바로 그러한 것으로 알고 인정치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교회와 그 성도들의 삶 속에 끊임없이 내려지는 하나님의 결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게 된다(교의학 I-2, 534-35)."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내적, 외적 증거에 기초한 학문적 결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성경은 인간의 결정이나 주도권과는 별도로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기적을 창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대하여 교회는 순종과 순복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데 "그것은 교회의 발생에 대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과 기초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진정한 역사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교회에서 독특한 그리고 나름대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교의학 I-2, 540)." 바르트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시키지만 모든 인간의 권위 위에 두었다. [교회 교의학] 전반에 걸쳐서 그는 성경이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그 가르침이 무오한 것처럼 취급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교의학이 성경적이냐는 것이다.

 

만약 성경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기필코 그것 때문에 교회가 혼란스럽게 된다고, 다시 말해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바빠진 나머지 교회의 선포라는 문제의 본질에 의해 제기된 학문적 과제를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교의학 I-1, 287)."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신학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모든 교리의 시작과 중심 그리고 결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그의 생애와 죽음, 부활, 높이심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연합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구조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제공하며 그의 신학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독특한 자기 계시, 즉 인격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계시는 이 하나님의 자기 해석이다. 우리가 만일 그의 계시에 대하여 다룬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다루는 것이지... 그와 다른 어떤 실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교의학 I-1, 311)."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이 말하는 그 분이라면 그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분이어야지 단순히 하나님을 대표하거나 그의 대리자일 수만은 없다. 계시 사건의 실제성 안에, 그리고 그 이면에 그것의 가능성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적 답변이라고 이해했다.  그는"따라서, 계시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의한다면, 계시하는 하나님과 계시의 사건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것의 효력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매끄러운 연합 가운데 계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다(교의학 I-1, 309)"라고 주장했다. 슐라이엘마허와는 반대로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그의 신학의 출발점에 두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여타의 모든 신론들과 계시의 개념들과 비교해 볼 때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신론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구별케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미 계시의 기독교적 개념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구별케 한다(교의학 I-1, 301)." 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독특하고 탁월한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그러므로 진정 인간이며 동시에 진정 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는 인격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육체 안에서도 능동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인격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 존재와 활동의 주체이시다(교의학 I-2, 151)."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두 번째 '존재 양태'의 성육신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는 '위격'(person)이라는 말보다 '양태'(mode)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는 다른 인격이시라면 그 분은 성부의 자기 계시일 수가 없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절대적인 연합을 이루고 계시는 신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그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교회의 삶 내에서의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삼위일체라는 상황 내에서 이 말이 이해되기를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두 번째 존재 양태요, 성부 자신의 인격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신 것이다.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 정의하고 신적 탁월성을 두 가지 범주, 즉 신적 사랑이라는 탁월성과 신적 자유라는 탁월성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전통적 이중성을 대신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자신과 인간들 사이에 교제가 있도록 그가 자유로이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시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은혜롭게 죄악된 인류와 같이 되신 것(identification), 곧 하나님의 아들이 먼 나라로 찾아오신 길에서 드러난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탁월성들은 은혜와 거룩, 자비와 의, 인내와 지혜이다. 바르트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를 강조했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이 세상과의 교제를 갖기 전에, 그리고 그것과는 별도로, 그 자신 안에서, 즉 그의 삼위일체적 삶 안에서, 완전한 사랑과 교제를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때만 (헤겔의) 범신론을 피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 은혜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하나님이 만약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 세상이 필요했다면, 그의 사랑은 순수한 은혜의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 세상은 하나님이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의 신성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주장했고 하나님의 자유라는 입장에서 그것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고상함, 주권적 위엄, 거룩함, 영광, 심지어 초월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이 신적 인격의 자기 결정과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교의학 II-1, 302). 사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은 그 분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최고의 것 그리고 철저히 독립해 있는 모든 것과 대비된다. 그것들이 전혀 존재치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지라도 그 분은 작아진다거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교의학 II-1, 311)." 하나님의 자유의 탁월성은 조화와 편재, 불변과 전능, 영원과 영광 등인데, 바르트는 그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하나님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충만함은 피조적 생명과의 조화를 향하여 기우러져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이 나와 이 세상과의 진정한 교제로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심오한 조화에 도달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들과 연합이라는 이러한 의욕과 결심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근거와 기초로 보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예수의 성육신,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세상과 언약적 교제를 맺으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르트는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 뒤에 어떤 하나님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분은 우리가 없는 하나님이기를 원치 않으며 ... 오히려 우리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즉 우리의 존재와 삶의 행위 안에서 그 분의 비길 데 없는 존재와 삶의 행위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교의학 IV-1, 7)."

 

선택의 교리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들어온 최고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죄악된 인류가 충분히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와 배척을 짊어지고 '먼 나라'로 들어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선택받은 자이자 배척받은(저주받은) 자이고,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은 그 분 안에 포함되며 그 분은 대표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하나님의 배척, 모든 사람들에게 놓인 하나님의 진노,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 죽음을,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인하여 영원 전부터 자신에게로 돌려놓고 그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고 택하며, 예수를 필두로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예수를 택한다(교의학 II-2, 123)."

 

이와 같이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 일원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택이자 유기의 유일한 대상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 선택, 구원, 생명을 허락하고, 자신에게는 ... 배척, 파멸, 죽음을 돌렸다(교의학 II-2, 163)." 곧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에게 엄청난 대가를 돌리면서 인류를 사죄하고자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 구원이 미치는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유기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것을 분명히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가운데 불경건한 삶을 살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이러한 욕망과 노력은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무효화되었다. ... 인간에게 놓여진 것은 하나님의 교제 속에서 누리는 영생이다(교의학 II-2, 319)." 그는 만인 구원설(apokatastasis)을 말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서면 응답에서 바르트는 직접적으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스 폰 발타사르는 "바르트의 선택 교리에서 분명한 것은 보편적 구원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명백한 단 한 가지의 실재는 은혜이며 어떠한 정죄적 심판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어야만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평가: 바르트의 신학 방법의 강점은 계시에 대한 전적 의존에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신학은 철학적 체계들이나 문화적, 지적 유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신학적'이다. 전반적으로 바트르의 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신학의 자주성을 보존하고 있다. 신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과학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의 강점은 또한 약점으로 남는다. 그것은 그가 신학적 자주성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데서 연유한 약점이다. 계시의 진리를 합법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여하한 시도도 거부한 결과 그것은 신학의 자주성을 확립시켜 주는 것을 넘어서서 신학을 고립시키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신앙을 인간 경험의 지평 안에서 예기 될 수 있는 것쯤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믿음과 경험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스탠리 그렌쯔는 말한다. 후이스틴(Wentzel van Huyssteen)은 "바르트는 신학의 대상을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란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하여 그가 전제하고 있는 공리적 기준은 출구가 막혀 있다. ... 계시에 대하여 그가 제시한 긍정적인 특성도 신학의 주관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적 계시 신학은 대단히 비의적인 방법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기본적인 신학적 교의들--하나님, 계시, 성경, 영감 등--이 주관적인 변덕(그것이 개인적 차원이든지 혹은 영향력 있는 전통을 따르는 것이든지)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바르트의 신학적 방법이 일으킨 논란의 두 번째 요점은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분을 아는 인격적 앎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것으로만 제한하였다. 그럼으로 모든 교리가 일종의 기독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바르트의 선택 교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예정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다. 바르트가 성자와 성부와 성령 사이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독론에 대한 극단적인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구속사에서 성부와 성령 그리고 인간의 역할들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바르트의 성경에 대한 교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 양자로부터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고등비평설의 학문적 결과들을 무시하여 성경을 마치 축자적으로 영감된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지나치게 구분함으로써 성경의 교리적 무오성을 부정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바르트의 성경관과 성경의 용도에 대한 그의 이해 사이에 그가 두고 있는 차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말하는 성경의 용도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인간적인 성격에 대하여 그가 강하게 했던 말들을 무시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성경관에 초점을 맞추어서 바르트가 성경을 신학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취급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무시한다. 20세기 신학에 끼친 바르트의 가장 위대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불분명한 가운데 묻혀 있던 삼위일체의 교리를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바르트의 취급 방법이 양태론적(modalistic)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인격(person)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삼위일체의 구분을 위하여 존재의 양태(modes of being)라는 용어를 채택함으로써, 하나님을 어떤 단일적 주관성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는 세 가지 존재 양태라는 궁극적 실제를 초월하거나, 그 이면에 그보다 더 높은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양태론을 거부했다(교의학 I-1, 382). 그리고 나중에는 양태론에 대한 거부를 극명하게 밝히고 하나님이 영원한 존재 안에 복종의 순서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영원한 그리고 환원할 수 없는 구분이 있음을 주장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승리의 "예!"가 인간의 모든 "아니오!"를 무효화시켜 버린다. 바르트에 대하여 가장 동정적인 비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버카우어(G. C. Berkouwer)는 "마치 케리그마가 아무런 중대한 메시지가 없는 단순한 선언이 되어 버리는 위협 속에 놓이듯이, 바르트 신학에서 은혜의 승리는 인간 결정의 심각성을 막연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슐라이엘마허가 인간에 대하여 매우 큰소리로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고 했던 오류를 범했다면,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하여 큰소리로 말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 했던 실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