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론[ 井田論 ]
조선시대 실학의 거두 정약용(丁若鏞)이 제시한 토지제도 개혁안.
이것은 그가 1817년(순조 17)에 쓴 ≪경세유표 經世遺表≫에서 전개시킨 토지개혁 이론이다. 당시는 토지 제도의 문란을 비롯해 국민경제가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정약용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문둔전(衙門屯田)·궁방전(宮房田) 등의 팽창으로 국가 수입원이 감소되고, 이서(吏胥)들의 가혹한 수탈에 이기지 못해 농지를 떠난 수많은 유민(流民)이 발생하고, 무위도식으로 호화 생활을 하는 지주층의 횡포 등으로 인해 국민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이서들의 중간 착복으로부터 민산(民産)을 보호하는 한편, 이들의 착복을 막아 재정을 튼튼히 하는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또 놀고 먹는 유식양반과 전국적으로 발생한 상당한 수의 유민들을 생산에 종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토지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기본 전제하에 정전제만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현실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라고 판단하였다.
원래 정전제는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유제이다. 이 제도는 토지의 한 구역을 ‘井’자로 9등분해 8호(戶)의 농가가 주위의 여덟 구역을 각각 경작해 자급하고, 중앙의 1구(區)는 8호가 공동 경작해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던 것이었다.
이러한 정전법이 그 실시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전론(田論)을 논하는 모든 학자들이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표방해 온 것이 통례였다. 물론 정약용의 정전론은 중국 고대의 정전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여러 실학자들이 논의해 온 현실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였다.
그는 ≪경세유표≫의 전제조(田制條)를 〈정전론 井田論〉과 〈정전의 井田議〉로 나누었다. 전자는 주로 고대의 정전제에 대한 종래 유학자들의 해석상의 오류를 조목별로 지적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견해를 피력한 것이었다. 후자는 주로 정전법을 새로운 토지개혁안으로 전개시킨 것이었다.
그는 종래 중국 유학자들과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정전제를 이상론으로 표방하면서도 그 실현 불가능함을 말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즉, 선배 학자인 이익(李瀷)은 당시 조선의 지형이 중국의 평원과는 달리 산악이 많음을 들어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일정한 지형을 정해 정자전형(井字田形)을 만든 주대(周代)의 그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8결의 사전(私田)이 있고, 1결의 공전(公田)을 두는 형식을 취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부 학자들이 주대에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많았으나 조선은 그 반대이므로 시가 불가능하다는 논거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농업·수공업·상업은 이미 그 직이 분업화되어 토지 배분의 대상은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뿐이므로 총인구의 과다는 총토지면적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선배 학자들의 균전론(均田論)·한전론(限田論)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균전법이 역사적으로 연구, 시행되었으나 실패했음을 지적하였다. 즉 그것은 바로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까지 모두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려 한 데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1799년(정조 23)에 쓴 〈전론 田論〉에서도 인구 증감의 변화와 토지 비옥도의 차이로 균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한전론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즉 한전이란 전지를 일정한 수준까지 매입할 수 있고 일정한 한계 이하는 매각할 수 없는 제도라 하지만, 타인의 이름을 빌려 그 한계를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비판을 전제로 정전론의 실행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는 토지 분배의 원칙과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농자득전(農者得田), 즉 농업 종사자에게만 토지를 분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발전에 따라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는 토지 분배대상에서 제외시킴은 물론 좌식(坐食) 계층인 사족도 제외시키고 농민들에게만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원칙을 새로 정립시켰다.
둘째, 가족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족노동력이 많은 가족에게 더 많은 토지와 비옥한 토지를 분배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의거해 토지분배 방법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먼저 그는 토지 분배 대상 농민을 원부(原夫)와 여부(餘夫)로 나누었다.
원부는 정전제에 따른 토지 분배의 8구역 중 1구역의 수전농민(受田農民)을 말하며, 여부는 1구역의 4분의 1의 수전농민을 말한다. 원부는 8인 가족으로 구성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가족노동력(남자는 20세 이상 60세 이하, 여자는 20세 이상 50세 이하)의 수는 5, 6인이 되어야 1구역인 100묘(畝)의 토지를 분배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부는 부부로 구성된 2인 가족의 노동력으로 구성되어 25묘를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부를 사전 1구역의 완전한 수전단위(受田單位)로 하고 여부는 4분의 1구역의 수전단위로 양극에 설정한 다음 그 중간 영역의 배분 단위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가족 구성에서는 원부와 여부 사이에 여러 구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4·5·7인 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각각의 가족노동력 구성도 다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5인 가족 이상만이 1구역의 전지를 분배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토지 비옥도의 상·중·하에 따라서 분배할 것을 구상하였다.
즉, 5인가족 이상만 1구역을 분배받되 원부 이상은 상등지 1구역을 분배받으며, 5·6·7인가족은 1구역을 분배받되 그 가족노동력의 노동자수에 비례해 점점 비옥도가 높은 토지의 1구역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의 기준이 가족노동력에 있었으므로, 실제로 노동력을 소유하지 못한 병약자와 노인은 수전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구상을 실현시키려는 의도에서 토지 사유화의 현실을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정전제의 경우, 공전 1구역은 국가가 경비를 지출해 매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편, 사전 8구역에 대해 토지 경작의 재분배는 시행하나 토지 소유의 재분배에 대하여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의 주장이 가지는 한계라고 하겠다.
즉, 당시 지주층에 의한 토지 사유화와 사적 지주제도에 대해 비판은 하면서도, 기존 사유지의 국가 환수를 통한 토지 재분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은 채 경작자만을 그의 정전제 토지 분배원리에 따라 재분배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토지개혁사상은 노동력에 따른 토지 재분배를 역설하면서도 기존의 토지 소유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결핍된 개혁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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