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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전론[ 均田論 ]

好學 2012. 9. 9. 15:05

균전론[ 均田論 ]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제기했던 토지제도 개혁론. 당시 소수 지주들의 농지 겸병으로 인한 농촌 사회의 피폐를 근본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주장되었다.

대체로 중국 고대의 정전법(井田法)과 수나라와 당나라의 균전법에 의거해 토지 국유·경자유전(耕者有田)·균등 분배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농지소유제도의 개혁론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 후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논의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형원(柳馨遠)의 균전론이다. 이외 정조대의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에 나타난 농촌지식인들의 균전론도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익(李瀷)의 한전론(限田論)이나 정약용(丁若鏞)의 정전론(井田論)도 균전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유형원이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생각했던 것은 고대 중국의 정전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으로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 그 대신 북위·수·당대에 시행되었던 균전제를 바탕으로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게 농지를 분배하며, 조세·군역·공부(貢賦) 등도 토지를 대상으로 일률적으로 부과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곧 토지를 국유화하여 일부 계층의 농지 독점이나 농민의 침탈을 막고자 한 것이다.

둘째, 종래의 결부법(結負法)을 폐지하고 경무법(頃畝法)을 시행하자는 것이다. 결부법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토지 면적을 책정하는 것으로 조세의 징수에는 편리하지만 토지의 실 면적은 알 수가 없고, 관리들의 농간과 중간 착취가 가능한 비과학적인 계량 단위였다.

반면, 경무법은 토지의 면적을 단위로 한 계량법이므로 토지의 측량이나 분배, 그리고 조세 부과에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토지의 분배에 있어서는 우선 국가 기관에 일정한 토지를 배정하고,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최고 12경(頃)에서 최하 2경의 토지를 주며, 농민에게는 장정 1인에게 1경씩의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1경은 약 40두락으로서 1인의 장정이 경작 가능한 면적이며, 동시에 조세를 내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면적이라는 것이다. 또, 토지를 지급받은 관리들도 자기집의 노동력을 이용해 직접 경작하게 하며, 소작을 금지시켜 소정의 분배된 토지 이외에는 일체 겸병의 여지를 없애고자 하였다.

넷째, 경지 정리를 시행하되 정전제의 형식에 따라 토지를 가능한 한 정사각형으로 구획하고, 농로와 수로를 정비하자는 것이다. 또, 토지 분배의 절차에서 서민은 20세부터, 사족(士族)은 15세부터 지급하고, 여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분배하지 않으며, 토지를 받은 자가 사망하거나 이사를 했을 때는 즉시 보고, 다시 분배하는 절차를 밟게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토지를 지급하거나 환수할 때는 증빙문서를 작성하고, 동시에 토지대장에 기록해 관계 관청에서 보관하게 하며, 위반자는 엄벌해 문란을 방지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농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고 균등한 부담에 의해 국가의 재정을 확보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론에도 역시 전근대적인 한계성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양반과 상민의 차별적 신분계층이 인정되고 국가 기관 및 궁방전 등의 특권적 토지소유자가 허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전제개혁의 이념은 후대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어 다양하고 창의적인 개혁론들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익의 한전론은 균전론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었으나, 현실성을 고려해 토지 소유의 상한선만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반 농촌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전제개혁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논의들은 대체로 균전론 또는 한전론이 주류였다. 1789년 정조의 구언윤음에 따라 올려진 ≪응지진농서≫에는 많은 농촌지식인들의 토지개혁 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영광의 진사 이대규(李大圭)의 균전론이었다. 그는 당시의 농촌 피폐를 구제할 길은 균전법의 시행밖에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엄격한 중국식 균전제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지형에 맞게, 또 토지의 비옥도를 공평하게 균분해 1호당 1백무씩 지급하고 조세와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공주의 유학 임박유(林博儒) 등은 보다 실현성 있는 한전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건의는 왕과 신하들에 의해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채택되지 못하였다.

유형원에서 비롯된 균전론 중심의 전제개혁에 대한 논의는 결국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혁 의지와 근대적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