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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政治思想 ]

好學 2012. 9. 9. 15:02

정치사상[ 政治思想 ]

 

 

정치에 관한 사상, 곧 국가의 통치와 국민의 정치행위에 대한 의식 내용. 한국의 정치사상은 당초 공동체조직의 소박한 종교사상과 혼합된 상태로 나타나 고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고 실학의 발생에 힘입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 서구의 문화와 사조가 유입됨에 따라 새로운 가치와 기준에 따른 정치사상의 도입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사상을 시대별로 개관하고자 한다.

 

고대의 정치사상

(1) 정치사상의 발생 농경생활이 정착되고 최초의 정치사회로서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君長國家)가 탄생함에 따라 그 지배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각종 설화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이다.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조는 태양신(太陽神)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자연을 움직이고 모든 인간사(人間事)를 주재하는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설화는 많은 과장과 분식이 더해진 것이겠지만, 단군왕검의 출자를 신성하고 초인적인 데서 구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구성내용이었을 것이다.

태양은 신석기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으므로 태양신과 이어지는 단군왕검은 더할 나위 없는 권위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한국 고대에 등장하는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들은 대개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단군왕검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 점이다. 이것은 매우 신성한 권위를 가진 정치적 지배자가 아직 신비한 제사장의 기능을 겸해야 하는 단계를 뜻하는 것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미분화(未分化)를 말해 준다.

고조선의 법률인 팔조법금(八條法禁) 가운데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시키고,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3조항이 남아 있거니와 고조선의 지배자는 이와 같은 규범이 집행되는 엄연한 정치사회를 통치하는 존재로서 지위를 점차 굳혀갈 수 있었다.

성읍국가들은 일정한 배경 아래 연맹하여 연맹왕국을 성립시켰다. 그 동안 제정이 분리되고 연맹장은 왕으로 호칭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는 가뭄이나 홍수, 흉년이 들면 왕을 죽이거나 내쫓자고 하여 그 책임을 추궁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연맹장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가 자연의 조화와 농업의 풍요로운 결실에까지 책임을 져야 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뒷날 천변지이(天變地異)가 나타나면 왕이나 고위 관직자가 견책당하는 선례가 된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혼합된 상태에서나마 탄생설화를 통해 정치적 지배자의 권위와 능력을 분식하고, 나아가서 자연의 조화와 민생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데서 원초적인 정치사상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2) 충군애민사상(忠君愛民思想)의 대두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왕은 그 정치적 권위를 한층 고양시키게 된다. 새로이 탄생된 귀족들이 합의제에 의해 국가 중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지만, 국가를 대표하고 귀족을 통섭하며 정책 집행의 최고 책임을 지는 왕의 권한과 지위는 매우 크고 높았다.

이처럼 왕의 권위가 고양됨에 따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신라의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쓰고, 그들의 행적과 공훈을 적은 비(碑)를 세워 그 존대(尊大)함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왕에 대한 충성은 당시 국가의 모든 신민에게 강조되고 통용된 덕목이요 사조였다.

신라 화랑도에게 교육하는 덕목이었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그 첫째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가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가 벗과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가 전쟁에 나아가 물러나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가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필요성에서 제기된 실천덕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의 발달에 따라 필요성이 강조된 효(孝)와 더불어 충(忠)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라의 두 화랑도가 장래를 기약하여 지킬 바를 맹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충도(忠道)를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 사례라 하겠다.

이와 같은 충성에 대응하여 왕에게는 신민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이 요구되었다. 고구려의 재상 창조리(倉助利)는 왕이 백성을 근심하고 사랑하지 않음은 인(仁)이 아니요, 신하가 왕에게 간(諫)하지 않음은 충이 아니라 하였고, 진흥왕은 왕이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는 도리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중심이요 권력의 장악자인 왕의 통치가 바로 그 통치의 대상인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그 안위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왕도(王道)의 이상에 부합되는 주장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충군과 애민의 사상이 곧 삼국시대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일찍부터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알려져 고구려·백제·신라에서 그 경전과 사서(史書)가 읽혔으며, 따라서 그 정치사상을 시사해 주는 대부분의 언설(言說)이 그것에 입각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읍국가로부터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형성시키는 과정을 통해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유교적 표현을 빌려 나타낸 것이며, 그 자체가 유교사상 그대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하겠다.

(3) 전제주의와 개혁이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백제의 영토와 국민을 흡수하여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부상함에 따라 통치체제의 확대·개편이 뒤따랐다. 동시에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金春秋)과 문무왕 부자(父子)로부터 시작되는 신라 중대(中代)의 왕통이 열리고 전제왕권이 성립되었다.

신문왕은 김춘추의 묘호(廟號)가 자기 나라 태종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당(唐)의 이의 제기를 무시하는 한편,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직후 발표한 교서(敎書)에서 왕에 대한 신하의 절대 충성을 강요하고, 그에 어긋나는 경우 철저한 숙청을 단행했던 것이다.

왕은 절대권력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것에 상응하여 귀족의 합의기구인 화백(和白)이 약화는 대신 관료적 행정기구인 집사부(執事部)가 전제정치를 뒷받침하였다. 이 때 이르러 신라에서는 전제정치를 옹호하고 전제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유명한 유학자인 강수(强首)와 설총(薛聰)이 활약하였다. 그들은 신라 골품체제에서 진골(眞骨) 아래의 육두품(六頭品) 출신으로 한결같이 불교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유교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구하고, 유교적 도덕률(道德律)을 최우선의 것으로 내세우면서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전제왕권보다는 불교와 밀착된 진골귀족세력과 골품제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왕에 대해서는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은 전제왕권과 결탁하고, 전제주의를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신라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귀족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빈발함에 따라 혼란이 야기되었다. 특히 지방으로부터 호족세력(豪族勢力)이 흥기하여 후삼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혁기를 맞아 육두품세력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개혁을 주창하였다.

신라 말의 대표적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은 육두품 출신으로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합격하고 문명(文名)을 드날린 다음 귀국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끝에 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렸다.

그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과거제의 실시 등이 포함된 과감한 개혁이 주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호족의 발호를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중앙집권체제를 상정하되, 골품제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귀족국가를 바람직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는 당나라에서의 견문과 경험, 그리고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신라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요청했던 셈이다. 이 요청은 용납되지 않았으나, 신라 중대 이래 뚜렷한 성장을 보인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마침내 적극적 개혁이념을 제창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전제주의의 주창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정치사상의 커다란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정치사상

(1) 다양한 사상과 정치적 통일 신라 말에 현출된 후삼국시대는 커다란 혼란기요 전환기였다. 신라에서는 새로이 호족세력이 대두하여 사실상 신라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난 각지에서는 다양한 사상의 전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사를 통해 정치적·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변화가 많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후삼국시대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가장 활기에 찬 때였다.

불교에서는 새로이 선종(禪宗)이 수입되어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선종의 경우, 각지에서 대두되는 호족들과 결합하여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선사(禪師)들의 사상적 특성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맞서면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꾀하는 호족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기존의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화엄종(華嚴宗)은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갈라져 각각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을 지지하면서 극심한 대립·갈등 속에 있었다.

한편, 궁예(弓裔)는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면서 그의 구세적(救世的)인 통치의도를 강조하려 하였다. 이 때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도 크게 유행하였다.

지형이나 지세를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연결지어 명당(明堂)을 중요시하는 풍수지리설은 종교적 성격을 띠는 일면, 정치적으로 호족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지녔다.

그들은 지덕(地德)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비보하는 데 힘썼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근거지를 명당으로 확인받아 호족으로서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를 비롯해 불교·풍수지리설 등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에 의해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왕건 자신이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풍수지리설에 대한 믿음도 컸다.

그는 유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관심과 이해가 그의 호족연합정권 수립과 후삼국 통일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에도 왕건은 이들 여러 분야의 사상과 종교에 대한 배려와 믿음에 변화가 없었다. 불교에 대해서는 교종과 선종을 두루 숭앙했고, 풍수지리설의 존신을 후손들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정치 운영에는 유교의 이념을 적용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취민유도(取民有度)를 내세워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예하의 장상(將相)들에게도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취렴(聚斂)의 억제를 강력히 요구하여 인정(仁政)에 힘썼다.

그런 한편, 〈정계 政誡〉와 〈계백료서 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꾀한 것은 희미하나마 유교정치의 지향을 시사하는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에 여러 부문에서 일정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는 다양한 사상적 분출이 있었고, 왕건은 그것들을 포용하여 후삼국의 통일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성취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수립을 위해 유교의 이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최승로와 유교적 정치이념의 확립 고려왕조의 정치적 기반이 확립됨에 따라 중국의 과거제도가 도입되고 당·송의 정치제도가 채택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정치의 기저를 이루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책을, 유교를 존숭한 성종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최승로는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와서 12세 때,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아 학문과 자질을 칭상받기도 하였다. 그 뒤부터 그는 40여 년간 수많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직생활을 계속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새로이 왕위에 오른 성종의 요구에 응하여 정치의 당면과제에 대한 종합적 의견 개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무28조〉였다.

〈시무28조〉는 앞부분에서 태조를 비롯한 역대 다섯 왕의 정치적 행적을 5조치적평을 통해 비판하고, 뒤에서 28조목에 걸쳐 구체적 정책 건의를 한 것이다. 그 중 6조목은 망실되고 오늘날 22조목만이 알려져 있다.

그가 건의한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국방문제, 중국문화의 수입에 따르는 문제, 왕으로서의 태도 등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석교(釋敎 : 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을 위한 것이요, 치국은 오늘의 일인데, 오늘은 매우 가깝고 내생은 매우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유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아울러 불교의 공덕신앙(功德信仰)과 불교관계 행사들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또 이상적 정치를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에서 구하여,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 왕의 통치가 일반 백성들에게 미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왕에게 신하를 예우할 것을 요청하고, 귀족관료층의 권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제주의적 정치를 한 광종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한 것도 상통되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종합할 때, 그가 건의한 것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건의가 성종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져 시행되었고, 고려의 정치는 유교적 이념에 토대하여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신라 하대로부터 시작된 정치적·사회적 격동 끝에 통일신라시대의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추진된 유교적 정치이념의 정립이 이로써 성취되었던 것이다.

고려 성종은 여러 번의 교서를 통해서 그가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와 주공(周公)의 풍을 진착하여 요(堯)·순(舜)의 정치를 이루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모든 시책이 예전(禮典)에 의거해 이루어지도록 했으며,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효(孝)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효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친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와 복종의 계서(階序)관계를 강조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만큼, “효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 충(忠)이다.”라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성종이 교서를 통해 “가문에서 능히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에서 충신이 될 것이다.”며 효를 강조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지향되고 예교(禮敎) 질서가 정립됨으로써, 고려 정치는 유교적·문치적 성향을 뚜렷이 하게 되었다.

(3) 농민반란과 신분해방론 고려는 중기에 이르러 사학(私學)이 발달하고 한문학이 활기를 띠면서 유교문화의 난숙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을 당하여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고 유교적 이념 자체가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서경(西京)의 승려 출신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운동을 벌이면서, 지덕(地德)이 왕성한 서경에 천도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하면 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고, 주위의 36국이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삼국시대부터 성행했던 풍수지리설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고 그 때까지 고려를 지배해온 합리적이면서 사대적인 유교이념과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경을 근거로 한 묘청의 반란과 김부식(金富軾)이 거느린 정부군의 진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고려에는 무신란이 발생하고 문치적 귀족사회는 붕괴되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많은 문신들을 살육하고, 왕의 폐립(廢立)을 자행하였다.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했던 고려의 정치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에 수반하여 전국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하였다. 당초 지방관과 향리의 수탈에 반감을 지녔던 농민들이 무신란으로 야기된 혼란과 하극상의 풍조에 영향받아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점차 규모가 커지고 전국으로 확산되어 고려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던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신분적으로 양인농민과 노비로 구분될 수 있지만, 그들의 목표는 그 뒤에 신분해방과 정권탈취를 주장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일련의 반란 가운데 개경에서 일어난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은 그들의 선동적인 연설로도 유명하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장상이 원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각기 그 주인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살라서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公卿)·장상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이는 중세 노비들의 신분해방 선언으로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 내용은 특권지배층을 부인하고 스스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노비 없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뜻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당시 어떠한 사상과도 연결지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의 어떤 사상도 그들의 주장을 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그 무렵 천한 신분으로 출세하여 최고권력자가 되었던 이의민(李義旼)의 경우에 자극받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자체는 엄청나게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당시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기반하는 정치질서의 파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이러한 새롭고 혁명적인 선언을 배태시킨 무신집권기는 그만큼 생동하는 변혁기였고, 새로운 역사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성리학적 경세론(經世論)의 등장 고려 무신집권의 후반기는 대몽항쟁기와 중첩된다. 약 50년간 강도(江都:강화도의 별칭)를 임시수도로 하여 몽고에 대항하다가 끝내 굴복하게 되었을 때 고려는 무신란의 소용돌이와 참혹한 전란의 상처 때문에 종래의 문화적 기반이 붕괴되고 정치적 장래는 불안정한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원(元 : 몽고)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원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 편입되어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왕국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문교(文敎)의 회복에 힘쓰고 전통적인 유학의 부흥에 진력하게 되었다. 이 때 원으로부터 성리학이 전래되었다.

성리학은 중국 남송시대에 주희(朱熹)에 의해 체계화된 신유학(新儒學)으로서, 그 이전까지 도덕철학의 범위를 넘지 못하던 유학에 노불(老佛)의 사상을 가미, 이론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새로이 체계화된 사상이었다. 이것은 이단의 배척에 날카롭고, 철학적 성격이 강했으며, 성경(誠敬)을 주로 하는 수양론(修養論)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고려 후기에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보수적 기반이 강한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이 흥기하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그들의 정신적 토대로 삼고, 그에 입각한 경세적 포부를 토로하였다.

그런 움직임은 대개 정치적·경제적으로 모순이 극대화되었던 당시 고려사회의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자는 상소문으로 나타났다. 이것 역시 그 시기 정치사상의 한 모습으로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제현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성리학의 수용에 선구적 구실을 한 유학자였다. 그는 구폐책을 상소하면서 그것을 통해 왕의 수덕(修德), 정방의 혁파, 녹과전 부활 등 11개 조목에 걸쳐 시정하거나 개혁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한편, 이색은 이제현의 제자로 원나라의 국자감에서 수학하면서 일찍부터 문명을 날렸으며 고려 성리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활을 한 대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에 복중상서(服中上書)를 통해 시무를 논하면서, 전제(田制) 개혁, 무과(武科) 설치, 불교의 폐단 등 6개 조목에 걸쳐 당면과제를 제시하였다.

이들 두 경세론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성리학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제현은 왕의 수덕을 위해 사서(四書)를 공부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도를 익힐 것을 요구했고, 이색은 불교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내세우는 것들이 당시 고려사회의 매우 긴절한 핵심적 문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결같이 왕의 결단을 촉구하고, 심지어는 개혁을 주저하는 일은 어리석어서 잘 다스릴 자격이 없는 임금의 소행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나라의 간섭 아래 침체에 빠진 고려의 정치에 성리학으로부터 새로운 활력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왕의 권능을 되살려 왕정의 상궤(常軌)로 돌아가도록 요청한 것이었음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정치사상

(1) 정도전의 민본주의와 재상정치론(宰相政治論) 무신의 집권과 대몽항쟁, 그리고 뒤이은 원나라의 간섭기를 경험하면서 축적된 정치적 ·사회적 모순은 마침내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을 낳았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기조로 한 개혁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이 고려왕조에서는 성취되지 못하고, 역성혁명의 형식으로 왕조가 교체됨으로써 비로소 여러 부문에서 변혁과 개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기에 정치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혁명론을 개진하여 새 왕조의 이념확립에 절대적 공헌을 한 사람이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전형적 사대부 출신인 그는 일찍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입사하여 보수적 권문세족에 맞서 처열한 정치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체계적인 저술을 통해 유교사상가·정치이론가로서 두드러진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우주론과 인성론을 받아들여 그 이론체계 위에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낳고, 음양이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을 낳으며, 음양·오행의 기(氣)가 응집, 변합하여 인간과 우주만물이 생성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불교의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을 철저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의 불교 비판은 윤리적 측면에서도 가해져 불교가 멸륜해국(滅倫害國)을 한 것으로 단정하였다. 이처럼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철저하게 불교를 비판을 한 것은 그 때까지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와 같이 불교를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도교(道敎) 역시 비판한 그는 유교, 곧 성리학이야말로 도학(道學)이요 정학(正學)이라 규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구조적인 정치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민본주의에 입각한 권력론을 주장하고, 왕의 상징성을 전제로 한 재상정치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정도전은 정치의 근본을 백성〔民〕에 두었다. 그는 “대저 왕은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왕의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즉, 왕보다 국가가 우선하고 국가보다 백성이 우선하므로 백성은 가장 귀중한 존재이고 왕에게는 하늘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에 있어서 통치자나 통치권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의 법제나 시설은 백성을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철저한 민본주의요 위민사상이었다.

그런데 통치자가 민본·위민의 원칙을 저버리고 부당한 통치행위를 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에 대한 답변은 그 통치자의 통치권은 소멸되고, 다른 유덕한 자에게 천명(天命)이 옮겨가서 새로운 통치자가 탄생한다는 것이었다. 곧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심의 소재가 통치권의 정당성 여부를 결정하는 관건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민본주의와 혁명론은 일찍이 중국 고대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조선의 건국 직후에 일면 왕조교체를 합리화시키고 다른 일면으로는 정권담당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정방향을 천명하는 데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겠다.

왕은 이처럼 천명을 받은 사람이요 민심이 열복하는 통치자이지만, 정작 정치의 실제에서는 국가의 원수(元首)로서 상징적인 존재에 머문다는 것이 정도전의 견해이다. 그는 왕이 하는 일은 재상 한 사람을 올바로 고르는 일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 재상이 통치행위의 실제를 담당하는 것이다.

재상은 물론 중대사를 처리할 때 왕과 협의해야 하지만, 대개는 최고의 정책결정권자, 또는 정책집행자로서 강력한 권한과 지위를 가진다. 그러므로 왕은 반드시 성인이나 현자가 아니더라도 중재(中才), 즉 보통의 자질만 가지고 있으면 훌륭한 재상을 얻어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재상은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결코 임용될 수 없다는 논리로 귀착된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새 왕조의 개창에 공헌한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정도전이 그 대표적인 지위에 있었다는 점과 깊은 관계를 갖지만, 유교적 입장에서 왕 중심의 전제주의를 배척하는 체계적 견해가 피력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밖에도 정도전은 대간(臺諫)에 대해 그 기능의 중요성은 인정하되 정권이 그리로 쏠려서는 안 되며, 수령과 감사의 권능을 높이되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올바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정도적의 정치사사은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것이었고, 새로운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그의 주장은 조선의 정치 실제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2) 도학정치론과 개혁변법주의(改革變法主義) 조선왕조는 상당한 정치적 기복을 겪는 가운데 집권체제를 정비하고 유교적 이념을 확립해 나갔다. 세종대에 이르러 왕권과 신권(臣權)이 조화되어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민생(民生)이 평안해졌으며, 민족문화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 뒤 세조 때에는 왕권강화책과 부국강병책이 추진되었고, 그것을 양성지(梁誠之)가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런 가운데 ≪경국대전≫의 편찬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시행으로 유교적 규범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수성기(守成期)로 접어들고, 훈구세력 대신에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대두하면서 사림정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보다 이상화된 유교적 정치사상이라고 할 도학정치론이 제기되었다. 조광조(趙光祖)로부터 구체적 내용이 갖추어지고 이이(李珥)에게서 체계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도학정치론은 조선사회의 유교화가 심화되면서 제기되어 뒤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에 의하면 도학이란, “격물치지로 선(善)을 밝히고,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몸을 닦는 것으로, 몸에 온축하면 천덕(天德)이 되고 정치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겸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道)를 실천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계발하고, 교화사업(敎化事業)을 펼치는 것이 곧 도학정치의 지향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처럼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론은 동시에 개혁과 변법의 주장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상당한 현실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광조는 중종반정 이후 등장한 사림세력이 종전의 폐정에 가름하여 유신(維新)의 정치를 시도할 때 핵심적인 역활을 하였다.

그는 정치적 시책의 근본으로,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며, 성현(聖賢)을 본받음으로써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도학정치론이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다스림의 근본인 왕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여, 왕이 성현을 본받아 수양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또한, 인심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교화사업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향약(鄕約)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일찍이 주희가 모든 학문의 기초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소학(小學)의 실천운동적 성격을 띠고 이 때 처음으로 일부 지역에서 향약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성리학의 이념을 지방 곳곳에 확산시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이와 같은 도학정치의 실현과 관련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조종(祖宗)의 구법(舊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약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비롯한 몇 가지 변혁을 실제로 주도하였다.

조광조보다 약 반세기 뒤에 출중한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로도 활약한 이이는 민본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역시 도학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최고권력자인 왕의 뜻과 조처가 정치의 실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므로, 왕을 철인(哲人)으로 인도하여 그 절대적 권력을 이성의 힘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왕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신료들도 뜻을 높이하여 스스로 현인이 됨으로써 정치가 도의(道義) 세계에서 인(仁)과 의(義)를 중심으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도(君道)에서는 백성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여 인의(仁義)의 도를 행하고 천리(天理)의 올바름을 지극히 크게 하는 왕도(王道)가 최선이며, 신도(臣道)에서는 도덕이 몸에 가득하여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고 임금 섬기는 일과 자기의 행동을 한결같이 정도(正道)로써 하는 대신(大臣)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 이 양자의 결합을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도학정치의 구현과 관련하여 언론(言論)의 자유를 중시해서, 언제나 열린 언로를 통해 신민의 의견과 방책이 수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과 같은 정치이론을 전개함과 동시에 당시의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00년에 달하여 중쇠기(中衰期)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혁신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 구체적인 시무책을 개진하였다.

그는 시대가 달라지면, 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견지에서 개혁변법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서 생재(生財)와 활민(活民)을 급선무로 하는 여러 방책을 제시한 것이다.

조광조와 이이를 통해 살핀 사림정치기의 도학정치사상은 고도의 유교적 교화를 전제로 중국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왕도정치론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었다.

특히 현실적인 개혁과 변법의 주장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인용되고 상기되는 이상론에 머문 채 시행되지 못했고, 그런 가운데 사림정치는 당쟁으로 파탄의 길을 걸었다.

(3) 실학(實學)의 정치사상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으로 정착하여 정치사상의 기조를 이루었던 성리학은 이기설(理氣說)을 중심으로 발전, 우주론(宇宙論)과 심성론(心性論) 분야에서 커다란 철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황(李滉)과 이이의 연구와 활동을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는 창의적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주희의 학설을 묵수하고 학파간의 대립이 당쟁과 연결되는 등 그 폐단이 널리 지적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왕조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정치적·사회적으로 커다란 변동과 혼란 속에서 쇠미해지고 있었다. 이 무렵 조선이 당면한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이 대두하였으니, 그것이 곧 실학이다.

성리학을 모태로 한 실학은 여전히 성리학이 절대적 위력을 지닌 상황에서 대체로 일부 실세(失勢)한 양반층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이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은 지대한 것이었다.

실학을 통해 정치·경제·역사 등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와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당시 조선의 학문적 발달에 새로운 경지가 열렸기 때문이다.

실학자들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구상하는 각 방면의 개혁안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는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실학자로 정치기구와 토지제도의 개혁에 크게 치중함으로써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발전시킨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과 정약용(丁若鏞)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살피기로 한다.

유형원은 실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학자로, 벼슬을 포기하고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물인 ≪반계수록 磻溪隨錄≫은 전제(田制)·재정(財政)·교육·관리임용·정부기구·군사제도·의례(儀禮) 등 국가체계의 전반적 개혁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 책에서 방대한 규모로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던 그는 당대에 동국(東國)의 첫째 가는 경륜가로 평가받았다.

유형원은 토지가 천하의 대본(大本)이라 하여 전제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자영농민의 육성으로 부국부민(富國富民)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현실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가문과 지벌(地閥)을 부인하였다. 그가 그린 이상국가에는 노비제가 없었으며, 그 밖에도 상당한 변혁을 지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고적인 왕도정치와 농본주의(農本主義)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유형원은 정치에 있어서 왕권이나 권력을 둘러싼 갈등 같은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정치의 목적은 양민(養民)과 교화에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천리를 따르고 인도(人道)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여 유교적 예치주의(禮治主義)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당시 조선의 법답지 못한 제도, 곧 비법지제(非法之制)를 시정하여 백성들을 수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결국 이상국가를 그린 방대한 구상으로 발전했다고 이해한다면, 제도와 체제를 중시한 그의 관념적 한계에 당면하게 된다.

이익은 유형원이 죽은 직후에 태어나서 그의 실학을 한층 더 발전시켜 하나의 학파(學派)로 자리잡게 한 대학자였다. 그는 형이 당쟁에 희생당하는 것을 목도한 뒤 관로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평생을 농촌에서 연구생활로 일관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성호사설 星湖僿說≫ 역시 다방면에 걸친 백과사전식 기술방식을 통해 개혁안을 담고 있다. 이익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지대하여 이념과 제도의 양면에서 많은 언급을 하였다. 그가 정치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당시 조선사회의 폐정 개혁을 통해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왕도정치란 물론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정치요, 맹자(孟子)가 말한 인의(仁義)의 정치를 뜻한다. 이는 결국 성선설(性善說)을 기초로 한 덕치주의(德治主義)로 귀결되는 것이고, 전통적인 민본사상과 맞물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복고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그 동안 불가피하게 생성된 폐단과 잘못을 개혁하고 시정하는 변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익은 이러한 개혁의 중요성을 인식한 식무자(識務者)로 이이와 유형원을 들면서, 변법을 통한 왕도정치의 회복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개혁안을 마련했으며, 그 귀착점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상국가였다.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깊히 인식했던 그는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주장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정치 실제에 있어서는 당쟁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과거제 개편안을 마련하고, 왕의 전제정치를 막기 위한 재상 직능의 회복과 대간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변법을 강조하고 덕례(德禮)만이 아니라 정형(政刑)을 중시하는 변화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왕도정치의 테두리에 머물고 있었다.

정약용은 흔히 실학의 대성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익보다 약 80년 늦게 태어나서 19세기 중엽까지 생존한 그는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많은 연구와 방대한 저술을 남겨 빛나는 다산학(茶山學)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실학사상면에서도 그는 유형원으로부터 이익에 이어지는 경세치용의 학문계통뿐만 아니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내세우는 북학(北學)계열의 사상까지도 통합, 계승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사상은 인성(人性)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전개되었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고 성악설도 부정하면서, 인성은 선과 악의 가능성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선악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면서도(好善而恥惡), 선을 행하기는 어렵고 악을 범하기는 쉬운(好善而易惡)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율적인 인간은 도덕적 행위를 권유받는 동시에 규범(規範)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것이 예(禮)와 법(法)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법치의 현실적 필요성 또한 중요시하였다.

또한, 그의 자율적 인성에 관한 주장은 정치사회의 출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리게 하였다. 즉 인간은 자연상태의 무통치(無統治)·무규범(無規範)으로부터 스스로 민망(民望) 있는 통치자를 추대하여 수령이나 왕의 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자율적 선택능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사회의 지배자는 민망을 잃을 때 쫓겨나고 교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제주의를 거부하고 일반 백성을 정치의 객체로부터 주체로 부상시킨 혁신적인 견해였다. 정약용은 같은 논리로 백성의 뜻에 부합되는 법이 제정되어야 함을 주장했고, 능력 본위의 직업 선택과 토지의 공동소유·공동경작·공동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여전제(閭田制)를 내세웠다.

이와 같은 정치사상을 근거로 구상한 유토피아는 그 때까지 제시된 다른 어떤 이상론보다 진보적이었으며, 근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내려온 교적 전통과 실학의 발전, 그리고 그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이처럼 발전적인 치사상을 배태시킬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근·현대의 정치사상

(1) 전통적 규범의 동요 19세기 중엽 이후에 선조의 정치체제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정치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천명덕치(天命德治)의 통치이념이 흔들리고 점차로 내부적 질서와 균형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내부적 분해과정에 있던 조선조 정치체제를 향하여 또 하나의 결정적인 도전이 외부로부터 압박해 왔다. 그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서양세력의 내침과 그 영향이었다.

이러한 서양세력의 개방요구와 더불어 조선조보다 먼저 서양세력과 교섭한 일본과 청(淸)이 한반도에 대해 침략적 간섭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 도전에 대해 당시 조선의 조야(朝野)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대응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들을 당시의 정치사상적 계보에 따라 대별하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치사상, 동학(東學)의 정치사상, 그리고 개화(開化)의 정치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정척사의 정치사상은 대외적으로 자주적 배타 성향과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전통적 보수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으며, 개화의 정치사상은 대외적으로 개방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대내적으로는 근대적 발전을 지향하였다.

동학의 정치사상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배타성향을 보이면서 대내적으로는 체제개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2) 위정척사의 정치사상 이 정치사상은 조선조의 통치이념으로 일관해온 정통 성리학의 맥락에서 조선조 정치체제의 보위를 주장한 대표적 사상이었다.

위정척사론의 태두였던 이항로(李恒老)의 정치사상을 보면, 그 사상적 기초는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이기분합설(理氣分合說)에 있었으며, 이는 당시 위정척사론자들의 서양을 물리치고 강화(講和)를 반대하는 논의(禦洋斥和論議)에서 공통의 기본논리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대외관계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조선조의 체제안정이라는 실천목표와 연결되어 있던 위정척사사상의 주리론은 기(氣)를 이(理)에 복종시키는 이존기비(理尊氣卑)의 논리에서 조선조 본래의 정체(政體)와 질서를 이로 보고, 외세라는 객체를 기로 보려는 자존적 의식이 그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주리(主理)의 기조(基調) 위에서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하여 정치체제의 보위를 주장하고, 군부가국(君父家國)이 일체라는 유학적 신념을 가지고 국난에 대응했던 정치사상가들이었다.

성리학적 정치사상에서는 정치체제를 윤리적 가치체계와 동일시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위정척사론자들에게는 이질적 윤리체계를 지닌 외국의 정치체제와 교섭을 가지거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곧 이질적 정치체제에 의한 침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위정척사론에서 외적 도전에 대응하는 직접적 방안으로 전수척화설(戰守斥和說)이 제시되는 한편, 근원적인 방안으로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여기에서 외양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내수가 강조된 것은 체제내적 모순을 개혁하여 왕도정치의 본질적 이념인 천명덕치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위정척사이념의 이론적 기수였던 이항로의 내수외양론을 보면, 요약하면 ① 통치자(군주)의 극기정신, ② 양화(洋貨)·양물(洋物)의 배척·금단, ③ 외세의 도전에 대한 주보정벌(誅補征伐) 등 세 가지로 집약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강조된 것이 통치자의 수기정심(修己正心)과 극기정신이었다. 즉,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양이의 전제로 내수를 주장하면서 집권지도층, 특히 군주의 금욕적 수양을 내수의 요체이자 척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한, 그의 위정척사론은 그러한 내수설과 더불어 실제적인 대외적 위기에 직면하여 군사적 대응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된 군사적 대응이란 조선조의 전통적 국방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서, 안보의 근간을 군사력에 두기보다는 중심성성(衆心成城 : 백성의 마음이 성곽처럼 견고하게 됨)이나 친상사장(親上死長 : 윗사람을 친하게 대하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침)과 같은 단결이나 충성이라는 민중의 내면적 의지에서 구하였다.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그를 시종여일하게 존숭한 그의 문인 김평묵(金平默)에 의해 이론적으로 더욱 정교한 발전을 보게 된다.

김평묵은 자신의 〈벽산심설연원 檗山心說淵源〉이나 〈대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내청절화소 代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에서 자신의 위정척사사상이 이항로로부터 적전(嫡傳)으로 승계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평묵의 위정척사사상도 이항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조의 정치사적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0년대 초부터 1876년에 이르기까지의 대일본관계, 그리고 1880년대초 청국과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서양수용의 문제 등에 당면하여 그는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충격적 변수들을 대체로 부정적 요소로 규정하고 그 극복을 위한 척외적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자신의 논저인 〈척양대의 斥洋大義〉 등에서 서세유입(西勢流入)의 해악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즉, 서양세력을 가장 해로운 금수류(禽獸類)로 단정하고 만약 그들과 통교하면 경제가 침식되고 주권이 침해되며 사교(邪敎)가 만연하고 미풍양속이 타락되며 질서가 파괴되는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에 척사의 절대적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의 〈어양론 禦洋論〉에서는 유학적 가치체계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단오품설(四端五品說) 및 오행설(五行說)에 의해 서양세력이 통교를 요구하는 이유를 구명하고 척사와 어양의 절대적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김평묵은 이항로의 척사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외환(外患)의 극복이 근본적으로는 내수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내수를 위한 구체적 정책대안들을 그의 〈치도사의 治道私議〉에서 제시하였다.

이 〈치도사의〉는 대외적 척화를 위한 선행적 방안인 내수정책론으로서 자강아사(自强我事)를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과 재정비를 위한 정책대안을 포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사힐융론책(養士詰戎論策)은 적극적인 척화·자존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조 정치체제의 자존·보위를 위해서는 실용적 인재를 배양해야 하고, 이와 더불어 서양세력의 도전에 물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비(武備)를 강화해야 한다는 양면적 정책이다.

양사란 사악한 이질적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정도를 행하는 실천 주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위정적(衛正的) 방안이며, 힐융이란 서양세력의 내침을 물리적 대항을 통해 제압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척사의 방안을 뜻하는 것이었다.

김평묵이 힐융을 강조하여 국변의 강화를 제시한 것은 이항로의 전통적 전수설에 비해 진일보한 대안이었다. 그리고 김평묵의 위정척사사상에 있어서 〈왜양일체론 倭洋一體論〉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이항로의 척사론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인식으로서 척사논의의 확대를 뜻하였다.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1870년부터 무력침공을 해오기 시작하고, 1875년에는 군함을 앞세우고 내침하여 불평등한 수호(修好)를 강압적으로 강요해 오자 김평묵과 위정척사계열의 사림들의 척화논의는 주로 일본의 침략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강압적 수교요구에 응하려 하자 김평묵은 최익현(崔益鉉)·윤정구(尹貞求)·이만손(李晩孫홍재구(洪在龜홍재학(洪在鶴유인석(柳麟錫유중교(柳重敎)·유중악(柳重岳) 등의 사림들과 더불어 척화소(斥和疏)·지부상소(持斧上疏)·만인소(萬人疏) 등을 통해 맹렬한 척화상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척화상소활동은 그 뒤 위정척사운동이 의병운동으로 전환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이항로의 주리론적인 정치사상은 김평묵·최익현·유중교·유인석 등에 의해 위정척사의 사상과 운동으로, 그리고 의병운동의 지도이념으로 확산, 계승되었다. 한편, 기정진(奇正鎭) 등의 유리일원론적(唯理一元論的)인 정치사상도 이 시기의 위정척사론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1895년 일본인 낭인들에 의한 민비시해사건과 그 뒤 내려진 단발령은 을미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이 격렬한 의병운동의 이념적 지주는 위정척사의 정치사상이었다.

또한, 1904년 일본이 제1차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항일의병 무장투쟁이 시작되었고, 일제에 의해서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이에 저항한 군대가 의병과 합류한 것을 계기로 1907년 또다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 때마다 위정척사의 정치사상은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이념적 배경의 하나로 기능하였다.

이 정치사상은 자강아사를 위한 내정개혁의 측면에서는 부분적으로 발전 성향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통한 조선조 정치체제의 유지를 추구했던 만큼 정통 성리학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체제를 보위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무장투쟁의 이념적인 지주로서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중요한 연원(淵源)이 되었던 것이다.

(3)동학의 정치사상 19세기 후반에 조선사회 내부에서 자생하여 그 이후의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정치사상이 동학의 사상이었다.

본래 동학사상은 1860년(철종 11)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된 민족종교사상이었으나, 그 뒤 단순한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반침략·반봉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전개되어 마침내는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최제우는 서양세력의 내침을 민족적 위기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기본목표로 하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로서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의 정치사상에서 그 반침략의 논리를 살펴보면, 우선 동학은 서학(西學), 특히 천주교에 대조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서양세력은 화공갑병(火攻甲兵)의 물리적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학(學)의 입장에서 그들보다 우수한 무극대통(無極大通) 천도의 동학, 그리고 장생(長生)을 믿는 동학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동학의 정치사상은 척양(斥洋)과 동시에 척왜(斥倭)의 내용도 담고 있다. 이미 1860년 동학의 포교를 위해서 지은 〈안심가 安心歌〉에서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면서 일본에 대한 강한 적대의식을 나타냈던 것이다.

국제관계의 인식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탈피하고 있다. 최제우가 〈논학문 論學文〉에서 “땅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라고 규정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동학이 세계를 동과 서로 대립적으로 파악한 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그 문명권 밖에 있는 것을 모두 이적(夷狄)으로 간주하는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학의 정치사상은 서학에 대항하는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정척사의 정치사상과도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자극되어 국체를 보전한다는 보국이념에서 출발한 동학사상은 동시에 당시의 내부적 문제에도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상황이 외부적 위기와 함께 대내적으로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동학이 외부로부터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도 체제의 내부적 모순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학은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주창하면서 국내의 분열상태의 극복에 앞장섰다.

동학의 반봉건적 성격은 우선 정통 주자학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발견된다. 동학은 그 사상적 구성요인이 유교·불교·선교(仙敎)이며, 거기에다 풍수지리설과 음양설 등 조선의 민간신앙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동학사상이 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삼강오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주자학적 정치사상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조선조의 봉건지배체제에서 비유교적 요인을 받아들여 독자적 교리를 확립하고 치세의 원리로 삼겠다는 동학사상이 용납될 리가 없었다.

동학의 정치사상에서 반봉건적 체제부정의 성향은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서 표명되고 있다. 현실적 비애에 빠져 있던 조선의 민중에게는 초인적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현실이 타개되기를 바라는 운명론적 미래관이 널리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민중이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는다.”고 하는 ≪정감록 鄭鑑錄≫의 예언에 이끌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동학사상은 이러한 운명관을 흡수하여 민족적 성격을 부각시킨 다음, 그 운명관을 비극적인 것에서 희망적인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민중을 비참한 현실로부터 희망에 찬 미래로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동학의 이러한 운명관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후천개벽사상이다.

이 사상은 동학창시 이전까지를 선천(先天)의 세상으로, 그리고 동학 창시 이후를 후천(後天)의 세상으로 구분하였다. 동학 창시에 의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선천의 시대는 삼황오제 등의 성현이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대천자(代天者)가 존재하던 시대이지만, 후천의 시대는 하늘이 직접 인심에 강령하는 시대, 즉 사람과 하늘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시대를 뜻한다.

이러한 후천사상은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 및 지상천국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후천개벽사상은 선천의 시운을 부정한다. ‘불순천리불고천명(不順天理不顧天命)’의 근세, 즉 봉건적·중세적인 것을 모두 부정하고 조선조의 다음에 도래할 후천개벽의 세상을 지상천국으로 표현하였다.

동학의 정치사상이 선천의 시대, 즉 조선조의 체제를 부정한 것은 단순히 특정 왕조를 부정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상신선사상(地上神仙思想)을 통해 계층적 신분질서를 거부함으로써 천인일여(天人一如)의 평등사상으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보국안민을 위해서는 모든 계층의 백성이 동귀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억조창생의 동귀일체를 주장하는 동학의 원리가 곧 천인일여의 인내천(人乃天) 평등사상이다.

동학의 평등사상의 진전과정을 보면 최제우의 ‘천심즉인심(天人卽人心)’ 또는 천인일여의 관념으로부터 제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의 ‘사인여천(事人如天)’에 이르러 경인사상(敬人思想)이 더욱 고양되고,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그러한 관념들을 종합하여 인내천의 집약적 개념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렇게 정립된 동학사상의 평등원리가 봉건적 신분의 계급성과 그것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를 부정한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동학은 1890년대 초에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해 나갔는데, 이 운동에 농민의 정치사회적 요구가 투영됨으로써 동학이 농민의 요구에 부응, 초기의 세계도피적·명상적 성향에서 벗어나서 실천적 정치사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개국 이후 봉건적 수탈뿐만 아니라 일제를 포함한 외세의 자본주의적 수탈까지 당하게 된 농민은 지역적으로 산발적인 민란을 통해 대항하던 중 동학이 내건 반침략사상과 반봉건의 평등사상에 공감하고 동학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편, 전봉준(全琫準) 등 동학의 하층간부에 의해 동학사상이 정치사회적으로 해석됨으로써 동학의 조직은 농민봉기와 연결되어 분산적·고립적 농민봉기가 통일적 규모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 기점이 1894년 2월의 갑오농민봉기였던 것이다.

동학농민은 봉기 후 삼남 53개 지역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스스로 단행하였다. 그 사이에 민비(閔妃)의 조정은 농민과 ‘전주화의(全州和議)’를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외병차용책(外兵借用策)을 택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군은 불법 침입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자행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1895년 5월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의 정치사상과 동학농민봉기는 수구파정권의 붕괴와 전통적 신분제의 폐지에 크게 기여했으며, 갑오개혁의 실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뒤 제3대 교조 손병희는 동학사상에 개화사상을 접목시켰으며, 1905년 12월 천도교(天道敎)를 동학의 정통으로 선포하였다.

(4) 개화의 정치사상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의 충격에 대한 또 다른 대응으로 서 개화사상이 대두하였다. ‘개화’의 개념이 최초로 조선조의 문헌에 나타난 것은 1881년 박정양(朴定陽)의 〈일본문견조건 日本聞見條件〉에서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선 1850년대부터 일부 양반 및 중인 출신 지식인들이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을 통해 서양문물에 관한 정보를 접하면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일련의 정치사회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내용적으로는 이것이 최초의 개화사상이었다.

중국어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한의사 유홍기(劉鴻基), 그리고 북학파 실학의 거두인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등이 초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박규수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에 들어왔을 때는 평안감사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받들어 미국 상선을 불태워 버렸으나, 신미양요를 겪은 다음 해인 1872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온 뒤에 서양의 문명과 힘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개화사상가로 변신하였다.

초기 개화사상가들의 영향력은 미미했으나 강화도조약 체결 다음 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죽자 그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익힌 김윤식(金允植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유길준(兪吉濬) 등의 개화사상가들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 대립하였다.

김홍집·어윤중 등의 집권세력이 중심이 된 온건파는 청국의 양무자강운동(洋務自强運動)과 같은 방식으로 서양의 우수한 기술은 수용하되 종교와 사상은 우리것이 우수하니 이를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점진적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주로 20대의 청년들로 구성된 급진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변혁을 주장하면서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급진적 개방노선을 추구하였다. 당시 급진파는 자신들을 스스로 개화당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사대당이라고 지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이 두 파는 정치적 대립상태에 있었는데,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화당은 3일정부로 끝나자 몰락하였다.

당시 개화당 정부가 내건 혁신정책 14개 조 중에는 조공제도의 폐지와 완전자주독립의 공포, 내각제도의 수립, 정부조직의 개혁, 양반신분제 및 문벌제도의 폐지 등의 급진적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10년 뒤인 1894년 온건파 정부에 의해 갑오개혁이 단행될 때 대부분 실행되었다.

초기의 개화사상이 대중의 지지기반 없이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하향적으로 보급된 데 비하여, 1890년대 후반부터는 개화사상이 종적(縱的)인 속성에서 벗어나서 횡적(橫的)인 대중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것은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남궁 억(南宮檍)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 그리고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의 보급에 크게 힘입었다.

독립협회는 열강의 각종 이권 침탈에 강력하게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국민에게 널리 각성시키고,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수용하여 인권과 재산권의 자유, 참수형과 연좌제의 폐지, 언론과 결사의 자유, 참정권의 확대와 의회의 설치 등을 주장함으로써 대중적 지지기반을 넓혀 갔다. 만민공동회는 양반·학생·부인·상인·맹인·승려·백정 등이 동참함으로써 명실공히 개화사상이 국민 저변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개화사상은 더욱 국민대중 속으로 확산, 침투되어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으로 나타났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신민회(新民會)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5) 민족주의적 각성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우리 민족이지만,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나 운동이 발생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서구자본주의 열강과 일본의 내침에 직면하면서 비로소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외적 과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민족적 통합’이라는 대내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민족주의적 각성이 촉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후반 외세의 내침이라는 외부적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된 위정척사·개화·동학의 정치사상은 제각기 그 사상적 내용에 차이가 있고, 또 시기에 따라 그 위상이나 영향력에 차이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내침해 오는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186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의 시기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초기 단계로서 반침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1880년대 이후 1905년까지의 시기는 우세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침략해 오는 일본에 대응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정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개혁을 추진해야 했던 시기로서, 반침략과 함께 반봉건의 저항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민족주의의 전개과정이었다.

1905년 이후 8·15광복까지의 시기는 일본에 의해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로서 반식민(反植民) 투쟁이 전개된 저항적 민족주의의 시기였다. 광복 이후 분단의 시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대외적 저항보다는 민족의 통합을 지향하는 역사적 과제를 대내적으로 짊어지고 있다.

(6)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은 한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국제법상 패전국 영토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조건을 구실로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그 뒤에는 냉전체제에 의해 분단이 고착화되어 결국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상이한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의 민족주의는 아직도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고 운영되는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민족적 과제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민족주의는 근 1세기에 걸친 반침략·반봉건 투쟁과정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접목되어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였다.

한국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는 19세기 후반의 독립협회 운동에서 제기되고 ≪독립신문≫에 의해 확산된 국권수호와 자주민권 이념이었다.

그 뒤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결집, 전개된 3·1운동은 계층·지역·종교·성별을 초월한 전민족적 의지의 표출이었기에 민족적 통합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민족주의의 실현 원리로서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3·1운동의 영향으로 그 해에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그 정부형태를 민주공화제로 선언한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 민족·민주국가의 실현 계기가 되지 못한 것은 국제정치의 환경적 조건에도 원인이 있지만, 우리 민족의 실현능력의 결여도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현대 민족주의는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제도와도 결합될 가능성이 있다. 민족주의가 전체주의나 권위주의와 결합될 경우에 그러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대립·갈등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공동체의 운영원리가 민주적 정향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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