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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운동[ 社會主義運動 ]

好學 2012. 9. 9. 14:59

사회주의운동[ 社會主義運動 ]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실천운동.

 

〔개 설〕

사회주의사상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Platon)으로부터 맹아(萌芽:새로 트는 싹)를 찾아볼 수 있으나, 구체적·현실적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중반의 서유럽에서이다.

즉, 산업혁명이 가져온 부정적이고 비인간적인 결과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초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푸리에(Fourier,F.M.C.)·생시몽(Saint-Simon)·오웬(Owen,R.)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인 위기는 개인주의에 있다고 보면서, 집합주의적인 공동체사회를 이상형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비판과 극복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utopian socialist)라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람이 마르크스(Marx,K.)와 엥겔스(Engels,F.)였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을 과학적 사회주의자(scientific socialist)라고 자처하면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구체적·실증적 분석을 행하였다.

그 결론은 자본주의사회는 그 내재적인 법칙에 의하여 공산주의사회로 필연적으로 전이하게 되었다. 그 역사적 과도기로서 사회주의사회가 존재하게 되고, 그때 사회주의자들의 역할과 임무는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론적인 분석에 그친 것이 아니라, 1864년 제1차 인터내셔널(The First International)이라 불리는 국제노동자협회(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혁명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은 바쿠닌(Bakunin)을 비롯한 무정부주의자(Anarchist)들과의 불화로 인하여 1876년 해체되었다.

그 뒤 유럽 각국에서는 사회주의정당들이 속속 출현하여 마침내 1891년 독일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을 중심으로 하여 제2차 인터내셔널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제1차 인터내셔널과 같은 단일지도체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제1차세계대전에서 각국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적인 연대를 깨고 각각 그들 조국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전쟁 동안 제2차 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되는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국가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제2차 인터내셔널의 입장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면서 1919년 제3차 인터내셔널을 새로이 조직하였다. 코민테른(Comintern)이라고 하는 이 조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통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이에 대하여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이 오히려 새로운 독재주의라고 비난하면서 그들과 결별하였다. 이처럼 동일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사실상 적대적인 관계에 서 있었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의회를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추구한다고 하면, 소련의 사회주의자들은 폭력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후자의 사회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회주의는 비공산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를 지칭한다.

〔한국사회주의의 전개과정〕

(1) 기 원 한국에서의 사회주의사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입장이 존재하며, 실학사상과 동학혁명에서 그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입장에서는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의 여전법(閭田法) 사상을 일종의 농촌사회주의의 구상으로, 그리고 동학혁명에 나타난 계급타파사상과 외래자본주의 배격사상을 일종의 인민주의(populism)로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사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펴고 있다.

(2) 일제강점기 근대적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사상은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외국에서 수입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주의운동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 이후 민족주의운동가들은 국외로 탈출하여 투쟁을 계속하거나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만들어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해외에서의 운동단체 가운데 한국사회주의운동사에 기록될만한 것이 생겨났다. 1917년 8월 신규식(申圭植)이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한 조선사회당이 그것이다.

이에 앞서 신규식은 청년 인재를 양성하고 중국 혁명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동제사(同濟社)를 만들었는데, 이 조직을 조선사회당으로 개칭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릴 예정이던 국제사회주의자대회(제2차 인터내셔널)에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스톡홀름대회가 유산되자 조선사회당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신규식은 민족주의자였고 사회주의를 신봉한 것 같지는 않지만,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서 조선사회당을 만든 듯하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이 당은 한국에서 사회당의 이름이 붙은 최초의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18년 6월 지도적 민족주의혁명가의 한 사람인 이동휘(李東輝)가 전일(全一)·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이한영(李漢榮) 등과 함께 노령(露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당명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바꾸고 같은 해 8월 말경 당본부를 상해로 옮겼다. 이것이 이른바 상해파고려공산당인데 민족좌익운동으로 불리는 방편적인 공산주의운동의 조직체이다.

당시 상해파와 대립, 경쟁하는 또하나의 공산당이 이에 앞선 1918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오하묵(吳夏默) 등에 의하여 조직되었는데,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가 그것이다. 이것은 1919년 9월 5일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으로 개편되었다가 1920년 12월 25일 전로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1921년 11월 3일 다시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세칭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으로 상해파와는 달리 볼셰비키당에 직결된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이 두 파는 파벌투쟁을 되풀이하다가 1922년 12월경 코민테른에 의하여 해체되고, 그 극동총국(極東總局) 산하의 코르뷰로(高麗局)에 흡수되면서 다같이 붕괴되었다.

이처럼 해체된 고려공산당에는 국내에서 망명한 민족주의자들로서는 여운형(呂運亨)·안병찬(安秉讚)·최창식(崔昌植문창범(文昌範원세훈(元世勳장건상(張建相) 등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로서는 박헌영(朴憲永)·무정(武亭) 등이 들어 있었으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내지 민족주의자와의 구별과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았으며 함께 뒤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런 단체에서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운동만을 가려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도 3·1운동 이후 급진주의운동 또는 사회주의운동이 급격히 번져갔다. 이 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 민족운동을 민족개량주의(民族改良主義)라고 배격하면서 계급적 사회혁명에 의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려는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운동인데, 그 주동 세력은 주로 동경유학생들이었다.

1920년 1월에 조직된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가 모체역할을 하였는데, 주요 인물로는 이기동(李起東)·김찬(金燦김약수(金若水박렬(朴烈)·정태성(鄭泰成)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박렬·김약수·정태성 등은 조봉암(曺奉岩황석우(黃錫禹)·김판권(金判權)·권희국(權熙國)·원종린(元鍾麟)·임택룡(林澤龍)·김사국(金思國)·장귀수(張貴壽) 등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동경에서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이것이 재일 한국인의 사회주의운동단체의 효시였다. 그러나 흑도회는 이념분쟁으로 곧 해체되고 말았다. 박렬·정태성은 무정부주의를, 김약수·김찬 등은 공산주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무정부주의파는 곧 풍뢰회(風雷會)를 조직하였다가 곧 흑우회(黑友會)로 개칭하고 1922년 4월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이에 맞서 김약수·변희용(卞熙鎔송봉우(宋奉瑀) 등은 1923년 1월 동경에서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같은 해 8월 국내 각지를 순회강연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전파, 보급시키다가, 10월 서울에다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4년 11월 이것을 기반으로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경에 있는 북성회의 국내 지도본부였다. 1925년 1월 북성회는 다시 일월회(一月會)로 개칭되는데, 그 주도 세력은 안광천(安光泉)·변희용·최익한(崔益翰박낙종(朴洛鍾) 등이었다. 이들 단체는 한결같이 계급투쟁·무산계급해방 등 사회주의의 이념을 내걸었다.

국내에서는 또 북풍회에 앞서 1922년 1월 19일 윤덕병(尹德炳)·김한(金翰)·신백우(申伯雨)·원우관(元友觀)·이혁로(李爀魯) 등 19인의 발기로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무산자의 생존권 확립을 목적으로 한 논객(論客)과 각종 단체의 지도급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1922년 3월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제휴하여 무산자동맹회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무산자동맹회의 대부분의 간부는 서울청년회 회원이었다.

그러다가 장덕수·오상근을 중심으로 한 민족개량주의파와 김사국·김한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간에 내분이 일어나 분열되었다. 김사국일파는 장덕수계열을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다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파투쟁이 벌어져 김한 등은 떨어져나가 화요회(火曜會)와 합류하고, 김사국·이영 등이 이 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사회주의적 사상단체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1923년 7월 7일 서울에서 홍명희(洪命熹)·김찬·신백우·원우관·홍증식·윤덕병 등이 “홍수와 같이 팽배하게 밀려오는 신사상을 연구하여 조리있는 갈피를 찾아보려는 목적”으로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1924년 1월 19일 그 이름을 화요회로 고치고 단순한 연구단체로부터 행동단체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화요회라는 이름은 마르크스의 생일인 1818년 5월 5일이 화요일이었다는 데 근거한다.

그 뒤 상해에서 귀국한 조봉암·박헌영·김단야(金丹冶)·조동우(趙東祐)·임원근(林元根) 등이 가담하게 되었고, 북풍회와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김사국·이영 등의 서울청년회와 대립하였다. 화요회는 1925년 4월 제1차 조선공산당 조직과정에서 모체역할을 한다.

이 밖에도 1923년 5월 북성회의 민태흥(閔泰興)·현칠종(玄七鍾) 등에 의하여 조직된 토요회, 1924년 8월 전일(全一)·이남두(李南斗)·이봉길(李鳳吉) 등이 결성한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1924년 12월 이영·정백(鄭佰)·최창익(崔昌益) 등이 서울청년회의 별동조직으로 결성한 사회주의자동맹, 1923년 12월 김치명(金治明)·이계형(李啓亨) 등에 의하여 조직되었다가 화요회에 흡수된 혁청단(革淸團) 등 무수한 서클과 단체가 명멸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조직체의 결성·해체와 이합집산 및 혼동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또는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간의 이데올로기면에서의 본질적·근본적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공동의 목표가 민족해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하의 민족주의운동에서 그 주체성이 견지되면서 사회주의와 결부되었던 것 가운데 가장 큰 의의를 가지는 두 가지는 신간회운동과 조소앙(趙素昻)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들 수 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 분열된 항일독립운동을 민족주의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의 협동전선으로 통일하여 비타협적 민족단일당을 결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창설되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가 신간회를 통하여 전개하려던 민족운동은 항일민족주의와 경제적 사회주의가 결합된 대중적 민족주의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 좌파를 소부르주아의 정치적 대변자로 규정하면서 이 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1931년 5월 해체되었다. 이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의 통일전선·협동전선이 우리 나라에서 불가능함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나타난 독창적 사회주의사상이었다. 조소앙은 현대의 3대 사상조류인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종합체계화하는 데 정열을 불사른 정치사상가요, 실천적 정치가였다.

개인간의 평등, 민족간의 평등 및 국가간의 평등과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을 핵심으로 한 삼균주의 이론은 단순한 사변적 착상이 아니라, 그의 30년의 혁명투쟁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3) 광복 이후 8·15광복 후 최초로 사회민주주의를 강령에 표방한 정당은 1945년 8월 15일 원세훈(元世勳)이 발기하였던 고려민주당이다.

그러나 이 당은 곧 1945년 9월에 창설된 한국민주당에 흡수, 통합되었으며, 여운형·장건상 등이 1945년 11월 12일 조직한 조선인민당이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세력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 당은 “한국민주당이 자산계급을 대표한 계급정당이요, 조선공산당이 무산계급을 대표한 계급정당임에 비하여, 인민당은 반동분자만을 제외하고 노동자·농민·소시민·자본가·지주까지도 포함한 전인민을 대표한 대중정당”이라고 스스로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 당은 신탁통치문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대책 등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동조, 추종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조선인민당 다음에 결성된 것이 조소앙의 삼균주의청년동맹(1946)과 그가 김구(金九)중심의 한국독립당을 이탈하여 창당한 사회당(1948)이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의 3당합당으로 박헌영 중심의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이에 반대한 여운형을 중심으로 백남운(白南雲)·이영·장건상·김성숙(金星淑이상백(李相佰)·최익한 등에 의하여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여운형의 암살로 이 당은 붕괴되고 6·25전쟁을 전후하여 좌파에 속하였던 백남운·이영 등은 월북하였고, 우파에 속하였던 장건상·김성숙 등은 남한에 잔류하였다. 그리하여 광복 직후의 정치적 혼란기에 나타났던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정당은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그 뒤 혁신정당을 표방한 민주적 사회주의정당이 사회주의의 불모지에 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6년 5월 진보당(進步黨)의 발족이다.

조봉암·서상일(徐相日)·박기출(朴己出)·윤길중(尹吉重)·김달호(金達鎬)·이동화(李東華)·김기철(金基喆)·신창균(申昌均)·이명하(李明河)·조규희(曺圭熙)·송남헌(宋南憲)·신도성(愼道晟)·고정훈(高貞勳)·김철(金哲) 등이 주동이 되어 평화통일론과 사회적 민주주의를 정강으로 내세웠다.

공산당과 결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봉암은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에 도전하여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고, 그 결과 216만 표를 획득하여 국민대중의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뒤 진보당추진위원회는 당의 지도권문제와 간부들간의 인간적 불화로 분열되어 조봉암계는 진보당(1956.11.)을, 서상일계는 민주혁신당(1957.10.)을 각각 결성하였다.

하지만 두 당은 모두 민주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국민대중정당을 지향하였던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두 혁신적 사회주의적 정당은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국민대중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세칭 ‘진보당사건’이 일어나, 당수를 비롯한 20명의 당간부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당은 1958년 2월 25일 불법화되었다.

대법원에서 당간부들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조봉암만은 사형이 언도되어 1959년 7월 3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진보당사건과 조봉암사형사건은 그 뒤 정치적 재판이라는 논란을 강력하게 불러일으켰다.

진보당사건 이후 동면상태에 빠졌던 한국의 혁신적 사회주의운동은 4·19혁명을 계기로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즉,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소수의 근로인민당 우파,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의 잔여세력, 일부 신진인사·청년세력들이 집결하고,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1960년 7월 29일의 총선거에 참여, 원내 교두보를 확보하는 의석을 획득하였다.

그 뒤 얼마 동안의 정비·개편·통합 과정을 거쳐 민주사회주의적 정강·정책을 내건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을 결성함으로써 한국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능성과 전망은 5·16군사정변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당은 해산되고 당간부는 물론 외곽 산하단체인 청년·학생·여성·노동·통일 단체 등의 간부들도 투옥되고 장기형에 처하여졌다.

제2공화국의 붕괴와 함께 사회주의운동도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민주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의 발상지인 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를 도입, 수용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공산주의 독재체제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내지 ‘주체사상’으로 사상계는 일색화(一色化)되어 버렸다.

이 여파는 남한에다가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까지도 기피, 혐오하고 공포감 내지 적대감을 심게 한 작용까지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국제적 냉전과 국토분단에서 빚어진 정치적·사회적 긴장 및 경직된 지적·문화적 풍토와 이에 입각한 흑백논리와 도식적 사고 때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차이가 모호하고도 혼동되었던 것이다.

〔평 가〕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내적·외적 여러 제약 요인으로 인하여 그 이념과 세력을 뿌리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외계층의 불만과 요구를 수용, 해소,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 좌우세력간의 극단적인 대결을 완화시키고, 독주와 독단을 견제하며, 보수양당제의 한계성과 결함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 통일정책과 사회보장정책 등의 모색·표방을 통하여 분단문제와 사회경제적 평등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넷째, ‘사회주의인터내셔널’ 등과의 유대강화를 통하여 다양한 민간외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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