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反共]
한국에서의 반공은 분단과정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 자유민의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신념에 따라서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표현된 것이다.
반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호하고 구현하려는 것이기에 자유민주주의와 표리가치로서의 성격을 지녀왔다. 반공이 한국에서 정책이념으로 작용한 것은 정부수립 당시부터이지만, 전국민적으로 반공의식이 심화되어간 것은 6·25전쟁 이후부터이다.
북한의 남침은 정치적으로 한국에서 중간노선의 정치세력이 소멸되는 조건이 되었으며, 국가적으로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강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공국시에 따른 정책과 활동을 시기별로 보면, 정부수립에서 1950년대 말까지의 반공개념정립기, 1960년대의 통일역량배양기, 1970년에서 제5·6공화국까지의 체제경쟁기, 김영삼 정부 이후의 체제개방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소의 냉전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배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한 한민당(韓民黨)은 반공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한사회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테러·파업·폭동 등이 전국에서 속출하였으며, 특히 1947년 2월 ‘국대안(國大案)’에 반대하는 좌익계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사회소요 행위는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정을 거친 뒤 5·10선거를 통해 자유민주적 자주독립정부가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반공이념이 정부시책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9월 28일 정부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면서 그 규정을 공포하여 “모든 반국가적 행동과 사상을 철저히 쳐부수고 국토통일과 조국의 방위에 결사, 헌신한다.”는 결의를 함으로써 한국의 젊은 학도들의 반공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일이 반공에서 비롯됨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정부는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국민의 반공의식을 높여나갔다. 특히, 민족지상·국가지상을 내세우면서 좌익세력과 맞섰던 족청세력(族靑勢力)은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행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가 되면서 군대 및 경찰조직에 파급되었고, 그 결과 정부의 반공의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여순반란사건과 대구 10·1폭동사건 등이 발생하고, 정부는 이에 맞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나가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그때까지 남북이념대결에서 반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던 일반 국민들까지도 공산주의에 대해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통일논의는 강력한 대공정책과 함께 불법·무력·반란집단에 대한 응징을 전제로 한 북진통일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특히, 1954년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마련되었던 제네바협상이 결렬된 뒤 1955년 2월에 창당된 노동당이나, 같은 해 9월에 발족한 민주당은 물론, 혁신야당으로 출범한 진보당도 1956년 11월 결당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하에 유엔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다짐하여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의 주권을 전제로 한 통일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봉암(曺奉岩)의 평화통일론이 자유당의 무력통일론을 비판함으로써 급기야는 1958년 진보당사건에 이어 1959년 7월 조봉암의 사형집행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강력한 대공경각심은 교육시책에도 반영되어 1954년 국민학교에 ‘반공도덕’ 교육의 실시가 제도적으로 정립되었고, 1955년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반공교육이 시행되어 학생들에게 반공의식을 배양하도록 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냉전적인 체제대결로부터 동서화해적인 체제경쟁 구조로 그 정책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자유당의 무력북진통일론은 자취를 감추었고, 보수와 혁신을 막론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북한의 남북연방제에 의한 통일방안 제의와 오스트리아의 중립과 통일모델에 대한 논의는 그때까지 금기시되었던 이념논쟁과 체제논쟁으로까지 발전되어 1960년 5월 10일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국가보안법〉도 개정되었다.
1961년 5월 5일에는 학생들의 이른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이 결성되어 남북학생회담 개최와 남북교류론 및 중립화통일론까지 대두되는가 하면, 북한에서는 때맞추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들의 주장에 대한 지지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혁신계에 의해 주도된 이와 같은 이념논쟁과 중립화통일론도 5·16군사정변에 의해 침묵하게 되며,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로써 제3공화국 시기는 시종일관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실력배양에 역점을 둔 통일역량 배양기라 부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반공교육도 일대전환을 가져와서 종전까지의 반공도덕교육이 제도적으로 전교과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반공교육정책은 1965년 베트남파병과 1968년과 1969년에 있었던 북한의 무장간첩침투사건 등으로 더욱 강화되었으니, 1968년에는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라는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었고, 대학에서 국민윤리가 필수 교양과목으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96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대북한 정책에서 대한민국이 그 체제의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선의의 체제경쟁을 선언하게 되었다.
탈냉전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정책전환을 시도하여 1971년 8월 12일 대한민국은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하였고, 나아가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을, 1973년 6월 23일에는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정부는 공산권에 대한 호혜주의원칙하의 문호개방정책을 내세웠고, 1974년 1월 18일 남북한상호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하는 등 강력한 반공정책의 구현보다는 한반도에서 선의의 체제경쟁을 위한 평화정착과 대화 및 평화통일 노력을 우선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비무장지대에서의 땅굴 구축과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의 미군장교들에 대한 도끼만행사건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등 일련의 사건은 반공정책을 게을리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특히 1975년 4월 말 베트남이 적화됨으로써 북한의 남침도발 가능성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는 안보강화특별담화를 통하여 온 국민이 반공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총력안보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하였다. 그로 인하여 1975년 6월 7일에는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공포하여, 배우면서 지키는 반공학도의 사명을 강조하게 된다.
이 시기에 전시동원 체제를 확립하여 전국적인 범위로 민방위대가 조직, 편성되고 〈사회안전법〉·〈민방위기본법〉 등이 제정된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주변정세와 대내적 관계가 상충되는 가운데 안으로는 체제강화와 안보를 위한 반공동원체제의 제도화와 밖으로는 국제적 해빙조류에 편승할 수 있도록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개선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아울러 그와 같은 정세변화가 한반도 내부정세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1980년 12월 30일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반공법〉을 폐지하고, 나아가 재일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을 실현시켰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수세적인 반공에서 적극적인 승공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5공화국에 들어와서도 남북대화와 평화적 통일이 통치이념으로 포함되어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회담과 이산가족교류 등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강력한 반공정책보다는 평화정착과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에 주력하였다.
1982년 1월 22일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의 제의와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공연을 추진하는 등의 정책을 펴면서 정부는 이질화된 남북한의 사회문화를 극복하고 자유와 민주에 대한 우위성을 확인시키는 국민반공계도 정책을 견지해왔다.
제6공화국에 들어오면서 한국사회는 민족주의의 개화기를 맞게 되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출범한 제6공화국은 올림픽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의회와 정계개편 국제화시대의 북방외교 및 남북대화 등의 격동기를 맞았으며, 소련과 동구권의 공산체제의 붕괴는 정부의 반공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이 시기는 자유민주체제 개방기로서 민주화정책과 개방, 그리고 민족통일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제논쟁은 보수연합이라는 세력정비를 가져왔다. 따라서, 반공국시 논쟁은 법적으로나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기저로 한 한반도의 평화통일문제에서 탈이데올로기적 자주통일과 체제수호라는 차원에서의 시비가 가려져야 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로서는 북한과의 모든 교류를 개방함으로써 폭발적으로 요청되는 국민의 통일염원을 풀어나가면서 자유민주체제의 우월성을 견지하고, 나아가서는 반공수호세력의 대동단결을 가져다줄 정책방향의 일대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그것은 반공이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자유수호라는 적극적인 개념에 바탕하는 것이어야 한다.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만남을 위해 만날 것을 제의하고 있다. 또한 통일 부총리에 진보적인 인사를 기용하는 등 적극적인 남북화해 조치를 위해 갔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는데, 사상전향제도는 일제의 잔재로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준법서약제도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관계의 전향적인 발전도 북한의 핵문제가 돌출하면서 남북관계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문제는 국제문제화되면서 한반도에는 난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로 북한의 핵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고 남북정상회담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던 중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으로 남북문제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김일성의 조문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간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고 학생운동에도 주사파논쟁이 대두되어 한국에는 반공 히스테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일련의 공안사건으로 정국이 급냉전되고 연이어 야기된 남한의 북한 쌀 지원파동은 인공기 사건으로 불거지면서 남북한간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한국의 보수층으로부터 북한의 쌀지원 중단이라는 일련의 압력이 가해졌다. 특히 북한의 동해안 잠수함침투 사건과 1997년 2월의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망명사건은 남북관계의 장애물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12월에는 북풍사건이 불거지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을 폈지만 한 때는 잠수함을 침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이후 두 차례의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등 남북화해 기운이 표면적으로는 감도는 듯하다.
하지만, 남한의 국방부는 북한을 주적으로 본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북한의 경우도 집권세력이 군사적 평화공존과 대외적 개방을 추구하는 인물로 구성되지 않는 한 현재 남북관계도 실질적인 화해분위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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