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김정준의 신학사상

好學 2012. 8. 30. 09:40

 

김정준의 신학사상 1

 

장신대:한숭홍 교수

 

I. 머 리 말

한국 신학계의 거성으로서 신학교육과 에큐메니칼운동의 역동적인

인물이었던 만수 김정준 박사는 신학을 시로써 풀이한 시적 신학자였다.

물론 선생의 전공은 구약성서신학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성서학자요, 특

히 구약신학자이다. 그러나 표현과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은 문학적 필

치와 교감을 통한 서술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문학성이 넘친다는 것이

다. 이것은 딱딱하고 틀에 박힌 신학이란 특수학문의 과학성을 부드럽

고 자유로운 상상의 기질속에서 승화시켜 제공하려는 그의 새로운 신학

함이었다고 하겠다. 그의 생애가 시적인 감동의 삶으로 이어져있었고,

그 삶이란 역사 위에서 전개된 그의 활동과 이념들이 모든 자연주의에

흠뻑 젖은 문학성을 풍기고 있었던 점은 그에게서 신학은 교리전수나어

떤 특정 교단전통같은 것의 전수가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서신학자로서 성서를 문학으로 해석하려 했으며, 동시에 구약의 학문

성을 성서 자체로부터 찾으려 했다. 성서가 각색되거나 이해득실에 따

라 특수하게 해석된 자체가 성서 본래성이 아닐 뿐아니라, 성서에 대한

잘못된 관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성서관

을 피력했다.

성서는 '신조' 나 '교리' 의 집합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

떻게 살았느냐'또한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기록을 최초의 원시시대

로부터 초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또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역설은 성서신학자로서 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그의신

학은 사실상 과거 지향적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과감하게 미래 지향적

으로 전환하려는 혁신적 사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

는 것이 현재정향적 신학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을 만수 선생은 " 오늘

을 사는 신학"이라고 했으며, 참된 신학의 실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맥

락에서 그는 분명한 표현으로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일에, '우리는 누구를 믿느냐'하는

신앙의 대상과 신앙의 방법 문제가 하나로 통일되어 전제한다.

그러므로 신학의 이론적 학문적인 발전에 대하여 우리는 최대의 민감성

을 가지고 관심을 해야 하겠지만 그 이론과 학문의 상아탑에 올라앉아,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인 문제, 윤리적인문

제를 등한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신학교와 교회목회가 분리되거나, 신

앙과 윤리가 서로 배치되거나, 예배와 생활이 서로 괴리되었을 때,그것

은 '오늘을 사는 신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가 명상이나, 맹신의 신비

적 종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떤이론을 해석이나 하고 있는 이

론적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 행

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하는 성서 자체의 증언을 다시 반

복한 것이며, 또한 현대과학이론에서 이론과 실천의 완전한 조화를 통

한 학문성을 그가 신학에서 역설하고자한 과학이론적 측면에서의 신학

의 학문성을 정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만수 김정준 박사는 이러한 그의 사상을 글로써만 표현한 사람이 아니

라는 점에서 한국 신학계의 지표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신학의 이

론과 실천의 문제, 즉 신학교육과 목회현장의 상관관계를 항상 그 자신

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상아탑 신학을 외친것도 아니

고, 이론부재의 열광주의 신앙을 강조한 것도 아니며, 충분한 이론과충

분한 실천, 다시 말해서 행동하는 신학의 위상을 스스로의 생활에서 직

접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그를 우리는 성서학자로서만의 제한적 위치

에서 보기보다는 사상가적, 시대의 선각자적 위치에서 조명할 수 있는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순수한 신앙고백에서부터 시

작되기 때문에 그는그 누구보다도 삶의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신앙, 은혜, 고난, 찬양, 승리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그 삶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항상 감사하며, 그의 고난을 시편을 명상

하며 찬양으로 넘친 것이다. 고난 속에서의 찬양! 이것이 만수신학의정

수이다.

 

II. 김정준의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먼저 그의 삶을 살펴보는 매우 의미있는 동기들이 함축된 사건들과 그 의미로 동기들이 함축된 사건들과 그 의미로 차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이 곧 그의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작업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를 자신의 진술을 기초로하여 분석해 보면서 그의 글로 표현된 작품들의 주제를 빌려 가면서 해석해 볼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신하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평가하면서 그의 신학의 성격도 규정할 것이다.

만수 선생의 생애는 2단계로 구획하여 서술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탄

생하여 마산폐결핵 요양소에서 퇴원하기 까지의 생애를 1기로, 그리고

퇴원후 서거할 때까지의 생애를 2기로 나누어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그의 삶은 병으로 양분된 삶이었다. 그 스스로도 마산

요양소에서 퇴원하던 1948년 11월 30일을 제2의 생일이라고 했을 정도

로 그의 삶에서 투병기간을 삶을 나누는 구획점이 되었던 것이다.

 

1. 생애의 제1기 (1914.11.6 - 1948.11.29)

김정준은 1914년 11월 6일 부산 동래 온천장에서 범어사로 넘어가는

산골 속 산성(행정명은 금성동)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곳 벽촌자체가 산골짝에 밭과 논을 만들어 겨우 식량을 마련할 수 있

는 곳이었으며, 사람들은 땔감을 해다 팔고 여름에는 열무김치를 해다

팔아 연명해야 하는 빈촌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

었다. 특히 그의 가정은 별로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누룩

만드는 가정에 가서 품을 팔아 가며 연명해야 했다. 이렇듯 그는 일년

에 설날과 추석때에나 쌀밥을 구경할 수 있었던 몹시 빈한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러한 환경에서 하루 50리 길의 보통학교를 걸어다니며 마치

는 것 자체도 그에게는 매우 보람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정

성과 본인의 끈기가 함께 어울려 결실을 맺은 것이었따. 어머니의 뱃속

에서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모태신앙을 그가 자랑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

의 모성애뿐만 아니라, 그에게 깊은 감명을 심어준 어머니의 신실한 신

앙심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속에서도 그에게 밝은 마음과 건

전한 신앙을 잃지 않도록 늘 기도했던 것이다.그러나 어머니의 안타까

움은 배움에 불탄 아들을 중학교까지 공부시켜 줄 경제적 여력이 없어

그만 그의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어머니에게 뿐만

아니라 명랑하고 건강한 소년 김정준의 가슴속에도 무엇인가 응어리진

한으로 맺히고 있었다. 더 배워야 하는데, 더 많이 공부하고 싶은데 하

는 간절한 소망이 그의 머리 속에서는 떠날 수 없는 지껄임 처럼 들렸

다. 그의 가정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 자신도 길을 찾아 내

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 자신도 길을 찾아내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무도 그의 장래를 위한 진학을 열어줄 수는 없었다.

소년 김정준은 이 때 비로소 생애중 처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

게 된다. 그가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늘 자랑처럼말

하는 그 은혜의 선물이 그에게 던져진 것이다.

그 당시 부산에 주재했던 호주 선교부는 이런 시골 산골짝에 있는 소

년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그들이 마산에 세운 호신 학교에서 중학과

정을 공부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이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시험에 대비하여 그는 기도와 성경통독을 통해서 준비를하

고 임했다. 선발된 학생들과 그는 마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계기가 그

를 신학과 관계시켜주는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여기 하나님 은혜로 합격이 되어 우리 동리에서는 처음으로 중학생이

되었다.

이것은 감격의 증언이며, 진실된 감사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기쁨

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광주학생의거 사건의 여파

로 호신중학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일본어 선생의 수

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이 생겨나자 학교는 김정준이 1년도 채 마치기

전에 폐교되고 말았다. 호주선교부는 장학생으로 뽑힌 학생들만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시켜주었다. 이때 그는 그의 신학의 친구가 된 조선

출과 정대위를 사귀게 되었고, 이들은 누구부다 가깝게 지내며 앞날을

서로 설계하고 이야기하며 우정을 돈둑히 했다. 이 아름다운 우정속에

그들은 점점 성숙해 갔다.

평양에서 김정준의 변화는 사실상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본질적

으로 전환점을 가진 시기였기에 매우 큰 변화를 맞이한 곳이다. 그는여

기에서 당시 성경 교사로 근무하던 송창근 목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배우며 한걸음씩 하나님의 손 안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잡아 그를 필요한 그릇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계기가 바로 평양 시절에

펼쳐진 것이다. 송창근 목사는 김정준, 조선출, 정대위 세 학생을 4학

년부터는 개인지도로 가르쳐주며, 이들의 젊은 기상과 희망을 키워주었

고 북돋아주었다. 이들이 모두 그후에 한국에서 훌륭한 신학자로서 활

동하며, 한국 신하계에 큰 공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실로 당시 송창근

목사의 신앙과 인격을 통한 감화 감동이 얼마나 이들의 인생관을 바꾸

어 놓았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외에도 목사가 되겠다

고 결심이 선 다른 학교 학생 몇명과 함께 늘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수요일 아침에는 조만

식 선생, 김동원 장로로부터 민족교육과 가르침을 받아왔다. 이때 받은

가르침들이 김정준의 사상이 민족중심의 신학과 역사를 수립하는 밑받

침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김정준은 "이렇게 평양서 중학

을 마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나는 믿을 수 밖에 없다"고 고백

한다. 그는 무사히 중학을 마치게 되었다. 이 시절을 그는 그 어느 시

절보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회상하곤 한다. 그것은 향수에 어린 시절처

럼 머리 속에서 스쳐가며 그를 고무시켜 주기도하고, 그의 삶의 애수를

풍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로 당시의 감정을 술회하였다.

나의 숭실중학 생활은 아주 즐겁고 평화서러운 환경에서 독서를 마음

껏 할 수 있었고 내가 가진 운동 취미와 음악의 취미를 마음껏 살릴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상가

장 많은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한 학교를 나의 모교로 하여 일찍부터 교

회 관계일과 많은 선배 목사,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

이 내게는 자랑아 아닐 수 없다. 나의 신앙생활 훈련을 철저히 할 수있

었던 것도 숭실학교 덕이었다.

김정준은 호주선교부의 장학금으로 숭실중학을 마치기까지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는 새벽기도에 매일 나갔으며, 성경공부와 전도 여행에

도 적극 참여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월요일에 있어도, 주일날은

절대 시험준비를 하지 않았던" 청교도적 신앙, 보수신앙도 이 때 감수

성이 예민하고 문학성이 강한 정준 소년의 아름답고 순수한 신앙이었다.

그는 항상 모든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여 말씀을 들었으며, 부흥집회나

강연회에 참석할 때는 항상 내용을 간추려 정리.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

다. 그것은 그를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소중하고 귀하다

고 느꼈기 때문이며, 이처럼 그에게서 신앙은 온통 순수성으로 꽉 차있

었다. 이것을 그는 한때 가졌던 보수신앙으로 자랑하고 있으나, 사실그

의 전 생애는 보수신앙으로 엮어져 있으며, 그의 사상속에서 쉽게 그흔

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학에서 그의 학문성의 가치를 신앙적 도그마주

의와 과학적 합리주의의 갈림길을 놓고 과학적 합리주의의 신학을 선택

했으나 신앙은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흐르고 있다. 즉 그는 신앙에서

는 보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를 선택하여 자신의 삶에서 조화하고 있

는 것이다.

숭실학교를 마친 김정준은 갈 데가 없었다. 아니 학비를 감당할 능력

이 없었기 때문에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단짝이었

던 조선출은 동경 청산학원 신학부로, 정대위는 1년 쉬고 동지사 신학

부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에게는 유학의 뒷받침이 될만한 경제적 힘이없

었었다. 그는 평양에 눌러앉아 숭실전문 입학도 그에게는 기적이었다.

불과 2주년까지만 해도 윤산온 교장은 장학금이 없다고 말했고, 그래서

숭전 입학 포기상태에서 기도에 힘썼던 그에게 새로운 장학금이 도달했

고, 그것은 장학금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숭실전문 문과 1년을 시작

한 것이다.

숭실전문학교 생활을 1년으로 끝났다. 학비 조달은 장학금으로 해결되

었으나 식비와 잡비등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학을 해야했으며, 그것은너

무 벅착 일이었다. 그는 조만식 선생에게 부탁하여 그집 가정교사로도

일을 했고, 송창근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산정현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

했다. 숭전 1년을 마치며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학교를 1년만 마치고 말았다. 숭전을 그마 두고나서 그는 평양 여자고

등성경학교 서무과 일, 성가대 악보 프린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이때 처음으로 그의 건강에는 이상이 생겼으며, 폐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고 고향에 가서 쉬고 있었다. 고향에서 쉬고 있을 때 산정현

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경영하고 있던 송창근 목사의부

름을 받아 정준은 부산에서 미취학 아동들에게 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치

며 [성빈]이란 월간지 편집도 맡아 했다.

1938년 3월 성빈학사가 문을 닫았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것을 확

신하며 서울로 떠난 것이다. 연전에서의 생활도 숭전에서와 마찬가지로

1년으로 끝났다. 그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연전이 대동공업전문학교로바

뀌었기 때문에 문과생인 그로서는 더 이상 연전에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9년 봄 그는 연전을 중퇴함과 동시에 일본 동경 청산학

원 신학부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이미 조선출이 2학년을 마치고 있었

다. 그는 일본에서 고학과 TB에 시달이며 어렵게 공부를 마쳐 드디어

1943년 3월 청산학원을 졸업했다. 졸업후 곧 바로 일본 교단 목사고시

에 합격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첫 목회지는 불국사 교회였다.

이때 그는 많은 신앙경험을 했고, 그것이 그의 신앙 유형을 형성시켜 주

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주 불국사 역전 교회가 나의 첫 목회, 여기서 불과 만 24개월 섬겼지

만 내 일생에 경험한 다른 어떤 목회보다 항상 기억이 새롭다.

불국사 역전의 구정리 교회는 그의 첫 목회지인만큼 그에게 남긴 인상도

깊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년만에 경북 자인읍 교회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는 4개월 목회를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다른목

회지로 옮겼던 것을 일생의 오점으로 생각하며 항상 후회하고 있다. 그가

그의 제자목사들에게 항상 어느 곳에 가든지 목회는 3년 이상은 하도록간

곡히 충고하는 것도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북 자인읍 교회에부

임한지 4개월만에 송창근목사가 시무하던 경북 김천 환금동 교회 부목사

로 부임하기 위하여 그는 세간 살림과 4식구가 트럭에 몸을 싣고 이삿길

을 떠났다. 오후에 대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국의 해방소식을 들었다.

김천에 오자마자 송창근목사는 조선신학교 재건 문제로 주간중에는 서울

에 가 있었고, 주일 설교를 위해서 주말에만 내려 왔다. 그래서 김정준은

사실상 거의 단독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후 남한의 미군정이시

작되었을 때 그는 군정관 통역을 하게 되어 교회일 외에는 거의 이런 일

이 시간을 뺏기며 바쁘게 살아갔다.

이러한 과로는 그에게 잠재해 있는 페병균을 다시 활성서켜 폐병을 재발

시켰다. 게다가 송 목사는 그해 11월 경에는 교회를 사면하다시피 되어김

정준은 교회를 혼자힘으로 이끌어 가야했다. " 내 짐은 더욱 무거웠다"고

하는 그의 책임감 있는 표현은 그만큼 그의 건장은 악화될 수 밖에 없었

다는 반사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런 무리한 목회일을 수행하는 일 자체

가 병자인 그에게는 무거웠을 뿐 아니라 무리였다. 그리고 이런 무리를계

속한다는 것은 건강을 포기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그는 1946

년 부활절 설교를 쓰고 각혈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 설교는 장로 한

분의 낭독으로 대신했지만 그는 곧 교회를 사면하고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을 남기고 그는 홀로 마산 요양소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1946년 6월 18일이었다.

김정준은 마산요양소에서 6급환자로 분류되어 사실상 죽음을 기다리는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그는 30개월의 요양후에 퇴원하여 조선신학교

교장겸 성남교회 목사인 송창근목사의 부름을 받고 1949년 2월 가족과 함

께 서울로 올라왔다. 6급 환자인 그가 퇴원하여 정상적이니 일을 한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고불

렀다. 마산요양소 시절은 그에게 시편을 암송하며 환자들을 환자로서 돌

보며 위로하는 일로 보냈다. '믿는 환자를 찾아서 주일이면 우리들끼리예

배를 보기 시작한 것"과 "시편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창출한 것이었다. 시편 암송은 그에게 기적을 주

었다. "시편이 내 병상의 양식이 되고 나의 육체는 결핵균으로 쇠약해 갔

지만, 내 영혼만은 살찌울 수 있었다는"는 확실한 신앙은 그를 죽음에서

살린 기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1948년 11월 30일 퇴원하였고, 이날을 그

의 제 2의 생일로 감사하며 축하한다.

 

2.생애의 제2기 (1948.11.30-1981.2.3)

1948년 11월 30일 마산요양서를 퇴원한 김정준의 삶은 항상 종말적이

었다. 그의 감상적인 표현은 매우 감동적인 간증으로 들린다. 그는 이

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애란 것을 말하려고 할 때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

님의 은혜의 손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고 날마다 하루 하루가 내게는 종말적이 되어 있다.

아마도 그의 독백과 간증은 단순한 문필적 표현만은 아니다. 그는 항

상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언제 재발될지 모를 병에의 공포와 대비속에

서 살아야했기 때문에 그에게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는 기적이며,특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앙

으로 그를 좌절에서 일으켰으며, 그의 신학자로서의 학문의 길과 목회

자로서의 종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

그의 후반기의 삶은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신학수업의 시기이다. 그는 1949년 2월 서울에 올라와서조

선신학교 (현 한국신학대학)에서 가르치며, 성남교회 목회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성남교회 시무는 그가 1958년 8월 영국 에딘바라로 신

학공부를 위해 떠날 때까지 8년간이나 계속했다. 그중 담임목사로 시무

한 기간은 3년 남짓한 기간이었으나 그는 여기에서도 항상 그가 강조하

는 신학교 목회의 합일의 참교육을 실천하려했다. 그에게서 신학교육은

단순히 학자나 신학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므로 신학교육은 반드시 목회사역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신

념은 그의 전생애에 걸쳐 삶으로서, 행동으로서 실천되어졌고, 후학들

에게 모범으로 보여졌다.

한국 전쟁은 그에게도 커다란 비극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어쩌면 자

신의 근원이 뿌리채 무너지는 허탈감이며, 존재의지의 상실이었는지도

모른다 6.25로 성남교회는 파괴되고, 송창근목사는 북괴에 납치당해 순

교했다. 송창근목사는 그의 신앙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실체이며, 동시

에 그의 삶의 두 기둥이었다고 하겠다. 한 기둥은 그의 어머니의 따뜻

한 모성애와 기도하는 신앙이었고, 다른 한 기둥은 송창근목사의 후견

인으로서, 신학인도자로서, 신앙인격자로서 그를 바쳐주었던 것이다.

그때의 허탈감이 그를 항상 짖누르는 것 같은 중압 의식이다. 그는 이

렇게 그 심경을 표현한 바 있다.

6.25의 비극은 교회당 파괴보다 송창근 목사님이 북괴에 납치당하여순

교당한 일이다. 그가 잡혀가시기 전날밤 그의 지하실에서 단파라디오를

들었던 나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요, 그와 맺은 나의 일생의 관계가 너

무 깊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기념하는 예배당을 건축할 뜻을 품게 되었

다.

그의 이러한 쓰리고 아린 가슴속에는 항상 송창근목사의 모습이 서려

있었다. 그가 캐나다 유학시절 공부에 쫓기면서도 [나의 잔이 넘치나이

다 (My Cup Runned Over)] 란 간증글을 영어로 써서 교회당 재건 모금

운동을 벌인 것도 그의 은사에 대한 제자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다.

당시 8,000불을 모금하여 성남교회 재건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성남

교회 성장사 속에서도 아름다운 일화로 기록되고 있다.

김정준은 1952년 8월 부산에서 한국신학대학 피난교실에서 교수겸 교

무과장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캐나다 선교부의 알선으로 캐나다 토론

토 임마누엘 신학교로 유학의 길이 열려, 그곳에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헷세드 연구]란 학위논문을 쓰고 1953년 3월 신학사 학위(B.D) 를 받았

고, 토론토 대학교 신학 대학원에서 "시편에 나타난 의인과 악의 상극

문제"란 논문으로 신학석사(Th.M)학위를 1954년 5월에 받았고 2년만에

귀국했다. 귀국하는 여객선이 풍랑을 만나 죽을 뻔하다 살아 돌아온 후

그에게는 "용궁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1958년 그에게 두번째의 유학의 길이 열렸다. 그가 청산학원시절부터

고대하고 희망하던 스코틀랜드 에딘바라 대학으로의 유학 길에 오른 것

이다. 그것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함태영 목사를 모시고 6개월간 세계일

주를 하고 돌아왔을 때 함목사가 하사한 1,000불의 돈으로 유학의 비용

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곧 영국 에딘바라 대학의 박사과정

에 입학하여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의지(Bth)에 나타난 히브리 경건

연구"란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60년 1월 귀국했다.

영국유학시절의 잊혀지지 않는 두가지 사건은,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교실 한 구석에서 했던 것이었다. 그날 새벽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교실

한 구석에 있는 물체를 보고 낙담하여 그후 이 충격으로 죽었다는 것과

또 한가지는 그가 1959년 5월에서 9월까지 한 학기 동안을 독일하이델

베르크 대학에 가서 구약 신학자 폰라트(G,Von Rad) 교수의 강의를 들

었다는 사실이다. 이 계기로 그가 한국 최초로 폰라트의 신학을 소개하

게 되었고, [폰 라트의 신학](1973)과 [폰라트의 논문집] (1978)을 집

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딘바라 대학은 그에게 신학박사학위만이 아니고 목회중심 신앙까지

전달해 주었다. 이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딘바라 대학의 목회중힘의 신학교육의 영향이 내 목회에 큰 영향을

주어, 내 신학교육 이념은 철저하게 목회중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강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이 신학과 목회의 상관관계론은 이미 이때 완전히 정립되었다. 그래

서 그 관계성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신학교육의 목적을 언제나 '목회를 중심한 것'또는'선교를 중심

한 것'이라고함에 일관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신학교육과 목회는 활과 화살에 비할 수 있다. 활(신학교육)은 화살 (

목회 또는 선교)을 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활을 구성하는 재료

또는 요소는 활대 (나무), 줄 이 두가지다. 활이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활대와 줄이 최대한으로 긴장해서 세운 목표를 향하여 정확히 쏘아야한

다.

신학교육에 대한 그의 교육철학은 사실 그가 신학을 단지 학문이나 이

론으로서만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철저한 사명감에서 발전된 사상이다.

그는 항상 신학이 이론 이전에 생활이면서 신앙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

는 신학교의 교육목표가 절대로 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자주 역설

하곤했다.

그의 소신은 다음과 같다.

신학이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내게는 신학교육이신

학자 길러내는 것만으로도 찬성하지 못한다. 그가 가장 우수한 신학자일

수록 그의목쇠에 대한 정열도 강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최고의

신학이 최상의 목회에 쓰여지는 종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제2의 생을 시작한 김정준의 33년간은 사실상 신학, 목회,선교, 에큐메

니칼운동으로 충족되어있는 시간과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신대에서

의 교수와 학장 (1961.9-1962.5)으로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교

수와 교목실장(1963.4 - 1969.2) 으로, 연합신학대학원 초대원장(1964.1

-1970.4)으로, 봉직했으며, 한신대학 학장으로 부름받아 학장 재직(1970

5.-1976.2) 등으로 신학교육의 책임자로서 행정직도 맡아했다. 그러나그

러한 행정직을 수행하면서 그의 '활과 화살론'의 신학교육론을 펼쳐 실

현했던 것과 못지않게 의미있었던 것은 그가 이 기간 동안 특히 60년 대

부터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참여하면서 그의 신학이 포용적이고 매우 개

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1963년 연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오면서 새로운 신학함의 길을개

척했다. 그것은 그가 말하듯이 학원선교와 병원선교를 통한 사명감의 충

만도였으며, 다른 하나는 TEF에 의해서 설립된 연합신학대학원의 원장으

로서 일하면서 에큐메니칼운동에 직접 체험하며 참여했던 것이다.

연세대학에서 연합신학대학원장으로 6년간 봉직한 것을 그는 그의 삶의

가장 값진 체험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헌신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이 새세

계 속으로 마음껏 뛰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체험하고 얻은 가장 귀중한

소득은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이론이나 교파 안배 위주의 감투에 대한 의

식이 아니라 (이런 것들은 사실상 에큐메니칼 운동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들이다) 그것은 반드시 신학적인 기반에 놓여야 하고 신학적인 대화

가 끊어진 곳이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

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체험담을 만한 것이므로 이론으로만 역설되는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울리는 꽹과리 같은 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들려

진다. 우리는 주위에서 에큐메니칼을 주장하고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많

은 사람들이 그 운동이나 기구의 운영이나 주도권 행사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면서 구후만의 에큐메니칼을 부르짖는 이중적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교파내에서 마저 갈등 분열 대립을 일삼으면

서 교회연합 사업이라든가 국제 기구에 참석하여서는 입만 벌리면 에큐

메니칼을 역설하는 것과는 다르게 김정준은 조용히 일하면서 한 걸음씩

에큐메니칼 정신이 가시화될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 마음

껏 뛰어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행동하는 신학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자신의 교파와 자신의 개인적 차원을 버린 큰 사람의

삶에서 펼쳐진 심금을 울리는 설교였다. 그의 행동, 그의 실천, 그의정

신을 움직여 나갔고, 감동을 주었으며,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곧 삶의

자체로써 우리의 심령을 울려준 설교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설교는 인

격이다"라고 외치고 외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수

있다.

김정준은 연합신학대학원장으로서 재직중에 신학의 3박자를 깊이 생각

했고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것은 신학과 신학교육과 신학활동이 참으로

하나의 연속고리 속에서 맞물려 돌아갈 때 참된 신학이 될 수 있다고확

신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러한 3자간의 관계는 그의 저술활동에서 그

대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주저들이 많이 집필되었으

며, 훌륭한 논문들과 세계교회와의 관계도 열심히 맺어졌다. 신학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 그리고 신학활동하는 일이 학원에서 가시화되고,자신

의 저술 속에서 문장화되어,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형체로 남겨놓은

것은 그의 삶이 한국 신학계에 남겨준 유산이다.

그는 1963년 12월 홍콩에서 모인 '동남아 신학교육협의회'연구 세미

나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69년에는 함부르크대학 객원교수로 강의

와 한국 교민들을 모아 설교를 하며 연구생활을 하기도 했다. 함부르크

의 기후는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는 1970년 2월에 귀국하여 입원

해야 할 정도의 병든 몸으로 돌아왔다. 그는 60년대에는 거의 매년 2-3

차례씩 외국에 나가 신학교육 관계 국제회의에 참석하기도 하고, 세계

신학교육기금(TEF)아주지역 대표로 런던에 가서 제3차 신학교육 관계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국 신학대학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

(1965.4-1966.4)으로 봉사히기로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웁살라에서 열린

WCC 제 4차 총회에 동북아시아 지구 대표 자문위원으로 (1968.3), 그리

고 1968년 7월에는 웁살라에서 열린 제4차 WCC 자문위원으로 위촉 받아

참석하면서 WCC 사람으로서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외에도 그의

경력의 하나하는 모두 값지고 매우 훌륭한 행동의 표본으로 드러나고있

는 것들이지만, 모두 열거하는 것은 그의 삶의 윤곽을 흐리게 할 뿐이

므로 이러한 대충적인 묘사에서 그를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동식교수는 김정준을 "화려한 신학자"라고 평했다. "신학도가 화려

한 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와 경력은 역시 화려하다

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행운아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운

명론적인 표횬이다. 아무래도 김정준을 부를 적절한 말이 있다면, 그것

은 '화려한 신학자'일 것이다.

 

 


김정준의 신학사상 2

 

I. 머리말

 

만수(늦이삭) 김정준 박사가 1981년 2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국 신학계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신학과 사회관

계를 역설하던 그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된 제자들의 슬픔은더

없이 깊은 것이었다. 물론 구약신학계의 애석함도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것은 한 학자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이나 동료 학자들의 상습화된, 인

륜의 정에서 표출된 인간사에 대한 표현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이러한

슬픔과 애도의 의미 속에는 만수 김정준의 신학과 사상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허탈감의 한 모습이 침잠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

은 사람들은 만수 선생의 인격과 신학과 사상의 깊이 속에 너무 빠져있

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제공한 것

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정준 박사는 스스로 자신의 신학은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그

러나 그의 겸손한 표현 속에서 그의 진실한 신학함이 번뜩이고 있음을

볼때 그의 신학은 신학없음을 포용하는 신학있음임을 우리는 그가 남긴

많은 저서들과 논문들, 설교들, 간증서를 속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아마도 그의 신학함이란 '없음(무)'까지 포괄하는 '있음(유)'의 변증법

적 종합인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신학의 행동성을 역설하면서 참된 신

에 관한 핵으로서의 신학이 존재(being)에 관한 규정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오히려 실천(doing)을 통한 신에 관한 핵을 함으로써 그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구약신학에만 제한된 성서

신학의 울타리 속에서 찾을 수 없으며, 좀 더 넓은 지평을 헤치고 확산

된 광활한 대지처럼 경계없는 신학지평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그의 신학은 사실상 강단신학이 아니고, 오히려차

원 높은 신학이상의 신학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이

론을 위한 신학함보다는 실천하는 행동신학을 삶으로 표현해 보여주었

고,학자적 자세로써 풍겨주었다.

때로 그의 신학과 사상에 관해서 신신학으로 평가되고 비판받기도 했

으며, 때로는 감상주의에 빠진 감정신학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또한 비

교적 그의 후기 신학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된 세계신학의 길을 가

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어쨌든 김정준의 삶은 그 자체로서그

의 신학과 사상의 흐름을 규정해 주었고, 깊이 인상지어준 것이다.저서

들이나 논문들은 그의 삶과 사상의 일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그가 생의 수십년을 미리 예견하고 저서들의 제목을 정한 것은 아니지

만, 우연하게도 그의 삶의 주요 동인들이 주어졌던 시점에서 출판된 책

들은 완전히 그의 삶의 상황에 부합되곤 했다.

그는 저술행위의 첫 열매로 1950년 [나의 투병기] ( 을유문화사,1950)

을 발표했다. 이때는 그가 폐병을 이기고 조선신학교 (현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봉직할 때 였으며, 그후 많은 신학저서들이 출판되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발표된 저서들의 제목은 그의 삶이 사상으로 표현된 것이곧

그 책 제목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많았다.

[고난과 경건] (연세대출판부,1966) [삶에 이르는 병] ( 대한기독교서

회,1974) ,[조용한 폭풍](한신대출판부,1975)[약하지만 강하다](대한기

독교 출판사,1977),[신에 목마른 사람들](선경도서출판사 1980),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건의 시간속에서 소망의 나라

로 향해가는 영혼의 자유함을 체험하고 있던 순간을 [시편 명상]( 대한

기독교서회, 1978)으로 내놓고 눈을 감은 것이다. 물론 시편명상은 그

이전에 틈틈이 썼던 것을 단행본으로 묶어 기독교서회에서 1978년에 출

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마지막 불꽃처럼 곧 꺼질 숙명의 시

간 앞에서 엮어져 나온 작품이지만, 그의 힘이 점점 쇠해가던 순간들에

도 시편을 읽으며, 고요함과 침묵과 명상의 시간을 보냈던 것과 관련지

어 본다면 그 의미가 매우 깊은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김정준의 삶은 그의 사상의 표출이 순간순간 엮어져 저술화된

제목처럼 우리 앞에 제공되곤 했다.

그를 "화려한 신학자"라고 부르는 유동식 교수의 표현은 김정준의 경

력과 활동을 통한 신학자로서의 위치를, 그리고 신학교육자요, 세계교

회 활동가로서 그의 인간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 김정준 자신

은 매우 고통으로 일관된 삶과, 고난받는 종의 자세로써 신학하며,사역

했던 종이었으며, 또한 정의의 예언자로서 신학교육을 감당하며, 참과

옳음을 늘 소리 높여 외치며, 스승으로서 그 본을 보여준 인물이기 때

문에 현실의 고통과 슬픔과 삶의 애통과 한을 항상 느끼면서 그것들의

실체를 묘사해 주곤했던 '한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화려한 신학자로서의 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 깊은 곳에 수용된 원액은 한이라고 하는 인간사의 실

존이었다. 이것이 그의 신학의 참된 모습이며, 진수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신에 목마른 사람들" 의 실존을 충족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그가

신학을 존재에의 추구만이 아니고, 이러한 실존 앞에서 삶의 역동성을

통한 총족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적 실

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은 인간 실존의 한 사실을 말해준다.

억울하고 비참한 고통의 현실을 가진 인간 실존은

반드시 한을 품게 되는것이다. 한을 가지게 되는 인간과 그의

고통, 그의 현존을 신학의 과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인간 김정준의 신학과 사상에서 우리는 외적 화려함과 내적 한의 신학

을 발견하면서 그의 신학함의 존재양태와 행동양태의 일치에 대한 지향

의지를 만수신학으로 정형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만수신학, 아니 그

의 사상 자체는 외화내한의 신학으로 정초되어진 신학이다. 그는 신앙

에 있어서는 감상주의에 가까운 감정신학의 입장에 서 있으며, 신학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깊이 수용하면서 동시에 한을 자신의 신학의

주제로 하여 신학하고 있다. 그리고 사상에 있어서는 행동주의에 가까

운 실천의지, 즉 도덕적 행함에 강조점을 두고있는 신학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느낌의 신학, 한의 신학, 행함의 신학을 그의작

품들을 분석하면서 살펴 볼 것이다. 동시에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와더

불어 그의 한국신하계에 끼친 공헌도 다루어 볼 것이다.

 

II. 김정준의 신학사상

 

1. " 오늘을 사는 신학" (1976)

김정준은 그의 신학의 중심주제 (Grundmotiv)를 '삶'이라는 본질 속에

서 추출해내려 했다. 그에게서 신학은 사실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찾아내는 작업이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삶을 규

정해 놓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금 이곳의 정황에서 올바로 밝혀내는 행위

였다. 그처럼 일생의 중심주제가 삶에서부터 삶의 마지막 숨길까지 연결

된 신학자도 드물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은 한마디로 '삶의 신학(Lebn-

stheologie)'임을 의미한다.

"오늘을 사는 신학" 이란 논문을 바로 그의 신학함을 현재적 상황에 던

져주는 삶의 철학(Lebensphilosophie)이며, 그렇기 때문에 삶의 역동성

을 본질 규정하는 철학작업의 한 설계도였다. 이것은 기성 신학과 교회

신앙에 대한 매우 과감한 도전이었고, 그가 주창하려는 만수신학의 방법

론을 암시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는 믿음의 방법보다는 믿음을 통한삶

의 방법이 이 시대 이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요청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신학도 항상 삶에 귀결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신학의 본래성을 제시하고 있다.

신학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믿느냐'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보수주의 신학이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한국교회 신학은 '어떻게 믿느냐'함에 집중되어 '신조'의 문제 '교

회' 의 문제가 우리나라 교회사 전면에 나타나게 되어 왔다...

'어떻게 믿느냐'하는 문제가 기독자의 삶의 전부인 양 생각함은 비성서

적이다.

이러한 선언은 성서자체가 생명의 존엄성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한 인간성의 근본문제에 답해 주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표출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 절망과 동시에 새로운 삶에의 은혜를 발견한 신학자 김정준

에게서 이러한 사상은 그 자신의 체험이며 고백이기도하다. 그러므로 그

에게서 성서는 성물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한

다는 숙명론적 기술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살이며, 특히 살아가

야 하는 삶 자체에 대한 해석이다.그러므로 그는 신학은 어떻게 믿을 것

이냐 라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간이 어떻

게 사는 것이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점을 항

상 그의 신학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풍기고 있다. 이러한 의미와 이런 사

상을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성서는 '신조'나 '교리'의 집합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 어떻

게 살았느냐'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기록을 최초의 원시시대

로부터 초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또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책

이다.물론 여기에는 누구를 '어떻게'믿느냐 하는 신앙의 대상과 방법의

문제가 기본적인 것이 되어있다. 그러나 그 신앙은 결코 신앙 그 자체를

위한 주장이 아니고, 다만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람답

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크리서천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책

으로서 성서는 그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김정준은 신학이 믿음과 행함의 일치에서 그 분질의 진가가발

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른바 '상아탑신학'을 비판했다.

다시말해서 김정준의 신학은 상아탑 위에 군림하는 이론의 신학이기를거

부하며, 이론과 실천의 공동광장 같은 신학을 역설하였다. "오늘을 사는

신학"이란 이처럼 삶의 정황에서 정초된 신학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장

신학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신

학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신학의 이론적 학문적인 발전에 대하여 우리는 최대의 민감성을 가지고

관심을 해야 하겠지만 그 이론과 학문의 상아탑에 올라 앉아, 기독교신

앙을 가지고 날마다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를 등

한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신학교와 교회목회가 분리되거나, 신앙과 윤리

가 서로 배치되거나, 예배와 생활이 서로 괴리되었을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신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신앙과 생활을 동일한 차원에서 역설하면서 참된 신학을 말하는 김정준

은 오늘을 사는 신학이란 신앙이 신앙 자체로서 그 의미를 가지는데 만

족하지 말고, 신앙을 선교하는데 있음도 강조하고 있다. 즉, 오늘을 사

는 신학은 상아탑신학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선교에 게으른신

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는 신학의 참된 본질은 신앙을

통한 행함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믿음은 행함이며, 동시에 그 행함은

개인의 신앙힘이요, 좀더 확대해석하면 선교적 사명에 연결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느 시대 어떤 장소, 그리고 어느

민족사회속에 세워지든지 간에 예수님 부활 이후 세워진 예루살렘 모교

회와 그 이후 발전된 초대교회가 물려주고 있는 신약성서의 신앙을 정

확히 이해하고 이를 고수해야 하며 동시에 이 신앙을 선교할 책임을 가

졌다.

이 점부터 김정준은 오늘을 사는 신학의 교회적 사명을 주장하고 있다.

신학은 성서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관한 내용을

선교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있다. 이처럼 교회의 사명에는 그리스도와그

의 구속 역사가 오늘을 사는 신학에서 선교를 통해 증거되고 전파되어

야 하는데 최종적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교회는 다만 '그이'와 '그의 하신 일', 이 두초점을 가진 타원형의 신

학을 가져야 한다. '그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교회는 흐

리게 하지 말아야 하고, 동시에 그가 인류를 위해서 하신 일에 대한 초

점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곧 신앙과 생활, 고백과 행위의 일

치를 말한다.

김정준의 신학은 상황을 성서적으로 해석하려는데 그 근본목적이 있기

때문에 "성서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신학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의 어느 한 측면, 즉 보수주의 신학이거나 진보주의

신학이거나 간에 일반적 진리로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교리와 신조

만 내세우는 보수주의 신자들이나, 사회참여와 역사참여를 내세우는 진

보적인 신자들은 다함께 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오늘을 사는 신학'으로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

는 모든 신학은 그 사상의 색깔과 상관없이 성서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서 자유주의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

과 꼭같이 절대주의의 방자함에 빠져있기 때문에 참된 신학이 될 수 없

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사회적인 행동만을 앞장 세우고 '그 범을 잡으려면 범

의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대로 세속을 성화시키기 위하여 세

속질서에 속한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신학자, 목회자, 신앙인

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방임주의 또는 개방주의가 '누

구를 또 무엇을 믿느냐'하는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를 흐리게 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들도 교리나 신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절

대화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만수신학의 요점은 행동하는 신앙주의에 초점을 맞

추고 있으며, 믿음과 행함의 종합을 실천목표로하는 삶의 신학이다.

이것을 그는 "오늘을 사는 신학"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신학구조 속에

서 개방주의와 보수주의를 지양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신학이존

재나 이론에만 머물러서는 상하탑의 신학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는 현장의 신학을 역설하면서 삶의 정항(Sitz im Leben)을 강조했다.


2. "한국교회와 성서해석 문제" (1967)

신학의 중심논쟁은 성서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따라서 점화되곤한

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선교역사가 짧고, 또한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섞

여 있으며, 종교 다윈주의가 일상생활에서 삶의 한 형식으로서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성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성서해석을 어떻

게 해야하느냐의 문제가 신학논쟁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김작사는 과감하게 축자영감설을 부정.비판한다. 그의 성서관은 성서

비펑학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성서세계에 관한 관조이다. 성서는해

석되어지는한 신학의 과제가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축자영감설을 "케케묵은 신학사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한국교회의 신

학적인 발전"을 축자영감설의 포기에서 시작해야한다고 단정하기도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성서비평학을 무시하는 성서연구는학

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조직적인 독경이 아니면, 분해적인 장절 구분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보수신학의 성서관을 혹평하기도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의견을 아래와 같이 표명했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성서를 많이 읽는 교회라는 칭찬을 들어왔으나 성

서를 올바르게 해석해 온 교회는 아니다. 성서 자체가 읽는 사람에게전

달하려는 그 뜻을 찾아보려는 태도보다 축자적 영감설을 고수하는 보수

신앙가들이 읽고 해석해 주는 것만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줄만 알

아왔다. 성서를 비평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범하는 일이나 경고해 왔

다. 성서를 비평적으로 (이것은 반드시 파괴적, 부정적이 아니라) 읽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사람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항상 핍박해 왔다.

심지어 그들을 이단이라 낙인 찍었다.

이오 같은 발언은 김정준이 격렬한 성서비평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이

다. 축자영감설에 대한 그의 혐오는 거의 선전포고라 할 수 있을 정도

로 도전적이며, 강렬하다.

그는 논문 "한국교회와 성서해석 문제"에서 다음의 네가지 문제들을보

수주의 신앙에 대한 비판과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1) 창세기 저자 문제 및 여권 문제

한국교회사에서 성서비평학에 대한 신학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34

년이다. 당시 남대문교회에 시무하던 김영주목사는 모세가 창세기 저자

라는 설을 부정하였다. 그는 일본 관서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으며, 거

기에서 수학하면서 성서비평학을 배웠던 사람이다. 또 한 사건은 당시함

북 성진 중앙교회에 시무하던 김춘배 목사가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

씀"이란 글에서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를 가르치지 말라"한 것은 잘못

된 것임을 주장한 사건이다.

1934년 예수교 장로회 제23회 총회에서는 이 문제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

었다. 그리고 김 영주목사에 대하여는 목사자격을 박탈하라는 판결이 떨

어졌고,김춘배 목사에게는 권징조례 제6장 42,43호에 따라서 처리하도록

판결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식취소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단 이 사건

은 끝나버렸다.

김정준은 이 두 사건을 심의했던 연구위원들이 "성서의 본문비평, 역사

비평, 문학비평의 문제들을 전혀 도외시했기 때문에" 성서해석을 아전인

수격으로 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1) '율법(Torah)'이란 말의 언어학적 해석과 신학적 역사적 해석을 완

전히 무시하고 있다.

(2) 용서비평학자를 성서파괴자라고 주장은 무지를 범했다.

(3) 성서비평학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적, 문화적, 언어학적,문

화사적으로 정확하게 인도하는 학문이다.

(4) 5경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해야 오히려 그 타당성을 인정받게된

다. 신명기 33장과 34장에는 모세 자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는

데 이것은 모세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된 사실을 입증하는것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무오하다고 하는 것은 성서가 정확무오 하다는

것이 아니고,"신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 구원의 길을 가르침에있

어서 성서는 절대적인 표준이 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김박사는 성서비평학을 더욱 철저히 도입

하여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게서 성서비평

학은 신앙과 신학의 정도를 제시해주는 길이요 태도이다. 그래서 그는다

음과 같이 말한다.

비평학은 오히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그 말씀을 우리 인간 지성과 이

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진실하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시대 사조에 영합시키기 위하여 성서메시지를 왜곡시킴은 용납할 수 없

으나, 시대와 사회가 변천되어 감을 감각하면서, 그 시대 그 사회 실정

에 맞도록 하나니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서해석자의 거룩한

임무이다.

김정준의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성서비평학에 대한

수용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성서비평학이 성서해석학의 최상의

태도요, 또한 가장 올바른 방법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면서 그 정당성

을 강조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해석이 그러하듯이 성서해석도정

형화 될 수 없으며, 성서의 내용이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그

때 그때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상황적

해석이 성서신학자의 임무라고 하는 것도 그는 역설하고 있다.

2) 단권 성경주석 문제

1935년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4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을 때, 황해노회장으로부터 감리교의 유형기 목사가 편집하고 장로

교의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목사 등이 집필자로 참석하여 발

행한 [어빙돈 단권 성서주석]이 자유주의신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며총

회의 태도 결정을 요청한 일이 일어났다.

총회는 장로교 소속 목사들에 대한 책임추궁과 더불어 뒷날의 경계를 삼

을 것과, 일반 교역자들에게 이 주석책을 구입하지 말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채필근 목사가 집필의 과오를 사과했을 뿐, 다른 세명의 목사들

은 그들의 사상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고 다만 교계에 물의를 일으킨점

만을 유감으로 표명했다. 이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어 버렸지만 이 사건

이 한국교회를 분열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정준은 바로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는 한국교회가 교권으로써 신학의 자유를 억압한 표본이며,

"정통신학이라 고집하는 사람은 억압자가 되었고 자유적인 신학사상과성

서해석을 하는 사람은 그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

장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논쟁과 분열은 정통주의신학과 자유주의신

학의 서로 다른 신학 입장에서 야기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

화된 사실을 김박사는 보수주의의 독선과 무지에서 야기된 현실이라고생

각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 따르면 교회분열은 자유신학에 의해서 도전

받은 보수신학에 그 책임이 있다고 반론하고 있다. 그에게서 시낙은 철

저히 자유신학에서 탐구되고 해석되고 수용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결

코 독백이나 근거없는 맹신에 의한 허구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그의 신학에는 다분히 실증주의적인 면이 있다.좀더 구

체적으로 표현하면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학이라기 보다

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신학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역사서로서,지혜문서로서, 고난의 기록으로서, 계약의 사건기록

으로서 그리고 은유적인 내용으로된 작품으로서만 받아들이려 한다. 그

렇기 때문에 성서의 본질이 하나님의 실체 이상일 수는 없으며, 이 점에

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무오, 다시 말해서 정확무오는 멀지만, 성서의 기

록된 문체 자체의 절대무오설은 부정하고 있다. 그는 과감히 성서속에는

신화, 고담, 미신, 허설, 각종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 내용의 절대성 보다는 그 의미의 절

대성에 더 깊은 진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글모음일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해는 그 글들의 문체와 양식, 그리고 저자와 저작년대를 밝

히는 과업을 요청한다. 이것이 양식사비평이며, 역사비평이고,성서의 상

황적 해석을 수용해야한다는 주장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길이다. "19세

기 이후 발달된 성서비평학의 결과로 성서는 더욱 권위의 빛을 오늘 우

주시대에도 발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명제이며, 신념이다.

3) 성서비평학과 한국교회 분열

한국교회는 1953년에 "예장"과 "기장"으로 갈라졌다. 그 분열의 원

인을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장로회측에서는 정통주의신학

의 독선때문에이라고 책임전가하고 있으나, 예수교 장로회 측에서는 하

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신화집이나 전승된 설화집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신신학의 자유주의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분열의 분위기

는 이미 192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함경도 지방과 간도지방에서 선교하던 캐나다장로교회는 이미 성서비평

학을 용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교 보습과

생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 목사의 성서비평학을 도

입한 성서해석에서 표명되었다. 서목사는 성경에는 문학적, 역사적,지리

적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

온 김관석, 조희념 목사는 서목사와 함께 새로운 신학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곧 김재준 박사도 성서 비평학을 성서이해에 도입해야 성서를 올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사건이 또 한 차례 신학

쟁점이 되었다. 긴장과 갈등의 시간을 흘러보내다가 1947년 신학생 51명

의 연서가 총회에 접수되었다. 그 내용은 자유주의 신학사상과 성서비평

학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를 계기로 장로교는 분열했는데 김박사는 그 책임이 성서비평

학을 신학교육에 도입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

서비평학에 무지했던"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4) 요나서 해석의 문제

196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 김기수 박사의 요나서 해석

문제로 또다시 신학문제가 터졌다. 김기수 박사는 요나서에 나타난 요나

의 기적이 역사적 기록이 아니고 비유라고 역설했는데 이 사건을 (1) 즉

시 파면조처해야 한다. (2) 총회 앞에서 사과시키고 1년 정직하자.

(3) 이사회에 해명했다고는 보고서만 받고 넘어가자는 측으로 3개안이거

론 될 때, 김박사는 다른 직장을 얻어 선교사를 그만두고 출국하여 일이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김정준은 이문제를 비롯하여 위에서 열거했던 문제들이 결국 예장의 보

수주의가 "성서 비평학을 극히 경계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제시하려 했

다.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신앙의 보루가 침해당하지 않기 위하여 최강

의 방어진을 치고 있다"고 그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볼

대 김정준의 신학은 경건과 고난 속에서, 그리고 그가 애송하는" 내 영

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시 134:6) 라는 애절한 앙모의정

에서 풍겨주는 근본주의적 신앙태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적이며, 그의 신앙은 보수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를 정확히 이해

하기는 어렵다. 그는 학문으로써 신학을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행함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중심의 신학사상을 그의 삶에 부각시켜 놓

았다. 즉, 신학은 머리로, 신앙은 가슴으로 하는 철저히 지와 정의 합일

체를 그는 스스로 구조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완성된 작품과 같은 것이

되었다.

그에게는 미완성이 없다. 그에게는 좌절도 없다. 그는 그의 신념을 그

대로 행동 속에서 현실화했기 때문에 미완성의 실체란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이 시편의 명상에서 새로운 음률을 타고 표현되었으며,설교 속

에서 행동하는 신앙의 모습으로 구현되어 나타났다. 그는 경계선상에

서 신학과 사상, 신앙과 생활을 영위한 것이 아니고, 한계가 없는 합

일의 경지 위에서 삶의 신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경계를 초

월한 신학자이다.

그는 철저히 자유주의 신학자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신학의 자

유도 만끽한 것이다. 그는 구약신학자로서 구약성서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그 제한성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신학하였다. 그는 구약시대의이

스라엘 민중의 비탄의 신음을 오늘의 한국상황에서 해석해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민중과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중의 신학을 해방의 맥락과 고난의 의미에서 한국신학계에 제공한

것은 민중신학자들에게는 매우 값진 선물임을 틀림없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한의 신학자로서 경건과 고난, 명상과 한의 하나된 실체로

서 신학 자체를 투시해 보려했다.

아무튼 신학체계는 매우 다양하며, 또한 매우 복잡하다. 그는 사상

적으로 제1기를 50년대, 제2기를 60년대, 제3기를 70년대로 3분해서

탈바꿈한 것처럼 보인다. 제1기는 주로 구약성서신학에 관심의 초점

이 모아졌으며 제2기는 에큐메니칼운동과 신학교육에, 제3기는 한국

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발전 단계의 구획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에게서 각 시기는 다

음으로 넘어가는 시기와 사상적 차이는 별로 두드러지게 특색지어지

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는 그의 신학과 사상의 발

전과정이 그의 생애의 제2기 내에서 3분된 것이므로 사실상 30여년간

의 그의 신학함은 사상적으로 거의 변함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도 있

다.

 

3. "구약에 나타난 해방의 신학" (1976)

구약학자인 김정준박사의 최대의 관심으니 인간의 삶자체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있다. 그는 항상 인간적인 실존의 모습에서 삶의 양면성

을 찾아내려하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고 있는 삶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

을 함께 묶고 있는 이중구조로된 실체이다. 다시 말해서 김정준의 신학

은 항상 삶의 이중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것은 해방의 본질과 동시에

종속의 본질도 함께 수용하고 있는 실존적 운명인 것이다.

그는 인간실존의 이해를 구약성서의 신학적 동인들로부터 찾아내어 해

석해주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해석행위자체를 서서신학의 학문적 기능자

체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서 성서신학은 곧 성서해석의 학문이므로해

석에 따라서 성서이해는 차이를 드려낼 수 있기도 하다.

"구약에 나타난 해방의 신학"은 김정준의 삶의 이중구조적 이해를 말

한 작품이란 점에서 그의 신학사상의 단면을 노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구약에 나타나는 해방신학의 전거를 찾기 위하여 이사야서

를 추적하였다. "구약성서야말로 '해방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책임

을 밝히고자 한다. '해방의 신학'을 주장한 제임스 콘의 텍스트가 누가

복음 4장 18,19절인데, 이 두 구절은 이사야 61장 11-2절을 70인의 번

역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구약 인용 정신을 신학

적으로 따지기보다는 '해방'의 사상이 구약에서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

고자 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기원에 대한 그의 주장은 출애굽사건자

체에서의 의미사적 해석보다 오히려 이사야서에서의 정치적 자유를 뼈

대로 역설된 것이다. 그는 특히 이사야서의 저술양식에 따라 해방의 신

학을 취급하고 있는 이사야는 제3의 이사야라고 제한적으로 규정하고나

서,그가 말하는 제3의 이사야의 신학을 해방의 맥락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제3 이사야는 제2 이사의 제자로서, 스승은 바벨론 포로들

과 함께 생활하며 구원과 소망의 사상을 고취시켜 주면서 고통의 시절

을 극복할 수 있도록 했던 정신적 지도자이다.

이사야서의 신학은 유대포로들이 바벨론 땅에서 해방되어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에 귀환, 정착한 후 해방자에 대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해방된

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이사야 신학의 핵심으로 보고 있

다. "그러므로 제3의 이사야의 해방신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이

스라엘이 누린 정치적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하고 일끁다." 이러한 맥락

에서 그는 제3 이사야의 메시지는 바벨론의 기반에서 벗어난 해방의 감

격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본다고 말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해방신학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 김정준의 해방에 관한 견

해는 이처럼 매우 소박한 면을 띠고 있다. 그에게서 해방은 정치적 해

방, 즉 자유함에 차원에서 이해되었고, 그렇게 때문에 한국의 8.15해방

을 이사야의 신학맥락에서 더듬어 보려 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주장에

확신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해방의 신학'이란 말을 그렇게 부정적 또는 터부시할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가 8.15 의 해방사건을 기독교적으로 생각할때 '해방의

신학'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정치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이 해방이 우리 민족 자체의

노력으로 일제와 투쟁하여 얻은 결과라고 하기 전에 우리 민족, 특히일

제의 학정 아래 수난받고 있었던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주어진 해방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신앙적인 사건으로 세

계에서 경험하는 어떤 사건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일이 신학적

인 작업이라 한다면 사실 우리 한국 크리스챤처럼 '해방의 신학'을 깊

이 이해할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김정준은 해방신학의 근원적 동인을 하나님의 주권에서 해석하려고 한

다. 그러므로 그가 구상하고 있는 해방의 신학사상은 신중심주의 신학

에 기초한 사상이다. 그는 이런 해방의 소식을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과

일제하의 한국인들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고 있다.

제3의 이사야의 해방의 신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이스라엘이 누

린 정치적 자유를 그 내용을 하고 있다. 어떻게 포로된 그 백성들에게

그 감격의 해방이 가능했던가? 그것은 우리나라가 어떻게 일제의 손에

서 해방받았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

신들의 정치적 노력, 경제적 발전 또는 그들의 군사적인 단결과 우위성

으로 바벨론 제국을 패망시켰기 때문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생각지 못

한 사이에 만군의 하나님 야웨가 파사왕 고레스 (B.C 550-530)로 하여

금 바벨론을 패망시키고 새로운 제국 파사를 세운 직후 바벨론 제국이

그 침략국에서 잡아온 모든 포로들을 자기들의 조국으로 돌려 보내주었

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고레스의 은총을 입어 B.C 538년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위의 두가지 인용에서 우리는 김정준의 해방신학 이해는 구약성서의맥

락에 의존하여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혁명적 힘에 의한 물리적 해방

아니, 혹은 계급투쟁적 상황에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제고되는

프롤레타리아식의 해방이론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의 섭리와 그로 인하여 만끽할 수 있는 자유를 해방의 핵심적 본질

로 이해.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김정준의 해방신학 사상에

는 인종적 차별과 압박으로부터 해방이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함몰

되고 있는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려는, 즉 기계적 사회구조의 압력으

로부터의 해방에 큰 의미를 두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구

속과 섭기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헌신과 신앙고백의 새로운 양태를 설명

하는 과정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의 본질을 좀

더 승화된 차원에서 규정하려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해방의 개념은 양면

성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해방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따른 행위

와 직결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이 현실성을 뛰어넘는다는 점

에서 이상적 실체 속에 포용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방은 그 행위 자체로서 그 의미를 충족한 것이 아니고, 해방된 상태

의 모습을 구체화해서 포현하는 것에서 더욱 해방의 깊은 본질을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해방의 개념과 상황을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제 3의 이사야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해방신학'만 말하는 것이아

니라, 만민의 '해방신학'을 선포하고 있다. 고통과 비극에서 놓임을 받

고 가난과 불의에서 해방받고 억압과 압박에서 해방받아 '영광'과 ' 즐

거움'과 '평화'의 새 질서가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사 65:10-14)

해방신학의 구약성서적 맥락을 추적하려는 김박사는 해방신학을 전승

사적으로 심도있게 살펴보려고 하였다.그는 해방이란 단어 자체가 제2

이사야와 제3의 이사야 사이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점을 매우 의미있게

관찰하면서,해방이란 "자유"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 단어의 사용은 " 계

약의 법"(출 2):22-23:31)에 따라 노예를 자유케한 노예해방 선포와 연

결되어 이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레위기 17장 - 26

장의 "성결법전"에서 희년(The Tear of Jubilee)에 노예와 죄수의 해방,

토지경작을 쉬게함으로써 농토에 대하여도 해방과 자유를 주었던 사실

과 소유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하는 인간과 자연의 법칙을 과감히 해

방의 전승사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해방의 근본 목적

은 정치적 자유나 억압 자체로부터의 벗어남 같은 물리적 해방만을 의

미하기 보다는 해방은 만인평등과 정의를 핵심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본

질이라는데 그 의미를 두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주장을 다음

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이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시고 인간은하

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자로서 아무도 같은 인간을 어떤 힘과 소

유를 가지고도 속박할 수 없다는 평등의 원칙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

각케 하기 위함이다.

그의 해석과 주장에 따르면 구약에 나타난 해방의 신학은 해방-평등의

궤도에서 그 현실성을 나타내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해방의 궁

극적 목적은 만인평등임을 역설하면서 좀더 발전하여 사랑으로 그 결실

을 맺게하려 했다. 즉, 그에 따르면 해방신학의 본질을 사랑에서 그 본

래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신학과 같은 의미에서 이해 될 수있

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해방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데 김정준의 해방은 자유와 평등의 차원으로 승화된 후에 결국 사

라에 종착된 상태여야 참된 가치를 갖게 된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은 음미해야 할 것이다.

제3 이사야가 말하는 '해방신학'은 본래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권리를 보장하는 하나

님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해방신학의 중심사상에는 해방의 주체자가 인간 자신임을 강조하는 면

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해방신학자들은 해방의 대상과 해방의 주

체가 모두 인간 자신이라는 점을 역설하면서 해방을 정치적 본질로만해

석하려 한다. 이들은 19세기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인간

의 소외현상을 분석하여 인간소외의 극복을 역설했던 마르크스, 엥겔스

의 정치경제학적 맥락에서 인간해방의 본질이해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김정준은 해방은 결국 하나님의 관심이면서, 그의 결정에 따라서 수행

되고 현실화되기 때문에 해방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로 받아들이려 하

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구속신학적 해방신학을 역설하고 있다.

억합, 수탈, 불의 구속이 완전히 제거된 인간의 사회적 삶의 상태에서

인간사이의 평등과 사랑이 생겨난다고 하는 단순 논리로써 김정준은 하

나님의 주권, 공의, 사랑을 강조하려했다. 그의 해방개념은 누구냐하는

문제의 해답에서 그의 해방개념은 해석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발해서그

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스라엘 전 역사를 바라볼때 해방의 신학은

구약 신앙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는 점으로 그의 해방신학 이해를 마

무리지었다.

그가 간추린 구약에 나타난 해방의 신학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구약에 나타난 해방신학은 첫 출애굽사건에 의해서 최초의 신앙고

백을 그리고 제2의 출애굽사건에 의해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앙

고백을 형성시켜 주었으며,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현으로

해방의 의미폭을 확장시켰다.

(2) 출애굽사건은 구속사적 의미에서의 해방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

적 인종적 차원에서의 해방도 의미하고 있다. 해방신학의 전거가 되는

첫 출애굽사건은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의 시작이며 그 구원의 성취를보

여준 사건이며,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건이다.

(3)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서 해방된, 선민 이스라엘은 그 해방의

기쁨만을 누릴 것이 아니고,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하

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의무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참

된 해방의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지, 인

간의 계급성 타파에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해방

신학'은 부당한 정치적 경제적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고 다

른 아무 신에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그 뜻을

인간 역사, 그리고 민족사 속에서 증거하며, 그 하나님을 나타내어야할

선교적인 의미를 우서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4) 이스라엘 역사에서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로써만 인간

의 역사는 진행한다는 역사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해방신학'은 결코 인간적인 지혜, 모략, 용기 또는 정치의 조직이나구

조의 완벽, 외교나 군대의 힘으로 또는 국민의 애국적인 정열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밝힌다."

(5) 해방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행사에 거스르거나 그의 정의

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그의 평화의 목적을 유린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

간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확인시켜준다. 즉, "해방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에 항거하는 인간의 참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6) 김정준은 구약에 나타난 해방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해방의 신학'은 정의의 하나님은 불의를 벌하심을 인간들에게 보여주

어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찾아 살게

함에 그 목적이 있다."


 

4. "한국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 (1977)

김정준선생의 신학적 관심은 구약신약의 근본구도 속에서 사회 및

역사문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 발표

된 그의 신학논문들 가운데는 한국적 상황광의 관계속에서 접근을 시도

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는 해방에 관한 관심을 민중신학으로 표출하면

서 내용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이 두 신학사상의 중심주제를 항상 구속

해방, 자유,빈자,수난, 한, 민중 등의 개념으로 서술하여 그의 신학함

의 정수를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는 확신

을 피력하면서 신중심주의신학으로 그의 신학을 규명하였다. 이런 관심

과 신학적 작업은 그에게 신학과 역사의 문제까지 사변의 폭을 확대시

켜 주었다. 구약학자인 그가 민족사에서 구속사적 해석을 시도한다는점

에서, 특히 선민의식의 바탕위에서 서술된 이스라엘사와 대조적으로 이

방민족사에 속하는 한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추적하려는노

력은 과히 그의 신학영역을 넘어선 모험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매우 강한 논리적 뒷받침을 구약신학으로부터 도입하여 한

국사를 하나님의 주권과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그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사상과 해석 틀에서 도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함석헌의 이해를 그는 다섯가지로 요약하였다. (1) 성서는

역사의 근본을 하나님께 구한다. (2)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3)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 (4)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주

권 아래있다. (5) 인간은 도덕적인 책임존재이다.

이러한 류의 구속사적 민족사해석은 많이 있다. 모든 역사철학은 역사

의 숙명이나 필연성으로써 역사의 추진자를 설명하며, 이러한 역사는이

러한 초월적 힘의 역동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역사철

학의 일반적 논리이다. 다만 이러한 자체에 구속사적 능력이 부여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만 숙명적 운동 자체로서 이해되느냐 차이 뿐

이다.

김정준은 한국민족사를 구속사적 궤도위에서 전개하려 한다. 그는 한

국에 기독교가 선교된 때부터 하나님의 구속사가 연결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전래 이전에도 이미 한국사는 그것이 민족수난사든지 혹은 정치

사든지 성서적 역사서술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

순히 세속사의 문제가 아니고, 구원의 문제와 매우 예민하게 관계되는

구속사의 문제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그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

혀주고 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의 역사를 성서의 원리에서 보고 비

판하는 일을 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기독교가 전래되자 아니했던 시대

의 역사도 성서의 원리에서 새로 기술해야 함을 느낀다.

여기에 부딛치는 첫 문제는 기독교 전래이전 역사는 기독교를 몰랐고

따라서 성서의 교훈과 사상이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신학적으

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전파 이전 역사도 성서가 가르치는 역사의 원리에

서 역사를 보고 기록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만민의 하나

님을 가르치는 성서는 인간사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에 관한 그의 입장은 그의 신학의 보편주의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한 요청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신학계는 어느시점에서부터

구속사를 말해야하느냐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런 근원적 문제

를 풀기 위한 시도가 많았으나 아직도 명료한 노선정립을 못하고 주춤

한 상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한민족통사에

적용한다면 한민족사는 구속사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며, 이럴 경우 그

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속의 가능성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

해야하며, 만일 기독교 전래 이후부터의 한국사를 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할 경우 만민의 하나님의 주권은 제한적이며, 그의 말씀선포 이전

시대와 지역을 구속영역에서 배제하는 제한된 신적 권한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민족사 전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하려하면 구태여 기독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그

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무의미하게 된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주권

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완전히 초월한 절대주권임이 증명된다. 그러

나 구원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기독교 전

래이전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이 간섭하지 못했던 세속사이므로 하나님

의 권능의 제한과 하나님의 구속사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또다른 초

월적 능력자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문

제가 한국에서 신학자들 사이에 약간 논란이 되다가 지금은 답보상태

에 머물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문제가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정준의 역사이해는 기독교 전파이전의 민족사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과 따라서 한국민족사 자체도 구속사적 시각에서읽

어야 한다는저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한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래 시

점이나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별로 큰 의미를 갖

지 못한다.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이전에도 하나님에 의한 구속은 있어

왔던 것이며, 다만 우리들은 그 섭리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역사 해석의 논리를 직접 읽어 보도록 하자.

한국역사를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 선조들이 만든 과

거 역사와 오늘의 현재 역사가 성서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역사 원리

로 된 역사이냐를 살피는 것이다. 즉 공평의 역사냐 정의 역사냐 공의

의 역사냐 정직의 역사냐 성실의 역사냐를 각 역사적 사건에서 묻는것

이고, 그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들의 역사이념에서 묻는 것이다.

'공평의 역사'라 함은 모든 기회와 소유에 있어서 편파적이거나 차별

적이 아니고 균등의 원칙이 시행된 역사가 되었느냐함을 묻는 것이다.

'정의의 역사'라 함은 선과 악을 혼동하지 않으며 의와 불의가 분명히

가려지는 역사가 되었느냐 함이다. '공의의 역사'란 어느 일부의 사람

들, 즉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일부 특수층,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권

력을 쥔 사람들이나 부유층들에게만 옳고 정당한 것이 아니라, 계급과

소유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하 모든 백성들에게 공정하고 의로운 역사

가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정직의 역사'는 허위나 사기나 속임수의

역사가 아니라, 즉 필요에 따라서 거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정한

역사가 아니라, 하늘과 사람들 앞에서 정정당당한 청렴하고 양심적인

역사인가를 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실의 역사'란 누가 보든 아니

보든, 표창이나 보수를 받든 아니 받든, 자기가 맡은 책임으리 묵묵히

이행하는 역사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다섯가지 원리로써 한국사

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인 이해이다.

이상에서 김정준이 주장한 한국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그 이론의논

거를 이사야 9장과 11장을 근간으로 하고 진술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

인들의 선교적 사명과 책임을 고취하는 것으로 그의 주장의 결론을 맺

었다. "우리 백성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선교해야 한다."

"우리 한국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되도록 우리 크리스챤들이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한국사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우리 신자들의

할 일이다." 즉, 기독교인들의 선교적 사명과 책임을 통해서 한국 민

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한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로서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한편으로는 기독교선교 이전의 한국민

족사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역사로 이해한 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민족이 기독교화될 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점

을 명시한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되지 않은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

의 백성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점이다. 그가 이 두 근본

적인 문제를 명료하게 규명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한국민족사에 대한 자체만으로도 그의 역사관을 드려낸 셈이다.

그의 논문 가운데 "한국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것이 있는데여

기에서도 그의 주장은 대체적으로 구속사적 입장에서 한국통사를 분석

해석한 것이다. 다시 한번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기독교 전래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성서에서 계시한 만민의 하나님

은 우리 민족사 처음부터 관계하셨고 이 역사의 주인이었다고 믿을때

우리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김정준의 신학사상, 특히 역사에 관한 이해는 실증

사관이나 페쇄적인 민족사관에 집약된 사상이 아니고 역사에 대한 신

앙고백과 신앙에 기초한 역사해석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이것은 역사 보편주의에서 해석하는 역사철학이며, 동시에 역사

의 신학화와 신앙회를 역설하는 역사신학이다.

 

III.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만수 김정준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몇편의 논문들을 중

심으로 분석해보았다. 작품선정에 어려움은 그의 신학과 사상을 어떤 시

각에서 조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어려움

이 많았따. 그러나 그의 신학과 사상을 보편적 기준에 따라 규정하려는

입장에서 본다고 하면, 그의 사상 가운데 극히 전문적인 일면적 사상을

그의 보편적 틀로 해석하여 제공할 수도 없고, 또 만일 이러한 시도로써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고 하면 극히 제한적 단편을 그의 사상전체로 오도

하는 경우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보편적이고 그의 사상의 대

계를 연결시켜주는 논문들만을 선정하여 해석해보았다. 그의 신학과 사

상에 대한 평가를 이런 맥락에서 추진될 것이다. 다음의 다섯가지 점으

로 그의 신학과 사상을 간추려 평가하도록 한다.

 

1. 삶의 신학

삶에 대한 애착은 삶에 대한 매력을 더욱 강하게 증폭시켜준다. 삶

은 생명의 힘이면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가지고 있는 문자 그대로 살

아가는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정준에게서 삶은 곧 생성과 소멸의 숙명적

원리 자체 속에 고난과 경건이 함축되어 있는 힘이며, 추진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을 넘고 일어서는 기적을

체험했으며, 동시에 그의 신앙의 깊이가 더욱 심화되는 매우 역설적이고

대조적이 면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서 신학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믿을것

이냐를 가르쳐주는 신앙론이나 신앙의 길잡이 학문이 아니다. 그는 신학

의 진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에 초점이 놓여있기 때문에 믿음의

형태나 행위 자체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삶이 더욱 문제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신학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정의들 가운데 신

학을 신앙과의 맥락에서 규정하려는 입장과 신학을 신앞의 단독자로서하

나님과 나와의 관계선상에서 규정하려는 입장은 매우 차이가 난다. 이미

많은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의 본래성 속에서 내재된 비본래성을 규명하려

했고, 실존적 인간이해를 통해서 인간의 부정적 측면 자체를 끄집어 내

어 정의하려했다. 실존, 허무, 구토, 비존재 모습을 말하기도 하면서 인

간적 삶의 부정적 면을 드러내려 했다.

김정준의 신학은 바로 이런 점에서 실존적 인간 모습에서 고통당하고있

는 고난속의 인간적 모습을 그려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고난의 더욱 승

화된 차원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학은 곧 희망과 용기를 제공하는 삶의길

잡이가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문제를 성서적 맥락에

서 추적하여 보여주려는 그의 신학은 삶의 신학으로서 단정될 뿐만아니

라, 삶의 신학적 맥락에서 신앙화가 가능한 신앙론이었다.

김정준의 삶의 신학속에는 고난이 흡수되어 용해되어 있으며,동시에 고

난 속에서도 주께 찬양의 시를 올리며 주의 영광을 노래하는 모습이 포

용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삶을 폭넓은 실체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삶

즉 생명에 대한 그의 진지한 고백이며, 철학인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의 생명이란 결코 과학적인 진단이나 판단대로 종말이 온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나는 나의 생명이 내손

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삶을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 가운데서 이해하고 믿는 그의 신앙에서 그의

삶의 신학으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삶과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

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한 본질의 양면으로 이해하면

서 신학도 사상도 신앙의 표현과 삶의 이해에 기초하는 때에만 그 의미

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삶의 신학, 생명 신학, 이것은 곧 그의 신학

의종합적인 구조이며, 틀이다. 이것은 그는 생활하는 신앙, 생활하는 신

학으로 불렀고, "오늘을 사는 신학"이라고도 불렀다. 신학의 기본공식인

신앙과 생활, 믿음과 행함의 완전한 구조에서 그의 삶의 신학은 이해된

다. 그는 삶의 신학에 고난하는 신학, 경건의 신학, 해방의 신학, 민중

의 신학, 한의 신학, 역사의 신학, 소망의 신학 등 모든 신학을 포괄하

려 했으며, 그래서 그에게서 삶의 이해는 매우 폭넓은 본질규정의 이해

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2. 과학신학

과학신학(Wissenschaftstheologie) 이란 말은 매우 생소한 용어이

다. 더욱이 김정준의 신학에 과학신학이란 말을 붙여본다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성격은 정확성과 사실에 대한 증명을

강조하는 점에 있다는 극히 일반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이 용어에 신학

적 요소를 서로 관련시켜 보았다. 김정준은 성서를 어떻게 믿을까라는

신앙론적 맹신주의에서 성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

해서 그의 입장은 성서의 사실들을 맹목적이고 전승적인 신앙의 측면에

서 그대로 수요하려하지 않고, 일단 과학적 - 고고학적 증명을 거쳐 사

실화된 자료에 기초하여 성서의 기자문제라든가 성서기록 자체의 오류

문제 등을 과학적 - 논리적 증거와 고고학적 - 역사적 증명을 통하여올

바로 받아들이되, 설화난 역사나 문학의 측면이 깃들어진 경전으로서의

의미로 받아들이겠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5경은 모세의 기록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자체는 우

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능력을 드러내주고 있기 대문에 성서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서는 항상 해석을 통해서 성서가

될 수 있으며, 사실적 가치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역사에 불과하다는 점

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성서신학은 해석의 신학이라는

생각을 피력했다.

우리는 그의 신학의 이러한 특징을 과학신학이라고 불러보았다.문제는

성서가 과학적 -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볼 때 단순한 인간의 기록이며,이

스라엘 민족의 역사라고 할 때, 성서의 정경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것

인가 하는 문제와 성서의 과학적 분석을 수용하는 신학에서 하나님의초

월적 능력이 신앙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3. 해방의 신학

김정준 신학의 특징은 해방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해석하는

점이다. 그는 해방의 신학을 정치, 사회적 맥락과 종교, 개인적 맥락에

서 구조화하고 있다. 해방의 신학은 첫 출애굽사건과 제2의 출애굽사건

을 통해서 완전한 자유와 구속을 선포하는 신학으로 정의된다. 이점에

서 김정준의 해방신학은 제임스 콘(James Cone)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자

들의 해방의 개념이해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그는 해방의 신학을 넓게

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찾으려했으며, 좁게는 바벨론 포로들의 해방 혹

은 한국민족의 일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구체적 억압 상황에

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본래성을 혁명

적 요소에서 찾아내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가 해방신학을 역설하였고, 해방신학자로 인정되면서도 그의 신학이

항상 강함과 그 강함을 포괄하고 있는 연약함이 변증법적으로 공존하는

면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그의 해방신학 이해는 성서

에 충실한 정통적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그는 자유라는 말로도 불렀고, 구속이라는 용어로도 설명하려 했다.

그의 논지는 해방의 신학은 곧 신학자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해방의

주체요, 그리스도는 해방자라는 점에서 그의 신학을 이해한다.

해방의 신학의 또한 면을 그는 민족역사, 자연의 해방, 즉 희년법에따

른 자유,휴경 등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해방의 신

학 도식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정의,평화,창조, 질서보전(JPIC)' 의

신학과 동일한 신학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역사신학

역사에 대한 이해는 각 학문마다 많은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역사 자체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역사철학의 경우 역사란 인

간적 삶의 여러 차원과 항상 밀접한 관계되기 때문에 인간관에 따라 역

사이해는 달라지며, 또한 세계해석에 따라 역사해석도 좌우된다.이러한

점에서 역사는 매우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 - 섭리 - 구속의 역사(역사)의 역사(역사)를 기

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신학자들의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김정준의 신학과 사상은 역사 자체를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신학이다. 그는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

사와 한민족의 고난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속사적 측

면에서 비교.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주건에 의한 역사의 이해를 그의 신

학사상의 기초에 설정하였다.

역사신학이란 교회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교리형성사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종종 교회사나 교리사를 '역사신학'이란 혁명으로 출판한

책들을 보게되는데 이러한 것은 역사신학이 아니다. 역사신학이란 역사

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신학적 맥락에서 풀어나가는 역사에 대한 신학

화작업이다.

이런 역사신학에 기초한 사상에서 김정준의 역사이해는 받아들여진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사는 물론이고, 한민족사까지도, 아니 인간의 모든

역사를 만민의 하나님 사상에서 해석하려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한마

디로 역사신학에 정초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민족사에 신학에 정초되

어 있다. 그에 따르면 민족사에 수용된 기독교의 의미는 별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행위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기 때문에 인류사

는 곧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주장이 그의 논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역사신학은 신중심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만 인정되는 역사

해석의 신앙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그는 역사를 보편사로 확대

했으며, 보편사에서 구속사를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의 신앙화를강

조했다. 이것이 그의 역사철학이며 역사신학이다.

 

5. 한의신학

김정준의 신학을 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의 고백에서

인용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신학을 한의 주제 속에서 정립하려 시도했

다. 한은 원한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는 추상명사이지만, 그는 한의 본

질 속에서 억울함, 비애, 절망 등과 한맺힌 실존 상황을 그려내려하였

다. 그래서 그는 "한은 한 인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격적 모

욕과 멸시, 냉대와 학대를 비롯하여 온갖 억울한 압박과 누명과 신체

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불가피하게 받을 때 생기는 감정이 즉각적으

로 배출 못하고 쌓이고 또 쌓여서 속에서 맺히고 침전하게 된" 상태라

고 말했다.

신학은 이런 한을 가진 심령들에게 한풀이를 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는 점에서 그의 한의 신학은 인간에 대한 카타르스적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한맺힌 실존으로살

아가고 있다.

김정준은 인간의 이러한 한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려

한다. 하나님의 고통이란 고통당하는 인간과 더불어 사랑과 자비와 하

나님이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그는 한의 신학을 민중신

학의 맥락과 연결해서도 주장하고 있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민

중자체에 그 역점을 두지 않고 모든 불의와 구속에서 억울하게 살아가

는 인간 실존 자체를 한이란 개념으로 승화하여 신학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한의 신학 쉽게 민중신학으로 대치되는 신학

이 아니고, 오히려 실존신학으로 이해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한의 현실속에서 응집된 실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의 미니스트리'(한을 풀어주는 일)야말로 참으로 '크

리스챤 미니스트리의 독특성'이라고 하고 싶다. 이는 인간고의 역사적현

실속에 하나님 자신이 동참하여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심으로 인간들에게

새생명, 새 희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한은 인간 실존의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에 인간 김정준의 신학과 사상의 결정체가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