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김재준의 신학사상

好學 2012. 8. 30. 09:32

 

김재준의 신학사상


장신大: 한숭홍교수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하려는 것인데 영생을 주는 것은 성경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나' 즉 그리스도라는 살아 계신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성경은 곧 가장 권위있다고 비판하여 판정한 사본이 곧 우리의 '성경'이오 이'성경'에 기록적 오류가 있다면 그저 그런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大戰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1949.11)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이렇게 성경을 성경의 설 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인 면에서 성경무오설을 수립할 때 우리는 어떤사람을 향해서나 대담하게 전도할 수 있다.

-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1950.3) -


I. 머 리 말

한국신학의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을 처음 시도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김재준이다. 김재준은 본래 성서의 신학적 이해를 문자적 제한으로부터 해방하여 폭넓은 해석을 시.도했기 때문에 때로는 자유주의신학자로 때로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신학의 또 한면은 감성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인간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했던 점도 있다. 이런 면모는 과히 김재준의 인물과 신학사상의 다양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들이며, 이때문에 김재준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게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넘기면서 짧았던 한국 기독교사의 흐름 속에서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결이 종래에는 장로교 교단.極肟 가져왔으며, 한국의 장로교회의 분열은 수많은 종파를 낳는 현상을 지켜 보았다. 보수정통주의적 신학자들은이러한 분열의 책임을 서양의 과학주의와 새로운 비성서적 성서해석을 따르는 신신학자들의 태도에서 싹이 텃다고 비판한다. 그런가하면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지켜가려는 진정 순교자적 자세로 보수정통주의 신학의 큰 흐름을 역행하는 사람들은, 분열은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보수정통주의적 성서관이 신화적인 차원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서 하나님의 본체와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대립투쟁의 양상은 이른바 박형룡파와 김재준파로 양분된, 장로교회 안의 두 세력의 극한성에서 빚어졌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교단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점을 예사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한 입장의 대변인적인 태도를 갖는다거나 또는 한 입장을 정죄하려는 중세기의 종교재판적 작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글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두 봉우리들의 정점을 그 자체로 정확히 분석하여 이해함으로써 무엇이 신학사상이 한국 기독교계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찾아 보려는데 그 목적을을 둘 것이다.


II. 김재준의 생애


1. 신학이전


장공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에서 엄격한 유교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기로부터 성장과정에 관한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기로부터 성장과정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아직 출판된 것이 없어 우리는 그 스스로 1985년 4월 6일부터 같은해 8월 31일까지 20회에 걸쳐 [크리스챤신문]에 연재한 "나의 생애와 신학" 및 방송원고들과 여러 편의 그의 글들 가운데 낼수 밖에 없다. "나의 생애와 신학"의 첫호는 "신학이전"이란 제목이 붙어져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의미있는 제목이다. 그는 그의 신학자로서의 삶의 분기점 이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가 받은 유교적, 도교적 교육과 그의 삶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래 나는 유교 가정에서 자랐고 선친께서 유학자였기 때문에 예수교에 대하여는 반감을 가졌었고 간혹 순회전도하는 매서인이 들러 밤을 새가며 전도해도 아버님은 '나는 공맹지도하는 사람이오 공호이단이면 사해야의라했오'하며 아예 들으려하지 않으셨다... 내가 일곱살쯤 됐던가

어쨌든 사랑방 구석에 앉아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나는 물론 아버님 편이어서 예수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맹세하곤 했다" 이렇게 김재준은 그의 기독교 접촉의 첫 순간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실체를 체험한 것이다. 그는 1920년 초 가을 서울 숭동교회에서 김익두목사가 인도하는 장로교 연합부흥회에 호기심을 갖고 참석했던 것이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창세기 1장 1절에 근거한 설교말씀에 감화 감동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순간 얼어붙은 냉철하고 근엄하고 고지직했던 유학적 혈액은 녹기 시작했고 그 혈관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힘차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때의 심정변화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으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체험하게 된다.' 믿으시오''이제 곧 믿으시오'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마음은 화끈 뜨거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졌다. 이건 하느님이 직접 주시는 하늘의화

평이었다." 그후 그는 동숭교회에 교인등록을 함과 동시에 "미지근하게. 믿을 수가 없어" 이미 성령의 불길로 뜨거워진 가슴을 갖고 더 많은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각 교회를 찾아가서 설교말씀을 들으며 그의 믿음의 열기를 더하려고 노력하였다. 초신자의 불같은 신앙과 기독교 진리탐구의 열성이 그를 계속 말씀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설교들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설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진부하고 구태의연한 평양신학교 축음기판인 것 같았다"라고 그때 그의 설교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설교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듣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꼈으며, 그래서 독학으로 당신의 많은 기독교 저서들과 특히 일본 사람인 '우찌무라, 가가와,우에무라, 등의 저서와 서양 기독교 명저들을 탐독하며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내곤 하였다. 김재준의 신학의 과격한 면이나 비판의식이 이미 기독교를 접하는 순간에서부터 싹텄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기독교 신학이해는 철저히 비판신학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기존 세력이나 기존 신학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기독교적 삶의 터전을 이루려는 매우 비타협적. 인물로서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일생의 모습이었고 본질이었다. 이미 신학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소년으로서, 특히 부흥회에서 믿기로 결심한 초신자요, 아직 기독교의 본질을 접하기도 전에 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성격을 비판할 정도의 지성인있던 김재준! 그는 과히 한국 기독교를 도전적 기독교 기질로 이끌어가서, 한 유형의 신학사상을 만들어낸 효시의 기질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서 철저한 비판의식은 그후 그의 신학사상의 사회화에서 구현된 실체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러한 형성체에는 또 하나. 동기가 깊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야누스적 모습을 이루고 있는 그의 원초성이기도 하다. 비판의 또 다른 대극적 기질! 이것이 아마도 자연에 대한 숭고함에 감동하는 느낌의 작용일 것이다. 이것을 장공은 "자연"이라고 불렀고 또한 같은 의미 맥락에서 - 물론 개념적 표현은 다르지만-"낭만"이라고 불렀다.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의 신학기질이 이미 낭만주의을 껴안고있는 포근한 품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형성되었고, 성장하여 독립된 인격체로서 한국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낭만주의니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자연에서 자유롭게 자란 그의 성장기 때문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김재준은 그의 기독교개종의 근본적 동기를 이런 시각에서해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개종이 그의 낭만주의적 기질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의 "무소유의 낭만"이란 글에는 이런 기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 있다.

지금부터 약 40여년전, 내가 겨우 20을 넘을락 말락한 시대였으니까, 돌이켜 생각한다면 정말 격세지감에 없지 않아요! 그때는 말하자면 낭만주의시적이러서 지금과 같은. 빡빡한 현실주의와는 다른 분위기가 젊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고 있었습니다. 내가 유교가정에서 혼자 기독교에 개종한 것도 어느 면에서는이런 낭만정신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유교의 그 빡박한 교훈과 계율을 초월한 기독교의 '자유하는 영'의 사람으로서의 낭만입니다. 전락자, 밑바닥에 침전된 인간에 대하여 사랑의 너그러움, 죽음에서 절망하지 않고 생명을 노래하며 영원을 모험하는 모습, 무덤을 헤치고 부활한다는 불퇴전의 삶의 의욕 등등이 '젊음'에 생명의 낭만을 느끼게 했다고 봅니다.

이처럼 그가 "자유","낭만","영원","부활"등을 현실주의의 궤도로부터 승화된 차원에서 받아들이려했던 것은 사실상 그를 지배했던 강한 타율적 유교문화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충동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 스스로 표현된 것처럼 철저히 유교교육에 의해서 양육된 것이다. 어린 마음이 계곡의 황혼을 즐기던 것은 지금도 유난히 맘에 떠오는 일중에 하나라 하겠오이다. 황혼이 짙어지고 만물이 호수 속에 잠기듯 어둠에 가라앉으면 여기저기서 반딧불이 반짝이고 초가울이면 귀뚜라미며. 온갓 벌게들이 울어제칩니다. 초생달이 반조각 하늘에 걸려 앉고 수없이 종종 밝힌 별들이 당장 떨어질듯 깜박일 때, 혼자 풀위에 멍석을 깔고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무언가 시라도 쓰고 싶은, 차분하면서도 들뜬 소년의 가슴에 작은 우주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싶어 집니다. 아홉살 때까지 선친 앞에서 한문을 읽다가 신학문을 배워야 된다는 권고에 따라 머리를 깍고 향동학교라는 소학교에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그게 합방 직후였습니다. 그전, 융희 3,4 년 때에는 개화운동이 우리 산골에까지 퍼져서. 지사타입의 어른들도 종종 들리고 했었지요. 그런 관계로 나도 그런 방향에서 신학문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의 나이 아직 10대에도 이르지 못한 소년이었지만, 벌서 사서는 다 떼었고 삼경이란 것도 조금 읽고 해서 유교의 전통은 제절로 피부에 배어들게 되었었습니다. 논어전편을 통강하고 공자님의 풍모를 마음에 그리면서 어른들과 인의예지에 대한 토론도 했지요. 신이나서 도덕론을 주고 받으면 20대의 늙은 학도들이 온전히 동료취급을 해주는 것이 신기스러웠습니다.

그의 성장기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순박한 소년으로서 자연에 빠져 있었고, 낭만을 즐기며 문학을 그리워했는가 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를 짓고 싶은 감성이 자연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늘의 별과 가을의 우수,

풀벌레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그의 감성을 자극하였고, 이런 정서는 장공을 더욱 감정의 인물로 형성시켜 주었다. 문학에는 흥미가 있어서 명치시대의 작가들, 특히 백근파 작가들을 좋아했다. 이사이의 시가도 탐독했다. 번역들도 많이 읽었다. 톨스토이 전집, 도스또이 빅톨위고의 [장발장(레미제라블)], 흑기사 등 닥치는대로 읽었다. 읽노라면 나는 쓰고 싶어진다. 그래서 구상도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세리프 등도 나열해보고 한다. 이런 저런 것들이 원고지를 메꾼다. 모아놓으니 수천매나 된다. 벽장높이 보다 더 높아서 벽장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신학이전"의 장공! 사상적 혼합주의의 소년기를 가졌던 김재준은 결국 종교적으로는 유교의 계율과 교훈으로부터 형성된 그의 삶을 기독교의 사랑과 영생의 존재로 전환하였고, 자연과 낭만의 감성주의는 그 강한 지적 추구욕과 더불어 비판의식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따뜻한 피와 차가운 이성이 그의 신학의 저변에서 합류하고 있는 신학의 길을 이어간 것이다.

 

2.신학에의 서장

장공은 과연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이라는 강한 의식을 한번도 저버린 적이 없는 철저한 크리스챤이었기에 그의 신학에는 항상 강한 자신감이 넘쳤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판의 소리들도 그를 꺽을 수없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독백하였다. "나는 맘먹었다 '신학'이 내

학문의 분야였구나! 싫든 궂든 나에게 신학 시키신 것은 하느님이 이미 정하신 경륜이었구나!" 이렇게 그는 확신하면서 미국에로의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프린스톤 신학교에 신학하기 위하여 떠난 것이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일본 청산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1928년 3월 같은 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터였으므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교수진이 짜여졌던 청산학원으로부터 많은 신학적 기초 지식과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극단의 보수주의 신학에 더 매력을 가졌던 것은 반작용의 원리처럼 단순한 반동이었다. 보다는 두 세계의 정복자가 되어 보려는 야심이었다. 그는 항상 강한 점과 약한점, 외연과 내연의 조화일치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합일원리를 즐겨찾는 신학자이므로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을 자기 자신의 능력안에서 융화하여 하나의 김재준 신학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에의 서장이 이처럼 전개되면서 그는 첫장을 청산학원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채웠고 두번째 장을 프린스톤에서 보수주의 신학으로 채웠다.

그 당시 프린스톤은 메친교수의 극단적 보수주의와 교장인 스티븐슨의 교회.(ecclesiastic)보수주의와의 대결이 노골화한 무렵이었다.

나는 메친교수의 강좌를 많이 택했다. 청산학원이 거의 극단적 자유주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극단적 보수주의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1년정도 신학공부를 한후에(1929년9월) 웨스턴신 학교로 옮겨 구약을 전공하였다. 1931년 5월에 '출애굽 년대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여 신학사(S.T.B) 학위를 받았으며, 그 다음해인 1932년 5월에는 '펜타툭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S.T.M)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겸 교사로 취임하여 영어, 조선어,한문,성경등을 가르쳤으며, 특히 신학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을 한 주일에 한번씩 가르치며 그의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그때 숭전재학중이던 김정준,숭중에 다니던 정대위를 비롯하여네 댓명이 장공의 개인지도를 받으며, 장차 한국신학계의 인물로 커가고 있었다.

 

3. 내가 믿는 하나님

김재준 신학을 논할때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보려는 사람들은 장공신학이 단순한 합리주의적 차원이외의 차원들을 종교적문제로 끌어들이려는 면과 성서비평학을 새로운 신학방법론으로 끌어들여 성서자체를 여러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면을 지적하면서 그의 신학입장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김재준신학에 대한 자리매김은 인위적으로 되어질 수 없으며, 더욱이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해석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의해서 규정될 수도 없다. 그는 분명히 그 자신이 자유주의 신학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공포한 것이다. 그는 해방후

한국교회의 신학논쟁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이때.의 한국교회의 신학 논쟁은 정통주의 대 자유주의가아니라 정통주의 대 신정통주의의 양태로 전개되었다. 세계 교회는 이미 두 극단에서 새로운 종합에로 상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이미 지양된 한 극단인 정통주의 신학 일색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 신학 일생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 신학의 현단계의 주류인 신정통 신학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대결하는 상대방이 그전에 있던 '자유주의신학'인 줄로 오인하고 돈키호테 식의 용기를. 부렸던 것이다. 사실 그 상대가 자유주의 신학(이른바'신비학')이었다면 멋진 승산도 가히 기약할 수 있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상대자가 이미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함께 이기고 올라선'신정통주의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적 패배는 단시일 내에 결정되고 만 것이었다.

그의 진술은 신학논쟁에 대한 두 대립적 입장을 객관적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신학노선이 보수주의와 대립되어 있는 신정통주의

임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이미 자유주의는 극복되었고 보수주의는 아직도 새로운 신학사조가 밀려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계속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향해 공격하고 있음을 냉소적으로 묘사하였다. 돈키호테적 만용을 가진 것으로 보수주의자들을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의 한계는 바로 비판을 위한 감정적 비판을 자행하면서 보수주의를 철저히 적대시한 것이다. 그리고 몇몇 곳에서는 거의 근거가 희박한, 오직 논쟁에 이기기 위한 필전을 펴기도 했던것이다.

 

이런 그의 신학 사상을 그의 신개념으로부터 유출시켜 분석하는 것이 어떤 논증보다 더 의미있던 것이므로 여기에서 그의 진술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살펴보자.

1985년 7월 13일 [크리스챤신문]에 그는 14번째의 "나의 생애와 신학"을 연재했다. 이날의 제목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신앙경험대로 고백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노라 할 때에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되었고 내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믿게 됐다는 그 자체가 성령의 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의 신학을 이단신학으로 정죄하던 이유는 바로 그의 성서관이 었으며, 신학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는 신인식이 문제였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와서 그의 전기적 단편에서 그의 신관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고백은 그의 전생애를 신학하면서 남긴 신앙고백이었다. 김재준은 정통보수주의를 공격하면서 그의 입장을 표명한 이 신앙고백은 신앙에서는 매우 온건한 신앙중심주의이고, 신학 방법에 있어서는 새로운 세계관에 적응하기 위한 비판적이며 분석적 방법도 성서해석에 도입하려고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러나 종교 상대 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서 인정하면서도 그의신관은 그에게 성령의 불길을 쏟아주는 하나님,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그리고 믿는 시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성령의 내재를 경험했다. 맨처음 믿기로 작정한 때에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성령의 하늘 위로와 기쁨, 그리고 복음증거 때문에

사람없는 외따른 집 독방에서 핍박자의 쇄도를 기다리던 깊은 자정( 밤 12시)에 내 생명속에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의 기쁨이었다. 김재준의 신앙고백에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 몇 가지 문제점도 있으므로 그의 형태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철하 교수는 김재준 신학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김재준 목사의 신학사상은 역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따운 "그리스도 중심"주의 또는 '말씀'의 신학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철학적 근거를 강력히 부정하고 초월절 차원 또는 계시 일변도의 새로운 실재론을 들고 나오는 따위의 것이라기보다, 즉 자유주의신학을배 격한다는 의미에서 케리그마적 신.隙 성격을 띠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출발점을 전연 자유주의 내지 합리주의에 두고 보다 완전히 불신아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신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붙든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김재준 신학사상에 대한 단정은 그의 입장의 모호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기고권이 발탁되면서, 과격한 방향으로 돌아선듯한 인상도 풍긴다. 어떻든 한철하는 김재준의 신학입장을 "자유주의신학을 용납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분명히 단정하였다.

이러한 단정의. 근거로서 그의 신학수업을 "극단적 자유주의" 청산학원에서 시작했고 프린스톤에서의 1년정도 보수주의에 접한 것 외에는 자유주의 신학경향을 띤 웨스턴신학교에서 학위과정을 마친 것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점은 주재용이나 박봉랑을 비롯한 한국신학대학 교수진과 신학자들의 김재준 신학사상 분류법과 매우 다른 점이다. 아마도 김재준은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 신앙인의 면모도 구비한 점에서 철저한 신정통주의자도 아니며, 보수주의 신학자는 더욱 아니었다고 하겠다. 아마 이런 많은 요소가 포괄되면서 수용성을 갖는 신학이 곧 장공 신학이 아닌가 한다.

"성경 절대무오설을 믿어야 그리스도교가 권위있게 되고 교회도 잘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믿어야 구원얻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화석된 바리새인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 축자무오설을 부인하므로 말미암아 신앙에 동요를 일으켜 타락한 사람보다도 이 설을 고집하므로 말미암아 성경의 문턱까지 왔다가 물러간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1950.3)-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나 인간의 게으름과 자기 만족 때문에 오히려 고정 불면 정체 등을 교회 본연의 자세인 것 같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병폐다. 특히 한국인의 보수 편중 경향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한국교회는 더욱 고루하게 되어가고 있다."

 

- 신학교 교회개혁으로 새 인간상 부활 (1971.1) -

 

I. 글머리

장공 김재준의 신학을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의 복잡성이널 다양한 관심 영역에 대한 그의 진술을 파악하는 어려움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강한 명료성과 동시에 그의 직설법적 진술에 대한 본의를 파악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꺼질 줄 모르는 불같은 정열로 글을 썼다. 그의 문필력은 때로는 감미로운 문학체로, 때로는 단조롭지만 주장이 분명한 명제어로 흘러갔으며, 마치 분화로구부터 솟아나서 넘쳐흐르는 용암같았다. 그리고 그의 지성은 제자들에 의해 하나씩 한국 기독교계에 정초되었다. 그는 한국의 신학사상을 기초한 인물들 가왁諍 한 사람이다. 그는 멈출줄 모르고 끊임없이 자갈밭 사이로, 갈대숲 사이로 때로는 계곡의 바위틈 사이로 흘러 내려 강을 이루며 흘러가는 깊은 강처럼 계속 흐르고 흘러가는 장구한 연륜의 사상을 한국 교회사에 남겨놓았다. 장공의 인물상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기작가의 작업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여기에서 우리는 장공의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 몇편을 선정하여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그의 신학사상을 이해, 평가하도록 할 것이다. 한 인물의 사상을 직접 그의 작품에서 찾아내어 평가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한 것은 없을 것이다.


II. 김재준의 신학사상


1. 행동하는 신학의 효시

1933년 구약신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김재준은 신학자의 시대적 사명감과 역사의식, 그리고 한국신학의 주체문제와 신학교육 등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1930년에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과 이사야 연구 등을 발표하면서 장로교회에 신학적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1934년 10월 15일 발표한 "실재의 탐구-전도서를 읽고"에서는 "전도서! 이것은체계 선 철리를 말한 것도 아니며 심오한 싸탑湛 말한 것도 아니며 심오한 신앙을 말한 것도 아니라 다만 '생의 의의'를 찾아 실재의 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매던 순례자의 피엉킨 속임없는 기록이라고 봄이 가한 것이다"라고 성서적 진리를 세속적 가치세계로 해석해 주기도 했다.

이런 '문필의 묘' 속에서 우리는 김재준이 성서적- 신앙적 - 신비적 세계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 회의하면서, 확증적인 한 가지는 그 스스로 이미 실증적 과학지식 체계에서 성서를 분해해 실증주의자였다. 그것은 그가 성서의 깊이 은닉된 진리에 대한 불확실한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기보다는 논증되고 과학적으로 명증되어지는 사건 사실자체로부터 모든 신학적 진리를 찾아보려는 점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귀국한 다음 이런 확실한 가치분석과 실증적 체계론을 갖고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무엇인가 민족에게 고하는 자세를 보이고 싶어했다. 귀국 후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들은 그가 민족의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민족역사를 고취시켜주던 구약의 예언자 처럼 그자신을 보이려했던 것이다. "전기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세계" "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그리고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등이 그의 야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대변한다고 하겠다. 어떤 사건이 생겨졌다는 것으로써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름 속에도 천태만상의 사건이 새겨지고 있으며 바다 속에서도 천변만화의 사건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역사가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이 시간, 공간 안에서 어떤 더 높은 질서를 따라 인격적인 '결단'을 하고 그것을 '공동사회적'인 의식하에서 창조해 나가는 행동에서만 지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장소인 역사는 자연의 규범 안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다.즉 진화, 성장 등 자연적, 합리적 범주로 기술할 과정이 아니다. 목적과 결단에 의하여 구성될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듯이 김재준은 그의 신학함을 역사의식으로 충만된 의지의 표현에서 출발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좋아했으며, 예언자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공동사회적인 의식 하에서"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를 원하며 살았던 인물인듯하다. 그는 역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 안에서, 자유하는 인간이 어떤 이상을 실현함으로써 생의 공허를 메꾸려는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유하는 인간을 빼 놓고 역사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시간 안에서 자유하는 인간의 실천함(praxis)을 역사로 해석하고,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예언으로 그리고 그 말씀의 구현을 그리스도사건으로 수용한 전통적인 신학적 구속사관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역사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러지는 것이 예언이요, 역사 안에 '말씀' 육신을 이루어 들어오신 것이 그리스도시다. 그는 위의 인용에서도 분명히 그의 신학입장을 표명하였듯이,역사의식과 예언자의식을 겸비한 '시대에 외치는 소리'로서 그의 신학을 세워나 갔다. 이러한 신학사상의 면모는 아모스연구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의" '사람의 죄악' '심판', 이 셋은 아모스 예언의 세가지 중추이며 서로 연쇄된 고리이다"라고 진술하면서 대지를 인간적 삶의 실존성과 하나님의 공의의 맥락에서 해석하였다.그 늴營 김재준은 분명히 한국의 아모스임을 은연히 과시하려 했다. 아니 한국의 아모스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암5:24)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의를 사모하길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아모스," 그는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의위에 세워지고 운행하여지기를 바라고 그를 위하여 싸우다가 그를 위하여 죽은 자이다. 이제 우리는 불의로 가득찬 세대에 있어서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 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분토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인가 한다." 위에서 우리는 김재준의 신학사상은 철저히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신앙을 기초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부정하며, 철저한 실천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의 내용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삶의 신학"이라고 했다. " 믿음 소망,사랑이 그 삶 안에 충만하여 사람들의 시달리는 허무와 절망을 채워준다면 그 밖에 또다시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지금부터 신학은 신앙과 이성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신학이다."

 

2.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어설에 대하여"(1950)

"삶의 신학"을 이 시대의 참된 신학으로 정립하기를 원하며 민족과 역사 앞에 의의 예언자처럼 행동하기를 원했던 장공의 신학사상은 사실상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기록자체의 영감적 비의는 부정하고 있다. 그는 성서의 대의가 이 시대의 불의를 심판하는 것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의미가 중추를 이루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서 자체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또한 성서를 영감된 기록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서가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된 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영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가 하는데 있어서는 모름지기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최대한으로 활동하고 사람은 최소한으로 최대한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영감은 더 커진다고 믿는것이 보통 민속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영감이란 것은 그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주 기계처럼 되어서 자기 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접신하였다는 무당같이 되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소위 축자영감설이 생겨난 것이니 이것이 과연 성격적인가 하는 것은 차츰 규명해 보기로 하자.

 

그의 주장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서는 신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둘째, 영감이란 인간이 기계처럼 되어 무의식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셋째,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감받는 것을 무당처럼 자기의식없이 접신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재준은 성서의 사실에서 영감의 성질을 결정하려는 바운(Bowne)의 입장에 선 것이다.

성서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점은 김재준이 기계적 영감설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박형룡신학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박형룡박사도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단지 첨예한 신학논쟁을 할 때에는 논리적 공격을 위해 극단적으로 과대해석한데서 기인한 듯하다.

2) "성경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기존한 모든 재료를 참고하며 그것을 비판 정리 취사하는 저술가로서의 정칙을 무시하지 않았다. 김재준의 성서기록에 관한 진술은 바로 이점에서 큰 문제를내포하고 있다. 그는 서어라는 경전을 단지 당시 문필가들의 기록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누가가 제 정신없이 복음서를 쓴 것이 아닐 뿐더라 그의 앞에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존 문서들도 많이 수집되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단지 작품일 뿐만 아니라 기록문서 이상의 영험적 실체는 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김재준에게서 성서는 신화집, 수상집 찬미집,기록문서, 공상소설 정도의 가치 이상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신비적 체험, 혹은 무아경의 영험을 주장하며, 누미노제적인 요소(nouminose)를 확신하고 있는데 반가치관의 표준자로 파헤쳐 제거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의 과학적 방법대로 한다면 기독교의 모든 신비적 요소가 인간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제거된 다음 기독교에 남는 것은 우상숭배였다는 것 이상은 없지 않을 까? 한편 김재준은 불가사의하고 초과학적인 규명불가능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사건은 확신하고 있다. 초과학적 사실을 믿으며 초경험적 영감은 부정하는 그는 너무도 극단적인 모순으로 그의 신학을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만을 하나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인정하고 기록 자체는 인간의 사건사적 기록으로 보려는 태도와 과학적, 실증적 세계관을 인정하며 초과학적, 신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그의 신학은 철저히 자유주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역시 부정하고 있다. 그는 1949년 11월 시민관에서 가졌던 제1회 장로교 청년 전국대회 초청강연에서 "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내가 1925년 이래 일본 청산학위엣 공부할 때는 자유주의신학이 전성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졸업할 때 나 자신은 자유주의신학인 막다른 골목에 이마를 부딪친 것 같은 느낌으로 이것을 양기할 길을 찾아 고민하였습니다. 그 후 곧 프린스톤에 가서 메이첸박사의 강의를 열심으로 들었습니다. 그 심경과 생활태도와 행동규율 등을 보았습니다. 많은 배움이 있었으나 그곳을 떠날 때 나는 극단의 정통주의신학이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발악하는 고민상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그후 만 2년 나는 이 두신학을 양기하면서 둘을 다 살리는 건설적인 참된 정통신학이 수립되기를 소원하여 스스로 노력해 왔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글의 첫 머리에서김재준의 신학을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그가 철저히 그의 색깔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도 정통주의도 부정하고 그가 제시하려 한 '참정통주의'란무엇인가? 그것은 '신정통주의'인가? 그러나 김재준은 신정통주의도 부정 한다.

(문) "강연자는 '신정통'신학에 관심이 큰 모양인데 그 학파에 속하였습니까?

(답)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거기에 예속하여 제자될 의도는 없습니다."

3)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주실 때 그는 그의'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닥닥 집어 넣어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판처럼 되게하는 것이 아니다." 장공 김재준신학은 수용성이 매우 큰 신학이며, 그의 인간됨은 매우 존경스러운 인격과 결정체로 채워진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독교계의 큰 그릇임에 틀림없다. 그의 신학사상이 어떤 영향은 한국 신학사상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강한 필력 속에는 종종 무지한 주장이나 의도적으로 논적의 사곡하여 비판하려는 태도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그릇됨에 비해 실망케 하는 것이다. 그가 겨냥하여 비판하는 보수정통주의자들의 성서 축자영감설이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닥닥 집어넣어서" 그때부터 "축음기판처럼"꼭같은 소리만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이해하면서 비판한 것은 전혀 그 비판의 본의가 무엇인지 의심케 한다. 박형룡 박사는 성서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주장하면서 기계음을 말한 적은 없다. 박형룡은 "기독교는 인간을 초월하야 신의 묵시에 절대권위를 발견하고 신의 묵시의 기록인 성경으로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법칙을 삼는다."라고 분명히 그의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김재준의 비판은 근거없는, 오직 계획된 비판을 위한 비판이며, 그렇지 않다고하면, 박형룡의 신학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 핵심을 벗어난 근거없는 비판을 한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가. 박형룡은 성서를 인간의 주어진 절대무오한 표준임을 강조한 것이지, 성서자체의 기록이나 인쇄할 때에 잉크가 잘못 묻혀 점이 찍히거나 안찍힌것까지 무오하다는 것이나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성서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정경이며, 삶의 표준자라는 것이 부정될 수 있다면, 기독교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기독교는 윤리교훈의 도장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을 김재준은 '세계신학'으로 지향하려 한 듯하다.

4) "영감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주요 내용은 두 가지다. 즉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가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그것이다." "그는 결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도 김재준은 자기이해의 범주에서 정통주의을 비판하고 있다. 어느 정통주의 신학자가 하나님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시하신다"고 주장하겠는가? 어느 신학자가 하나님의 계시한 하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는가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가? 오히려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세속사 안에서의 구속사적 역사를 더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란 진정 하나님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지고의 존재일까? 김재준의 주장은 박형룡신학에 대한 편협됨이 이정도를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나는 이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축자영감설이 사실은 성경 정신에 충실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려 한다." 이러한 주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그는 과학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적 우주원리를 도입하여 박형룡의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축자영감설에 관한 논문에 이어 "성서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라는 논문에서 성서비평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영감설과 무오설을 비판하고 있다.


3. "신학의 갈길 "(1962)

60년대의 장공은 세계를 보는 눈이나 민족사의 고통받는 민중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소아적 교만이나 독선적 비판주의자에서 좀더 성숙한 인격소유자로서 신학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 그에게서 신학함이란 성서의 영감설이나 무오설 등 치졸한 논쟁 차원을 벗어나 세계신학으로 향한 도약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여주려는 열린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장공이 신학을 시작하며 "삶의 신학" 을 외쳤던 그 본래 신학의 길을 찾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신학의 갈 길" 을 그가 찾아가면서 그는 세가지를 생각하며 고독한 길을 걸어간 것이다. 첫째, 그는 다음과 같이 "신학의 세기말"적 상황을 서술하였다. 모든 종교는 신뢰의 대상과 구원의 방도와 소망의 목표를 갖고 있다. 종교는 그 신로의 대상에 절대가치를 상정한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가치에 해당할 만한 본질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에 그 종교는 '우상숭배'로 되는 것이며 이른바 '거짓 절대"에 따르는 몰락과 저주를 가져오게되는 것이다.

인간의 신앙심에 내재되어 있어야 할 절대 가치를 주장함에 있어 김재준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조직신학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틸리히는 인간의 종교적 신앙에 대한 보편성을 (1) 인간이 존재의 근원에로 향하여 나아가려는 지향성 (2) 인간의 실존인 불해방의식 (3)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역사를 초월한 곳에서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인간의 소망과 확신 등이라고 본다.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신앙의 보편성이다. 이 점에서 김재준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으며,그가 수용거부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하여튼 인간의 보편적인 요구에 속하는 궁극의 문제들에 대하여 역사적 기독교가 대답하고 있는 한, 신학은 없어지거나 그 근본에서 변질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시대를 따라 생성 유전하여 조건을 달리하는 한,신학도 그 생태를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학함의 본질인 것이다. 신학의 불변성과 동시에 비고정성,즉 정중동 혹은 불변의 상변신학을 김재준은 역설한 것이다. 둘째, 김재준은 "신학의 방향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교파신학의 지양

교파주의를 지양하고 "하나의 교회"에서 교회 본질과 사명을 찾도록 하자는 주장은 그의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을 나타낸 것이다.

2)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 신학논쟁의 지양신학 대결은 신아의 대결로 ,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정대결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혈전을 벌이게 되어 양대진영이 이로운 것이 업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김재준은 이제 더 이상 신학논쟁,특히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싸움은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임을 실토하고중지를 요청한 것이다. "역사적 상황 안에서의 신학은 보수와 자유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이 김재준의 관용스런 신학입장이다. 보수를 파괴의 대상이나, 존립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대등한 동반자로 인정하고 있다.

3) 가톨릭 대 개혁교 신학 논쟁의 지양 김재준의 논지는 "신학적으로볼때, 어떤 경우에 더 많이 가톨릭적이고 어떤 경우에 더 많이 개혁교적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그 기독교적 원칙의 일관성에 있어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온전히 제외시키고서 독자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의 신학함이 삶의 신학에서 형성된 것이며, 행동하는 역동력, 즉 생명력을 추구하는 점에서 김재준은 교파사이에 연합된 하나의 교회 운동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형제된 신분을 유지, 보존하면서 하나의 길, 신학의 갈 길을 올바로 가기를 적언할 것이다. 이것이 장공의 이름붙일 수 있는 신학인 것이다. 셋째, 장공은 "신학의 취할 방향"을 신학이 갈 길의 마니막 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신학구상이며, 그가 당시에 설계한 미래 신학의 청사진인 것이다.

1) 세계교회적인 신학

"금후 신학이 취할 방향은 이미 이상에서 암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부터의 신학은 어떤 신학자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만족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어떤 교파의 신앙고백을 변증한 것으로 능사를 삼을 성질의것도 아니다. 금후의 신학은 '성령의 계통에 의한 세계교회적인 이론과 실증주의자이며 과학주의자였던 장공, 합리주의신학을 구상했고, 주장했고, 완성하려 했던 젊은 시절의 장공이 후기에 와서 비로소 "성령의 계통"을 요청하며 신학형성에서 역설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김재준은 성령신학으로 세계신학 형성을 역설한 것은 사실이다.

2) 세계교회적 신학의 '모퉁이돌'

김재준은 매우 의지가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그는 그의 신학이 세계신학의 '모퉁이돌'로 한 몫을 담당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용기나 긍지는 단지 그의 신학의 모퉁이돌 구실로 만족할 것은 아니다. 그는 사실상 세계신학의 주춧돌로서 위치를 갖고자 했던 야심 많은 신학자였다. "세계교회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구원자시다' 하는 신앙고백을 '모퉁이돌'로 삼고 건축된다." 김재준은 결국 여러해 동안 방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중심신학으로 귀향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분명히 신정통주의 신학자이기도 하다.

3) "세계교회적 신학의 범위는 인간과 인간 문화 및 역사의 전반에 관여 한다," 김재준은 "어느 것에 속한다는 것은 벌써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1949년 선포한 바 있으나 이미 1962년에 그 스스로 틸리히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그리고 리챠드 니버(Richard Niebuhr) 등의 문한신학과 역사신학의 영향권에 예속되고 말았다. 그는 신학의 이런 경향을 삶에서 해석하려 했다. 여기에서 그는 우수의 철인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의 실존주의를 삶의 정황 자체로 수용하였고 문화, 역사, 사상, 과학, 예술 등등의 모든 인간적 삶의 현상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하려 했다. 그것은 마치 박형룡이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평가되듯이 김재준이 "한국의 문화 신학자"라고 불려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리는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게도 각기 스스로를 자랑할만한 이론과 역사와 규범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신학의 갈길! 이에 대하여 초교파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하나의 신학, 세계신학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 상대주의를 암시하고 있는 종교신학임을 김재준은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훌륭한 적언에 불구하고 "신학의 갈길"은 개인의 신앙형태만큼이나 갈라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재준의 "신학의 갈길"은 사실상 그가 세운 조선신학교(현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의 방향을 다시 간추려 역설한 것이다. 김재준 교수가 송창근 박사와 손을 잡고 신학교육에 힘을 쓰면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헌신하게 된 것도 그의 신학이 삶에 기초하여야 하는 행동 신학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겨의 신학교육 목표를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우리는 조선교회로 하여금 복음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학적, 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게 할 것.

(2)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 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찬을 경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3)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의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학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4) 성경연구에 있어서는 현 비판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셩경연구에 예배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 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여야 할 것.

(5) 어디까지나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는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에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할 것.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 모략과 교권이용등은 조선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런 논쟁을 피할 것.

우리는 여기에서 김재준의 신학목표나 연구 목적이 평양신학교의 교육 목표와 많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교육은 개방성과 자유가 보장된 자유로운 학문연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세계관에 대한 개방과 모든 학문탐구의 자유야말로 학문의 최대 권리이며, 바로 학문발전의 원동력임을 김재준은 인정하고 이런 이상에 따라 신학교육을 시작하였고, 그것만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열중한 나머지 신앙으로서의 신학 본래성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는 "아버지하나님"보다는 " 존재 자체"를 사모했고 동경했으며, 신앙의 깊이 보다는 신앙의 문화적 표현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III.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김재준의 신학을 진술하면서 그의 신학사상을 문제성에있는 작품중심으로 파헤쳐 보았다.물론 제한된 지면 때문에 그의 전체 작품을 다루지 못한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다룬 몇편의 작품들은 그의 전체 사상의 대표적 표현이며 서술이기 때문에 우리의 추적.분석.해석.비판 등은 가장 적중한 것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신학을 몇가지로 평가하며 이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첫째, 장공 김재준의 신학과 사상은 너무 많은 내용을 산발적으로 담고있기 때문에 독자들에 따라서는 그 한면만을 보고서 그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어떤 사상을 두리뭉실 포용하려는면도 갖고 있으므로 그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둘째,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가? 그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Nein!)"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정통주의 신학자인가? 그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인가? 이 역시 그는 "아니다!라고 부정한다. 이러한 3중 부정이란 결국 20세기 인물인 김재준은 어떤 신학자로서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는 자유주의도 알았으나 배척했고, 보수주의도 맛보았으나 그들의 발광을 보고 떠났으며, 신정통주의는 문화적이고 합리주의적 지성에 기초한다고 거절하였다. 결국 그의 신학은 모두를 부정한 '부정신학("Nein" - Theologie)'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두를 갖고 싶은 '포괄신학(U mgreifen-Theologic)'이되고 말았다. 그에게서 신학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 Order)'의 '결단신학(Entscheidungs-Theologie)'이 아니고, '마치 이것인듯한 (Als-Od)'의 신학이며, 합성신학인 것이다.

셋째, 김재준은 분명히 위대한 한국 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신학의 큰 봉우리 하나를 한국교회에 보여준 예언자적 인물이며, 예언자

적 역사의식을 갖고 행동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비판하면서 그것 자체를 신학함이라고 하는 현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독선주의 혹은 비판주의는 한국교회 분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으며,그가 주장하는 삶의 신학이 진정 어떤 의미의 삶을 신학함인지 의심케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페쇄된 때에 조선 신학교가 개교된 것은 어떤 역사의 장난이 있었는지 아직은 감추어져 있다. 그의 철저한 신사참배 부인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안하고 신학교 할 수 있도록 일제의 식민총통의 개교 허가를 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평양신학교는 페쇄하고 조선신학교를 개교하게한 것이란 뜻일텐데, 아직 많은 점에서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넷째, 그는 조직적인 신학자는아니다. 그릇은 크지만, 체계적으로 신학을 만들 수는없었다. 그것은 그가 타고난 문학적 재질 때문에 신학

의 논제들이 산문화된 점도 있겠으나, 대체로 그의 신학의 전문적 관심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실 김재준은 인간의 문화내영 전체를 신학화려 했던 인물이므로, 그의 신학이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의 신학 가운데 전공분야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그를 어떤 신학자로 보아야 할지 망설이게 한다. 그래서 유동식 교수는 김재준을 "순례자"로 그리고 항상 새로운 관심으로 사물에 접하는 용기를 보면서 구원의 청년으로 규정한 것이다.

 

김재준!

그는 아호처럼 끝없이 긴 하늘을 향한 신학함을 이땅에서 외쳤던 시대의소리요, 한국 역사의 예언자적 아니 순교자적, "생의 의의 찾아 실재의 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매던 순래자"의 삶을 실제로 보여준 산 표본이었다. 여기에 장공 김재준의 참 모습이 있어며,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