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 도산 안창호

好學 2012. 8. 24. 19:47

 

 

 

 (크리스천 지성인과의 가상인터뷰 )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 도산 안창호

 

 

안창호 安昌 浩
출생: 1878. 11. 9 ~ 1938. 3. 10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미국에서 우리 민족들이 무지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동포들을 위해서 일을 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오늘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굳게 믿고 나간다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에게도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민족의 운명을 암담하지만 절 대로 실망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힘차게 나아가도록 합시다.

(연설문 “나가자” 중)

 

 

기자 :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오늘은 모두들 아시는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창호: 네 안녕하십니까? 갓피아 여러분, 여러분들을 만날 생각에 저도 많이 설레였습니다.

 

Q1. 독립운동가, 이 길을 걷게 된 동기가 있으셨나요?

 

 

 

 

 

 

A1. 제가 살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많이 불안했어요. 어릴 때에는 전쟁을 하고 사람들이 피난을 다니고 하는게 당연한 듯 그렇게 사는 건가보다 했는데요. 나이가 들면서는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고민을 하게 된거죠. 그러던 시기에 또다시 청일전쟁이 터졌고...
그런 사건상황들을 경험하면서 나라가 어려움을 겪으면 당연히 국민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라가 힘이 있고 잘 살아야지 국민도 권리를 가지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Q2. 그렇다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힘은 무엇인가요?

 

 

 

 

 

 

 

 

A2. 진정한 독립은 개개인이 먼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 역시 모든 국민이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알맞은 자격을 가지도록 성장하고 배우는 힘을 스스로가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독립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Q3. 그래서 처음 세 우신 학교 이름이 “점진학교”가 된건가요?

 

 


 

 

A3. "서두르지 말고 하루하루 실력을 기르면서 차근차근 다져가자"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남녀공학 학교였죠. 비록 초등학교였지만 서구 문화를 가르치고 교재도 저희가 만들었어요. 너무 좋은 시간이었는데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아요.

 

점진학교 : 1899년 안창호(安昌浩)가 평안남도 강서(江西)에 세운 초등과정의 학교.

안창호는 한말의 침체된 국운 속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해서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이 제일이라고 보아 고향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학교의 명칭은 점진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안창호의 점진론을 나타내고 있다. 안창호가 지은 교가(校歌) 속에도 그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이는 그가 평소에 강조하던 무실역행사상(務實力行思想)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7년에는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표현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사전)

 

 

 

Q4. 그 아쉬움이 미국까지 가셔서, 공립협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셨나봐요?

 

A4. 그렇게 연결이 되나요?(웃음)
더 많이 배우고 돌아와 한국을 위해 더 큰 일을 해야지 하는 뜻을 품고 간 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가 보니, 우리나라 동포들끼리 싸우고 거짓말을 하고 그게 악순환이 되서 일자리는 줄어들고 그런 모습이었어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하게 됐죠. 제가 공부하는 이유가 더 많이 배워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건데, 공부보다 먼저 지금 행동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한 결심을 내려놓고, 먼저는 빗자루를 들었죠. 빗자루를 들고 제 상황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먼저는 우리 교포들의 집을 찾아가 청소해주었어요. 그리고 집앞 골목골목을 쓸고, 꽃도 심어주고 변소를 치워주기도 했죠. 이렇게 제가 먼저 솔선수범하면 재미교포들도 변할 수 있다 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우리 교포들은 변하여 교포 들끼리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그 결속력이 ‘독립협회’를 만들게 했죠.

 

 

Q5. 선생님이 만드신 독립협회는 실천 규약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A5. 그렇죠. 말뿐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실천이 중요하죠, 그래서 규약을 만들었어요.
신용 지키기, 음담패설하지 않기, 속옷입고 밖에 나가지 않기, 외국인 앞에서 더욱 예의 지키기, 저축하기, 조국에 재정 보내기...뭐 이런 규칙이죠. 지금 사람들은 당연히 지키는 건데,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걸 잘 지키지 못했어요, 의식이 없었던 거죠. 어쨌든 이러한 것들을 지켜나가면서 우리 한인 사회는 미 국에서도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고, 다른 지역의 교포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죠.

그리고 이러한 정신이 나중에 국민회, 흥사단, 청년학우회등에도 이어진거죠.

 


Q6.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반성이 되는 이야기 입니다.

 

 

 

 
 
A6. 그런가요? 우리 그리스도 인은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잖아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 하면 모든것을 하나님께서 다 채우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제 가 나라를 위해 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형편 역시 다 채 워주셨습니다.
 
 

 

Q7. 나라일을 하시면서 경제적 필요는 어떻게 채우셨는지도 궁금했어요.



 

 

 

A7. 처음 미국에 갔을때는 하우스보이, 쉽게 말하면 미국인의 집에 집안일을 돕는 일을 했어요. 점점 언 어가 익숙해 지면서는 노동판에서 일을 할 수 도 있었어요.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데, 당시 저에게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죠.

그리고 나중에 국민회 회장직을 맡았을 때는 동포들의 배려로 매달 생활비를 지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 본인들도 타국에서 살기가 힘든데 하물며 자신들의 형편을 쪼개서 저에게 지원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아요.


Q8.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새겨지네요. 안창호 선생님은 모태신앙이신가요?

 

 

 

A8. 아니요, 저는 서울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처음엔 나라를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서울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런데 서울에 아는 지인도 없고 당장 생활을 해야해서 돈도 필요하고 그래서 생활비를 벌면 공부할 시간은 없더라고요.

그런데 그 때 였어요. 그날도 서울에서 일을 하며 정동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골목 구세학당에서 자신의 학교로 오면 먹고 자고 공부까지 시켜주신다고 하더라고요. 가난한 유학생인 저에게는 너무나도 솔깃한 제안이었죠.

그래서 구세학당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됐죠. 구세학당에서 배우는 과목에는 수학 과학도 있었지만 성경공부 시간도 있었거든요. 처음에 저에게 성경은 그저 신학문중에 하나였는데 학교에 송순명 선생님이라고 저희 학교에 온 학생들을 전도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송순명 선생님과 교재를 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에 서 나오는 애국심만이 근본적이고 참된 것이구나를 깨닫게 됐죠. 이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순간입니다.

그 때 만약 제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예요.

 

 

 

Q9. 하나님의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으신 것 같아요. 사모님도 서울에서 공부하시면서 만나게 되신 건가요?

 

 

 

 

 

 

 

A9. 그러고 싶었죠(웃음). 신학문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배우자 역시 저와 비슷한 사람, 그러니까 신학문을 했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 이길 원했어요. 그래야 같은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가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혼처를 정해놨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제 훈장선생님의 딸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어렵지만 훈장선생님을 찾아뵙고 혼사를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가 저를 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죠. 그런데 훈장 선생님이 그러면 당신의 딸에게 교회를 다니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도 모두 기독교로 개종을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지금의 아내인 이혜련양과 처제를 서울로 보내 신교육도 받게 하셨습니다.

 

 

 

 

Q10. 운명같은 만남이네요. 가정 생활에도 충실한 가장이라고 들었어요. 더구나 큰아드님이 대한민국 헐리우드 진출 1호 배우시잖아요. 너무 신기했어요.  

 

 

 

 

 

A10. 허허..(웃음) 부끄럽네요. 저는 아들(필립 안)이 연기를 하는 걸 반대 했는데, 제 아들이 배우라는 사실이 저를 훌륭한 가장으로 만든 샘인가요? 저도 별수 없는 한국사람이더라고요.
처음엔 아들이 취미로 연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은 영화배우가 돼서 사람들 입 오르내리며 저에대해 안좋은 소리를 했어요. 겉으로 는 괜찮은 척 했지만, 사실은 속에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불러다가 애기를 했죠. “왜 연기를 하느냐?” “ 앞으로도 계속 영화배우를 할 생각이냐?”

또박 또박 아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직업에 귀천이 있나요?” 이러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이야기 하는데, 스스로가 너무 편협했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을 위해서 아들의 인생을 좌우하려고 했구나 반성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저는 아들에게 설득을 당했고(웃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오히려 헐리우드배우를 하면서 대한민국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거니깐요. 제 아들 덕분에 제 그릇이 더 넓어 진 계기가 된거죠.
 
 

 

Q11. 정말 좋은 가장이 맞으시네요. 훌륭한 아버지를 둔 아드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시면서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 였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궁금합니다.

 

 

 

  

A11. 힘든 일도 많았죠. 그래도 그 힘든 일 속에서 계속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어서 감사하고 이겨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때를 꼽 자면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이 체결된 날이겠죠, 우리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힘이 무엇인지 백성들이 알기도 전에 우리나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 때에 허탈감은 너무도 컸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한 멍해져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한참을 목놓아 울었어요.

사람이 그렇게 울수도 있나봐요, 저도 제 안에 그렇게 많은 눈물, 울분이 있는지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한참을 울면서 하나님께 물어봤어요. 하나님 우리 국민이 이렇게 착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에게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주시나요?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70년 후에 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포로생활을 풀어주셨고, 국권을 회복 시키셨던 사건을 생각나게 해 주셨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구나 우리는 그 때를 위해서 다시 노력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저를 다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 이하 한국)을 강압해 체결한 조약으로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다. 1904년 8월 22일에 재정()과 외교()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둔다는 내용으로 체결된 ‘외국인용빙협정(, 제1차 한일협약)’과 구분하여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불린다.


Q12. 수감생활을 가장 힘든 사건이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역시 선생님은 다르시군요.

 

 

 

 

  

A12. 오히려 수감생활은 독립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수월하게 생활했죠.
감옥에 들어 갔을때 몸이 이미 좋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런지 감옥에 들어가서도 많이 아팠죠.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풀려났고, 그게 참 미안해요. 다같이 고생하고 힘들었는데, 제가 힘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

 

 

기자 : 네, 선생님과 인터뷰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반성하게 되네요.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해서 그 속에서 개인 의 이익만 쫓았던 저희 생활이 반성이 됩니다. 앞으로는 무슨 행동을 하든 그 움직임이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인터뷰 너무 감사했습니다.

 

 

 

안창호: 저 역시 너무 즐거운 시간이 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길 저역시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도서: 사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 안창호 (규장)

이미지출처: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