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주남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인격 2

好學 2012. 8. 26. 23:35

주남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인격 2

 

 

5. 기도의 사람

 


  주남선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기도의 종이었으며,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젊었을 대, 누에를 기를 때의 한 이야기가 그러하다. 1912년 9월 진주 잠업 강습고 수료 이후 한번은 양잠을 하는데 누에가 전명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동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딴 방으로 가서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 누에들이 완전히 소생하여 우량한 성적을 얻어 당시 총독을 상장가지 받았다는 신앙일화가 있다.(박손혁, 34)

 
 또한 그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에 장질부사에 걸린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형무소에서 장질부사로 많은 죄수들이 사망하는 중 나도 장질부사에 걸려 20일을 신음하는 오열이 극도로 달할 때에는 한 감방에 있는 죄수들이 상제노릇을 하겠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내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니 염려마시오 하고 기도하기를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이 흐르도록 기도하셨으니 이 복을 통하여 다소 체험하게 됨을 감사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후로 열기가 점점 물러가고 병이 쾌차함을 얻었다.”(박윤선a, 26)

 
 그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 별로 소리를 내어 기도하지는 않았으나, 조용히 옆에서 보면 언제나 흐느껴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고 일어나는 자리는 언제나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남영환 목사는 그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때는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격동기였으므로 어려운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항상 남의 죄를 책망하기 전에, 자신의 죄에 대해 자책을 느끼지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분의 통회하시는 겸손한 모습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슴이 뜨끔해 진다.”(남영환, 39)

 

 특히 그의 생애는 기도의 확신과 응답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긴 옥고의 기간 중에 그는 제목을 정하여 기도하였으며, 그의 기도는 조목조목마다 성취되고 말았다. 주남선 목사가 감옥생활을 하는 주에 기도한 제목들을 “① 말세에 바벨론 우상제국이 파괴되고② 신앙자유를 허락하여 달라고 했으며 ③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루어 달라고 하였으며 ④ 일본 신사는 소멸되고 ⑤ 조선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며 ⑥ 거창에 성경학원 하나 설립???”(박윤선a, 27)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해방과 그 이후에 성취된 것이다.  

 

6. 무언의 실천가

 

 주남선 목사는 “생활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길이길이 무언의 설교를 하시는 분”이었다.(전성도, 36). 그는 어렸을 때에도 효자상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주경중, 35), 삶 속에도 배운 바를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실천에 대한 예는 허다하다.

 
그는 손님대접을 잘하였다. 그의 장남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종종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이들의 대접을 최선을 다하여 하다 보니 자연 자녀들에게 대해서는 등한할 수 밖에 없었다.”(주경중, 34)

 

무엇보다도 그가 동료 교역자들을 독려하며, 전쟁 중에도 피난하지 않고 교인들을 돌본 일이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서 기도자로의 본을 보인 것은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주남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따라간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전의식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였던 것이며, 또한 우리가 행하는 선도 돌아오는데, 그것 역시 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주남선a, 19f)

 
그가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것이 있다. “미국 워싱톤에 있는 중앙청 안에 어떤 회의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상한 사진이 항 장 걸려 있다고 한다. 그 사진은 전면에서 보아도 그 사진의 눈이 바라보는 이를 내려다보고 우편에서 보아도 똑같이 바라보는 이를 내려다본다고 한다. 따라서 그 방안에서는 그 사진의 눈이 어느 곳이나 다 보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고 하는 데 하나님의 눈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 피할 수는 절대로 없고 은익 할 수도 없는 것이다.”(주남선c, 13)

 
 오병세 교수는 “그 어른의 설교에는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은 아니었으며, 부흥사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고, 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수단 방법 등은 찾아 볼 수 가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는지, 훤하다는 것은 엎어도 그에게서 참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었다.”(심군식, 7f)고 회고하고 있었다.

 

7. 지도자 양성의 꿈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기도한 중요한 제목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수도원의 설립과 거창에 성경학교를 세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와 거짓 신의 파괴, 조선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지도자 양성에 대한 꿈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복음사역의 초창기에 자기 자신이 30여 교회를 돌면서 일하던 상황 속에서 지도자 양성의 과제는 절실하게 다가왔으며, 잘못된 신앙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절실한 과제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교육의 과제를 의미있게 취급함으로써 교회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물론 고려신학교 건립에 있어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한상동 목사가 맡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가 옥중에서 교육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옥중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해방 직후 평양 산정현교회 하층에서 유하면서 한상동 목사의 말씀이 신학교를 설립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동감이 되었으나 나는 동년 12을 20일 경에 남한으로 나오게 되고 한상동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다가 1946년 3월 남한에 와서 마산에서 만나 진해 해군 수양소 좋은 건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진해를 동반하여 건물을 본 즉 적당한 고로 신학교를 설립키로 작정하고 한상동 목사께서 경성에 체재하는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와서 진해에서 하기 신앙강좌를 2개월간 계속하면서 경남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동년 9월 20일에 부산진 금성중학교 상층에서 개교식을 거행하고 수업 중에 마침 미국으로부터 한부선목사가 나와 교수로 돕게 되었다. 신학교 부속기관으로 고려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게 되어 교장 오종덕 목사가 취임케 되었다. 거창 시찰구 직영으로 보통성경 학원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1950년 3월 경남노회에서 인증을 받게 되었다.(박윤선a, 27)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거나 부각시키고 있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어쨌든 그는 설립자 중의 한 명 이었으며, 초대 이사장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부속기관이었던 고려고등성경학교의 설립이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그의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학교설립에 대한 진솔한 진술을 보면서, 여기서도 그의 충직하고도 진실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주남선 목사는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의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는 이상규 교수의 표현을 다르면, “관계적”차원의 봉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남선 목사의 한상동 목사의 이념적 일치와 경남 노회의 지도적 인사라는 점에서의 협조적인 관계, 그리고 거창이라는 당시로서는 내왕하기에 어려운 거리관계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이상규, 9). 물론 그가 더 오래 생존하였다면 그 관계의 질이 다르게 발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해방이후의 여러 가지 어련 상황 속에서도 말씀의 순수한 회복과 신앙양심의 청결한 회복을 위한 회개 운동을 주도함으로 고려파 운동을 낳게 하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혹시 우리가 그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나 한상동 목사와의 관계를 추적해 나감에 있어서, 외부로 드러난 일만을 가지고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런 평가는 그가 살아온 가장 기본적 삶의 태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주도권을 잡았으며, 누가 전면에 나서서 일했느냐를 그렇게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Ⅳ. 결론

 
 주남선 목사에 관한 소수의 자료를 읽고 정리하여 보았다. 주남선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다가 간 충직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목사님은 성품이 외유내강하시고, 사명에 충실하시며, 진리변호에 일점도 타협하시지 아니하시나, 그러나 의리에는 강직하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여 무언의 실천자였으며, 환난에는 선히 인내하였고, 교회의 타락과 민족의 부패를 인하여 눈물의 기도로서 그 생활을 일관하신 이 나라 민족과 교회를 위한 제물이 되신 겸손의 사람이시었다.”(박손혁, 3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주남선 목사를 감히 순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한 평생이 주님을 위한 삶이었다면, 그는 충분히 순교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죽지 않는 순교자’였으며, 우리는 그의 후예가 됨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끝으로, 1952년 3월호 「파수군」의 권두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순교는 기독교인의 최고의 축복이요 최대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최고 최대의 것이기 때문에 이 축복 그 자체가 또한 비할 데 없는 고난이기도 한다. 주를 위하여 그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순교라는 것을 비상한 때에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앙의 길에는 비상시와 범상시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비상인 것이다. 고로 참 신앙자에게는 그 생활이 날마다 순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교생활이 없는 곳에 참 순교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오인(吾人=박윤선)은 주남선 목사의 일생이야말로 외형으로는 비록 순교자가 아닐지라도 순교자에게 바치는 존경과 찬사와 흠모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 목사를 순교의 제불로 받으시지 아니하고 순교 생활자로 일생을 마치시게 한 것을 또한 감하는 바이다.

 

옥중생활 수년이요 인민국 점령하의 무서운 목자생활을 경과하신 목사님의 다난하신 신앙생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는 인(人)을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화려한 것이 없다. 침묵이며 실천이며 그 양을 위하여 생명을 개의치 않고 사수한 한결같은 충성뿐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병사(兵士)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은 범인으로 하여금 누구든지 이 주 목사님의 생애를 모본하여 그 일생을 순교생활로 바치게 하는 도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아-멘.”(박윤선b, 5)

 

 

<참고도서 목록>

 
남영환, “개혁주의 신앙의 구루터기”, 월간고신 (86. 4), pp. 38-39

박손혁, “주남선 목사 약력”, 파수군 15(1952.3), pp. 34-36

박윤선(a), “고 주남선 목사 옥고기”, 파수군 15 (1952.3) pp. 22-27

박윤선(b), “권두언 - 순교생활”, 파수군 15 (1952.3) p. 5

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 서울: 소망사, 1976

이상규, “초대 이사장이며 설립자 주남선 목사와 고려신학교”, 고신대학보 208(1996.1.11), pp. 8-9

전성도, “무언의 설교자”, 월간고식 (86.4), pp 36-37

주경중, “따뜻한 가정을 가져 볼 겨를이 없었던 아버지”, 월간고신 (86.4), pp. 34-35

주남선(a), "선이 돌아옴“, 파수군 61 (1957.3), pp. 19-22

주남선(b), "예수는 돌이시다“, 파수군 3(1949), pp. 7-10

주남선(c), “죄가 돌아옴”, 파수군 60(1957.2), pp. 12-16

주남선(d), “중대한 하나”, 파수군 64(1957.3), pp. 7-11

주남선(e), "하나님의 사람아“, 파수군 15(1952.3), pp 31-34

 
출처: 고신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