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서서평 aka. Elisabeth J. Shepping, 1880~1934 1

好學 2012. 8. 24. 20:25

서서평 aka. Elisabeth J. Shepping, 1880~1934 1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이어 성경학교를 마쳤다.
그녀는 1912년 32살 때 미국 남장로교 외국 선교국이 해외로 파견하는 간호 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왔다.
한때 군산 예수병원과 서울 세브란스 병원 간호학교의 교사를 거쳐 광주 제중병원(현 기독병원)간호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선교활동과 사회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296b1d2f64bdfb2369c4a4bc40ba621f.JPG광주에 와서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조급했기 때문에 매사에 서서(徐徐)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를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천천히 할 서(舒)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 서서평이라 했는데 이는 그의 본 이름인 쉐핑의 발음을 살린 것이기도 했다.
 
서서평은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병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하기도 했다.
이때 양림 거리에서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 독일계 미국 처녀인 그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평생을 처녀로 마친 그녀는 당시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했는데 직접 금주 동맹을 만들어 상가가 밀집한 지금의 충장로와 시장에서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뻔한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 이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21년 백운동에 현 백운동 교회의 전신인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웠으며 1922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일교회의 전신인 금정교회에 부인조력회(여신도회)를 조직하여 신앙 수련과 협동사업을 벌이는 한편으로 교회의 봉사활동에 앞장서게 했다.
 
그는 또 자비로 3년제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나섰다.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니일(Lois Neel)의 원조를 받아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니일"양 이름자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이일(李一)’학교라 했다. 
 
서서평은 또 여학생들의 자활능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마포, 무명베 따위 천에다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게 했다. 이 물건을 미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버지니아주의 벤스(R.G..Vence)부인이 팔아 대금을 송금해 왔고, 이 돈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그녀는 양림동에 뽕나무밭과 잠실을 두어 양잠, 제사, 직포 기술을 보급하면서 자립을 꾀하게 하여 배우고 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일학교는 이 지방 여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졸업생 가운데 간호사나 산파, 교사, 유치원 보모, 여전도사로서 계몽사업과 신여성 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한 사람이 많다.
 
서서평은 1923년 조선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에 선임되었고, 그로부터 11년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협회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그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조선간호협회를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 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간호 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호요강>, <간이 위생법>등 4권과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많은 번역서를 책으로 냈다.
 
서서평은 1934년 6월26일 새벽 4시, 54세를 일기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언에 따라 몸안의 장기는 모두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되었다. 장례식은 광주의 유지인 김신석, 최원순, 김용환, 정상호, 정광호(광주시장 제헌 국회의원) 최경식 등 계유구락부 회원들을 비롯한 비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여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그녀는 지금도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있다. 서서평이 별세한 뒤 이일학교는 1941년 9월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폐교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8년 9월 구애라 선교사에 의해 이일학교가 복교되었고, 1961년 3월31일 전주 한일여자신학대학(韓日女子神學大學)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