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최병헌(崔炳憲) 한국 최초의 신학자

好學 2012. 8. 24. 19:42

최병헌(崔炳憲) 한국 최초의 신학자

 

 

1. 생애

 [1858-1927.한국감리교 초기목사.신학자.호 탁사.충북 제천출생.]

  

최병헌(崔炳憲) 1858년 1월 16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아호는 탁사라 불렀다.그는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열심히 한학을 공부하여 20대에 벌써 한학에 능통한 선비가 되었다. 그 당시 보통사람들이 과거시험을 통하여 출세하는 과정을 밟는 것처럼 그도 1888년에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과거시험에 응하였다. 의외에도 거기에서 목격한 것은 부정부패로 가득찬 관청의 모습이었다. 권문대가라 하는 세도가들은 문벌계급만을 사람취급하고 하급계층의 사람들은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알게 되었다. 최병헌 자신도 이러한 부패의 와중에서 희생된 피해자로서 과거에 낙방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를 처음 알게된 것은 1880년에 그의 친구가 중국 상해로 부터 가져온 [영환지략]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서양문명의 발달과 그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된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해 뒤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88년 어느날 서울 정동에 있는 서양사람들의 숙소로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목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여러가지를 환담하고 한문 성서 한권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최병헌이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성서연구를 시작한지 5년 후인 1893년 그의 나이 35세때였다. 오랫동안 성서연구와 마음의 준비 끝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자 곧 전도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02년 5월 18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고 강단에서 설교하고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그가 목사안수를 받은지 얼마 안되어 정동교회의 설립자이며 담임 목사인 아펜젤러가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목포로 가던 중 불행하게도 배가 파선되어 순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3년에 아펜젤러 목사의 후임으로 정동교회를 한국으로는 처음으로 담임하게 되었다.

 

최병헌 목사는 정동교회에서 12년간을 담임목사로 목회하였다. 그가 정동에서 목회하던 기간은 일본의 침략에 의한 을사조약(1905)의 체결과 한일합방(1910)등 완전히 국권을 상실하는 민족적 비극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모교회인 정동교회를 이끌어가며 기독교의 복음 선교를 통하여 이 나라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심어 주었다. 그는 1914년에 감리사로 임명되어 인천과 서울지방의 교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1922년에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에는 감리교 협성 신학교 교수로 추대되어 후진양성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1927년 5월 13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목회하는 일 외에도 다양하게 활동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1889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로 취직하고 시간이 호락하는 대로 한문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서도 성서를 읽게 하기 위한 뜻에서였다.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과 서민들을 계몽하기 위한 배려는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에 서점 겸 사설 도서관격인 대동서시를 설립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배재학당 안에 독립협회의 전신이며 협성회,를 조직하는데 함께 참여하였고, 아펜젤러와 함께 주간지인 [죠션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였으며 또한 1897년에는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느껴 [제극신문]을 창간하고 주필로서 활약하였다. 1898-1900년까지는 아펜젤러가 중심이 되어 활약하던 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이 되어 신약성서를 한글로 완역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2. 그의 신학

그는 1900년부터 존스(George H.Jones)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를 창간하여 발행하였다. 그리고 1901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신학 논문인 '죄도리' [신학월보]에 게재함으로서 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두가지 주제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기독교신학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른 종교에대한 연구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그의 신학사상은 1901년에 발표한 '죄도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위의 논문에서 기독교의 근본문제인 죄의 원인과 결과와 그 해결책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과 결부시켜 논하였다.

 

먼저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원죄와 개인의 책임으로서의 죄를 말한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한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원죄는 인류에게 보편적인 운명으로 유전되어 내려온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를 짓고 살게 되었다.이것이 인간의 죄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인간은 구원받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있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사람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성령과 화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오직 중보자 되시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성령과 화친할 수 있고 성령과 화친함으로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시 논하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담이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다시 화합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그의 신학사상은 다른 종교에 대한 연구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었다. 그는 1907년에 "셩산유람긔"란 논문을 [신학월보]에 게재했는데,이것은 1912년에 [聖山明鏡]이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거기에서 그는 유교와 불교와 선교와 기독교를 논하였고, 1909년에는 "사교고략"이란 논문을 썼는데 거기에서는 공자교,회회교,인도교,불교 등을 논하였다. 또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 대한 논문은 "종교변증론"으로서 1916-1920년에 걸쳐 [신학세계]에 연재했었는데 1922년에 [만종일련]이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신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세계종교사이다. 여기에서 그는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들을 총망라해서 다루었고 특히 우리나라의 고유한 종교들을 모두 취급한데 그 특징이 있다. 그가 종교를 논하는데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첫째는 그 종교의 근본이 되는 교조의 사상과 세계관과 역사를 취급하였다. 둘째는 그 종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가를 다루었다. 셋째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종교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의 논술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선의 종교들과 한국의 다른 여러 종교들은 물론,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모두 자기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를 지닌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나 기독교까지도 절대적인 종교가아님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교파의 분열과 교회 타락의 역사를 지적함으로써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는 논하였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을 그는 성서라고 말하였다. 즉 성서에 말씀한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철저한 성서 절대주의를 주장하였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비판의 절대적 기준은 성서라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그는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종교가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완성점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기까지는 모든 종교가 지닌 역사적인 사명과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후에는 그 의미가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자세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종교학에서 처럼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복음신앙의 선교적 입장에 서서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창조적인접근을 시도하였다.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든,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든,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될 때 구원된다고 그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