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의사 옥인영

好學 2012. 8. 2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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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는, 의학과 신앙이 하모니를 이루는 곳

 

지금 제 연구실에도 책이 많지만, 집에는 책이 더 많아요. 대학입학하고 나서부터 32년 동안 의사 겸 교수로 줄곧 연구하고, 논문 쓰고, 학생들 가르치고, 환자 진료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책이 많을 수밖에 없죠. 제 서재는 대부분 의학 서적이 아니면 기독교 서적으로 채워져 있어요. 제가 소아정형외과 의사인데요. 정형외과 의사는 ‘목수’처럼 톱, 끌, 드라이버로 뼈를 자르고 붙이는 수술을 해요. 소아정형외과는 정형외과 중에서도 ‘어린이의 몸 전체에 있는 뼈와 관절’을 치료하는 과죠. 팔, 다리, 척추 관절, 뼈 관절 같은 부분들을요. 제가 학생일 당시에, 한국은 소아정형외과학의 불모지였어요. 저는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좋은 소아정형외과 교수님께 배우게 되었어요. 교수님은 제게 ‘친구에게’라며 자기 사진에 메시지를 적어서 주시기도 하셨고요. 그 사진은 제 연구실 서재 한 켠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마음이 맞는 교수 5명과 합심해서 1985년에 ‘대한소아정형외과 학회’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 서재에는 그때부터의 제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죠. 제가 공부한 정형외과학 관련 서적부터, 환자들 진료하면서 기록한 슬라이드 사진까지 모두요. 아이들을 진료를 하면, 처음 병원에 왔을 때부터 치료받는 과정을 계속 기록하거든요. 참, 사진 말고 아이들이 걷는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도 서재에 많네요.

이런 의학관련 자료를 제외하면, 소설책 같은 건 거의 없고, 대부분 신앙서적들이에요. 제가 재작년에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서재에 있는 책 중에는 교수님의 추천도서, 또 수업 들으며 레포트를 써야 해서 샀던 책도 있고요. 저뿐만이 아니라 아들, 딸이 모두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아서요. 제가 옥한흠 목사님께 제자훈련을 받을 때 봤던 책도 있고 자녀들이 제자훈련 받으며 본 책도 서재에 함께 모여 있어요. 어쩌면 서재의 기독교 서적은, 저보다 제 자녀들 책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읽을 책을 고르고 정리하는 방법

 

평소 지인이나 주변의 교수님들이 추천하시는 책은 잘 보는 편이에요. 베스트셀러도 관심을 가지고 보는데, 그래도 신앙서적을 주로 읽게 되더라고요. 전공분야 책은 늘 새로운 것들을 봐야하기 때문에 새로 나온 저널과 논문은 꼬박꼬박 챙겨서 보고요. 전공 관련된 책은 분야별로 선천성 질환, 기형처럼 의학적 분류대로 잘 정리해둬요. 그런데 신앙서적은 특별히 분류해서 꽂아두지를 않거든요. (웃음) 그래서 책을 찾을 때 좀 헤매기도 해요. 이제 서재에 있는 논문들 중에 오래된 것은 다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며칠 전에 정년퇴임을 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요즘에는 자료를 인터넷으로 받기 때문에 사실 남겨줄 필요가 없거든요.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항상 새 것이지만, 지나간 학문은 그저 옛 것일 뿐이에요. 요즘 서재를 정리하면서, 그런 점을 더 깊이 느끼고 있죠.

 

퇴임기념으로 선물 받은,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병원 동료 중에 제가 다니는 사랑의교회를 함께 다니시는 집사님이 한 분 계세요. 그 분이 제게 퇴직선물로 책을 한 권 선물해주셨거든요. 바로 필립 얀시의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라는 책이에요. 그분의「기도」라는 책도 좋았지만, 이 책도 좋더라고요. 저자가 소외된 계층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세계 곳곳을 순례하는 여정이 담긴 책이에요. 이 책은 앞으로 제가 중국을 마음에 품고 사역을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세 손주의 할아버지로 자녀들에게 바라는 점

 

저는 자녀들이 어릴 때 제 일을 하기에 너무 바빠서, 아이들에게 집에서 책 읽어준다거나 아이들과 함께 충분히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어요. 대학도 경쟁사회이기에, 남보다 더 뛰어난 논문을 쓰고 더 나은 실력을 가지려면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했거든요. 대신 아내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었지만, 좀 후회가 되기는 해요. 제가 손자 2명, 손녀 1명의 할아버지인데요. 그래서 사위와 며느리, 아들, 딸에게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라고 얘기하곤 하죠. EBS에서 ‘유태인의 가정교육’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책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은 무척 본 받을만하더라고요. 유태인들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전부터 책을 많이 읽어주거든요. 제 자녀들도 손주들에게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의 반지와 잊어버린 기도가 맺어준 부부의 인연

 

우리 부부는 제가 중학교 1학년, 아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주일학교 선후배로 처음 만났어요. 그렇게 쭉 알고 지내고 커가면서 교회도 함께 다녔는데, 제가 아내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죠. 대학에 가고 나서도 학기 중에도 아내와 한두 번 정도는 계속 만났고, 사실 방학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타고 8시간정도 오갈 때마다 제가 보호자처럼 함께 다니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도 아내를 동생으로만 봤어요. 그러다 본과 4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도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죠. 저희 어머니가 중국인이셔서, 더욱 중매결혼은 안하겠다고 했어요. 당시에는 국제결혼이 아주 드물었고,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도 없을 때였거든요. 또 놀림의 대상이기도 했고요. 처음 만난사람에게 어머니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과,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도 싫었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테니스도 치고 스키도 탔어요. 친구들도 많이 가르쳐줘서 주위에 여학생이 없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할 만한 사람은 없더라고요. 아마도 그게, 어머니가 대학입학선물로 사주신 반지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입학할 때 어머니가 제게 “환자를 금강석처럼 생각하는 의사가 되라.”고 하시면서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선물해주셨어요. 저는 학교 다니는 동안 그 반지를 왼손 넷째 손가락에 계속 끼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그 반지가 무슨 반지냐고 물어볼 때마다, 어머니가 주셨다고 했죠. 사실이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였나 봐요. (웃음) 하나님이 아내와 짝이 되게 하려고, 어머니가 제게 선물하게 하신 족쇄(?)라고 우리 부부는 믿어요.

하루는 병원에서 실습하다가 명동에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아내가 그 앞에 있는 거예요. 아내 언니의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언니가 아파서 결혼식에 대신 참석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청첩장을 봤는데 마침 신랑이 저희학교 선배였어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결혼식에 갔죠. 같이 점심 먹으면서 유학준비는 잘되고 있냐고, 서울에서 꾸준히 다니는 교회가 없으면 제가 다니고 있던 성도교회 성가대에서 혹시 소프라노로 봉사해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아내는 성악을 전공했는데,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독창연주를 할 만큼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았거든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그 뒤로 아내와 매 주일 교회에 함께 다녔어요. 매 주일 만나다보니 이런 여자를 어디에 가도 만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함께 신앙생활을 해왔고, 양가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거든요. 또 아내는 믿음도 좋고, 착하기까지 한 일등 신부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에게 유학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나와 결혼해달라고 프로포즈를 했죠. 그랬더니 아내가 어린 시절부터 저에 대해 가져왔던 생각, 저를 기도제목으로 올려놓고 기도했던 일, 저 때문에 콩닥거려서 공부도 못했던 일, 엄마와 언니에게 마음을 들킬까봐 몰래 친구에게 일기장을 맡겨 두었던 일 같은 얘기를 그제야 하는 거예요. (그 일기장을 맡겼던 친구도 저희 교회 교인이에요.) 계속 기도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단순한 사춘기 소녀의 풋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었대요. 아내의 얘기를 들으며 제가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한 건, 제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내의 기도에 응답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잊어버린 기도제목과 포기한 기도제목까지 응답하시는 분이신거예요. 그래서 제가 순장으로 섬기는 다락방에 미혼 선교사님들이 계시는데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배우자를 두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얘기 하죠.

 

선교에 대한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한, 스쿼시 라켓

 

저는 아버지가 내과의사시고, 어머니가 한국에서는 의사로 활동을 못하셨지만 원래 산부인과의사이셨기에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의대에 들어가고 나서는, 꼭 하고 싶었던 운동이었던 테니스를 정말 열심히 쳤거든요. 어느 정도로 열심히 했느냐면 수업이랑 공부가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학교에서 테니스를 쳤어요. 의대 테니스대회에 나가서 준우승까지 할 만큼, 테니스를 좋아했고 테니스에 빠져있었죠. 그런데 저희학교 정형외과 교수님들이 모두 테니스를 치셨거든요. 그러다보니 주말마다 테니스를 치시는 정형외과 교수님과 같이 운동도 하고, 저녁 사주시면 얻어먹고 그랬어요. 전공을 결정하는 본과 1,2학년이 되었는데, 교수님들이 ‘옥인영이 너는 정형외과 해야 해.’ 하셔서 정형외과를 선택하게 되었죠.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나서는 꿈에 그리던 잔디코트에서 론테니스(lawn tennis)를 칠 수 있어 너무 감사했고, 영국친구에게 스쿼시도 배웠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까 스쿼시장이 호텔에만 있어서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저렴하게 칠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스쿼시도 계속 쳤어요. 거기서 지금 대한스쿼시연맹의 회장과 전무인 두 사람을 만났고 대한스쿼시연맹을 만들었어요. 회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제가 12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어요. 그런데 1990년에 스쿼시를 치다가 상대편이 휘두르는 라켓에 눈을 무척 심하게 맞는 사고를 당했어요. 쓰고 있던 안경알이 깨지는 순간, ‘내가 너무 심하게 다쳤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제가 고도근시인데요. 고도근시인 눈은 안구가 짱구모양이라, 앞쪽에 각막손상을 심하게 받으면 뒤에 붙어있는 망막이 쉽게 떨어져 실명하게 돼요. 한쪽 눈이 실명이 되면 양쪽 눈의 원근이 안 맞아서, 어린 아이를 수술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병원으로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가면서, 하나님께 ‘이제 이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하십니까?’ 라고 계속 물었어요. 계속 기도하며 병원으로 가는데, 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야 ‘내가 학생때 의료선교를 하고 싶다고 항상 기도했는데 지금까지 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그냥 의사라는 직업에만 충실했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 알겠다고, 이제는 제가 기도드렸던 대로 선교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실명이 되어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평안함을 갖게 되더라고요. 병원으로 가면서 콧노래로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 편하다>라는 찬송을 계속 부르게 되고요. 병원에 도착했는데 안과 선생님들은 십중팔구 실명이라고 했고, 수술을 받으려고 수술실에 누워있는데 수술실이 조용했어요. 소독만 하고 수술을 시작하지 않는 거예요. 안과는 가는 바늘로 꿰매기 때문에 수술용바늘을 잡는 기구(neddle holder)를 써야 해서 수술을 시작할 때 소리가 나거든요. 제가 너무 많이 다쳐서, 이 친구가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 지 모르는구나라는 것을 직감했죠. 수술을 하고난 직후에는 실명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요. 출혈이 멎고 3~4일이 지나 안구 안에 가득 찬 피가 모두 흡수되어야 알 수 있거든요. 그 나흘 동안 온 병원에 제가 실명했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나흘이 지나 확인을 해봤는데 망막이 붙어 있는 거예요. 수술을 해준 친구가 “니 기도 쎄~게 했는 모양이네?”그러더라고요. 눈은 난시가 좀 있는 0.5로 회복이 되었고요. 그런데 저는 실명이 아니라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하나님 선교는요?’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선교에 대한 갈망을 품은 채, 정년까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죠.

 

한국WEC국제선교회에서 키운 선교의 비전

 

몇 년 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팀 사역으로 국제선교를 하는 단체인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의 한국본부를 세우는 일에 발기인으로 동참하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동안 ‘하나님. 저는 선교를 언제해요?’라는 물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듣자마자 하나님이 제게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제안을 거절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그래서 1997년 사랑의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렸고, 제게 이사장을 하라고 하셔서 2009년까지 12년 동안 WEC 이사장으로 섬겼어요. 단시간안에 350여명의 선교사를 해외파견하면서, WEC가 크게 성장했죠. 선교회 일을 하면서 젊은 부부들의 헌신도 많이 보게 되고, 그들의 간증도 들으며 도전을 받아 제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많았어요. 지금은 신학대학원을 다니게 되어 이사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WEC국제선교회의 동원본부에서 동원하는 일을 함께하고 있어요.

 

모진 세월을 딛고 믿음으로 피어난 어머니의 얘기가 담긴 책, 「어머니의 노래」

 

저희 어머니이신 이상운 전도사님은 중국 허쩌(荷澤)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산부인과 의사셨어요. 중국에서 한국인인 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1945년 한국이 해방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오셨죠. 한국에 온 어머니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저 중국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죠. 의사자격도 인정받지 못했고, 소망과 의지를 잃은 채 한국에서 많은 상처를 받아야만 했죠.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제 어머니로는, 사람들 앞에 아들의 어머니로 떳떳하게 나설 수 없었어요. 그토록 사랑한 남편은 12세에 이미 결혼을 했었으며, 일본유학 때 귀족가문의 여성과 결혼을 하기도 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알게 되셨죠. 그 외에도 아버지의 일탈과 동생의 죽음 등 어머니는 수많은 고난을 겪으셨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오직 믿음하나에 의지해 평생을 사셨죠. 믿음이 없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까지 제 어머니가 중국인이라는 것이 알려질 까봐, 친구를 집에 초대한 적이 없어요. 대학에 가고 나서는 화교인 친구를 집에 데려 오기도 했지만요. 그러다 2005년에 어머니가 소천하시고, 방한한 미식축구선수 하인스 워드가 ‘한국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제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어느 날 인터뷰를 하다가 우연히 어머니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분께 출판을 권유받아 홍성사, 이유진 작가와 연이 닿게 되었고 어머니의 인생을 담은 「어머니의 노래」라는 책을 내게 되었지요. 저희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아는 친구는, 그동안 교회친구 몇몇을 제외하고는 없었어요. 책을 보고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밝은 네게 이런 면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무척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또 이 책을 읽은 기자출신 친구가 동창회보에 제 어머니에 대해 쓴 이야기를 보고, 모르는 선후배들에게 전화도 참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의 노래」는 현재 2월 말에 중국판 번역이 완료될 예정이에요. 작년 말에 로잔선교대회처럼 화교 디아스포라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원래 어머니가 한국화교교회 대표로 늘 참석하셨던 모임이었는데, 서울 화교교회 목사님이 제가 중국어를 할 줄 아니까 어머니대신 참석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거기에 함께 가서 많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났고, 제 명함을 드리며 제 사역에 대한 소개도 했어요. 많은 사람을 알려고 노력하던 중에 그 곳에서 강의하신 의사선생님의 도움을 받게 되었어요. 3천명이 운집한 가운데서 출판사 사장님을 찾아 소개해주셨고, 제가 중문번역판을 보내면 중국에서 어머니의 책을 출간해 주기로 약속을 받게 되었어요. 「어머니의 노래」번역은 한성교회 유전명목사님의 사모님이 마무리를 도와주기로 하셨고요. 그분은 화교로 대만대학을 나오고 고려대학교 중문과 교수이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사모님이 많이 바쁘셔서 먼저 초벌번역을 맡길 사람을 찾았는데, 번역을 맡게 될 화교교회의 자매님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책에 어머니 사진은 표지에 있는 한 컷밖에 없는데 혹시 어머니 사진을 몇 장 더 보내줄 수 있냐고 그분이 물었어요. 그래서 어머니 사진을 보냈는데, 보내자마자 전화가 온 거예요. 그 자매님 집에 저희 어머니 사진이 아주 많다고요. 알고 보니 그분이 어머니가 생전에 예배 인도를 자주하셨던, 영등포에 있는 화교교회 목사님의 따님이셨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신기하게 저희를 연결해 주셔서, 저는 아내와 그 주 주일에, 어머니께 말로만 들었던 영등포 화교교회에 처음으로 방문했어요. 이전에는 목사님과는 항상 한국어로 대화했었는데, 이제는 제가 중국어를 할 줄 아니까 중국어로 얘기를 나눴고요. 어머니가 생전에 말씀을 전하시던 강대상에 서서, 제가 중국어로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어머니께서 생전에 이런 일이 생길 걸 아셨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교회의 노권사님들께서, 저희 어머니와 함께 사역하고 전도하러 다니셨던 얘기도 많이 해주셨어요.

 

바퀴를 갈아 끼우고 마음에 품은 중국

 

저는 이번 주에 정년을 맞아 퇴임을 했어요. 정년은 이제 일이 다 끝났다는 뜻이죠. 동양의 사고방식으로는 이제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니 보통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서양에서는 정년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요. 정년을 Retire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풀어보면 바퀴(Tire)를 다시(Re-) 끼운다는 뜻이에요. 인생에 새 바퀴를 끼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죠. 저는 새로운 일을 하게 되어 마음이 설레는데, 제 환자들은 섭섭해 하면서 다른 병원에 가지 않느냐고 아쉬워하더라고요. 제 퇴임소식을 전해 듣고는, 아쉽다면서 오늘 아침에 장문의 이메일을 보낸 환자도 한 분 있네요. 소아정형외과는 장기간에 걸쳐 환자의 경과를 지켜보기 때문에 이제 다 커서, 아이 엄마가 된 환자들도 있거든요.

이렇게 저는 바퀴를 갈아 끼웠고, 이제 WEC의 사무실로 4월부터 출근해요. WEC의 국제 헤드쿼터에서 만든 동원본부에서 선교를 하게 되는 거죠. WEC는 보수적인 선교단체라 이제까지 동원하는 일을 좀 등한시했거든요. 사실 처음에는 퇴임하고 나서 그냥 중국병원에서 의료사역하면서 지내려고 했어요. 제가 중국에 있는 3개 대학의 객원교수거든요. 거기서 제게 오라고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곳에 가면 그냥 환자들을 돌보며 지내지만, 제가 신학도 공부했고, 중국어도 할 줄 알고, 어머니의 간증과 제 간증이 있으니 중국교회를 돌아다니며 중국화교교회의 선교를 위해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WEC에서 하시더라고요. 저도 계속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일하는게 훨씬 의미가 있을 것 같았고요. 중국 본토를 빼고, 화교 디아스포라는 8000만명 이라고 해요. 한인 디아스포라는 700만명 인데 10배가 넘는 거죠. 세계에 어디를 가도 중국인이 있고, 중국교회도 어디에나 있어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중국교회도 큰 교회가 많고요. 중국인들은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죠. 그런데 한국교회만큼 중국(화교)교회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강하지 않아요. 제가 중국어를 배운지는 딱 5년 정도 되었어요. 그동안 우리학교 중국 유학생들이랑, 매일 같이 점심을 먹으며 제가 중국어 연습도 많이 하고, 중국어 예배도 드려왔어요. 하지만 제가 현지에서는 안 살아봤잖아요. 그래서 중국 현지의 WEC에 가서 선교사님들과 1년간 살면서,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도록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해요. 그 후에는 화교교회를 찾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려 합니다. 한때 한국에는 30만 정도의 화교가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시절에 화교 재산권을 제한하면서 한국에서 살던 화교들이 한국을 많이 떠났어요. 그중에 당시 화교교회를 다닌 교인들이 많거든요. 한국화교는 이민을 가서도 코리아타운 근처에서 모여 살며 장사를 해요. 그래서 도시마다 화교 크리스천들의 모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그 화교교회들에 가서 제 어머니 얘기를 하면 다들 잘 아세요. 또 금년이 화교교회 창립 100주년이라, 8월 15일 서울에서 화교 교회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거든요. 그때 한국에서 살다가 외국으로 이민 간 화교들이 많이 들어오실거예요. 그분들도 제 어머니를 잘 아시니까, 그 전까지「어머니의 노래」중국어판 책을 발간하려고 해요. 아내도 함께 중국어를 공부해서 저와 함께 화교교회를 찾아다닐 거고요. 저희는 앞으로 특히 WEC 동원본부 안에서 중국 쪽 일, 그리고 본토 안에 있는 교회들을 연계하는 일을 맡게 될 거예요.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간섭해주셔서, 시간에 맞게 일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WEC선교회에서 만난 선교의 동역자들

 

WEC에 동원본부가 생기기전에는, 주로 선교에 헌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아 서류심사, 인터뷰를 하고 훈련을 받게 해서 선교지로 파송해왔어요. 저도 그 과정에 참여했고요. WEC는 팀선교를 하기 때문에 선교사가 혼자 선교지에 가는 게 아니라 선교지에 있는 팀에 합류를 하게 돼요. 또 국제 선교단체라 영어가 필수고요. WEC는 특히 믿음 선교를 강조하는 단체라, 여러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며 저도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WEC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보내진 선교팀이 있었는데요. 아프간전쟁 때문에 국가에서 한국인은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죠. 선교사님들은 주로 병원에서 많이 일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하지만 다시 선교지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계속 함께 중보했어요. 하나님이 선교사에게는, 그 선교지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다들 선교지를 고향같이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안식년에 한국에 나와도, 열이면 열 빨리 다시 그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해요. 함께 중보를 하면서도, 저도 인간인지라 그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아프가니스탄에는 동의부대가 파견되어 있는데, 그 안에 병원이 있어요. 아프간 정부에서 한국 정부에 한국인이 모두 철수해도,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서 이 병원만은 좀 운영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죠. 정부는 고심 끝에 병원에서 꾸준히 일하셨던 WEC 선교사님들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분들께 KOICA(한국국제협력단)로 갈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선교사님들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바로 되돌아 가셨고요. 그분들이 선교회 소속으로 갔을 때는 후원자들의 선교비로 거기에서 생활하셨는데, KOICA로 가면 나라에서 월급이 나와요. 그런데 그 월급에 위험수당이 포함되어 액수가 꽤 크거든요. 그런데 선교사님들은 이전의 후원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가게 된 거라고 그 월급을 헌금으로 선교회에 다 보내셨어요. 또 선교사님들 사이에 후원금금액에 편차가 있기도 해요. 그런 경우에는 자기 월급을 후원금이 적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요. 이런 분들을 보면서, ‘정말 숨어서 훌륭하게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많구나.’ 하고 도전받게 되었어요. 저는 겉으로만 나타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WEC를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또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 저는 그분들의 반도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의 말씀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저는 빌립보서 2장 13절을 좋아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이에요. 제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마다 이 말씀이 제 삶에 적용이 되었어요. 내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 기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위한 계획을 분명히 가지고 계시고, 저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진 귀한 사람인거죠. 일을 할 때는 잘 몰라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항상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게 돼요.

 

기도제목

 

먼저, 이제 바퀴를 바꾸었으니까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세요. 앞으로의 사역이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사역에 계속 간섭해주시도록이요. 제게 도전을 품게 해준 수많은 WEC의 젊은 선교사님들처럼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출산 때문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는, 3개월 된 아기를 품에 안고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는 부부도 있거든요. 그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고요. 그리고 제가 지금 사랑의교회 전인치유센터 이사장도 맡고 있어요. 전인치유센터는 병원이 아니라 의사는 없어요. 하지만 지병으로 힘들어하거나,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을 해 심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돕고, 영성을 불어넣어 마음의 위로를 전하는 곳이에요. 그리고 그분들이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죠. 이곳에 오실 분들이 새 힘을 얻고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해주세요.

 

 

- 인터뷰 진행&정리 : 신은정 작가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 사진 : 유재호 작가